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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게놈 프로젝트 -그 위험한 자본가의 과학

인간 게놈 프로젝트 -그 위험한 자본가의 과학

사회진보 연대 2001.11.04 통권 20 호

지난 10년동안의 호황을 누렸던 신경제가 2000년부터 불황의 신호를 울리기 시작했다. '피의 금요일'로 기록된 2000년 4월 14일의 주가 폭락으로 무려 1조 달러가 주식시장에서 증발되었고, 그 주간 미국 나스닥이 기록한 폭락세는 1929년의 전설적인 '검은 금요일' 주간보다 컸다. 신경제를 받쳐오는 정보통신기술에서 더 이상의 수익모델을 기대할 수가 없고, 이 사실은 신경제의 미래를 더욱 참혹하게 하였다.

그러나 신경제에 도취한 클린턴 정부는 신경제의 거품을 다시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다. 클린턴 정부는 그 해 6월  미국, 영국 등 6 개국 국제 컨소시엄인 인간 게놈 프로젝트 연구 팀 책임자 콜린스 박사와 그 경쟁자이자 앙숙인 벤처 회사 셀레라 대표를 화해시키고 완성되지도 않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 초안을 서둘러 발표하였다. 정보통신기술의 거품이 빠지는 시점에서 생명공학으로 신경제 거품을 다시 부풀게 하려는 의도였다.1) 이러한 노력들은 유전자 기술의 산물인 탄저균 공포가 미국을 엄습하자 생명공학분야 벤처들의 주가가 일제히 상승하며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란

게놈(Genome)은 유전자(gene)와 유전자를 담는 염색체(chromosome) 두 단어를 합성한 용어로, 한 생명체에 담긴 유전 정보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인간은 60여조 개의 세포로 되어 있고, 각 세포핵에는 23쌍의 염색체가 들어 있는데, 이 염색체에는 유전자 비밀이 ‘담겨 있다고 하는’ DNA가 있다. DNA는 아데닌(A), 티민(T), 구아닌(G), 시토신(C)의 4개의 염기가 이중 나선 구조로 돼 있다. 사람의 경우 세포마다 대략 32억 쌍의 염기가 존재하고 있는데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바로 이 32억 쌍의 염기가 어떤 순서로 배열돼 있는가를 밝혀 내는 작업을 말한다.

인간게놈 프로젝트의 성과와 한계는, 신경제 부활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 정부와 자본에 의해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왜곡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 이 프로젝트가 각종 난치병인 암, 치매, 에이즈, 파킨스병, 당뇨병, 심지어 마약 및 알콜 중독 등의 원인규명과 유전적인 정신질환의 치료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는 ‘만병통치약’과 같은 환상이 그러하고, 유전자들은 인간 몸의 구성, 병의 발생, 행동양식과 지적 능력, 성(性)적 선호도, 범죄 성향까지도 결정한다는 지극히 위험한 유전자 결정론 혹은 ‘우생학‘과 같은 환상들이 그것이다. 

현재까지 인간 게놈 프로젝터 연구결과에 따르면인간 유전자는 대략 3만여 개 정도이며, 유전자들은 초파리와 50%, 개와 85%, 침팬지와는 99%나 공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 결과는 미세한 유전자 차이가 매우 다양한 차이로 나타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초파리, 개, 침팬지, 사람 순으로 복잡한 생물로 갈수록 새로운 유전자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유전자들 사이, 그리고 환경과의 다양한 상호작용이 중요함을 밝혀냈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 개방대학 생물학과 교수 매환호(Mae-Wan Ho) 박사는 개별 DNA염기서열 분석만으로는 인간에 관한 어떤 것도 알아 낼 수 없으며, 모든 염기 서열을 분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게놈에는 10,000개 이상의 유전자가 있는데, 이들 각각은 수 백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변이들을 갖고 있는데, 가능한 유전자 조합의 수는 각각의 유전자에 대해 10개씩의 변이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더라도 1010,000개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 숫자를 우주의 모든 입자수(1030)와 비교해 보면 어떠한 의미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결과에 따르면 유전자는 단순히 단백질의 아미노산 배열을 알려줄 뿐이며, 기껏해야 그 유기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단백질 종류를 알려주는 정도이다.

노동자-민중의 신체일부가 자본가 소유가 되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많은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투자와 연구 자금이 지속적으로 제공된다면 그 기술의 위험성을 논외로 하면, 극히 일부의 의학 상품들이 개발되기도 한다. 30여년의 유전학 연구에서 얻은 유일한 성과인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이 그 예이다. 그렇지만 자본 주도의 의약품 개발과 특허를 통한 독점권 확보는 노동자-민중에게 엄청난 치료비 부담을  자본가에게는 엄청난 수익을 안겨줄 뿐이다. 미국 제넨텍의 항암제의 경우 그람(g)당 5000달러, 암젠사의 빈혈치료제 에리스로포이에틴(EPO)의 경우 67만 달러, 항암 보조치료제인 콜로니자극인자(CSF)는 53만 달러나 한다. 미생물 유전자 변형산물인 인슐린의 대량생산을 통해 싼 가격에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만 보더라도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거는 자본가들의 기대치를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유전자 발견에 대한 특허는 유전자 또는 DNA 서열 자체에 특허성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 유전자를 이용하는 모든 행위에 특허가 인정되게 된다. 예를 들어 특허 받은 유전자를 재조합하여 단백질을 만들거나 이 유전자와 다른 단백질 유전자를 조합하여 융합단백질을 만들 수가 있는데, 이것은 모두 특허권의 권리범위이다. 즉, 유전자 특허의 권리범위는 거의 무한한 것이다. 인간 유전자에 대한 특허 전쟁은 생명 윤리와 과학적 양심에 대한 고려도 없이 자본가들 사이에서 이미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1995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1,175건의 인간 유전자가 특허를 인정받았으며, 1999년까지 미국 정부 388건, 인사이트 356건, 캘리포니아대학 265건, 제넨테크 197건을 특허 등록한 것으로 월스트리트저널은 집계하고 있다. 특허 출원도 1980년대 매년 15만건에서 현재에는 27만 5천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기술과 특허는 기술 독점을 넘어 노동자-민중의 생명 일부가 자본가의 소유가 되고 상품으로 전환된다는 의미이며, 새로운 통제 시스템까지 예고하는 것이다. 고대 노예제의 경우 귀족은 노예 신체를 모두 소유했지만, 21세기 자본가는 노동자-민중의 신체중에서 ‘돈’이 되는 유용한 것들만 분리하여 소유하게 된다. 자본가들은 1980년대 환경을 상품으로 만든 후 1990년대 정보/지식을 상품으로 전환하였다. 이제 2000년대에는 노동자-민중의 생명 일부를 소유하고 상품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던 존 모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체의 일부가 특허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한때 희귀한 암에 걸려 캘리포니아대학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그를 치료하던 의사는 비장에서 백혈구 생성을 촉진하는 단백질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 의사는 산도스라는 제약회사와 함께 이 비장 세포를 대량으로 배양하는 기술을 개발하고는 1984년 이 ‘발명’에 대해 특허를 받은 것이다. 무어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뒤늦게 소송을 제기 했지만 1990년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무어가 자신의 신체조직에 대한 소유권이 없다고 판결을 내렸다. 자신의 몸 일부가 자본가의 소유가 된 것이다. 또 다른 특허는 모든 아기의 탯줄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 우리를 더욱 경악스럽게 한다. 1993년 미국 바이오사이트사는 갓 태어난 아기의 탯줄에서 나오는 모든 혈액 세포2)에 대한 소유권을 미국 특허청으로부터 얻어냈고, 96년에는 유럽 11개국에서 특허를 획득했다.

정부와 자본가는 독점된 유전자 기술을 통해  노동자-민중들의 유전자를 검사하여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려고 한다. 아이슬란드와 통가와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전체 인구의 DNA 데이터베이스가 사기업에 팔렸으며, 스위스에서는 정부가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따른 윤리문제에 대해 다른 기업들과 협상을 하고 있고, 영국 정부는 스스로 데이터 베이스 설립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데이터 베이스 정보는 노동자들을 고용거부하는 구실로 이용할 수 있고, 건강 보험도 거부할 수 있는 등 훌륭한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미 영국 보험회사들은 개개인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요구하는 실정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위험한 장난

인간 게놈 연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핵 기술과 같이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유전자 연구의 붐을 조성한 복제양 돌리를 만드는 기술은 핵을 제거한 난자에 성체의 세포로부터 끄집어낸 핵을 집어넣은 후 그 난자가 배아를 발생하도록 만드는 과정을 필요로 하는데, 이 과정의 성공률은 1퍼센트도 채 안된다3). 난자 혹은 정자 세포, 초기 태아의 분화되지 않는 세포들의 유전자 조작을 배종 유전자 조작(germ line manipulation)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유기체의 세포 전부에 영향을 미치며 다음 세대로 대물림하게 되므로, 개인들과 자존에 위험이 크고 어떠한 위험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유전자 치료 또한 문제가 심각하다. 게놈 속에 유전자를 삽입하는 기술은 여전히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1999년 9월 18세 소년 제시 겔싱어(Jesse Gelsinger)사건은 유전자 치료의 위험성을 잘 나타내 주었다. 그는 유전질환인 신체의 암모니아가 증가되는 질병 OTC 결핍증4) 을 앓고 있었다.  OTC 결핍증은 식이요법으로도 생명을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지만 겔싱어는 유전자치료 임상실험을 자청하여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아데노 바이러스를 이용한 유전자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유전자가 포함된 아데노 바이러스(유전자 운반체)를 가지고서 치료를 받던 중 4일만에 호흡곤란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사망이유는 운반체로 사용된 아데노 바이러스에 의한 면역 독성 가능성으로 추정하고 있다5)        

