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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지식인 100명..누가 될까

오늘날 세계를 이끄는 글로벌 지식인은 누구인가. 미국의 국제문제 격월간지 포린폴리시(FP)와 영국의 시사 월간지 프로스펙트는 공동으로 이 같은 물음을 제기한 후 인터넷을 통해 자체 선정 후보 100명을 제시했다. 다음달 10일까지 온라인(prospectmagazine. co.uk/intellectuals) 투표를 거쳐 결과도 공개할 예정이다. 후보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자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도 다른 분야의 논쟁에도 영향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소통능력을 갖춘 생존인물”이라고 밝혔다. 이들이 선정한 후보군은 자신들도 인정하듯 영미권에 치우친 감이 있다. 이들은 ‘누락된 후보’에 대해서는 추천을 요청했다.

 

노엄 촘스키

 

미국의 언어학자, 변형생성문법() 이론의 창시자.
별칭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국적 미국
활동분야 어학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주요저서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미국의 언어학자, 변형생성문법() 이론의 창시자.
별칭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국적 미국
활동분야 어학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주요저서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본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출생이다. 구조언어학을 주류로 하는 미국 언어학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라 불린다. 중세언어학 연구가인 아버지 W.촘스키의 아들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구조언어학을 배웠다. 1951년에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교에 초청되어 그 곳에서 독자적인 변형생성이론()을 형성하였다.

1955년부터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의 언어학과 교수로 있으며,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영어의 음성양식 Sound Pattern of English》(1968, Morris Hall과 공저) 등에 의하여 생성문법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언어구조학의 기반이 되어 있는 경험주의를 넘어서 데카르트훔볼트에게서 그 발단을 찾아내려고 한 그 이론의 철학적 배경은 《데카르트파 언어학 Cartesian Linguistics》(1966)에 상세히 논급하고 있다. 주요저서에 《생성문법 이론의 여러 문제 Topics in the Theory of Generative Grammar》(1966) 《언어와 정신 Language and Mind》(1968) 등이 있다.

본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출생이다. 구조언어학을 주류로 하는 미국 언어학계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라 불린다. 중세언어학 연구가인 아버지 W.촘스키의 아들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구조언어학을 배웠다. 1951년에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교에 초청되어 그 곳에서 독자적인 변형생성이론()을 형성하였다.

1955년부터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의 언어학과 교수로 있으며,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영어의 음성양식 Sound Pattern of English》(1968, Morris Hall과 공저) 등에 의하여 생성문법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

언어구조학의 기반이 되어 있는 경험주의를 넘어서 데카르트훔볼트에게서 그 발단을 찾아내려고 한 그 이론의 철학적 배경은 《데카르트파 언어학 Cartesian Linguistics》(1966)에 상세히 논급하고 있다. 주요저서에 《생성문법 이론의 여러 문제 Topics in the Theory of Generative Grammar》(1966) 《언어와 정신 Language and Mind》(1968) 등이 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국적 영국
활동분야 역사학
출생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주요저서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 《극단의 시대》(1994)
본문

1917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으로 1870년대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2세 때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하고, 1931년에는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했으나 히틀러(Adolf Hitler)가 집권하자 1933년 다시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 뒤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논문〈페이비어니즘과 페이비언들, 1884~1914〉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져 대학 때 영국공산당에 입당하고 1946년부터 1956년까지 '공산당 역사가들의 모임'에서 활동했으며, 공산주의의 경직성을 비판하고 역사연구에서도 이념을 앞세우지 않은 탓에 뒤에 자유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마르크스주의 저술가가 되었다.

이론과 현실의 통합을 추구하여 1947년부터 노동자와 사회인을 교육하는 런던대학교 버벡칼리지에서 강의하고 1982년에 정년 퇴임했다. 그 사이인 1949~1955년까지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칼리지 특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1984년 이후에는 영국 아카데미와 미국 아카데미 특별회원으로 활동했다. 2001년 현재 런던대학교 버벡칼리지의 명예교수로 강의 및 저술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연구 대상을 노동자 조직 및 지도자들에게 국한하지 않고 노동계급 전체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조망하여 눈길을 끌었으며, 자본주의 형성과정과 그에 따른 인간의 다양한 삶에 근거하여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역사를 연구하여 명성을 얻었다.

