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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좌파

국가와 좌파

The State and the Left


리오 파니치(Leo Panitch)가 세계화, 국가, 그리고 좌파가 국가의 구실에 대해 어떻게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에 관해 진저와 토론했다.

▲ 진저 : 당신은 국가의 구실이 상당히 변했다고 생각합니까? 실제로 소멸되어가고 있으며 투쟁의 관점에서 어떤 구실도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까?

▲ 파니치 :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국가의 소멸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에 대한 재미난 변형이겠지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아래에서 국가가 소멸한다는 것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가 실제로 이해했던 것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 관계, 그리고 심지어는 자유시장에서 살고 있을 때, 사람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어쩔 수 없이 유발하는 갈등과 모순을 감당하는 국가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시대에 국가의 구실이 축소되고 있다는 관점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 시기 내내 국가는 탈규제, 자유시장 등을 둘러싸고 매우 활동적이었습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건 우리의 삶에서 국가를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 것은, 자유방임 원칙아래 있던 19세기 국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자본 축적 조건을 창출하고 강화하는 것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활발한 국가입니다.
레이건주의, 새처리즘, 또는 신자유주의 등 어떤 것도 국가를 우리 삶과 떼어놓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도리어 국가를 이용하거나, 단순히 자본주의에 이용되기보다 스스로 나서는 국가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건 국가는 경쟁력 있는 동력의 조건을 만드는 데 적극적인 구실을 자임합니다. 사람들은 세계화가 자본이 국가를 피해 지나가도록 이끌거나, 국가가 세계화 때문에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것은 정말 잘못 이해한 겁니다.

▲ 진저 : 기업이 공적, 사적 국제시장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고 좀더 강력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점에서는 분명 강조점의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 파니치 : 기업은 국가가 없다면 전지전능하지 않습니다. 북미자유무역협정은 기업이 체결하지 않았고, 기업이 고안하지도 운영하지도 않습니다. 세계무역기구와 국제통화기금은 국가 대표들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기업이 아니라, 이런 전략을 이해한 채 국가를 위해 일하는 관료와 경제학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자본의 압력은 노동계급의 요구와 국가의 재정 위기와 나란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자본이 국가를 벗어나는 전략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사민주의, 비마르크스주의자 또는 자유주의적 관점에 의해 배워 왔기 때문에 오해를 합니다. 우리는 루즈벨트가 "보라, 나는 체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구하고 있다"고 말할 때 그 속뜻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본주의에 대한 국가 통제가 어느 면에서 반자본주의적이라는 관념을 고집합니다.
어떤 통제는 더 이상 세기말에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들이 좀더 자신감을 얻고, 해고에 대한 두려움을 덜고, 더 전투적이 되게 만드는 실업보험 같은 규제 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각한 반대가 나타났고 그래서 국가는 지금 이런 규제를 완화하면서 다른 양식의 규제를 찾고 있습니다.
새로운 양식의 규제는 자본의 움직임에 문을 열어 줬고 모든 제약을 없앴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국가가 자본의 움직임을 보호하는 데 아무 할 일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국가는 외국 자본에 국내 자본과 똑같은 권리를 보장하고 지적재산권 같은 것을 인정하는 법을 통과시킵니다. 이것은 재산권을 보호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국가 통제를 포함합니다. 매우 능동적인 국가인거죠. 최근 해리스(Harris)가 온타리오(Ontario)의 교사들을 공격한 것처럼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노동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모순을 다루는 것도 역시 포함됩니다.

▲ 진저 : 당신은 이러한 점에서 노동계급에 맞서는 싸움을 주도하는 것이 국가라는 데 동의하시겠군요? 10년전 기업 세력은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위해 사회복지 프로그램 축소 로비를 벌이는 동시에 기업 자신들의 인력 규모를 줄임으로써 이 싸움을 부추겼습니다. 지금 전체 노동계급에 대한 공격의 첨병은 다름아닌 국가 그 자체입니다.

▲ 파니치 : 예,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진저 : 세계화 이래 국민국가가 아직도 투쟁의 초점입니까?