인간 게놈 프로젝트 - 명백한 자본의 과학

인간게놈 프로젝트에 지난 십여년 동안 미국은 3조 달러의 공적자금을, 영국은 수억 파운드를 사용하였지만 노동자-민중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의료 기술의 성과는 아주 미미하다. 정부와 자본가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수익모델을 이끌어 내지 못하자,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서 기적의 암치료, 질병의 박멸, 유전자 치료, 개인화된 약품 및 유전자 구성에 기반한 생활방식의 처방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조장하고, 이전 보다 더 많은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공적자금의 투자는 다른 보건 의료 서비스의 연구 개발을 무시하는 왜곡된 구조를 재생산한다. 열악한 주거 조건과 비위생적인 생활환경에서 비롯되는 빈민성 질환에 대한 투자는 전무한 상태이다. 세계보건연구포럼(GFHR) 대표인 아데토쿤보 루카스에 따르면 지난 10월 연례회의에서 “현존하는 인류질병의 90%를 위해서 연간 700억달러 연구비중 10%만이 투자되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설사 게놈 프로젝트의 극히 일부 기술이 성공하여도 그것은 노동자-민중의 생명체 일부를 특허하는 ‘해적질’을 통해 자본가 소유로 귀속될 것이고, 이것들은 상품으로 전환되어 노동자-민중에게는 높은 가격의 치료약으로 되돌아 올 뿐이다. 아울러 이러한 과학기술은 핵실험이나 소립자 연구와 달리 거대 연구기관 몇 곳이 아니라 세계곳곳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여러 연구기관에서 분산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통제나 폐기 또는 방향전환이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인간 게놈 프로젝트와 같은 연구는 정보 공유를 통한 투명한 연구진행과 일상적인 노동자-민중의 감시와 통제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실감하고 있다. 전 미국을 휩쓸고 있는 유전자 기술의 성과(!)인 탄저균6)의 예는 이것을 너무도 명백하게 말해 주지 않는가? PSSP


1) 앨빈 토플러는 다음 '제 4의 물결'은 인터넷을 이용한 디지털과 생명공학에 의한 혁명이 될 것이라고 또 다시 거품을 불어넣고 있다.

2) 탯줄 혈액에는 백혈구나 적혈구로 분화되기 이전 단계인 조혈모세포가 듬뿍 함유돼있어 백혈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치료에 이용될 전망이 높다.

3) 만약 사람에게 적용한다면 핵을 제거한 1개의 난자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100명 이상 난자 기증 여성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아울러 돌리가 정말 성체 세포의 핵으로부터 복제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많은 의문이 있다.

4) ornithine transcarbamylase

5) 투여된 아데노 바이러스가 목표장기인 간 뿐 아니라 다른 장기까지 침투되었다. 이로 인해 수시간만에 염증반응을 보여 환자체온이 섭씨 40.3도까지 올라갔다. 다음날에는 환자가 혼수상태가 되었고, 이에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였으나 폐는 흉수로 가득 찼고 더 이상 혈액을 산화시킬 수 없게 되어 사망하게 되었다.

6) 유전공학기술은 탄저균, 천연두균, 콜레라균 등 각종 세균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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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리눅스 정치(The Politics of Linux)

 이 글에서는 리눅스로 대변되는 오픈 소스 운동이 갖는 의미를 비교적 쉽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이 글은 자본주의내로 흡수 통합되어 규모면에서 확대되는 오픈 소스 운동과 그것에 저항하는 흐름을 잘 대비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들 흐름을 단순하게 에릭 래이몬드의 오픈 소스 운동과 리차드 스톨만의 자유소프트웨어운동으로 나눌 수 있으나 현재까지 명확하게 분리 대립되고 있지는 않다. 한가지 예로 리눅스의 창시자 리눅스 토발즈는 오픈 소스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데비안 리눅스를 만든 부르스 페렌(Bruce Perens) 같은 사람은 오픈 소스 운동을 만들었다가 다시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으로 돌아 가기도 했다. 물론 리차드 스톨만은 지속적으로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을 고수하고 있다.  국내 좌파들은 이러한 두 흐름의 미묘하지만 “큰”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 글을 번역하였다. 참고로 부르스 페렌은 그의 짧은 편지 "It's Time to Talk About Free Software Again"에서 왜 그가 다시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에 참여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한번 읽어 보길 바란다.

이 글은 2001년 10월에 “전 세계 컨텐츠 생산자여 단결하라! 세계화의 문화정치”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맥마스트(McMaster) 대학에서 열린 학회에서 발표되었던 에세이이며, 2003년 5월에  모음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번역문은 노동자의힘 45호-48호까지 연재하였다.(역자 주)

The Politics of Linux

리눅스 정치

태드 프리드만(Ted Friedman), 조지아 주립대학교

유토피아적 공간

글로벌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숙제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을 넘어서는 생산과 유통에 대한 대안 모델을 개발하는 것- 점진적 개혁을 넘어선 현 글로벌 시스템에 매우 매력적인 대안을 그려보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프로젝트는 단순한 비판이상의 것을 요구하는데, 우리의 사회적 상상력을 마비시키는 신자유주의 지배사상(doxa)의 족쇄를 벗어나게 하는 유토피아적 생각을 가진 새로운 정신과 창조성을 필요로 한다.

좌파에 대한 일부 비판론자들은 이런 종류의 유토피아적 생각은 죽었다는 것에 동감하는 듯하다. 러셀 야코비(Russell Jacoby)는 유토피아의 종말: 무관심 시대의 정치와 문화(The End of Utopia: Politics and Culture in an Age of Apathy,2000)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고,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미국 만들기 : 20세기 미국에서 좌파의 생각(Achieving Our Country: Leftist Thought in Twentieth-Century America)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애도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주의에 흐르고 있는 유토피아적 생각의 끈들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그의 에세이 “물화(reification)1)와 유토피아”에서 주장했듯이, 자본주의 문화는 항상 유토피아적 요소를 포함할 수밖에 없는데, 소비자들이 주목하는 대중문화는 이러한 유토피아의 짧은 경험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적 요소는 대중문화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유토피아주의는 빠르게 진압되고 저항은 동화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대중문화에 비판적 참여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탈신비화 해야 함은 물론이고, 때로는 유토피아적 충격을 확대하고 의문을 제기하며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현 글로벌 시스템에서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한다면, 대중문화와 하위문화의 실천 속에서 깊이 흐르고 있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 곳에 우리가 꿈꾸는 지금보다 나은 세상이 있다.

 만약 모든 대중문화 저변에 흐르는 유토피아주의가 있다면, 그 흐름은 확실히 다른 담론들보다 더 가깝게 표면위로 상승한다. 유토피아적 생각들을 풍부하게 하는 담론들은 컴퓨터 문화 영역에서 발견되는데, 그 이유는 꽤 명확해 보인다. 다름이 아닌 컴퓨터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래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컴퓨터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미래가 어떠하며 우리가 어떤 종류의 미래를 원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필자가 다른 글에서도 주장했듯이 컴퓨터 문화는 유토피아적 영역(utopian sphere)과 같이 동작한다 - 유토피아적 영역이란 다른 종류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공적영역(public sphere) 내부에 안전한 공간을 말한다.

공적 영역에서 수용할 수 있는 정치적 논쟁의 범위는 [기껏해야] 연방준비은행이 0.25% 금리를 인하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 정도인데, 컴퓨터에 대한 탐색의 공간은 더 급진적인 전망을 가지고 실험할 여지가 있는 극소수의 공간이다. 그것은 당면한 실용주의적 정당성에 대한 요구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시간의 씨앗(The Seeds of Time,1994)에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종말보다는 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운 것처럼 보인다고 암시했듯이, 컴퓨터에 대한 담론은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아주 드문 공간중에 하나이다.



리눅스란 무엇인가?