저서에 《노동의 전환점》(1948) 《원초적 반란자들》(1959), 3부작 《혁명의 시대》(1962)·《자본의 시대》(1975)·《제국의 시대》(1987), 《극단의 시대》(1994)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1994) 《예술의 힘》(1995) 등이 있다.

 

홉스봄의 생애와 사상 
        

김동택 (정치학 박사)[수유연구실+연구공간넘어 자료실에서]



1. 에릭 홉스봄의 생애

20세기의 위대한 역사가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릭 존 에른스트 홉스봄(Eric John Ernst Hobsbawm)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1917년에 태어났다. 본래 그의 조부는 러시아령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으로서 1870년대에 영국에 이주해왔으며 그의 외가는 오스트리아-형가리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 출신의 중산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대영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에서 직장을 갖고 있었는데, 졸업 여행차 이집트를 방문했던 홉스봄의 어머니와 결혼하게 되었던 것이다. {제국의 시대} 서설에서 홉스봄 자신이 간략하게 밝히고 있듯이 그의 출생에는 국제적인 이민과 취업, 제국과 식민지, 여성 교육, 그리고 세계 여행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는 두 살 때 비엔나로 건너갔다가 1931년에는 베를린으로 옮겨 살다가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럽 대륙에 파시즘과 전쟁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감에 따라, 1933년 런던으로 옮겨와 거기서 정착하게 되었다. 런던의 성메리르본 고전문법학교에 다닌 그는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역사를 전공하게 된다.
자신의 경험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통해 홉스봄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동료학생들과 교류하면서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의 활동은 1946년부터 56년까지 이루어진 '공산당 역사가들의 모임 (Historian's Group of Communist Party)'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그 모임에는 모리스 돕, 로드니 힐튼, 크리스토퍼 힐, 에릭 홉스바움, E. P. 톰슨, 빅터 키어넌, 조지 뤼데, A. 머튼, 존 세빌, 도로시 톰슨 등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연구는'아래로부터의 위로의 역사'라는 독특한 시각에 입각해 있었으며, 그 결과 민중사, 계급 형성사, 사회사, 전체사 등 여러 분야에 걸처 중요한 연구결과물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공산당 역사가들의 모임'은 1956년 제 20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시작된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영국 공산당의 입장에 반발한 지식인들의 탈당 사태로 흐지 부지되었다. 홉스봄 자신은 당을 떠나기 보다는 공산당 당적을 고수하는 가운데 역사학 연구와 여러 모임을 통해 당의 민주화를 촉구하였다. 그는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강력하게 조직화된 정당'의 필요성에 대해 분명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그의 저서 곳곳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나타나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맹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간주될 수 없다. 그는 현존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유보없는 비판을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에 있어서도 이데올로기적인 재단 보다는 객관적 사실에 충실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론과 현실의 통합을 추구했던 그는 1947년에는 노동자들과 사회인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런던 대학의 버벡 칼리지의 사학과 강사로, 59년에는 전임강사로, 1970년에는 정교수로 재직하다가 1982년에 정년 퇴직하였으며 이후 미국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객원 교수로 활발한 강의 활동을 했다. 현재에도 8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버벡 대학의 특별 교수로 세계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강의와 저술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2. 자본주의와 인간에 대한 탐구

홉스봄의 근본적인 연구의 관심사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세계를 만들어냈으며, 그 속에서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집중되어있다. 이러한 관심사를 축으로 그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성과 발전, 그로 인해 고통받게된 농민과 노동자 계급, 빈민과 의적 그리고 게릴라에 이르는 다양한 인간들, 나아가 자본주의 문화 비평으로서 음악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17세기 위기론'을 1950년대에 발표한 이래 그는 수많은 연구 업적을 남겨왔다. 그는 '17세기의 위기론'에서 유럽은 17세기에 전반적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점이 이미 이 시기에 사회경제적으로 준비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영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세계적 맥락에서 다룬 {산업과 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그의 주저로 알려진 장기 19세기에 관한 3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는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이르는 이른바 장기 19세기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파국으로 각기 구분하여, 그것의 역사적 추이를 검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작업을 통해 그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와는 구별되지만, 그러나 그것의 역사적 뿌리를 이루고 있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규정해왔고 또 왜곡해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3. 장기 19세기(1789-1914)에 대한 고찰

