별로 외국 가보고 싶은 생각은 안드는 편이다. 아직 한국에도 안가본데가 많다고 생각한다는... 그럼에도 외국 중에서 하나 고르라면 독일 가보고 싶다고, 대학 2학년땐가 누구에게 말한 적이 있다. 독일하면 단연 마르크스, 칸트, 헤겔, 하버마스, 베토벤 등등. 왠지 '합리'적일 것 같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니 한 치라도 오차가 있는 분야는 째째하게 손데지 않고, 거대한 것만 하는 나라. 왠지 그럴 것 같은 나라. 근데 왜 사람들은 프랑스를 가보고 싶어 했던 것일까? 패션 같은 거 말고는 별로 유명한 것도 없이, 미완의 혁명들만 널부러져 있는 나라. 올빼미 같은 근엄함도 없는 수탉을 상징씩이나 시켜주는 나라. 도대체 수탉이 뭐가 상징이 되는 것인지? 그런데 마르크스는 올빼미 보다는 프랑스의 상징인 수탉을 더 좋아했었지.('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1843)) 왜 더 좋아했을까? '혁명적 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수탉이 올빼미보다 잘하나?

혁명적 실천이란 것이 다름아닌 수탉의 일상과 같은 것일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프랑스가 더욱 싫어지다가 최근에 약간 프랑스가 좋아지고 있다. 선진국 치고 데모도 그쯤 하다니 참 용하네. (물론, 독일이고 프랑스고 가보고 싶지는 않다. 돈도 없고.)



사진: 맨위는 동아일보에서, 두번째는 한겨레에서, 세번째는 밑바닥 보시면 알겠지만, 어떤 네이버 블로그에서 퍼왔다. (이 중 한겨레 것은 AFP 연합 통신에서 구매한 사진이고, 동아일보는 별 설명없이 특파원 이름만 나오는 걸로 볼 때 직접 찍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마지막 사진은... 설마 저 블로거가 직접 찍은 것이겠나?)

 

※ 이번 프랑스 시위사태의 도화선은 최초고용계약법(CPE) 제정이라고 한다. 이 사태에 대해 한국의 보수언론은 프랑스의 경직된 고용구조, 쉽게 말해 종업원을 맘대로 자를 수 없는 고용구조 때문에 프랑스 경제가 악화되었고, 또 이런 시위사태도 일어나게 되었다고 뇌까린다. 뉴욕타임스가 이번 시위사태를 두고 세계화에 의한 충돌이라고 정리한 것과는 대조된다. 아니, 날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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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1 01:46 2006/04/01 01:46

이 미친 놈의 날씨

2006/03/28 14:32

3월말인데 눈이 날리고 있다. 엘리뇨? 라니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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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8 14:32 2006/03/28 14:32

선생께서는 소위 민중사학의 약점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최근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민중사학’의 약점을 파고들기도 하고요. 아울러 동학농민 운동 등을 스탈린주의의 ‘5단계설’에 끼워 맞춰 동학 운동을 마치 근대 부르주아 혁명인 것처럼 규정하는 것도 비판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한국 민중사학의 일부는 일본 민중사학의 한 갈래이기도 한데, 바로 스탈린주의적인 5단계론을 한국 역사에 무비판적으로 적용해서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발전했다고 사실을 조작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나 사회주의의 정당성을 찾아내려는 태도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물론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아주 거시적으로는 세계사의 법칙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전환이 모든 나라에서 일률적으로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죠. 많은 경우에는 예컨대 조선처럼 농업관료체제가 강했던 곳, 그러니까 국가의 수탈 능력이 강하고 국가가 상당 부분 시장을 대체했기 때문에 유통 경제의 발전 역시 다른 루트로 조금 늦은 시기에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뉘앙스를 민중사학이 많이 무시했고 서구중심주의적인 방법으로 서구와 똑같은 시기나 조금 늦은 시기에 조선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본 축적이 시작됐다는, 사실이 뒷받침되지 않는 그런 주장을 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지금 극우 세력한테 공격받는 데 아주 무력한 것이죠.