리눅스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나 애플사의 매킨토시 OS(Operating System)와 같은 컴퓨터 운영시스템이다. 이들 시스템과 차이점이 있다면 “오픈 소스(Open Source)”라는 점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저작권”을 설정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GPL(General Public License)이라는 [저작권]하에 배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저작권은]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수정, 배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으며, 유일한 제약 조건으로는 이 저작권이 적용된 소프트웨어를 재배포할 때 역시 이 규약에 명시된 것과 동일하게 배포, 수정, 그리고 소스코드를 얻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Rosenberg) 저작권(copyright)대신에 GPL은 종종 ”카피레프트(copyleft)"로,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는 종종 “프리웨어(freeware)2)”라고 불린다. 리눅스 소프트웨어는 전 세계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큰 커뮤니티들이 인터넷을 통해 서로 소통하며 집단적으로 개발하였다. 레드 햇(Red Hat)이나 칼데라(Caldera) 등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은 리눅스를 패키지 버전으로 관련 문서와 생산 지원과 함께 팔고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소프트웨어를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리눅스, 넓은 의미에서 오픈 소스에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내에서] 그 범주 밖의 사회 경제적 관계를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물론,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 개발은 특별하고 독특한 커뮤니티에 의해 진행된 전문적인 작업이기는 하지만, 리눅스의 수많은 이용자와 개발자의 상상력을 사로잡는다. 그것은  후기 자본주의와 다른 사회적 관계로 구성된 미래의 한 단면, 즉 광범위한 유토피아적 전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특한 실천방법인 오픈 소스 개발은 반드시 경제관계 전반에서 전형(template)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제품이 디버그될 필요는 없는 것이고 또 모든 노동자들이 숙련된 리눅스 프로그래머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외되지 않고, 상품화되지도 않는 노동이라는 오픈 소스의 비전은 21세기에 우리가 원하는 노동의 모델로 작용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임슨이 언급한 바와 같이 유토피아의 이면에는 물화(reification)가 있다. 자본주의는 상품화과정을 통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닥치는 대로 흡수해 버린다. 급진적 사상은 사유화되고 상품화되어 그들이 비판하고자하는 시스템을 통해서 판매된다. PC가 기술의 민주화를 가져올 도구가 될 것이라는 개발 초기의 비전은 애플사,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의해 성공적으로 상품화되어 판매되었다. 확실히 PC는 세계를 변하게 했다-헤게모니는 항상 협상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전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기술의 힘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PC가 대중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권력 구조의 변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거대 음반회사에 “팔리는 것”을 경계하는 인디 락 밴드의 딜레마를 생각해보라. 공적공간에 접근하기 위해서, 당신의 상품을 시장에 팔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렇게 하면 당신은 당신이 반대하는 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티지아나 테라노바(Tiziana Terranova)는 “자유노동 : 디지털 경제를 위한 문화생산(2000)”에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테라노바는 오픈 소스 프로그래머, 아마추어 웹 디자이너, 채팅룸 관리자(moderator) 등 사이버공간에서 활동하고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의 자유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에 저항적 대안이라기보다는 디지털 경제에서 자본주의에 통합된 부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들 지식 노동자들은 많은 “컨텐츠”를 제공하는데, 그러나 [그들의 무료 노동은] AOL,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같은 기업들을 위해 웹(Web)을 돈벌이가 되는 곳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기업들은 [그들의] 노동으로 돈을 벌어들이는데 아무른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앤드류 로스(Andrew Ross)는 “정신노동의 문제(The Mental Labor Problem)”(2000)에서 많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착취적 조건(주당 80시간 노동, 임시계약직, 의료혜택을 받지 못함)에 대해 순종하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조건들을 미화하기까지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카페인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에 대한 예찬) 이것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포스트 모던한 노동력의 한 부분으로 “문화적 디스카운트(cultural discount)”가 널리 퍼진 예로 볼 수 있다. “문화적 디스카운트”는 창조적 기술전문가들이 다른 직업 보다 낮은 임금을 기꺼이 받으면서 좀더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노동을 실현할 기회를 보상 받는 현상을 말한다. 로스는 이 시스템이-보헤미안3)의 시장에 대한 낭만적 거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시스템- 자본주의 지식 경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조적 요소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러한 문화는] 대학교가 대학원 시스템에 의해 착취되면서도, 정신적 삶의 기반을 유지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수업조교와 관련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리눅스 개발자들이 이러한 창조에 대한 디스카운트(creative discount)의 본질적인 희생자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적 자본을 기부하고 있고, 그것으로 레드햇과 IBM과 같은 기업은 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픈 소스에는 매우 독특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상품화 과정과 전유과정을 구조적으로 중지(short-circuits)시킬 수 있었는가하는 점이다. 리눅스 개발자들은 그들의 노동을 [무료로] 기부한다. 하지만 GPL에 포함된 문구는 다시 원상태로 돌릴 수 있는 특별한 탄력성을 가지고 있다. 그 문구의 내용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제한 조항을 추가할 수 없게 하여 개발자의 작품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반면에 문화적 디스카운트는 청중들의 접근권 허용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통제권을 [단지] 양도하는 행위를 말한다. - 그들의 주요 음악 녹음을 그들의 앨범으로 제작할 수 있는 소유권을 양도해야 하는 모든 음악가들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이와 다르게] 리눅스 개발자들은 창조적 통제의 지속적 보장에 대한 답례로 그들의 보상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사와 같은 기업들은 이 시스템이 그들의 현 지적재산권 영역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오픈 소스 커뮤니티에 대한 색깔시비를 벌이고 있다. CEO 스티브 발머는 리눅스를 “공산주의“로 언급하고 있고(Geene 2000), 한 기자에게 ”리눅스는 지적재산권 체제 내에 기생하여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에 달라붙는 암적 존재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Lea 2001). 윈도우 책임자인 짐 알친(Jim Allchin)은 ”나는 미국사람이다. 미국식으로 믿는다. 만약 정부가 오픈 소스를 장려한다면 그것은 그 위협을 이해하는 정책입안자들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Bloomberg News 2001).

오픈 소스 정치

리눅스가 자본주의적 관계에 유토피아적 대안을 제공해 준다면, 이 모델은 무엇으로 구성되어있는가? 또 오픈 소스 개발의 정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리눅스의 의미, 즉 이 고무적인 프로젝트로부터 교훈을 이끌어 내고 설명하려는 이야기들, 자체가 바로 투쟁의 과정이다. 필자가 리눅스에 대한 여러 가능성들을 찾아내기 위해 네트를 찾아 내려갔을 때, 놀라울 정도로 서로 경쟁적이며 부적합한 설명들을 접할 수 있었다.

오픈 소스를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학술연구 형태, 선물 경제 이랜스(e-lance) 경제4) 그리고 자유시장의 승리라고 서술되고 있다.- 몇몇 공통된 생각들은 그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부적절하지만, 물론 이 모든 설명들이 모두 부적절한 것은 아니다. 리눅스, 이 놀랍고도 고무적인 성공 이야기의 중요성을 정의하는데 현재에도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지금부터 리눅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가지 개념, 즉 에릭 래이몬드와 리차드 스톨만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비전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래이몬드와 스톨만은 리눅스의 개발에 핵심적 업적을 남긴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 스톨만은 리눅스의 전신인 GNU 운영 시스템을 개발하였고 레이몬드는 페치메일을 비롯한 많은 핵심적인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리눅스에 도움을 주었다. 두 사람은 리눅스의 지지자이자 이론가이기도 하다. 가장 영향력 있는 그들의 에세이, 스톨만의 “GNU 선언문”, 레이몬드의 “성당과 시장(The Cathedral and the Bazaar)”은 많은 사람들을 동참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두 사람을 안토니오 그람시의 용어를 빌리자면 소위 “유기적 지식인”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커뮤니티 외부에서 그 커뮤니티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그들이 서술한 그 커뮤니티 내에서 나왔고, 자신의 커뮤니티와 바깥세상을 위해서 그들 자신의 커뮤니티를 명확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 (물론 필자는 그 커뮤니티 바깥쪽에 있는 학자이다. 그러나 이것이 리눅스에 대해 정리하는 작업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리눅스 커뮤니티 내부의 목소리를 정당하게 대표하고자 노력하게 한다)

래이몬드와 스톨만이 리눅스 프로그래머로 같은 커뮤니티 내에서 목소리를 내지만 서로 그들의 프로젝트를 보는 입장과 정치적 견해는 서로 반대되며 대립하고 있다. 래이몬드는 오픈 소스를 자유시장의 승리로 찬양한다. 그리고 오픈 소스를 소프트웨어 개발에 효율적인 도구로서 흥미를 가진다. 반면 스톨만은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한 전망을 지적재산권 시스템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에서 찾는다. 래이몬드와 스톨만의 견해에 대해 각각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딱지를 종종 붙이는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래이몬드와 스톨만 둘 다 해커 문화의 고유한 자유주의적 가치로부터 같이 출발했다고 볼 수 있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끝을 맺고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래이몬드를 기업-자유주의자(corporate libertarian)로 스톨만을 좌파-자유주의자(left-libertarian)로 부를 수 있다. 게다가 필자는 확고한 스톨만 캠프의 지지자이다. 이 글에서 마지막으로 래이몬드 접근의 한계와 스톨만 접근법의 장점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래이몬드의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에릭 래이몬드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도구 개발 분야에서 거의 20년 동안 활발하게 활동해온 소프트웨어 개발자이다. 그는 역시 해커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이며, 새 해커 사전(New Hacker's Dictionary)을 편찬했으며“해커 문화(Hackerdom)의 짧은 역사“라는 널리 읽히는 책을 지필 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래이몬드는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오픈 소스의 이론가가 되었다. 래이몬드 자신이 세운 역할은 마이크로소프트사와의 전쟁에 승리하고 리눅스의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시도로 오픈 소스에 회의적인 사업가들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그의 에세이 "성당과 시장“은 넷스케이프사로 하여금 네비게이트를 오픈소스로 하기 위한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내부 문서인 ‘할로윈문서’에 대한 그의 폭로와 분석은 이 비히무스 괴물5)이 리눅스를 실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뉴스로 해커들을 고무시켰다. 그의 에세이 “성당과 시장”은 현재 오픈 소스 출판사인 O'Reilly & Associates에 의해 출판된(1999), “성당과 시장”이라는 제목의 그의 에세이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

레이몬드의 정치는 해커 자유지상주의 (급진적 자유주의 libertarianism)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리차드 바버룩(Richard Barbrook)과 앤디 캐머론(Andy Cameron)(1998)에 의해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로 설명하고 있고 파울라 바숙(Paula Barsook) (2000)은 "사이버 이기주의(cyberselfishness)"로 붙이고 있다. 해커 자유지상주의는 무엇보다도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에 가치를 두고 있고 전통적으로 자유를 극대화시키는 주체로 족쇄 풀린 자본주의-시장을 찬양한다. 물론 자유지상주의는 모든 권력의 집중화에 회의적이지만 기업 권력보다도 국가권력에 대해 더 많이 우려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해커 자유지상주의는 이러한 경향을 따르면서도, 특히]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독점이 자유시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해커의 자유 지상주의는 소수의 자산가들에 의한 방대한 부의 축적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제공해 주는 네트 경제에 적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성당과 시장”을 읽었을 때 특히 놀라운 것은 래이몬드가 오픈 소스 개발 과정을 자유시장의 골격에 적합하게 맞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래이몬드의 논문에서 구성된 은유는 성당 건축의 수직적 명령구조와 경쟁적이며 분권화된 시장(bazaar) 세계와 대비시키고 있다. 물론 시장(bazaar)에서의 상인은 상품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오픈-소스 개발자들은 그들의 시간을 [무료로] 기부하는 자발적 봉사자들이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 래이몬드는 “선물 경제”를 오픈 소스 개발을 설명하는데 도입하였다.