1)  {혁명의 시대 1789-1848} : 이중혁명과 자본주의 세계의 형성

1962년에 출판된 {혁명의 시대}는 장기 19세기의 첫 번째 국면, 즉 세계 자본주의의 형성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산업 자본주의가 어떻게 승리했으며, 그 결과 세계는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먼저 홉스봄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가 시작된 시기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승리한 시기로 규정한다. 그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것의 승리가 여전히 불분명했던 유럽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중혁명, 즉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서였다고 지적한다.
혁명이 시작되었던 1780년대의 세계는 압도적으로 농촌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여전히 절대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기에 영국의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경제를, 프랑스의 대혁명은 자본주의 정치를 상징하는 통합적인 혁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중혁명은 공업 일반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공업의 승리를, 자유와 평등 일반이 아니라 부르조아적 자유와 평등의 승리를, 근대 경제들 일반이 아니라 자본주의 중심부의 승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홉스봄은 이중혁명에 의해 형성된 1848년의 유럽를 균형을 잃은 사회로 규정한다. 그가 보기에 그 시대는 혁명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봉건적 귀족사회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산업 혁명에도 불구하고 토지 문제는 여전히 핵심적인 문제였으며, 산업상의 호황과 불황이 아니라 농업상의 흉년과 풍년이 사회와 인간들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확대는 최초로 자유주의적 원리하에 내버려진 대규모의 노동 빈민을 만들어내 정치적 불안정을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2) {자본의 시대 1848-1875} :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

1975년에 출판된 {자본의 시대}는 장기 19세기의 두 번째 국면, 즉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을 다루고 있다. 홉스봄은 이 시대에 들어서 공간적으로 자본주의는 지구적 규모에서 진행되엇으며 시간적으로 사회적인 변동 또한 급격하게 빨라졌음을 강조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최초로 자본이란 이름이 등장했으며, 그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던 마르크스가 마찬가지로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자본은 이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자본의 시대는 1848년 혁명의 실패와 경기활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1848년 혁명의 실패는 두가지 상황을 초래했다. 첫째 유럽에서는 정치 혁명이 후퇴하고 산업혁명이 모든 변화의 동인이 되었다. 둘째, 사회혁명의 두려움으로 인해 자유주의자들을 노동빈민계급으로부터 이탈하여 구체제의 지배계급들과 타협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정치는 전반적으로 보수화되어갔다. 그러나, 비록 사회혁명의 꿈은 사라졌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점차 조직과 이론을 갖추고 정치적 무대에 등장했다.
혁명의 실패와 상대적인 자본주의의 팽창은 불가피하게 그 시대를 부르조아가 승리하는 시대로 만들었다. 그러나 홉스봄은 부르조아의 승리가 결코 부르조아의 정치적 지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다만 사회의 발전 자체가 불가피하게 자유주의적 발전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만 이 시대는 부르조아가 지배하는 시대로 규정될 수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유럽 내부에서 빈부의 격차를 점점 심화시켰고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세계 시장의 착취에 힘입었던 까닭에, 소수의 승리자 즉 중심부 국가들이 다수의 패배자 즉 주변부를 착취하는 현상을 구조화시켰다. 그리하여 홉스봄이 보기에 {자본의 시대}는 사회적, 지리적 양극분해가 심화되었다는 점에서 균형이 파괴된 시대였다.
홉스봄이 보기에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것은 1850년대의 대호황이었다. 호황은 혁명가들에게 희망을 앗아가 버렸지만, 이후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불안정을 초래한 호황과 불황이라는 전형적인 경기순환 현상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1857년의 불황, 1860년대의 호황 그리고 다시 이 책의 마지막 시점인 1875년의 불황으로 이어지는 경기순환은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성격으로 자리잡게 된다.
결국 {자본의 시대}에서 홉스봄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의 발전은 "혁명의 시대"에서 내걸었던 자유와 진보의 이념이 점차 퇴색하면서,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전면에 나타나는 현실,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그것이 전 세계적인 규모에서 이루어지는 억압과 인간의 희생과 고통을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했던 역설적인 현실이었던 것이다.

