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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녹색당과 브라질 노동자당의 경험

독일 녹색당과 브라질 노동자당의 경험 - 의회의 규율과 문화에 도전하다

독일 녹색당과 브라질 노동자당의 사례를 통해서 본 민주노동당 원내 진출의 의미

서복경/ 국회도서관 입법정보연구관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한국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 그 첫 번째라면, 외생 정당의 의회 진입이 두 번째 의미다. 진보정당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상이한 정치적 이념, 정책적 지향에 초점을 둔 접근이다. 외생 정당이란 정당의 엘리트와 지지기반이 의회 외부로부터 생성된 정당을 말한다. 오랫동안 의회활동을 함께 해왔던 정당들에게는 나름대로 공유되는 문화와 규율이 있다. 외생 정당의 의회 진입은 이러한 기존 의회의 규율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의미한다.

독일 의회의 엄숙주의를 파괴하다

이 두 측면을 모두 갖는, 비교적 최근의 대표적 사례로는 독일 녹색당과 브라질 노동자당을 들 수 있다. 두 정당은 모두 1980년대 초 처음 의회의원을 배출한 뒤 20여년 만에 집권정당이 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2002년 대통령을 배출했고 의회 1당이 됐으며, 녹색당은 사회민주당과의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하지만 두 정당이 의회에 진출하던 시점의 정치 상황과 지향하는 정치적 가치에는 차이가 있으며,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많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사례와 바로 연결짓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만, 민주노동당이 어떤 변화를 부를 것인지를 가늠해보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독일 녹색당은 분권화·직접민주주의·자결·이해당사자의 공공정책 결정 참여를 표방하며 다양한 환경운동단체, 생태민주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함께 만든 정당이다. 녹색당이 1983년 5.4%의 의석으로 원내에 진출했을 때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기존 정당들은 독일 의회의 문화, 의정활동 방식, 새로운 의제의 등장이라는 세 측면에서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문화적 도전이란 의복예절의 무시, 발언형식 파괴, 선전용 깃발의 회의장 반입 등 관행화된 문화에 대한 의도적 파괴를 말한다. 녹색당은 ‘독일 의회의 엄숙주의에 대한 도전’을 주요 의회 전략으로 택했다. 기존 정당들은 대중적 지지를 의식한 이벤트성 행사라는 비판을 가했지만 유권자들의 호응은 높았다.

또 녹색당은 원내정당의 집행위원회 구성에서 여성의원 비율을 높이고 양성평등 문제를 의회 내에서 공론화했다. 1983년 1차 집행위원회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3 대 3이었으며 1984년 2차 집행위원회는 6명을 모두 여성으로 구성했다. 녹색당의 여성의원 우대정책은 원내 다른 정당 소속 여성의원들의 지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특히 사민당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공개 회의석상에서 동료 남성의원들의 성차별적 발언이나 낙태·동성애 문제에 대한 보수적 태도를 공격함으로써 의회의 남성 중심성에 도전하기도 했다.

녹색당의 진입은 기존 정당들의 의정활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1987~90년까지 녹색당 의원들은 모두 1206건의 대정부 정책질의를 했는데, 이 수치는 당시 독일 의회 정책질의의 8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또한 의원 수가 훨씬 많았던 기민당, 사민당과 거의 대등한 수준의 법률안을 발의함으로써 왕성한 활동력을 과시했다. 이런 노력은 기존 정당들의 더욱 적극적인 의정활동에 자극이 됐다.

의회에 상정되는 의제에서도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환경·여성 문제를 전면에 내걸었던 녹색당의 활동은 여론의 관심을 받았고, 기민당이나 사민당은 어떤 형태로든 이 문제의 대응책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 결과 녹색당이 제안한 법률안은 거의 통과되지 못했지만 기민당이나 사민당은 새로운 법률안이나 수정 법률안을 제기함으로써 관련 입법의 수가 증가하게 됐다.

그러나 녹색당의 원내 활동이 긍정적 효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1991년 녹색당은 한 석의 하원 의석도 얻지 못했는데, 1983~90년까지 원내 활동이 정체성의 혼란, 내부 분파의 대립 격화를 야기했던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 녹색당은 두 측면에서 문제에 봉착했다. 하나는 의원단의 자율성이 증가하면서 중앙당과 당원의 통제가 어려워진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민당과의 협력에 대한 당내 갈등이었다. 녹색당의 정체성에 맞는 다양한 입법안을 발의했지만 군소정당의 한계로 통과에 이르지 못하자 사민당과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현실주의자들이 늘어났다. 현실적 성과보다는 원칙의 고수를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과 현실주의자들의 갈등은 1988~89년에 이르면 언론을 통한 공개적 대립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1994년 다시 49석의 의석을 얻은 녹색당 내에서는 현실주의 노선이 힘을 얻었고 2002년 선거 뒤 사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의 진보적 유권자들 내에서는 현재 녹색당에 대해 원칙을 포기한 ‘제2의 자유민주당’이라는 비판적 평가에서부터 수권능력을 갖는 정당으로의 변모라는 긍정적 평가가 폭넓게 존재한다. 녹색당의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브라질 노동자당은 1970년대 말 새롭게 등장한 노동운동 조류의 폭넓은 지지를 기반으로 1979년 탄생했다. 그러나 1982년 선거의 결과는 참담했다. 군부가 여전히 집권하고 있던 조건에서 민주화 지지 유권자들의 표는 제1야당인 민주운동당에 집중됐다. 당시 노동자당의 주류였던 노조 지도자들은 현 대통령인 룰라 디 실바를 포함해 대거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노동자당의 재기는 1985년 시작된 대통령 직선제 쟁취운동에서부터였다. 1988년 시장선거에서 노동자당은 대도시에서 36명의 시장이 당선되는 것을 비롯해 1천명이 넘는 시의원을 배출했고, 그 여세를 몰아 1989년 룰라는 대통령에 출마했다. 결선투표까지 가서 근소한 표차로 패배하기는 했지만, 노동자당은 점차 연방의회와 지방자치체에서 영향력을 확장해갔다.

대중참여의 대표적 모델, 참여예산제도

노동자당의 의회활동 초점은 참여를 통한 의회활동의 모델을 창출하고 노동자·농민·소수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대중참여 의회정치의 대표 모델로 꼽히는 것이 참여예산제도다. 참여예산제는 부족한 예산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를 주민의 대표로 구성한 위원회에 묻고 그 의견을 반영하는 제도로, 현재는 다른 정당들도 도입한 성공적인 제도로 꼽힌다. 참여예산제가 가장 모범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포르투알레그레에서는 1989~2000년에 기본 위생시설을 갖춘 가구가 53%에서 85%로 증가했으며 유아사망률이 40%가 감소하는 등의 성과를 낳았다. 또한 정당조직에서 전당대회 이전에 예비회의와 누클레오 제도를 도입해 당원에 의한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냄으로써 기존 정당들과 차별화를 꾀했다.

 

노동자당의 성장은 자발적 당원 기반을 갖지 못하고 부패했던 기존 정당, 특히 민주화운동 정당이며 집권당이던 민주운동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에 기인한 바 크다. 기존 정당에 대한 실망은 당원들의 적극적 참여와 투명성을 보여주었던 노동자당을 기존 정당들과 차별화해주었던 것이다.

 

<출처>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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