선물경제로서 오픈 소스 개발의 개념은 흥미 있는 개념이다. 선물경제의 개념은 대부분 리차드 바버룩의 에세이 “하이테크 선물 경제”(1998)에 잘 언급되어 있다. 선진국가 내에서 대부분의 정치가와 기업 총수들은 자본주의의 미래가 정보의 상품화에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러나 다가오는 정보화 사회의 최선두에서는 화폐-상품 관계가 아나코-꼬뮤니즘의 실존 형태에 의해 만들어지는 관계로 보조적 역할로 밀려나고 있다. 대부분의 네트 이용자들에게 네트는 그들이 서로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배우고 토론하는 곳이다. 물리적 거리에 의해 제약받지 않는 그들은 정치나 화폐의 직접 중재 없이 서로 협력하고 있다. 그들은 저작권에 도 무관심하여, 정보에 대해 [비용을] 지불할 생각도 없이 서로 주고받는다. 사회적 결합을 위해 국가나 시장이 없이도 시간과 생각의 선물에 의해 만들어지는 상호 책임을 통해 네트워크 커뮤니티는 형성된다.

[이상과 같이] 선물 경제는 상품화 관계와는 뚜렷한 차이가 있는데, 래이몬드는 바로 이점을 무시하고 있다. 래이몬드는 선물경제를 "탈-희소성(post-scarcity)"이라 불리는 환경에 의해 확장된 자유시장으로 보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탈 희소성” 환경에서 해커들은 더 이상 화폐를 위해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대신에 명성- 혹은 그들이 자아 상승(ego boost)라 부르는 “에고부(egoboo)6)"을 위해 그들은 경쟁한다. 이 용어는 과학소설 팬들의 세계(science fiction fandom)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진화 심리학7)의 가정을 빌어 그는 ”사람들이 [해커]의 동기를 “이타적”이라고 하지만 이타주의 그 자체가 이타주의자들의 자아를 만족시키는 한 형태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동어 반복일 뿐이다; 만약 사람이 모든 자신의 선택을 불가피하게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미리 정한다고 가정하면, 이기심이 없는 행동으로 보이는 것조차도 이기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 미숙한 철학자들(old freshman philosophy)에 따르면 테레사 수녀도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살핀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이기심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 보았다. 이런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환경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심리 중에서 이타주의가 부각될 수 있는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래이몬드에게 그 대답은 “탈 희소성” 경제이다. 여기서 화폐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른 것으로 그것을 대신하는데, 이러한 래이몬드의 견해는 기업 자유 지상주의 특유의 몰역사주의와 자기중심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 래이몬드는 “탈 희소성”에서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을 주장한다. : “디스크 공간, 네트워크 대역폭, 컴퓨터 성능”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가 무엇을 당연하게 가정하고 있는지를 고려해봐야 하는데, [그가 당연하게 가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 기반 시설이다. 오픈 소스 연구는 국가지원 연구 대학에 의해 장기간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고, 인터넷은 미 국방성의 연구계획기관(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의 지원 하에 발전되었다.

더 놀라게 하는 것은 래이몬드의 글 성당과 시장의 서문에서 가볍고 대담하게 “희소 경제를 넘어서는 21세기의 정보 과잉 시대“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래이몬드는 미국의 방대한 부분만을 고려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나머지 세계, 즉 컴퓨터 능력이 매우 희귀할 뿐만 아니라 삶의 필수 조건이 되는 [제 3]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현 자본주의 체제에서 탈-희소성에 근접하는 어떤 움직임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래이몬드는 탈-희소성 경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리차드 스톨만은 탈-희소성을 투쟁해야하는 목표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한다면 경제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다음으로 스톨만의 배경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해 보자. 스톨만은 스티븐 레비(Steven Levy)의 Hackers(1984)에서 언급한 불멸의 MIT 인공지능 연구소 소속의 유명한 프로그래머의 일원이었다. 스톨만은 항상 소프트웨어를 공동체의 자산으로 보았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사유화를 추구하는 MIT를 1980년대 초에 떠났다. 곧이어 스톨만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창설하고 유닉스(UNIX) 운영체제에 대한 오픈 소스 버전 개발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을 GNU라 명명했다. GNU는 "GNU's Not Unix(GNU는 Unix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커들이 자주 사용하는 ”자기 호출(재귀) 약어(recursive acronym)“로 일종에 유머이다. 이것은 스스로 자기를 정의하며 끊임없이 반복되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GNU가 다시 GNU's Not Unix로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GNU는 여러 리눅스의 연속적인 개발에 가장 큰 기초가 되었다. 스톨만은 대안적인 저작권으로 ”카피레프트(copyleft)"-어떤 사람이 개발한 자유소프트웨어를 사유하거나 착복할 수 없게 하는 방식-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톨만은 래이몬드와 같은 자유지상주의 틀에서 시작했지만, 스톨만은 그것을 더 밀고 나갔다는 점이 래이몬드와 다르다.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그의 투자는 정보 소유에 대한 훨씬 근본적인 물음에 이르게 했다. 스톨만이 Byte 잡지에서 “나는 일반적으로 정보와 지식에 사람들이 접근하는 방식을 바꾸려고 하고 있다. 지식을 소유하려하는 것, 지식과 정보의 사용허가를 통제하려는 것 혹은 그것을 공유하려는 것을 막는 행위, 이 모든 것은 일종에 파괴행위(sabotage)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피폐하게 하는 행위이다.“고 언급한 바 있다. 스톨만은 소프트웨어 한 단위를 빵 한 조각에 대비한다. 만약 누군가 내 빵 한 조각을 가지고 간다면 나는 그 빵을 다시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제한된 자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프트웨어는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빵과 같은 것이다. 빵을 나누어주어도 당신은 여전히 빵을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독점하는 행위를 스톨만은 ”소프트웨어 매점(software hoarding)“이라고 불렀다

스톨만의 이 추론에 고무적인 것은 해커 윤리 중 최고의 덕목인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에 대한 존중과 세상을 변혁하려는 이상주의적 욕망을 포괄하는 그의 방법이다. 그는 이 추론을 논리적인 결론으로 밀고 나가 평등주의적이며 공동체주의적 비전에 도달하고 있다. [이제] 그 비전은 자본주의에서 신성시하는 사유재산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이버이기주의를 벗어나 대안적 사이버토피안(cybertopian) 전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많은 오픈 소스 개발자들과 이용자들의 사명감에 책임 있는 견해로 생각된다.

물론 자유소프트웨어의 에릭 래이몬드 버전8)은 래드햇의 밥영과 같이 새로운 리눅스 기업가들에게 더 인기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더 낮은 이윤을 제공하고 그것에 익숙해질지라도, 그것은 보편적 자본주의에 훨씬 더 적합하다. 그러나 카피레프트 시스템의 천재 스톨만 덕분에 그의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자본 친화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더라도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지적재산권 영역에 도전하고 있고 주목할 만한 유토피아적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 그 대안적 힘은 냅스터와 같은 유사한 도전에 대한 관심의 폭발로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GNU 선언문에서 스톨만은 자신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에드워드 벨라미9)( Edward Bellamy), 벅민스터 풀러10)(Buckminster Fuller)와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11)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기술 유토피아주의의 전망과 유사하다. 유토피아적 환영은 실제 삶으로부터 눈멀게 하는 이데올로기이며, 환타지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들을 미래의 목표로 향하게 하고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도구를 제안하고 있다.

벨라미의 뒤돌아보면Looking Backward은 아마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기에 진보적인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풀러는 1960년대 신좌파에 영감을 주었다. 이와 유사하게 스톨만의 미래에 대한 견해로부터 필자는 용기를 다시 얻는다. “결국 프로그램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탈-희소성 사회로 향하는 한 걸음이다. 그 사회는 누구도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되게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법률제정, 가족 상담, 로봇 수리 그리고 소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예상과 같은 필수 업무를 위해 일주일에 10시간 정도 필요 노동을 한 후에 사람들은 프로그래밍과 같은 재미있는 활동에 집중할 것이다. “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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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주) 물화(reification) 서구 비판사회이론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간주되는 루카치(Georg Lukacs)가 처음 사용 한 용어로서, 인간가치 마저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물신주의가 전 사회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까지 침투, 확산되는 과정을 물화과정이라고 설명한다.

2) (역주) 정확하게는 Free software(자유소프트웨어)이며, 이를 줄여서 freeware라고도 한다(출처: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그러나 일부 논자는 GPL이 적용된 자유소프트웨어(free software)와 구별해서 ‘공짜’ 프로그램이라는 의미로 freeware를 따로 불리하기도 한다.

3) (역주) 보헤미아는 체코의 북서부를 지칭하는 말로, 떠돌이 집시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1984년 소설가인 윌리암 멕피스 세커리는 세속을 멀리하는 집시의 생활방식이 예술가와 유사하다하여 그의 작품에 예술가를 보헤미안이라고 처음 사용했고, 이를 계기로 보헤미안은 사회 관습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분방한 방랑 생활을 하는 예술가를 지칭한다.