3) {제국의 시대 1875 - 1914}; : 파국에 처한 부르조아 세계

1987년에 출판된 {제국의 시대}는 장기 19세기의 최종 국면, 즉 제 1차 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야기된 부르조아 사회의 파국을 다루고 있다. 홉스봅이 {제국의 시대}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 시대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배태시킬 수밖에 없었던 모순에 지배되었던 시대였다는 점이다. 세계는 호황과 불황이라는 자본주의 특유의 경제주기에 휩쓸리게 되었다. 1873년부터 시작되어 18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격렬한 공황은 농민들로 하여금 곡물 가격의 하락이라는 시장 논리와 자연 재해의 이중적인 재앙에 시달리게 했다. 공황에 대한 농민들의 대응은 대량 이민과 협동이었다. 가격, 이윤 그리고 이윤률의 공황에 대한 정부, 기업들의 대응은 각기 보호관세에 입각한 보호무역주의였으며 기업들의 대응은 경제적 집중과 기업 합리화의 복합으로서 '트러스트'와 '과학적 경영'이었다고 홉스봄은 결론내리고 있다.
하지만 1914년은 부르조아를 위해 그리고 부르조아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 즉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한 시점이며 따라서 '장기의 19세기'의 종말을 표상한다. 이 시대의 모순은 스스로를 진보의 담지자로 규정했던 부르조아가 현실적으로는 피착취 계급과 식민지 민중들의 노동에 의존하는 기생적인 계급으로 변모함에 따라 겪게 되는 정체성의 상실로 특징지워진다.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된 대중적으로 조직된 임금노동계급의 운동이 자본주의의 전복을 요구했으며, 부르조아 자유주의의 정치적 문화적 제도가 노동 대중과 여성들을 포함한 대중들에게 확대됨에 따라 자유 부르조아들은 정치 권력의 주변부로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게다가 승리하는 부르조아의 이미지는 이자소득과 식민지 민중의 노동력 착취를 근거로 살아가는 기생 계급의 이미지로 바뀌어 버렸다. 그 결과 {제국의 시대}는 부르조아들로 하여금 근본적인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게 했던 것이다.
또한 이 시대는 유럽에서는 유래를 찾기 힘든 평화의 시대였지만 바로 그것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유래를 찾기 힘든 세계 전쟁을 만들어 낸 시대였으며, 발전된 산업 경제 지역들 내에서는 사회적 안정성이 증대되는 시대였으나 바로 그것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식민지 제국의 변방에서는 제국을 삼켜버리게 될 폭동과 혁명이 혼합된 세력이 불가피하게 형성되어간 시대였다. 보호주의의 확장은 식민지 확장을 자연스럽게 추구했으며 이로 인해 제국주의는 주변부로부터 초래될 수 있는 세계혁명적 요소를 내장하게 되었다. 즉 러시아와 중국 혁명 그리고 페르시아와 터키 혁명은 제국의 시대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제국의 시대는 주변부 혁명으로부터 점차 세계 전쟁과 러시아 혁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홉스봄이 보기에 이 모든 모순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발전이 불가피하게 내장한 모순이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 시대는 부르조아 세계의 파국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1880년의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지구적인 세계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적 분화에 따른 양극화가 다른 어떤 시대보다 커진 때였다. 기술의 발전은 세계를 지구적인 범위에서 하나로 묶이게끔 했지만, 그것은 지구를 발전된 부분들과 지체된 부분들, 지배적인 부분들과 종속된 부분들, 부유한 부분들과 가난한 부분들로 양극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것은 주변부로부터의 혁명을 통해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홉스봄은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모순의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지적한다. 역사상 유래없는 진보와 번영을 주창한 부르조아 자본주의가 역설적으로 역사상 유래없는 전쟁과 야만적인 파시즘을 낳게된 상황이야말로 부르조아 자본주의의 모순 그 자체였던 것이다.