▲ 파니치 : 만약 국가가 세계화를 적극 지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세계화를 처리할 국가도 필요합니다. 지금 자본이 국가를 무시하고, 국가가 시종 구실만도 못하게 힘을 잃었다고 생각한다면, 국가를 포기하고 다소 공상적인 국제주의에 열중할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많이 보고 있잖아요. 이것은, 가상 공간에서 가상 자본을 갖고 뭔가 일을 하는 어떤 국제 시민사회가 생성되리라는 약간 모호한 개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정치 투쟁은 항상 국가 수준에서 해결됩니다. 당신이 나처럼 세계화를 국가가 후원하고 주창한다는 관점을 수용한다면, 마르크스의 이 말이 바로 오늘날에 해당합니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국가 대표로 구성됩니다. 변화가 효과를 발휘하도록 하려면 국가를 바꿔야 합니다. 국가 정책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전체 조직 구조까지도 바꿔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히 옳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취하는 행동의 결과가 자본의 해외 도피라면 무엇이 행동의 관건인가? 자본 이동을 통제하지 않고 도대체 어떻게 자본의 해외 도피를 멈출 수 있는가?"
남들은 "그러나 당신이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이크로칩 혁명 - 단추 하나를 누르면 돈이 뉴욕에서 도쿄로 이동합니다 -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을거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는 컴퓨터 혁명 때문에 자본의 움직임을 감시하기가 훨씬 쉽습니다.
미국 정부는 돈 세탁을 위해 자본을 이동하는 자를 감시하는 구실을 할 국제 금융 컴퓨터망을 요구해 왔습니다. 모든 국제 거래는 뉴욕에 있는 세 개의 통신망을 통과합니다. 두 개는 사유물이고 하나는 공공재입니다. 감시 문제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정치 문제입니다.
한 국가의 정책 변화는 다른 나라로 빠져 나갈 힘이 있는 자본 때문에 제한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들 사이에서 자본 통제책을 재확립하기 위해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고 각 나라에서도 이러한 통제책들을 다시 세우기 위해 여론을 먼저 얻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움직임의 초점을, 자본의 이동을 쉽게 하기 위해 각 국가가 진행하고 있는 협력에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또 통제책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간에 협력하도록 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이것이 혁명적인 듯 들리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혁명적인 것은 아닙니다. 2차 세계대전 말미에 자본 통제 개념을 미국과 영국의 협상가들이 논의했습니다. 그 생각은 만약 자본이 국가의 법률에 대항하여 떠난다면 다른 국가가 첫 번째 국가의 허락이 없이는 자본의 유입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제안은 그 당시에는 무산되었지만 지금 자본 통제를 주장하는 데 중요한 전례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가 각 나라에서 급진적 사회주의의 부흥을 이루어내지 않고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벌여야 하는 투쟁의 목표입니다.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은 서로 서로 협력하며 서로를 고무시키며 비슷한 속도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 자체와 그 내부는, 각 국가 내부의 움직임에 의해 개별 국가가 먼저 변하지 않고서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리우에서 열린 환경운동 회의 또는 나이로비와 베이징에서 열린 여성운동 회의는 사람들이 자국에서 로비 활동을 벌일 때 기준이 될 국제적으로 합의한 원칙들을 발전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국제적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자국을 바꾸는 것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 진저 : 요즘 지방 도시정부(또는 도시 지자체, city state)를 자본의 기술적 변화와 혁신의 중심 근거지로 표현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저도, 지방 도시정부가 탈규제화하는 대신 노동복지정책과 같은 제도로 규제를 다시 강화하는 움직임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 파니치 : 나는 도시 수준의 정부가 실제로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별로 확신하지 않습니다. 명백히 작은 나라인 싱가포르와 홍콩은 그런 기능을 하지만 뉴욕 또는 토론토 행정부가 자본 흐름을 촉진시키는 주도적인 기관이라는 견해는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도시가 금융 자본이 집중적으로 모여있고, 전체 경제를 후미로 둔 자본 집중의 매듭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프랑크푸르트, 토론토, 런던 그리고 무엇보다도 뉴욕은 그런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캐나다= 옮긴이) 재정부가 베이가(Bay Street)에 하는 것이나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월가에 하는 것같은 구실을 도시 정부가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두 번째 질문의 관점에서 볼 때, 국가는 복지국가를 훈련시키고 규제를 푸는 데 능동적입니다.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보편적인 복지 제공을 없앰으로써 국가를 없애는 것을 목격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복지를 얻는 데 영향을 주는 조건과 복지정책이 결정되는 조건을 결정하는 재량권을 바탕으로 정부가 간섭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가가 좀더 큰 구실을 한다는 것을 또 한번 보여줍니다. 자유주의자와 사민주의자 - 이 세상의 클린턴 류, 봅 레이 류(Bob Raes), 토니 블레어 류 - 들은 국가가 매우 능동적인 구실을 한다고 봅니다. 심지어는 세계은행까지도 우리에게 최소한의 국가가 아니라 효율적인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즉 부패를 제한하고 노동자와 복지 혜택을 받는 이들을 재교육시켜 그들이 경쟁적 자본을 위해 좋은 재원이 될 수 있도록 하고, 기술적 변화를 지원하는 국가 말입니다. 사민주의 기술관료들은 우리에게 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산업 정책을 개발하고 관련 비용을 보증하며 많은 훈련을 촉진시키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론은 복지 혜택에 의존하는 노동자를 훈련시키면 여기(캐나다: 옮긴이)의 임금 비율과 관계없이 제3 세계와 경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많은 관점에서 글러 먹었습니다. 그들은 제3 세계에 상품을 수출하고 그들과 경쟁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교육과 복지국가 프로그램에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목표를 채택하는 것이며, 비윤리적입니다. 사회주의자는 항상 이러한 것을 윤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비록 사민주의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당신이 집없는 사람을 길거리에서 보면, "이 사람은 훈련과 교육이 덜되어 있으며 비경쟁적, 비기업가적이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이 엿같은(fucking) 체제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훈련은 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남부 온타리오 지역에서 성공한다면 그것은 실업을 위쪽 뉴욕주에 수출한 댓가일 것입니다. 제3 세계가 기술과 훈련을 채택할 수 없으며 우리 만큼의 능력을 갖추고 우리와 경쟁할 수 없다는 전형적인 서구의 개념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훈련의 핵심 전략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독일이 만드는 데 100년이 걸린 직업훈련 체제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2세대(60년: 옮긴이)가 걸릴 것입니다. 봅 레이(Bob Rae)에게는 장기적인 직업훈련 체제와 분리된 산업 정책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의 정책은 아마도 2030년에나 효과를 보기 시작하겠지만 그는 4년 뒤에 다시 당선되어야 할 처지입니다. 이 쟁점 또한 우리가 능동적인 국가라고 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몇몇 진보적인 사람은 국가가 능동적인 한 그것이 자본주의를 지원하건 말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진저 : 그러나 캐나다 정치 환경에서는 지금 신보수주의적 정책들이 해리스주의자 등의 관점을 빌어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보시죠?