극우 세력들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조선에 자생적인 자본주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조선에서] 서구와 같은 방식의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상인자본들이 강화돼 가고 있었지만 역시 그것은 국가에 예속된 상인자본이었죠. 그리고 그것이 산업자본으로 전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민중사학은 그런 걸 무시해 왔습니다.

민중사학의 그런 약점을 극우파들, 이영훈 씨와 같은 사람들이 이용해서 ‘일제 덕분에 우리가 자본주의 발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의 성공적인 자본주의 기초였다’고 일본 제국주의를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해외와 직접 연결돼 있는 한국의 대자본들에게 유리한 주장입니다. 그러면 해외 자본이 삼성전자의 지분을 60퍼센트 소유한다든가 한국의 금융시장을 장악한다든가 하는 부분이 역사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죠. 해외 자본이 우리 나라의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면 해외 자본이 악이 아닌 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대자본에게 아주 유리한 역사 해석이죠. 우리가 거기에 반론을 하려면 민중사학의 도식적인 끼워 맞추기 식 해석을 극복하고 조선 후기 상인자본의 발전에 대해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구요.

동학농민운동 같은 경우에는 너무나 많은 층위들이 중첩적으로 얽히고설킨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피억압층·피지배민들의 수탈 기구에 대한 전반적인 반발, 전반적인 항쟁 운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와해돼 가고 있는 수탈 체제에 대한 종교적 외피를 쓴 항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지도부는 봉건 세력들과 연결돼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학농민항쟁의 지도부를 보면, 전봉준의 경우에는 대원군과 깊은 관계가 있던 인물이었고, 주로 투쟁을 국가기구 자체에 맞춘 것이 아니고 봉건 지배세력의 일부인 민씨를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그 대신 대원군을 옹립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 운동의 민중적인 의미는 그런 면에서 많이 훼손됐죠. 결국 그 운동이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아마도 지배계급 중 일파가 그 이득을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동학 항쟁에서는 피지배계급이 아직은 지배계급을 완전히 탈피해서 지배계급의 영도 없이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인 것입니다.


구한말 <독립신문> 등 개화파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셨는데, 이들이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게 되면서 보이는 모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독립신문>은 한국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효시로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산업자본이나 자율성을 가진 자본가가 아니었고 새로운 유산계급, 특히 일본에 쌀을 수출하는 지주계급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었는데, 핵심적으로는 외세에 절대적으로 예속돼 있는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거의 외세의 사상적인 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또 외세와는 아주 가까운 유착 관계에 있었죠. 대다수는 개신교 개종자들이었고, 서재필은 아예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조선도 기독교 열강들과 똑같은 열강이 돼서 예컨대 만주에서 중국의 세력을 밀어내고 조선의 이권을 확립하는 등 아류제국주의 세력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족국가는 바로 일본이나 서구의 제국주의적인 국민국가였고, 다만 현실적으로 조선이 당장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그들이 절실히 느끼는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조선이 합방이라는 식민화가 됐을 때, 제국주의적인 사고 방식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것이 법칙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 중 상당 부분은 민족패배주의에 빠졌습니다. 조선이 어차피 운명적인 약자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결국 일본 제국의 신민이 되어 중국 등을 약탈하는 것이 조선 유산 세력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해 소위 친일파가 된 거죠. 이광수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일부 무장독립운동을 하는 세력 같은 경우에는 사회진화론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서 또 다른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찾아나섰는데, 그 중에 일부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이동휘 같은 사람이죠. 이동휘는 개화기에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자였는데, 그 사람이 결국에는 1917∼18년부터 볼셰비즘을 조선 해방운동의 방법론으로 채택하기에 이른 거죠. 왜냐하면 사회진화론으로 더는 독립운동을 할 만한 그런 부분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약자의 처지에서 보면 사회진화론이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죠. 그러니까 별 다른 쓸모가 없죠.