4) (역주) 기업에 속해 있지 않은 독립적인 인터넷으로 연결된 고급 전문 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를 지칭하는 용어

5) (역주) 마이크로소프트사

6) (역주) 다른 팬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판이 높아지는 것

7) (역주) 사람의 마음을 적응의 산물로 간주하는 학문이 진화심리학이다. 래이몬드는 성당과 시장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리누스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 .....생물학과 경제학에서의 적응계에 비유하는 것이 더 강력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리눅스 세계는 많은 점에서 생태계나 자유시장과 같이 행동한다. 일단의 이기적인 에이전트들이 효용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수정하는 자율적인 질서를 만들어 내며 이것은 중앙통제가 이룰 수 있는 어떤 결과보다 더 정교하고 효율적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해의 원리''를 찾아낼 수 있다”.

8) (역주) 이것을 스톨만의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과 대비되게 오픈소스 운동이라 부른다.

9) (역주) 에드워드 벨라미(1850~1898) 유토피아 소설가. 그 이전까지만 해도 유토피아 전통은 항상 이상적 세계를 인간 사회와 동떨어진 세계, 우주나 땅속을 배경으로 했으나 그의 소설속 시간여행에서는 2000년 미국을 유토피아로 설정하였다. 1888년에 펴낸 「뒤돌아보면 Looking Backward」로 유명하다.

10) (역주) 벅민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 1895-1983, 사진, 추천사이트)는 건축가이자 엔지니어로 최소한의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목적의 혁명적인 기술 디자인으로 특히 유명하다

11) (역주) 아이작 아시모프(1920 ~ 1992) 미국 생화학자이자 유명한 공상과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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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인터넷 - 칠레의 추억

이글은 노동자의 힘 제 39호에 실린 글입니다.  --한 두어달 개인적인 사정으로

새로운 글을 적지 못할 듯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적은 글을 시간날때 마다

update할 예정입니다.  

 

사회주의 인터넷 - 칠레의 추억 

1970년 칠레에서는 새로운 실험이 시작되었다. 선거를 통해 사회당과 공산당 그리고 일부 부르주아 정당 연합인 민중연합(Unidad Popular)의 아옌데 후보가 36.3%를 획득하여, 결선 투표에서 당선된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당시 아옌데 정부에 남겨진 것이라곤 파탄에 빠진 공장과 탄광 그리고 미국의 살인적인 경제 봉쇄 정책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옌데 정부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사회주의 경제로 평화적 전환을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소련식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를 답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칠레 정부는 사회주의 경제 추진과 함께, 경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현 경제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했고, 중앙 집중적인 관료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분권적이며 민주적인 네트워크 시스템이 필요했다. 이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칠레 정부는 컴퓨터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흥미로운 실험을 시작하였는데, "프로젝트 사이버신(Project CyberSyn, Cybernetics synergy)"이 바로 그것이다(1971).

프로젝트 사이버신

프로젝트 사이버신은 스테포드 비어(Stafford Beer)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이론에 따라 칠레의 국가 경제에 대한 경영구조를 통합하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사이버네틱스란 정보가 어떻게 수신, 송신, 저장, 재생되며 다시 순환된 새로운 정보가 과거의 정보와 결합하여 자동 수정되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로 통신기술과 정보처리기술을 바탕으로 구현되고 있다. 스테포드 비어의 사이버신 시스템은 인간의 신경 구조 동작을 모델로 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신경구조르 뇌에 의해 통제되는 수직구조 시스템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렇지않다. 오히려 인간의 신체는 탈 중심적이며 잘 분권화 되어 있는 네트워크 구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시스템은 하부 시스템에 최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가 전체를 아우르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정보 후진국 칠레에서는 완성할 수 없으며, 설사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국가 경제에 대한 방대한 정보 처리는 시스템 과부하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들은 이 실험에서 장벽이 되지 못했다. 이전 기독교 민주당 정부가 창고에 처박아 놓은 텔렉스(telex)1)와 극초단파 라디오는 훌륭한 통신 수단이었다. 이 장치들을 전국의 공장들에 배치하여 네트워크를 구축하였고, 그것을 다시 2대의 중앙컴퓨터가 있는 칠레 수도 산디에고에 연결하여, 전국적인 네트워크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었다. 스테포드 비어와 그의 동료들은 이 네트워크 시스템과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1972년 10월에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초기형태의 전국적인 사이버신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였다.

사이버신 시스템의 주요 내용은 각 공장-산업 단위에서 노동자들의 협동 경영을 통해 올라온 전국적 규모의 정보를 통계 처리하여 쉽게 가공된 정보로 가공하여 노동자들이 경영에 직접 참여하여 이용할 수 있게 실시간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불만사항과 요구사항을 정부에 전달하는 통로로도 사용되었다. 사이버신 시스템은 모든 기업들에 대해 노동자-민중들이 언제든지 산디에고에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통해서 접속할 수 있게 허용하는 열린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열린 구조는 노동자, 민중과 정부와의 관계를 예전 보다 더욱 평등하고 굳건한 관계로 전환시켜 주었다.

특히 위기상황에서 이 시스템은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1972년 칠레전역에 국영 운송기업 설립을 반대하는 기업주들이 공장폐쇄를 단행했을 때 이 시스템은 각 지역의 식량과 연료 상황을 알려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아옌데 정부는 빠른 대응을 할 수 있었고 자본가들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옌데 정권의 배신과 몰락

그러나 문제는 아옌데 정부에 있었다. 부르주아들의 지속적인 파업과 미국의 경제 봉쇄정책에 굴복한 아옌데 정권은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군부와 타협하여 연립내각을 구성해버린 것이었다. 아울러 국유화, 농지개혁을 중지하고 중소 부르주아들의 불안을 해소하고 투자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정책을 입안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향은 사이버신 시스템 설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는데, 초기 참여 과학자들과 다른 지향을 갖는 과학자들이 이 시스템 설계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들은 종종 초기 설계자들과의 마찰을 일으켰다.

1973년, 아옌데 정권의 이러한 정책들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증폭시켰고 아울러 미국의 경제 봉쇄와 자본가의 계속된 파업으로 정국은 더욱 불안해졌다. 스테포드 비어는 산디에고를 떠날 것을 권고 받기도 했지만, 그는 숨어 다니면서까지 지속적으로 사이버신 시스템 설계에 참여하였다. 그 결과 1973년 9월 10일, 라모네다 대통령궁에 새롭게 갱신한 시스템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바로 그 다음날, 1973년 9월11일, 미 CIA의 조직적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대통령궁에 포탄을 퍼붓는 것을 시작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스테포드 비어는 다행히 몸을 피했지만, 곧 아옌데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칠레의 폭압적 군사정권에 의한 비극은 시작되었다. 칠레의 군사 정권은 이 실험적 시스템을 이용하기 위해 설계자들을 불러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방적이고 평등한 특성을 가진 사이버신 시스템은 강압적 군사정권과는 태생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결국 이 실험은 75%만 국가 경제 시스템을 사이버신에 집적한 미완의 상태에서 파괴되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잊혀져갔다.

그 후 30년

아옌데 정권의 이 실험을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빅브라더를 만든 것이 아니냐는 근거 없는 비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이버신 시스템은 초기 아옌데 정권의 사회주의 이념과 칠레국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민주 집중 원리와 자주관리를 바탕으로 노동자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시스템에서 진정한 약점은 그 프로젝트가 오직 위로부터 추진되었다는 점과 임금노동과 이윤을 기초로 하는 경제에 밑바탕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칠레 사회주의 정권시기에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실마리가 있었다는 점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125개의 공장을 점거하고 자주관리를 실험하고 있었다. 일부 보고에 따르면 노동자가 자주관리 하는 공장이 개인 소유의 공장보다 매우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며 결근 비율도 훨씬 낮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의 파업이 치열했던 1972년에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은 자본가들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생산물을 노동자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노동자 조직인 '꼬르돈 인더스트리얼(cordones industriales)'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직접선거로 대표를 선출했고 소환권을 보장했다. 이 조직은 일종에 초보적 소비에트 혹은 노동자 평의회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상상해보자. 만약 옌데 정부가 이들 노동자들과 같이 했다면,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자주관리 운동과 위로부터의 사이버신 시스템 계획이 결합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우리는 칠레에서 '사회주의 인터넷'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지금의 인터넷 역사는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1) 전화의 자동 교환과 인쇄 전신의 기술을 이용한 기록 통신 방식. 다이얼 등으로 상대 가입자를 호출하며 인쇄 전신기에 의해 통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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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법칙, 황의 법칙 그리고 ...... - 60나노급 플래시 메모리 개발의 의미

 무어의 법칙, 황의 법칙 그리고 ......

- 60나노급 플래시 메모리 개발의 의미


추석 전 9월 20일, 신문사 방송국할 것 없이 모든 언론사들이 일제히 '삼성 전자가 60 나노 기술을 적용한 8기가 비트 낸드(NAND)형 플래시 메모리((Flash memory)를 개발했'음을 보도하였다. 또 이 기술은 '무어의 법칙'을 능가하는 성과라고 한다. 휴대폰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무노조의 신화를 위해 노동탄압을 일삼는 삼성에서 해마다 첨단기술의 성과를 자랑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삼성의 이러한 면을 두고 노동탄압에 대한 면죄부를 주기도 한고, 또 일부에서는 무노조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과가 가능하다고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번 삼성의 성과에 대한 '속뜻'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듯하다.

