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쯤 전에 친구가 쓴 편지

2007/07/12 23:53
네가 물어봤던 것들이
마침 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고 맴돌고 있는 것들이라
이참에 정리해보려고 한다네
너에게 하고 싶은 말과 더불어서 말야
글쎄, 과연 잘 될 지는 장담 못하지만
참을성과 이해심 많은 너라면
이 두서없는 글에서 내 진심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가 얼마 전 그랬던 걸로 기억해
네 혈연 중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껴 공부하게 됐다고


사실을 말하자면 그 때 내가 느낀 감정은 한마디로

"뭐?!"

...였어


내가 아는 너,
어쩌면 정확히 표현한다면 '내가 원하는 너'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너는
외부의 누군가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애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굳은 신념을 가지고
비록 인간성을 상당부분 말아먹어버리는 시험일지라도
네 신념을 사회에서 관철시키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감수해야 할 과정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후에
죽어라 매진하는 형태가 될 거라 생각했거든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게으름이 아닌 이런저런 생각으로 불안해하고 고민하는 네가
오히려 나로서는 좋아보이고 더 안심이 돼

오랜 기간 숙고한 끝에 찾은 네가 진정 원하는 일을 할 때
네 인생뿐만 아니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좀 낯뜨거운 말이지만 지켜보는 난 대단히 기대가 된다
넌 분명 그럴만한 역량을 가졌으니까

그리고 내가 네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주저말고 언제든지 다가오도록

이런 시대에
이런 나라에
이런 가정에 태어나게 해준 운명에 감사하면서
함께 마음껏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해보자구


나는.....

그래,
네 예상대로야


다만 법학서적은 내 관심 밖이라는 것만 빼고는


분명 대단히 흥미로운 학문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그저 얄팍한 수준의 호기심과 흥미만 가지고는
금방 한계에 부딪치게 되잖아
책을 펴기가 무섭게 마구 쏟아지는 개념들의 습득
학설의 정리 그리고 그리고..........

지금의 나에겐
이런 지겨운 것들을 견뎌낼 인내심이 완벽하게 결여돼있어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인생의 대부분을 이런 식으로 보냈더라구


가끔씩 네가 나의 재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얼마나 착잡한 기분이 드는지...아니?


그건 실상은 내공 따윈 하나도 없는,
아주 어릴 때 터득해버린 교활한 잡기술일뿐이야

주위사람들의 칭찬과 주목과 인정은 내게 마약같은 거여서
그걸 얻기 위해 잔머리를 열심히 굴렸지
그래서 남들 눈에 대단해보이는 방법 몇가지를 좀 아는 것뿐이라구
깊게 물어보면 제대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말할 필요도 없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하잖아
그런데 남들이 추켜올려주는 초반에는 실력이 팍팍 늘다가
본격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에서는
노력에 뒤따르는 고통과
타인의 칭찬이 주는 쾌감을 저울질하기 시작해
저울이 아주 조금이라도 고통의 쪽으로 기우는 순간
내 노력은 거기서 끝이야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인간형이지

남들의 시선이라는 거
성취동기를 자극하는 데 상당히 유용하게 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길게 보면 역시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적어도 내 결론상
그건 수단이지 결코 가치가 될 수 없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건
얼마만큼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였는가
앞으로 난 이거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해

그래서 나는,
내 무능함이 낱낱이 드러나는 곳에
나를 소속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덕분에 요새 진짜 죽도록 피곤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살아있다는 실감이 나서 좋아


하여간 얼른 널 만나고 싶다

사실 널 만나면 계획한 공부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못하게 돼
진이 빠지게 얘기하느라 말이지
그렇지만 너와의 대화는 항상
공부'따위'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단 말야

만나서,
너의 고민과
최근 내가 느끼고 있는 그 치졸하고 역겨운 감정에 대해서
얘기나 좀 해보자


아 졸려서 더는 못 쓰겠다
내일 또 죽어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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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안하다 친구야.

 

 불현듯 이걸보니까 다시 정신이 차려지는 구나.

 

 

우리가 마치 인생에서 큰 것이나 겪은양 퇴폐와 무기력에빠져서

 

앞길 헤쳐나가는데만 급급해서 살아선 안되겠지.

 

거참 이젠 완전 진부한 얘기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우린.... 이것저것 하고 싶은것도 할수있는 것도 많은 사람들인데 말야.

 

뭘 두려워하고 눈치나 보며 움츠러드는 영혼들이 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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