선생께서는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노 기로의 신흥불교청년동맹 등의 사례를 통해 불교와 맑스주의의 접점에 대해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좀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불교라고 외길화해서 이야기하지만 불교 안에도 수많은 의미들의 층위가 포함돼 있습니다. 초기 불교의 경우 당시 인도 중간계층이 왕권과 브라만 그러니까 제사장 카스트 권력에 일종의 도피적인 저항을 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왕권과 브라만 권력을 부정했고, 왕을 다만 갈등의 조절자나 단순한 폭력자라고 생각하고 카스트제도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그런데 왕권과 브라만의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보다는 그 사회를 피해 일종의 수행공동체를 만들어서 그 사회의 경계를 넘으려 했던 것이 초기 불교 공동체입니다.

초기 불교 공동체의 실천 방법이 꼭 이상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 그 때 상황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있었는가 없었는가는 별도의 문제지만 ― 어쨌든 카스트제도에 대한 비판의식이라든가 평등주의라든가 철저한 무신론이라든가 초자연적 힘에 대한 무관심이라든가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이 하나의 비판 세력, 체제에 대한 비판 세력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불교의 이와 같은 성격이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서 희미해져 갔습니다. 이미 기원전 2세기 아소카 대왕이 인도의 상당 부분을 통일했을 때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것이 불교였습니다. 아소카 대왕의 일종의 국교가 됐었던 거죠. ‘왕권을 벗어나야 한다’, ‘권력을 벗어나야 한다’는 초기 불교의 탈권력적 의식에 대한 전면적인 배신이었습니다.

그 후 불교는 왕권과 계속 유착을 누리고 있었지만 불교 안에는 그래도 국가와 지배계급의 폭력, 폭력이 충만한 계급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이 어느 정도 내포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뒤 동아시아에서 불교의 역할을 보면 불교의 일부 교파가 민중 저항의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5∼6세기, 세 가지 계단의 가르침인 삼계도가 민중 세력의 반체제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우가 있었고, 그 후에도 미륵신앙, 백련도, 그리고 정토신앙의 일부 계파가 민중 세력의 이데올로기적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의 경우에도 17세기 후반에 미륵신앙을 믿는 공동체들이 국가에 반란을 시도하는 등 불교의 일부인 민중불교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불교는 상층부가 왕권, 그리고 체제와 깊이 유착을 해도 저항적 가능성을 적어도 전근대 시기에는 완전히 잃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죠.

일본의 경우 특히 지방 농촌 사찰 중에는 부자 사찰들도 있었지만 농민이 가난했던 만큼 상당 부분의 사찰이 대단히 가난했고 거기의 사제들 즉, 승려들이 농민과 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도시에서도 승려들 안에서 빈부격차가 대단히 심했는데, 일부 가난한 승려들에게는 하층민들 그리고 노동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가치와 의식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20세기 초반, 그러니까 1920∼30년대에 일본 자본주의가 여러 가지로 위기에 봉착하고 특히 세계 공황 이후에 가난한 사찰 신도의 상당 부분이 파산하고 파탄에 빠졌습니다. 이 때 일부 젊은 승려들, 그러니까 맑스주의 등의 신사조를 접한 승려들이 자기 신도들과 연대해서 폭력적인 계급 사회를 새로운 근대적 방법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그 의식이 어느 정도 체계화된 결과가 바로 세노 기로 스님이 만든 신흥불교청년동맹이었습니다. 그 동맹은 바로 1930년대 초반 일본 불교의 진보단체였고 정치적으로 사회민주당 또는 공산당과 연대를 해서 반파시스트 전선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세노 기로의 경우 볼셰비즘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맑스 저서에 깊이 공감을 했습니다. 맑스가 말한 소외와 불교가 얘기하는 망상, 맑스가 말한 허위의식과 불교가 얘기하는 온갖 환상들을 연결시키기도 했죠. 자본주의의 심성적인 배경이 불교적으로 봤을 때 과연 무엇인가. 결국, 탐냄, 어리석음 그리고 성냄 그러니까 인간적인 공격성 등 불교가 제거하고자 하는 바로 그런 부분이 자본주의라는 제도를 심성적으로 뒷받침한다든가 하는 식의 체제 비판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또, 초기 승가의 생활로 봐서는 이미 일본의 제도권 불교가 산송장이 됐다는 등 제도권 불교에 대해 매우 정당한 비판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일본 공산당하고도 손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결국 1936∼37년에 세노 기로 스님이 경찰에 검거되고 고문받아 전향하고 평생 폐인이 됐죠. 풀려나오고 나서도 전향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너무 깊었지요. 더는 의미있는 사회적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에는 일본의 파시스트 국가에 대항하기에는 세력들이 너무 취약했습니다.