 

우선, 상식부터

60 나노기술에서 '나노'란 '니나노'가 아니라, ‘나노미터‘를 줄인 말로 길이의 단위이다. 1 미터가 100 센티미터이듯, 나노미터로 환산하면 10억 나노미터가 된다. 즉 1 나노미터는 10억분의 1미터로, 대략 머리카락 지름의 8만분의 1 정도 되는 길이다. 물론 눈으로 볼 수 없고 고급의 특수 현미경으로만 관찰할 수 있는 아주 미세한 길이이다. 그러므로 60 나노기술이란 단순히 60 나노미터 폭을 갖는 미세한 전기 도선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또 플래시 메모리란 디지털 사진기나 캠코더 등에 흔히 사용되는 정보 저장장치로 반도체로 만들어진 휴대형 하드 디스크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종류로는 낸드(NAND)형과 노어(NOR) 형이 있는데, 낸드형은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지만 속도가 느리고 노어형은 정보저장량은 적지만 속도가 빠르다. 이번에 개발된 8 기가(Giga)비트 플래시 메모리 칩으로는 16 기가 바이트 메모리 카드를 만들 수 있는데, 이 용량은 대략 MP3 파일 기준으로 340시간 분량(4000여곡)을 저장할 수 있는 양이다.


 

무어의 법칙과 황의 법칙

지난 30 여 년간 반도체 칩의 개발 속도는 무어의 법칙과 아주 잘 맞았다. 무어의 법칙이란 인텔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1965년에 발표한 것으로, 반도체의 집적도가 1년 6개월마다 2배씩 증가하지만, 가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법칙이다. 이 법칙의 핵심은 반도체 부품의 크기를 줄이는 기술인데, 반도체 부품의 크기를 작게 하면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고 반도체 칩의 크기도 작아져 단가를 낮출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삼성 발표한 기술은 이 무어의 법칙을 능가하여 (1 년 6 개월이 아닌) 1년에 2배씩 집적도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삼성전자는 2001년 업계 최초로 반도체 제조공정에 100나노기술을 적용한 1기가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이어 2002년 90 나노급의 2 기가 메모리를 발표해 무어의 법칙을 능가한 바 있다. 이에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은 2002 년 세계 3대 반도체학회 중 하나인 ISSCC(International Solidstate Circuit Conference)에서 ‘메모리 신성장론’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집적도는 1 년에 2 배씩 증가하며 이를 주도하는 것은 모바일 기기와 디지털 가전 등 이른바 ‘Non-PC’ 분야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황의 법칙’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황의 법칙이 발표된 후 '희한하게도' 이 법칙에 따라 2003년 70 나노급의 4기가에 이어 2004년에 60 나노급의 8기가 플래시메모리를 실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플래시 메모리 시장에서 자본의 경쟁

올해 플래시메모리의 세계시장 규모는 107 억 달러 정도이고, 내년에는 175 억 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시장에는 미국의 인텔,  일본의 도시바, 한국의 삼성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이미 삼성보다 앞서 도시바와 인텔은 각각 지난 6월과 9월초에 65나노급 기술을 확보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리고 뒤이어 삼성이 9월말에 60나노, 정확하게는 63나노급 기술을 확보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처럼 이 분야에서 경쟁은 불과 몇 달 차이로 매우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개별 자본가가 기술개발을 통해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면 이 상품의 개별 가치는 사회적인 가치보다 낮아지게 되어 더 많은 이익을 높일 수 있다. 이를 '특별잉여가치'라고 한다. 이는 자본의 투자를 통해 얻는 이익이 아니라 기술개발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하지만 잉여 노동시간을 연장시킨 결과로 얻어진다. 그러나 기술개발이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너도 나도 생산성이 높아지면 특별잉여가치는 자동적으로 소멸하는데, 이것이 자본가가 끊임없이 기술혁신을 통해 초과이윤을 얻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무어의 법칙에 따르면 특별잉여가치가 자동적으로 소멸하는데 걸리는 기간이 1년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짧은 기간은 자본의 기술개발 경쟁을 매우 치열하게 한다.

예를 들어 1 기가급 메모리 카드가 현재 10 만원 대인 반면 내년 말쯤에 본격 생산될 것으로 16 기가급 메모리카드는 같은 크기(Size)를 가지면서도 가격이 수백만 원을 웃돌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다. 그리고 이 기간이 지나면 순식간에 가격이 하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제품을 먼저 내놓아 초기시장을 선점하고 생산량 향상에 따른 원가 경쟁력의 확보를 위해 ´나노 기술´ 적용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미 플래시메모리로 경쟁하고 있는 3사의 경우 반도체 기술이나 반도체 장치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와 있다. 그러므로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느 회사가 더 과학기술 노동자들의 (절대적 혹은 상대적) 노동강도를 강화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무어의 법칙과 황의 법칙이 잘 맞는 이유

일반적으로 과학기술 노동자들의 노동의 결과는 노동의 시간을 통해 평가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 시간 관리 이외에 다양한 노동자 관리기법이 적용하고 있다. 우선 인금관계를 개별화하여 팀간 혹은 개인간 사이의 경쟁을 제도화하고 있다. 이 방식에는 개인별로 업무성과의 목표를 정해 주는 것, 개인별로 인사고과를 하는 것, 상시적으로 인사고과를 하는 것, 개인별로 차등 임금인상하거나 개인의 능력과 업적에 따라 상여금을 수여하는 것, 그리고 개인별로 경력을 관리하는 것 등이 있다. 또 책임감을 강하게 심어주는 전략도 사용하는데, 대표적으로 반미, 반일 등 민족 감정에 호소하기도 하고, 연구기획, 개발 단계 등 다양한 경영 참여를 통해 마치 사업주가 된 것처럼 무한책임을 부여해 자율적인 자기-착취로 나아가게 하기도 한다.

이것은 '이성에 입각한 복종' 기법 같은 것인데, 책임지는 직위에 있는 간부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일반적인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작업 속에서 정신적육체적 에너지를 초과 투입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또 매우 시급하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일하는 것을 강요함으로써, 제반 [인간적인] 기준 내지 규준들과 집단적인 연대를 약화시키거나 절멸시키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또 과학기술 노동의 특성상 시간을 많이 준다고, 또 노동자의 헌신을 이끌어 낸다고 해도 자본이 원하는 시기에 재품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본가는 ‘이성에 입각한 복종’과 함께 더 강력한 '강압적 복종 방식'을 병행한다. 강압적 복종 방식이란 무조건 개발 시간을 정해놓고 그 기간 내에 개발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이다. 언뜻 보기에는 고전적인 방식과 유사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고전적으로 납기를 맞추어야 하는 노동의 경우 노동시간에 따라 생산량 증가가 예측 가능하므로 과학적인(인간적인?) 관리(착취)가 가능하다. 그러나 기술 개발 노동은 그 개발 기간을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이러한 특성은 개발 기간 외에는 아무런 관리 기준 없다는 뜻으로 한마디로 ‘무조건 이 기간 내에 개발하라’는 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무어의 법칙과 황의 법칙이다. 이 법칙이 지난 30년 동안 귀신 같이 맞았던 비밀은 자본가들이 그 법칙이 맞게 과학기술 노동자들을 강도 높게 착취했기 때문이지, 자본가들의 뛰어난 미래 예측 능력 때문이 아니다.

반도체 칩이 극도로 더욱더 미세해짐에 따라 그만큼 설계도 어렵고 생산 공정단가도 올라가고 있다. 이제 이 기술은 극한까지 와서 45 나노이하의 공정에서는 황의 법칙(혹은 무어의 법칙)을 맞추기가 매우 힘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자본가는 공정 단가가 상승하면 할수록 자본간의 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개발기간을 더욱 단축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상황이 격해질수록 과학기술자들의 노동 강도는 2배, 3배 더 증가될 것이다.


 

인텔과 삼성의 공통점

인텔의 공동창업자 무어 회장은 무어의 법칙을 발표하였고, 삼성의 사장은 황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인텔과 삼성의 공통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무어와 공동으로 인텔을 창업한 로버트 노이스는 “무노조는 우리 회사를 살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노조가 있는 회사의 규칙을 우리 회사에 적용한다면 회사는 곧 망할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 무노조는 경영의 제일 원칙이다. 운영하는데 유연성이 필수적이다. 국가를 위한 큰 희망은 우리 경제를 마비시키는 노동자와 경영자의 깊고 깊은 분열을 피하는 길이다”라고 강변하고 다녔다고 한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의 무노조 신념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삼성의 황사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윌리엄 샤클리라고 했다. 공교롭게도 윌리엄 샤클리는 인텔의 노이스와 함께 실리콘 벨리에서 노동자 탄압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다(**).