▲ 파니치 : 국제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상황은 해리스의 사례와 다릅니다. 캐나다인은 종종 시대에 뒤떨어집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클린턴-블레어 스타일 정부가 현재는 더 전형적입니다. 물론 사민주의적 형태의 전략에 되어 먹지 못한 것이 얼마나 포함되어있나를 따져보는 척도의 하나는, 그들이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여하지 못하는 모순에 갖혀있기 때문에 실제로 교육에 투자할 계획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부자가 돈을 다른 곳으로 옮길까 노심초사하면서도, 돈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 진저 : 복지 정부 또는 공공 훈련 체계의 측면에서 볼 때 클린턴이 정부 개입을 강하게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미국의 교육은 점점 사유화되고 있습니다.

▲ 파니치 : 그점을 아주 잘 지적하셨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은 그 방향입니다. 그들이 복지국가를 재편하려는 이유 중 하나는 사람들을 이러한 훈련 체제에 종속시키고 밀어넣으려는 것입니다. 당신이 보편적 복지 혜택을 유지할 때는 해리스 류의 `신병 훈련소'(boot camp)를 만들 수 없습니다. 노동복지정책 뿐 아닙니다. 직업훈련도 같습니다. 진보적인 이들은 평생교육을 말하곤 했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가 마치 바다표범이나 원숭이라도 되는 양 훈련에 대해 떠듭니다! 레그 위테커(Reg Whitaker)가 말했듯, 사람들이 직업훈련을 받는 것은 고용센터에 가서 컴퓨터를 켜고는 일자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입니다.