한국에서도 한용운과 같은 사람들이 불교사회주의자를 자처하고 공산주의자들하고도 매우 친했고, 그리고 민중적인 세계관을 매우 강력하게 가졌던 사람이에요. 그 뒤에는 1970∼80년대 일부 불교의 청년 세력들이 민중불교 운동을 일으켜서 제도권 불교에 대해 세노 기로의 비판과 매우 비슷한 방식의 비판을 가했지만 한국 불교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세노 기로가 얘기한 산송장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다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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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21 19:53 2006/03/21 19:53

※(원래 기사 밑에 달려 있던 설명-주인장 주) 그린피스 대원들이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를 굽어보는 유명한 그리스도상에서 각국 정부들에게 세계 생물다양성을 보호하도록 촉구하는 깃발을 펼치고 있다. 이 사진은 그린피스가 16일 런던에서 공개했다. 세계 188개 국가 대표들은 브라질 쿠리티바에서 생물다양성협약(CBD)회의를 열고 생물다양성 보호문제를 논의한다(AP=연합뉴스). [2006/03/1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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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8 14:04 2006/03/18 14:04

[영화] YMCA 야구단

2006/03/16 20:16

세계 야구 클래식에서 한국대표팀이 미국을 꺾었다고 온 나라가 난리다. 그 전에는 일본을 꺾었던 바였고, 오늘도 다시 일본을 꺾었다고 하니, 한국야구사 101년의 개가일 수도 있겠다. 일본야구사는 130년, 미국은 종주국이니까 훨씬 오래겠지.

한국야구사가 101년이라고 하는 얘기는 신문에서 봤다. 이 말이 맞다면 한국 야구는 1905년 창단된 황성 YMCA 야구단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영화 의 시작도 그래서 1905년부터인 것 같다.

 

영화에 따르면 황성 YMCA의 선교사와 통역 민정림(김혜수)이 1905년에 YMCA야구팀을 창단한 것이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민정림의 아버지가 1905년 을사조약때 자결한 민영환으로 되어 있다. 이건 픽션일까 아닐까? 그리고 선수들에 유생 이호창(송강호), 고관집 도령 류광태(황정민), 신지식인으로서 을사50적(시해)단 소속 오대현(김주혁) 등이 있다. 아, 나무꾼 소년들과 벙어리(나중에 벙어리 아님이 밝혀짐) 지게꾼 등도 나온다.

 

류광태의 아버지, 그러니까 '고관'에 해당하는 인물은 당시에 흔하던 친일파로 보이는데, 오대현이 가면을 쓰고 집에 침입하여 시해하려고 하다가 동료 류광태를 보고는 살려준다. 암행어사가 꿈이던 유생 이호창은 류광태의 친구인데, 아버님 괜찮으셔서 다행이라 위로한다. 이호창의 부친(신구)은 재야의 유생으로 현재는 서울에서 서당을 운영하면서 의병한다고 집나가버린 호창의 형님을 기다린다. "변절한 선비가 많아 명륜동에 더이상 학이 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기대하던 큰아들이 의병 간 것에 실망하고 있다. 민영환의 장례식날 문상온 류광태의 부친에게 상주가 "더러운 변절자"라며 문상을 거절한다. 물론 이 모든 갈등은 야구라는 '역사'적 목적에 의해 해결된다.(해결이 시도된다.)