(*) '신자유주의의 본질', 피에르 부르디외 르몽드 디쁠로마띠끄 1998년 3월호

    http://copyle.jinbo.net/archives/bourdieu.htm

(**) 'Organizing Silicon Valley's High Tech Workers', David Bacon

    http://dbacon.igc.org/Unions/04hitec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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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괴델 그리고 리눅스

매트릭스, 괴델 그리고 리눅스 19세기말까지만 해도 수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체계로 인식되었다. 수학 체계는 내부에 모순 없는 몇 개의 기본 공리만 정하면 이로부터 모든 정리를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아키텍트'는 가상공간 매트릭스에 완벽한 이상적 세상으로 건설하고자 했다. 그리고 시온의 민중들을 제외하면 매트릭스 속의 민중들은 실제로 완벽한 사회로 여겼다.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역할은 수학에서 괴델(1906~1978)이 맡았다. 괴델은 모순이 없는 완벽한 체계 안에는(어떤 공리에 기초를 두고 있건 간에) 항상 그 체계에서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문장이 적어도 하나 이상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을 간단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음 질문에 답해보자. "독도 사람이 말했다. 독도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이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만약 이 말이 진실이라면 이 사람은 독도 사람, 즉 거짓말쟁이인데도 진실을 말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말이 거짓이라면 독도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다. 아무튼 괴델은 이를 통해 완벽한 체계도 불완전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의 그누 리눅스(GNU Linux)는 자유소프트웨어 규약(이하 GPL; General Public License)이라는 저작권 하에 배포된다. 이 것은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사용하고 수정, 배포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유일한 제약 조건으로는 GPL이 적용된 소프트웨어를 수정해서 재배포할 때 다시 GPL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IBM과 같은 거대 자본도 예외일 수 없다. 일부 오픈 소스 진영에서는 이 것 때문에 기업들의 참여가 저조하다고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제약조건은 자유소프트웨어(*)가 자본에 독점되지 않게 하는 강력한 방패역할을 한다. 그리고 자유소프트웨어가 마치 박테리아처럼 스스로 확장하며 번식할 수 있게 하는 내적 논리를 제공해 준다. 적어도 몇 년 전까지는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작년(2003년)에 오픈 소스 진영의 한 업체가 DRM (Digital Right Management; 디지털저작권관리) 기술을 GPL 규약 하에 제작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상황은 약간 달라졌다. DRM은 독점 소프트웨어를 보호하기 위한 인증수단 혹은 접근 차단 기술이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유’를 차단하는 기술 개발에 ‘자유’소프트웨어 규약(GPL)과 개발 방식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리눅스 공동체를 이끌면서 오픈 소스진영에 참여하고 있는 리누스 토발즈도 이 DRM기술 개발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DRM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리눅스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유로운 개발을 보장하는 GPL 규약을 어떠한 경우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토발즈는 자유로운 개발을 억압하는 DRM 기술 ‘그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 DRM 기술의 외부적 조건 이 변한다고해도 즉, 자유롭게 개발하고 소스를 공개한다고 해도 기술 ‘그 자체’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괴델은 어떠한 완벽한 시스템에도(구조가 아무리 완벽해도) 항상 내부에 불완전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역으로 이러한 불완전함의 존재는 제도적 장치와 같은 구조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매트릭스에서도 완벽한 시스템 내에 균열을 일으킨 것은 그 속에 존재하는 불완전함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을 이용한 시온 민중들의 투쟁이었다. 자유소프트웨어 상황은 매트릭스와는 정 반대이다. 완벽한 GPL 규약 속의 불완전성은 자본에게 개입할 틈을 주고 있는 것이다. 상황은 정반대이지만 결론은 동일하다. 자유소프트웨어에서도 그 불완전함은 주체(자유소프트웨어 생산자와 이용자)의 끊임없는 참여와 투쟁을 요구한다. (*) 자유소프트웨어는 지난호에 밝힌 4가지 자유를 만족하는 소프트웨어를 말한다. GPL규약은 자유소프트웨어를 만족시키는 규약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 자유소프트웨어는 GPL규약을 따르는 자유소프트웨어만을 한정한다. (**) http://www.sidespace.com/products/oggs/ **이글은 네트워커 10호에 실린 글이다. 네트퉈커에서는 마지막 부분이 조금 잘렸다. 아마도 지면관계때문인듯하다. 잘된 글은 아니자만 그래도 저자와의 상의 없이 결론부분을 짤라 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듯하다. 나름대로 고민한 것인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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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I

 

'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I


1985년에 리차드 스톨만은 자유 소프트웨어 재단을 창설하고 구체적으로 4가지 자유를 규정했고, 이 4가지 자유를 보장하는 소프트웨어를 자유소프트웨어라고 정의하였다. 프로그램을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도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자유 0'으로, 프로그램의 작동 원리를 연구하고 이를 자신의 필요에 맞게 변경시킬 수 있는 자유를 '자유 1'로, 이웃을 돕기 위해서 프로그램을 복제하고 배포할 수 있는 자유 '자유 2'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로그램을 향상시키고 이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다시 환원시킬 수 있는 자유 '자유 3'로 규정하고 있다.

이 4가지 자유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지만 '공짜'라는 의미와 연관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자유 1'과'자유 3'은 소프트웨어 생산에 관한 것으로 소프트웨어의 내용을 비밀로 유지하거나 사유재산으로 보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나머지 '자유 0'과 '자유 2'는 이용에 관한 것으로 재산권이나 저작권을 무시하고 공짜로 배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면 다시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해 그들의 설명을 직접 들어 보자.


유료 또는 무료로 수정하거나 그렇지 않은 상태어느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곳에라도 자유롭게 복제하고 배포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로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것의 의미는 사용 허가를 받기 위해서 별도로 요청할 필요도 없고 또한 비용을 지불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자유소프트웨어란 무엇인가. 강조는 인용자)’


즉, 소프트웨어가 자유소프트웨어 정의에 충실하다면, 자유소프트웨어의 4가지 자유를 반드시 실천해야 하고 그것은 공짜 소프트웨어로 귀결된다. 처음 유료로 구매한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구매한 사람은 언제든지 공짜로 배포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또 자유소프트웨어의 공짜의 의미는 일정기간 무료로 사용하는 셰어웨어(share ware)나 독점 소프트웨어로서 공짜인 프리웨어(freeware)와는 질적으로 다른데, 이들 소프트웨어는 4가지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자유소프트웨어의 공짜의 의미는 4가지 자유의 결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4가지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자유소프트웨어의 자유는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의 주장과는 상관없이 정치-문화적 의미뿐 아니라 경제적 의미를 강하게 포함하고 있다. 높은 가격으로 소프트웨어에 담을 친다면 더 이상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비단 자유소프트웨어를 누구나 공짜로 사용할 수 있다는 '분배'적 의미로 한정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자유소프트웨어가 가격이 없는 즉, 교환가치를 갖는 상품이 아닌 비-시장적 관계(non-market relations)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또 시장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서도 자유소프트웨어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수많은 특허를 독점하고 있는 IBM 등 컴퓨터 자본이 자유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하고, 자유소프트웨어를 그들의 기계에 적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독점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 정보기관의 참여는 그 만큼 자유소프트웨어가 기술적으로도 보안상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자본이나 정보기관마저도 자유소프트웨어에 기여하게 유도하고 있다는 의미로, 자유소프트웨어의 강한 흡입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소프트웨어에 담겨 있는 특별한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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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ID 기술 : 노동자 통제에서 상품 통제로

RFID 기술 : 노동자 통제에서 상품 통제로

노동자의힘 제 60/61

김해민

한 노동자가 캠코더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갔다. 그가 캠코더를 집어 들자 백화점내 CCTV는 그의 모든 행동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스팸 메일이 증가한다. 그런데, 그 스팸 메일의 내용은 백화점에서 관심을 보였던 물건들이었다.

한 노조원이 해고당했다. 자본가의 감시 시스템은 해고 순간부터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하청업체의 모든 생산 과정에 전자 꼬리표가 붙기 시작하더니,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스마트 태그, 전자 꼬리표 등으로 불리는 RFID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기술은 이러한 상황을 현실화한다. 이미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선·후불식 교통카드에는 RFID 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과천도서관이나 은평 구립도서관 등에서도 바코드 대신 RFID 기술을 도입하였다. 교통카드에 적용된 것은 개인의 신분까지 확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신용카드나 휴대폰에 내장된 교통카드는 신분확인까지 가능하다.

RFID 기술

RFID 기술의 'RF'를 풀어서 쓰면 라디오-주파수(Radio Frequency)가 된다. 라디오 주파수라면 KBS의 89.1MHz나 MBC의 91.9MHz 등 방송 주파수를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무선(wireless) 주파수를 통칭한다. 무선 통신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계기가 라디오 방송부터이기 때문에 무선 주파수를 라디오 주파수(RF)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RF라는 말이 들어가면 그냥 무선 통신을 생각하면 된다. 무선통신 장치에는 송신장치와 수신장치가 있는데, RFID기술에서 각각 RFID태그(또는 transponder, 태그는 꼬리표라는 뜻)와 RFID 판독기(Reader 혹은 interrogator)라 부른다.

RFID의 'ID'는 'IDentification'의 약자로 '신원을 확인함'이라는 뜻이며, ID-card라면 신분증을 뜻한다. RFID 장치 내부에는 무선 통신을 위한 안테나와 필요한 정보를 기록하고 저장하는 메모리(저장장치)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메모리에 식별 정보가 저장된다. 만약 신분증에 적용된다면 주민증 번호나 기타 개인정보들이 입력된다.

그러므로 RFID 장치는 RFID 태그에서 내보내는 식별 정보를 무선으로 받아서 그 태그가 붙어 있는 상품(사람)이 무엇인지(누구인지)를 식별하는 장치이다. 저장된 식별정보의 내용이 많을 필요는 없다. 무선으로 전달된 식별 정보를 통해 중앙 컴퓨터와 연결하여 다양한 개인 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하면 되기 때문이다. 또 RFID 장치가 인식(감시)할 수 있는 거리는 종류에 따라 다른데, 상호 유도 방식(Inductively coupled)의 경우 1m 이내의 근거리에, 전자기파(Electromagnetic wave)방식의 경우 3에서 10m 정도의 중장거리까지 인식할 수 있다. RFID 태그는 매우 소형으로 제작 가능하므로 지갑이나 입고 있는 옷 신발에 붙일 수도 있고 사람에게 이식(implant)할 수도 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멕시코 정부가 2003년부터 보안과 신원확인을 목적으로 법무장관을 비롯한 법무부 직원 160여 명의 몸에 RFID기술을 이용한 생체 칩을 이식시켰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져 논란이 되고 있다. 또 일본의 오사카 교육당국자들은 초등학생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가방, 이름표, 옷 등에 RFID를 부착하기로 했으며 덴마크에서도 어린이 보호를 위해 RFID를 도입하기로 했다.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RFID와 유사한 RF장치를 생생하게 경험하였다. 98년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 출근부 대신 노동자들에게 지급되어 몸에 부착하게 되어 있는 'RF카드'는 마치 상품의 바코드처럼 자동 인식기(판독기)를 지나갈 때 마다 노동자들의 출입시간을 감시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RFID 장치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전에 부정적 여론을 형성시키기 때문에 자본가에도 불리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노골적인 RFID 감시 장치를 상품으로 내놓고 있는데, 여기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지난 7월에 발표한 'RFID 확산전망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RFID 시장규모는 1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ABI(*)자료를 인용해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장기불황으로 인한 통신시장의 침체와 함께, 현재 RFID 장치의 단가가 싸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시장이 형성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저렴한 가격의 RFID 상품이 개발될 때까지 현재의 불황을 극복해야 하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 군사·안보용 즉, 감시·추적 장치의 상품을 개발해 고가로 파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인 RFID 감시 장치를 만들어 팔고 있는 것이다.