4. 파국과 희망의 갈림길

홉스봄이 보는 부르조아 세계의 파국은 자본주의 역사 자체의 파국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1914년 이후 붕괴된 것은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였다. 19세기의 종결과 더불어 인간 사회는 급속하게 변화했다. 홉스봄이 들고 있는 하나의 사례로, 1914년 이후 '재앙'이란 단어의 의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전쟁의 뒤를 이은 두 차례의 지구적인 혁명, 지구적 탈식민화, 두 차례에 걸친 인종 청소에 의한 대량 학살, 한 차례의 경제적 위기와 같은 것들로서 규모면에서 제국의 시대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정치적으로 19세기 부르조아의 세계는 '볼셰비즘'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1914년 이전과는 매우 다른 그 무엇으로 자신을 변형시켜야만 했다. 파시즘이나 사회민주주의의 출현은 바로 그것의 결과였다.
장기 19세기에 관한 연구에서 홉스봄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는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부르조아에게 있어서나 프롤레타리아에게 있어서나 과거에 추구되었던 내용의 희망이 결코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가 보기에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혁명은 모두 종결된 꿈이며, 현재의 인간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회를 희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19세기 부르조아들이 꿈꾸던 세상과 20세기에 현실적으로 닥친 세상이 아주 다르듯이 현재의 인간들이 꿈꾸는 세상과 미래에 도래하게 될 세상은 아주 다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역사가 홉스봄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봄은 여전히 희망하기와 그것을 위해 살아가기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현재의 희망과 매우 다른 모습으로 미래가 나타날지라도, 현재의 시점에서 인간들이 수행해야할 의무는 결코 회피될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 이른 바 장(長)기 19세기라 일컬어 지는 1800년대, 정확히 말하자면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기해 제 1914년 1차 세계대전까지의 시기를 다룬 역사책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장기 19세기만큼 인류의 역사상 커다란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며,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현 문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기 19세기를 알아야 하기때문이다.

 

3권으로 된 이 시리즈물은 장기 19세기를 부르주아에 의한 혁명과 부르주아의 승리라는 커다란 틀로 서술하고 있다.

 

에릭 홉스봄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로, 이집트 출생이다. 홉스봄에게 붙은 통상적인 수식어인 '마라크스주의'를 고려해 볼 때, 일련의 저작들이 편협한 서술 관점에서 쓰여졌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하지만,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런 의혹은 기우에 지나지 않음을 통감할 것이다.

 

혁명, 자본, 제국이라는 세 가지 단어로 장기 19세기를 설명하려고 하는 홉스봄의 의도는 책의 제목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이렇게 한 가지 주제로 역사를 서술하게 되면 으례 그렇듯이 데이터의 의도적인 이용과 아전인수식의 해석을 동반할 수도 있지만, 홉스봄의 역사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혁명, 자본, 제국이라는 커다란 틀로 장기 19세기를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시대마다 홉스봄은 정치 경제 종교 과학 문화 등 다방면에서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우선 혁명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영국의 산업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중 혁명에 주목하고자 한다. 프랑스 대혁명 여파, 그리고 1848년 전 유럽적인 혁명 -불행히도 실패로 끝났지만- 을 관통해 홉스봄은 이중혁명이 유럽에 미친 여파를 추적한다.

 

그 후 자본의 시대에서는 경제가 정치보다 앞서가기 시작한 시대로 규정하며 자본의 거국적 팽창, 그리고 발흥하는 민족국가, 독일과 미국 등의 신흥 강대국의 출현에 초점을 맞춘다. 이 시기에 비로소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의 주도층으로 성장했다는 게 - 물론 전적인 면이 아니라 일부에서- 홉스봄의 요지다.

 

마지막 제국의 시대에서는 부르주아 계급의 위기와 유럽의 여러 민족국가들의 제국화, 노동 계급의 위치 상승 등을 고찰한다.