 

역사는 물론 다면적이고, 우리들의 시각도 그걸 가급적 제대로 포착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 재밌다. 그렇긴 한데, 결론은 김혜수의 대사처럼 야구는 거대담론을 떠나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인가? 오늘날 월드 야구 클래식이랑 어떻게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우리가 일본이나 미국같은 강대국에게 극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까지도. 온 나라가 즐거워하는 것까지도. 한 번은 비극, 한 번은 희극인 것까지도?


사진: 네이버에서 퍼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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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6 20:16 2006/03/16 20:16

새만금

2006/03/16 19:39

새만금 간척사업에 대한 법원판결이 났다고 한다. 오늘 오후였다. 수업 마치고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정부의 승리로 사업은 재개된다고 한다.

 

사실, 이해당사자가 아닌 나로서는 이 일에 관심 갖는 것 자체가 오지랖 넓은 짓인 것같다. 그렇지만, 물론, 이런 개인블로그에서 투덜거리는 거야 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를 지르는 일일 뿐이므로 현실적으로 관심도 반대도 뭣도 아닐 것이다.

 

뭔가 찬성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있으니까 정부에서 밀고 나간 것 아니겠는가. 호남지방 개발 효과 운운 하지만 실은 업자들 뱃되지 불리는 일일 뿐이라고 많이들 비판하는데, 실제로 조금이라도 이익 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지속적으로 '법정투쟁'을 한 거겠지. 1심 시민단체가 승소 했을 때, 사실 그건 법원의 립서비스일 뿐인 것이라고 고시 합격한 친구 하나가 말했었지. 그놈은 뭔가 내막을 알고 있는 눈치였으나 나는 모른다.

 

결국 2심 3심 모두 정부가 이겼다. 사업은 재개된다. 갯펄을 메우게 된다. 이것으로 새만금에 대한 나의 관심은 끝이다. 아니, 지금까지의 것 모두 관심도 뭣도 아니었으니까,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개발이란 것이 진정 아직도 유효한 이 시대의 화두인 걸까 하는 것만은 정리를 좀 해야겠다. 물론 여기서는 할 수 없고 책을 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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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16 19:39 2006/03/16 19:39

차범근 재평가 운동

2006/03/07 00:33

인터넷 포털을 중심으로 차범근 감독에 대한 재평가 운동이 일고 있다. 아직 공식 언론에서 이 운동을 언급한 적은 없다. 그러나 네이버 같은 데는 차범근이라는 검색어가 순간적으로 인기검색어에 오르기도 했다.(내가 봤다. 순간적으로.) 지식검색으로 차범근을 치면 온통 그가 선수시절 독일에서 이룬 업적에 대해 경악하는 글들뿐이다. 아래글도 그런 지식검색에서 퍼온 것이다. 물론 글쓴이의 정서는 보아하니, 붉은악마 혹은 황우석 열풍 등으로 나타났던 최근 우리 사회의 '애국질' 현상과 관련 있어 보인다. 그러나 '순수 축구'(그런게 있다면)로서의 차범근과 그에 대한 재평가는 모든 이의 가슴을 뛰게 하지 않을까?

 

"자본과 국가주의, 분할 지배술의 이데올로기 등등은 모두 회색.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축구의 몸짓."

 

(아래, 네이버 지식검색에서 퍼옴.)------------------------------------------------

 

말할 것도 없이 차붐입니다.
지금도 명문이지만 그때당시 세계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리그 우승컵을 쓸어담으셨고
UEFA컵 2회 재패라는 무지막지한 기록을 세운 사람이죠.
지금도 독일인들은 차붐 하면 알아줍니다.
차두리가 레스토랑이나 편의점 가서 계산하려고 하면
그냥 가라 이럴 정도입니다.. 특히 프랑크푸르트는 더 그렇죠..
발락, 클로제 같은 선수들도 차붐을 안다고 합니다.
어떤 프랑스 시인은 차붐을 낳은 어머니와 그의 조국에게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시까지 썼다고 합니다.

느낌이 안 오신다면,
차붐 선수의 주요 활약상을 bej0322 님의 글을 인용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전율이 돋아날 겁니다.

차범근 감독님은요,,,,,,,,
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Park''s Cup).