▲ 진저 : 국가에 대해 조직적 요구를 제기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좌파가 어디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파니치 : 가장 우선적인 것은 외국과 협력해 자본 통제를 다시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는 머리속에 진짜 우리의 국가를 확립하고 세계의 여타 운동 세력들도 이것에 우선권을 두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이 작업이 제대로 되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종류의 재정부 또는 캐나다은행(Bank of Canada)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것은 좌파가 충분히 진보시키지 못한, 역사적으로 약한 문제입니다. 이랬던 것은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언제나 국가는 시들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점이 좌파가 국가의 구조적 틀과 구성을 너무 신경쓰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제에 우리가 몰두해야 합니다.
국가를 조직적으로 재건설하자는 대규모 캠페인이 필요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이것은, 국가 기구와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추상적인 경제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이와 노동 계급을 위해 종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해방 이론이 말하는 것과 거의 유사하게도 가난한 계층에 명백하게 우선 순위를 두는 것과 연관됩니다.
이것은 국가기관 노동자들을 위한 큰 변화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 무주택자에 관한 아주 흥미로운 작업이 뉴욕에 있습니다. 그것의 핵심 방향은 사회사업 인력을 요구하고 무주택자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사회사업 인력이 실제로 이 일을 처리할 때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기 보다는 사리분별력을 지니고 자신을 무주택자의 옹호자로 자리매기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재정부를 어떻게 바꿀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일에는 모든 산하 기관과 각 국의 내부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뒤따릅니다. 이들이 봉사하는 사람들을(수혜자들을) 기관 외부인으로 보기보다는, 정부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수혜자들이 선출직 위원회를 통해 다른 기관과 부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게 하는 길을 생각하는 것이 좀더 이롭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필요한 정부 형태의 모형입니다.
이것은 또한 공공 영역 노동자들이 이러한 기관을 대표하고, 차관(부장관, deputy ministers) 또는 산하 기관장을 선출하는 데 힘을 발휘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후보는 장관이 지명 추천할 수 있지만, 선출의 결정은 결국 일반 공무원들이 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공 영역 노동자들의 또 다른 구실입니다. 이것은 정책 대안에 대해 서비스 수혜자들과 토론하는 것과도 연관됩니다. 만약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과 정책에 5가지 대안이 있다면, 관련 노동자들은 정책 선택을 위해 노인들의 투표를 실시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여기에 속박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을 결집시키고 교육시키고 최종 결정을 위한 자료를 얻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성격과 관련해 필요한 것을 생각할 때 급진적이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정말 (우리를=옮긴이) 약하게 만드는 것은 공적 영역은 선이며 '우리 편'이고, 사적 영역은 나쁜 것이며 '우리의 반대편'이라고 말하는 좌파의 경향입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이론의 거울 (반대란 뜻=옮긴이) 이미지입니다. 이것은 공적, 사적 영역 모두의 계급적 본성을 전적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 이것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분리 사고를 완전히 깨야 합니다.
당분간은, 내가 생각하기에 급진적 국가가 어떤 형태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을 만들어내고 반영할 수 있는 교두보가 국가안에 있습니다. 지역 사회 또는 노동자 일반의 특정한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혁신적이며 민주적인 프로그램과 서비스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두보는 축소되고 있으며 자원이 제한되어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지 유토피아적인 전략이 아닙니다. 매우 장기적인 전략임에는 분명하지만요.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국가를 세우고 기획할 구조적 개혁을 즉각적으로 얻어낼 수는 있습니다.


리오 파니치(Leo Panitch)는 토론토의 요크(York)대학 정치과학과 교수이며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의 편집자이다.

출처: 진저 (www.web.net/~beng/ginger) 98년 7월.


고려대 신방과 학생 이정훈 님이 번역해주신 것을 제가 손봤습니다. 그래서 오역이 있다면 신기섭 제 책임입니다.
김승현님이 이 글 맨 앞 파니치 교수의 첫번째 답변 처음 몇 문장의 명백한 오역을 지적해주셔서, 1999년 11월8일 수정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른 몇곳도 어색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고쳤습니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영한 대역본을 준비했습니다.
영어 원본은 여기 (http://www.web.net/~beng/ginger/articles/issue2/panitch.htm)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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