 

홉스봄의 이런 저작들은 장기 19세기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는 역사서이다. 방대한 참고 문헌을 자랑하지만 지나치게 학제적이지 않은 쉬운 문체, 분야별로 정리한 체계적인 접근 등은 홉스봄이 왜 유능한 역사학자인지를 백분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다. 그러나 홉스봄의 이런 역사 서술이 지나치게 유럽 중심적 - 그런데 사실, 장기 19세기는 유럽의 역사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이라는 것, 약간의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은 읽는 이에 따라서 거부감을 느낄 소지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단기 20세기를 다룬 홉스봄의 저작은 '극단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까치에서 출판되었다.

 

 

빈곤퇴치가 테러 막는 길.....제프리 삭스

1941년 8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은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을 발표했다. 2차 대전 이후의 세계평화에 관한 공동선언이었다. ‘전 세계의 경제발전과 사회보장’이 주된 내용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같은 해 취임 연설에서도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모든 국가들이 국민들에게 ‘건강하고도 평화로운 삶’을 영위케 하기 위해 전 세계적 경제협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부시 현 대통령도 최근 이와 비슷한 선언을 했다. “전 세계인의 보다 나은 기회와 삶을 약속하는 지속적인 경제 번영이 테러를 막을 수 있다.” 매우 의미있고 긴급한 과제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주요 선진국들, 특히 미국이 크게 변해야 실현가능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경제는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번영의 이익을 나눠주지는 않는다. 10억명이 넘는 인구가 단지 그날그날의 연명을 위해 애쓰지만 그나마 쉽지가 않은 상황이다. 지난 2년간 세계보건기구(WHO)의 거시경제보건위원회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매년 수백만명이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것도 얻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는 상세한 증거를 목격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홍역·결핵·말라리아·에이즈(AIDS)와 같은 예방 및 치료가 가능한 병들로 죽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돈이다. 부국으로서는 많은 액수가 아니겠지만 가난한 나라로서는 벅차다. 실제로 이들 가난한 나라의 연간 1인당 보건비용은 11달러 정도이다. WHO가 생각하는 연간 1인당 최소 보건비용인 33달러에 크게 못미친다. 이 같은 격차를 메우기 위해서는 선진국들이 이들 나라에 1인당 20달러 정도는 보조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선진국의 보조는 2달러 선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선진국들은 수백만명의 죽음이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라 ‘자연적’ 발생에 의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만약 선진국들이 국민소득의 0.1% 또는 소득 10달러당 1센트만 제공한다고 해도 연간 250억달러가 된다. 이 돈이면 에이즈 치료, 아동면역, 말라리아 예방을 위한 모기장 등과 같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수억명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선진국들의 기부금은 필요한 액수의 4분의 1에 그치는 60억달러 수준에 불과하다. 이를 250억달러 수준으로 올린다면 한해 800만명의 생명을 구할 것으로 WHO는 보고 있다.

미국은 선진국 중에서도 가장 인색한 나라이다. 외국원조에 쓰이는 비중은 연방예산의 1%에도 못미친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미국이 가장 인심이 좋은 나라이며 연방예산의 약 20%를 외국원조에 사용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해도 미국은 유럽국가들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부시 대통령은 전 세계인의 번영을 촉구하는 연설에서 ‘무역을 통해 빈곤과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제무역을 포함한 시장원리 또는 시장의 힘만이 빈곤을 해결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반쪽의 진실이다. 무역이 빈국에 도움이 되려면 빈국이 생산한 제품을 부국이 시장을 개방해 사줘야 한다. 게다가 질병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는 수출 주도 성장을 달성하기도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무역정책보다는 의료 서비스를 겨냥한 직접적 금융지원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선진국들이, 빈국이 최소한 필요로 하는 수준의 지원은 물론 빈국들이 수출할 수 있도록 시장을 개방해야 할 때다. 이 같은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한편에선 많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죽어가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적 불안과 소요는 계속될 것이고 테러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 하버드대 경제학과 석좌교수 ) (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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