말레이지아 전 1:5로 뒤지던 상황.

종료 5분 남겨놓고 4골의 소나기 골.



79년 프랑크 푸르트 입단



8월 당시 세계 최고 리그로 불리던 분데스리가 데뷔

데뷔전 상대는 도르트문트.

스타팅으로 75분까지 뜀.

어씨스트 기록.

최고권위 축구전문지 ''KICKER''紙 선정 주간 베스트11.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

헤딩으로 승리 결정 골.

KICKER지 선정 이주일의 골.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

그라보스키 어씨스트로 선취골.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MG 전.

한가운데 돌파에 이어 찬 공, 왼쪽 포스트 맞고 골.

선취골.

세경기 연속 골.



이날 KICKER지, 처음으로 <차붐>이라는 단어 씀.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페차이의 어씨스트를 받아 강슛.

그라보스키 센터링, 헤딩 슛.

30M 중거리 슛.

첫 해트트릭 기록.



11월 일본의 오데쿠라가 소속된 쾰른 전.

두 동양인의 대결로 관심 집중.

차 선취골, 결승골로 두골 기록.

오쿠데라 헛발질 7번.

차붐 대승.

프랑크푸르트 3:1로 승리.

일간스포츠 톱기사

<차범근 두골! 오쿠데라 누르다>

이때 부터 MBC 차범근 경기 녹화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밤. 시청률 최고.



12월 UEFA 컵 출전.



첫번째 경기 레알 마드리드를 맞아 차, 선취골을 넣었으나 1:1 무승부

두번째 경기 AC밀란 전.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강슛.

포스트 맞고 튀어나왔으나, 골대 5초이상 흔들림. 특종 기사실림.

3:2로 프랑크 푸르트 승리.



80년 3월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1차전.



당시 20세의 나이로 ''게르만의 혼''이라 불리던

로타 마테우스(90년 월드컵 MVP), 갈색 폭격기 ''차붐'' 전담마크 특명.

신문 <마테우스! 차붐을 막아라> 톱기사.

경기 마테우스의 완승. 차붐 속수무책.

2:3 패.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2차전.

역시 마테우스 차붐 전담 마크.

이번엔 마테우스 속수 무책. 차붐 대활약.

우측사이드 마테우스 여유롭게 제치고 어씨스트. 1:0 프랑크푸르트 승리.

차붐, 이날의 선수.

원정팀 득점 우선권으로 프랑크푸르트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

경기 후 신문 마테우스 인터뷰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는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이다."



79~80 시즌 득점 랭킹 7위 랭크.

세계 상승세 베스트 4 선정됨.

세계축구 베스트 11 선정됨.

연봉 독일에서 세번째 액수. 협상 타결.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 귀화 추진. 실패.

81시즌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도프에게 육탄공격 받아 심한 부상.

프랑크푸르트 팬들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프 살해 위협 소동. 경찰 출동.

부상이후 슬럼프. 이때도 역시 한국언론 차범근 씹기 발동.

KICKER지 이일로 <한심한 한국인들> 이라는 기사.

곧 슬럼프 회복.



83년 레버쿠젠으로 트레이드.

프랑크푸르트 팬들 울음바다.

85~86시즌 분데스리가 MVP !

득점 4위.



86년 한국대표팀 선수로 멕시코 월드컵 출전

88년 다시 UEFA컵 출동.

차붐 스페인 에스파뇰을 맞아 극적인 3:3 동점골 터뜨림.

5만 관중 차붐! 환호.

승부차기로 레버쿠젠 역시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UEFA컵 우승.



신문 톱기사

<지구 최고의 선수 ''차붐''>

KICKER지

<차붐, 팀 창단 첫 UEFA 우승 두번이나 이끌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의 영웅이자 분데스리가의 최고스타>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출장 최다골 기록 (아쉽게도 이기록은 최근몇년전에깨짐)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



당시-독일에서의 차범근은 최고의 용병으로 꼽혔습니다.

보루시아MG와의 시합당시..당시20살임에도 불구하고 게르만의 홈이라고 불렸던 마테우스가

차범근의 전담마크를 담당합니다...

막상.시합날-차범근은 날아다녔고..마테우스는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시합후 마테우스는 인터뷰에서 이렇게말합니다.

"나는아직 어리다, 그러나 차범근은 세계최고의 공격수다"

이렇게 자신의 패배인정과, 패배를 정당화시킵니다.

또.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럽진출한 선수가있죠 일본의 오데쿠라.

오데쿠라 그선수또한 독일.분데스리가에 진출합니다..

그리고 역시-차범근과 맞붙을기회가 있었구요..같은 아시아인이라는것으로 집중받기도했으나.

시합당시.차범근은 역시나 날아다녔고, 오데쿠라는 헛발질7번...

그리고 누구?인가가 말하기를..현재 분데스리가에서 평범한 마크방법으로

차범근을 마크할수있는 수비수는 아무도없다-라고 했었습니다.

그정도로 굉장한 공격력을 가졌던거죠...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시절..그팀의 주장이.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시합이 끝나고, 차붐의 몸을 봐라, 이것은 2차대전에 참가한 병사의 몸과 다를바없다-"

그정도로 집중마크를 당했던겁니다

그의 체력또한 어마어마했죠...현재 우리나라국대팀에 인간병기.차두리

한강변을 아버지와 끝에서 끝까지 달리기를 하는데...차범근은 저만치 앞에가있고,

차두리는 못쫓아가고 뒤에서 헥헥-대고있더군요..

차범근나이 38에 19살의 독일국가대표선수보다 체력이 월등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가 얼마나 몸관리를 잘했는지를 알수가있죠

또 어떤사람들은 차범근이 챔피언스리그를 진출못했다고 딴지를 거는데요

그당시의 UEFA컵은 지금보다 훨씬더 권위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챔피언스리그가 각나라리그1~3위가 진출을 하지만

그당시에는 무조건 1위만 올라가는것이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어쩌다 허접팀이 올라갈수도 있었고...

UEFA컵은 2위부터..몇?위까지 쭈루룩~진정.최강팀들과 자웅을 겨뤄야 했던거죠

한경기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붐'을 연호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프랑크푸르트 소속당시 레버쿠젠과의 시합당시..레버쿠젠의 겔스도프라는 새끼가

뒤에서 찍어가지고 차붐을 못쓰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자 차붐광팬..칼들고 레버쿠젠에 그놈죽이러가는일까지 생깁니다

그리고 차붐이 레버쿠젠으로 옮기자.프랑크푸르트팬들은 눈물바다가 되기도 하구요..

86월드컵.에대해서도 말하겠습니다.

사람들이 86월드컵때 차범근이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고...

그렇게 차붐-차붐-해대더만...골도못넣었다고...씹어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당시.우리나라가 만났던 나라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불가리아를 제외하고는 이탈리아, 아르헨티나...영원한 세계축구강국들 아닙니까?

그리고 시합내내 전방에 나가있는 차범근에게 공이연결된적은 5번을 넘지못했습니다.

미드필더에서 완전히 밀려버린거죠, 차범근 하나만 잘한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예를들면 현재-세계최고의 윙-라이언 긱스..그또한 웨일즈의 사람이고..

웨일즈는 월드컵 구경도 못하고 있습니다...오래전...아주오래전..한번-진출한적은 있다고...

그리고 한가지 알아둬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차범근은 당시 발목부상중이었습니다.수술을 해야할 상황이었는데

월드컵때문에 월드컵후로 미루고.발목에는 붕대를 칭칭말고 시합에 참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비수를 끌고다니면서 공간을 만드는게 안보인다면...축구보지마십시오-

만약 차범근 활동당시...지금처럼 당연지사 월드컵 본선을 진출하는거라면..

분명 한번은 16강에 올라갈수있었을겁니다...안타까울따름.

독일에 차범근 활동당시 칼하인츠 루메니게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선수는 유럽의 펠레-라고 불렸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펠레와는 시대의 차이도있기때문에

오히려..펠레보다 조금더-앞설거라고까지 평가받았습니다.

프랑크푸르트시절.감독은 차범근이 칼하인츠루메니게보다도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차범근...호나우두, 피구같은 선수들과 비교해서.절대 뒤지지않았을것으로 보입니다

우선...차범근이 득점한 골수가..그들에비해서 크게 많은게 아닌데요

그이유는 차범근은 전형적인 골게터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보다 더좋은 위치에 자기편 선수가 있다면...망설임없이 공을 보냈습니다-

즉-자신의 득점보다.팀의 승리를 위한 플레이를 했다는거죠

일본에 70년도정도? 그때 가마모토 구니시게 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선수의 실력...가히-엄청난 선수였습니다...

올림픽에서 혼자 7득점을 한것만 봐도 알수있죠

그런데 자기들만 잘난줄아는 그 일본놈들이 그 가마모토를 아시아 최고라고 부르는것은 주저합니다

그건 바로..한국에 차범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사람들은 차범근을 아시아의 호랑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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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7 00:33 2006/03/07 00:33

술이 떨어지다.

2006/03/06 04:00

                            술이 떨어지다.

 

 

술이 부족하니 옛 전적(典籍)만을 따르기로 할 것인가?*

 

봄의 초입에 들어선 서당 하늘에는 술병이 많았는데,

찬 은하수가에 킾(keep)해뒀던 포두주인 것처럼,

콸콸 잔에 따라서 한 병, 두 병, 마시다가

끝나지 않을 밤인 듯이 긴 농쟁(弄爭) 벌이다가

 

술병에 정신을 빠뜨리고, 대화를 빠뜨리고, 인문학을 빠뜨리고,

깜빡하고 고개를 떨구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별들은 모두 마셔버렸다.

 

토한 자국처럼 휘부염하게 터오는 하늘은 어제의 맑은 술빛이 아니다.

은하수 구비처럼 마르지 않을 별들인줄 알았는데,

어느새 별들이 다 떨어지다.

술이 떨어지다.

 

 

* "述而不作 信而好古" - <<논어>>, <述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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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6 04:00 2006/03/06 04:00

[영화] 산책

2006/03/05 02:10

음악을 좋아하는 네 명의 친구가 각자 직업은 가진 채 취미로 밴드 활동을 한다. "걸어온 길이 얼마건, 앞으로 가야할 길이 얼마건, 그런거 신경 쓰지 말고" 하자는 음악활동.

 

네 명의 주인공이 각기 가지고 있는 일상의 소소한 갈등들이 곧 스토리 전개의 뼈대이다. 영화는 이 소소한 갈등이 전개되는 소소한 과정을 소소하게 보여준다. (정말 소소한 영화였다.) 감독은 <편지>를 만들어 히트쳤던 사람. 

 

네티즌들의 평가는 극대극이다. 인터넷에서 한 번 찾아들 보시길. 진지한 사람들은 악평을, 소소한 사람들은 좋은 평을 한 듯하다. (사진은 네이버에서) 하지만, 영화속의 그 모습들, 우리가 한때 꿈꾸던 모습 아닌가. "나이 서른에 우린 어디에 있을까?...운운" 하면서 말이지.

 


약간 쌀쌀한 아침에 산책하고,저녁에 시원한 맥주 한 잔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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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5 02:10 2006/03/05 02:10

깜빡깜빡한다는 것

2006/03/01 03:36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깜박깜빡하는 일이 너무 많다. 심지어 지금 이 주제로 여기 블로거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몇가지 링크를 그쳐서 여기 써기에 오는 동안 그걸 까먹었다. 이 주제로 쓰기로 했다는 것.

 

까먹는 것의 생물학적인 매커니즘은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걸 까먹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정말 바라는 것만을 행한다면 치매는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나의 모습이란...

 

다시말해서 내가 까먹는 것은, 좀 덜한 증오, 그리고 좀 덜한 이익!

 

영원한 젊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 그렇지만 이 글이 치매 노인이나, 그로 인해 고생하는 가족 등의 아픔을 조롱하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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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1 03:36 2006/03/01 0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