진짜 무엇에 쓰고자 하는 물건인고?

사실, 자본가들은 RFID기술을 노골적인 감시 장치에 적용하기보다는 과거 20여 년 동안 사용된 바코드 기술을 대체하고 싶어한다. 바코드의 경우 저장할 수 있는 정보 용량이 너무 작고, 정보를 수정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이러한 바코드 기술을 개선한 것이 RFID 태그 기술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을 감시하는 기술이 아니라 상품에 부착되어 관리하기 위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RFID 태그는 무선 통신을 이용하므로 장착한 제품을 대형 할인점 창고 문을 통과시키기만 하면 어떤 물건이 얼마나 들어왔는지가 재고데이터베이스에 자동으로 입력된다. 또 출고할 때도 자동으로 계산돼 재고정보에 즉시 반영될 수 있다. 자본가들은 이 시스템을 적용하여 물류상의 전 작업 공정을 자동화하고 그 결과 운영비와 생산비의 감소를 기대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 기술을 전사적자원관리시스템(Enterprise Resource Planning: ERP)의 확장된 개념인 공급망관리(Supply Chain Management : SCM) 시스템과 고객관계관리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 CRM)시스템에 접목하고 싶어 한다. 세계적인 시장 리서치사(社)인 가트너(Gartner)의 기술이사인 제프우드(Jeff Woods)가 뉴스팩터(NewsFactor)에 "RFID는 향후 20년 내 경영학 과목을 바꿀 것"이라고 한 의미도 여기에 있다.

세계적인 물류기업 월마트는 지난해 여름 2005년 1월부터 RFID 시스템 체계를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상위 100개 공급업체들은 2005년 1월까지, 나머지 공급업체는 2006년 1월까지 RFID 태그 부착을 해야 한다. 월마트에 이어 세계 6위의 유통업체인 독일의 메트로도 RFID 시험을 오는 11월에 시작할 예정이다. 이들 유통업체들은 제품에 RFID 방식 가격표를 붙여 물건이 배달된 순간부터 제품을 추적·감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노동자 통제에서 상품 통제로

ERP는 상품의 재고 확인, 처리 과정을 훨씬 간편하게 한다는 명목으로 기업 차원에서 도입하는 일종에 자동화 시스템이다. 이러한 ERP가 기업 내의 전사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SCM은 기업과 기업간에 자원, 정보, 자금 등을 통합 관리하여 이해관계에 있는 모든 기업들을 최적으로 관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CRM은 고객관리 프로세스를 자동화한 고객관리시스템이다.

얼핏 보기에는 노동자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통제하겠다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들 시스템에 적용된 RFID 장치가 노동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자. ERP 시스템에 RFID 장치를 도입할 경우 노동자들의 개별 휴식 시간, 작업시간, 생산량, 생산속도, 불량률, 작업장 내 현재 위치 등이 완벽하게 감시·추적된다. SCM의 경우는 협력업체 혹은 하청업체간의 완벽한 정보 공유를 핵심으로 하는데, 이들 업체간의 자발적 협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RFID기술로 인식된 하청업체의 정보가 대기업으로 자동 전달된다면 자발적인 협력을 이끌어낼 필요가 없다. 이 상황에서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2중 3중의 통제 아래에 놓이게 된다. 또 CRM기술은 상품기획에 필요한 소비자의 정보를 관리하는 것이 목적인데, 이 정보는 상품에 내장된 RFID 장치에서 나오는 무선 주파수를 통해 소비자를 추적·감시하여 얻어낸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상품 관계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므로 상품에 대한 통제는 본질적으로 노동자뿐 아니라 상품과 관계한 모든 사람들을 '은밀하게' 통제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골적인 노동자 통제 장치와는 달리 RFID 태그는 경영 혁신을 내세우며 도입되기 때문에 통제 장치의 속성이 은폐된다. 더욱이 RFID기술은 무선 통신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상품 통제 장치는 논란을 크게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는 물론이고 소비자까지 철저하게 감시할 수 있는 장치이다.

최근 이 장치를 둘러싸고 소비자 프라이버시와 관련한 논란이 있고 또 타협안도 제출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캘리포니아 주 의원들은 소비자들이 쇼핑을 마치고 매장을 떠날 경우 RFID 태그를 떼거나 파괴하는 것을 의무화했고, 가까운 일본의 경우 경제 산업성이 발표한 '가이드라인(안)' 에 따르면 RFID 태그가 장착된 물품을 소비자에게 판매, 교부하는 경우 태그 장착 사실을 사전에 소비자가 알 수 있도록 물품에 표시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가이드라인은 RFID 기술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 기술을 작업장을 중심으로 해서 전사회적 도입을 허용하기 위한 안전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RFID 기술은 정책적 보완만으로 부족하며, 설계과정에서부터 다시 재검토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RF카드 도입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투쟁이 RFID 태그에서도 절실히 필요하다.

* 1990년에 설립된 ABI Research는 본부가 뉴욕에 있으며 세계의 자동차, 반도체, 초고속통신, 에너지 부문 등에 대해 연차 연구 프로그램, 분기별 정보 서비스 및 시장분석 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시장연구에 관한 이들의 분석 자료는 www.abiresearch.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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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

'공짜' 리눅스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I. 그누/리눅스(GNU Linux)는 ’자유소프트웨어(Free software)‘에 포함되는데, 영어로 Free는 공짜의 의미와 자유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공짜 좋아하면 머리가 벗겨진다.'는 속담이 있지만 프로그래머가 아니고서야 리눅스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공짜‘라는 의미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있을까? 적어도 필자는 그렇다. 필자는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속담을 더 좋아 한다. 그냥 자유소프트웨어는 공짜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많은 자본들이 리눅스를 비롯한 자유소프트웨어 개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이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자본은 이윤이 남기 때문에 참여할 것이며, 이윤이 남는다는 의미는 어떤 면에서는 공짜가 아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국 안보기관인 NSA도 보안을 이유로 리눅스에 지원하고 있다고 하니 더욱 조심스러워 진다. 1998년 오픈소스 이니셔티브(Open Source Initiative, OSI)를 창설한 에릭 레이몬드와 같은 사람들은 자유소프트웨어를 자본주의를 강화하고 개선하는 도구로 보고 있다. 사실 에릭 레이몬드는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목적에 맞는 운동을 새롭게 시작했는데, 그것이 오픈소스 이니셔티브(OSI)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정의와 자유소프트웨어 정의 사이에 문헌상 차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자유소프트웨어는 '자유'를 오픈소스는 '생산의 효율성'을 더 강조한다. 그러한 OSI에는 자본가들을 위해 자유소프트웨어를 새롭게 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당근! 레이몬드는 당연히 자유소프트웨어를 공짜라는 개념과 연결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이용하는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 사람들이 공짜라는 개념에 인색하다면, 자유소프트웨어가 공짜로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기 더욱 힘들어진다. 사실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 사람들은 자유소프트웨어의 자유를 공짜라는 의미로 사용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자유 소프트웨어"의 핵심은 구속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의 자유에 있는 것이지 무료라는 금전적인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의도하는 이러한 자유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료 맥주(free beer)"가 아닌 "언론의 자유(free speech)"와 같은 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유소프트웨어란 무엇인가?)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을 창설한 리차드 스톨만은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의 영감을 1776년 미국 독립선언의 이상인 자유, 공동체 그리고 자발적 협동 정신에서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정신은 ‘자유 기업’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자유소프트웨어에 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스톨만은 '자유 기업'까지 언급하면서 Free는 공짜가 아니고 자유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스톨만까지 이렇게 주장하니 난감할 뿐이다. 그렇다면 '자유소프트웨어=공짜'의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또 그렇게 주장해서도 안되는 것일까? 또 공짜라고 주장하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러면 아직 공짜의 희망을 버리지 말고 자유소프트웨어 정의부터 한번 뒤져 보도록 하자.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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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과 리눅스

힙합과 리눅스 김영식 / 정보공유연대 IPLeft yskim@jinbo.net 깊 숙한 골목, 어두운 지하실 공간,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두 대의 턴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랩, 그리고 브레이크 댄스! 이것은 힙합하면 떠오르는 광경일 것이다. 80년대에 힙합은 미국의 어느 뒷골목 한 쪽 귀퉁이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고, 불과 몇 년 만에 빌보드 차트와 방송을 장악할 만큼 괴력을 발휘했다. 정규교육을 재대로 받을 기회가 없었던 미국의 빈민촌 흑인들은 음악이나 악기를 배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한 그들이 가장 리듬감 있는 음악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들은 악기나 오선지 없이 기존의 음악을 발췌하여 힙합 음악을 만들었는데, 이러한 기법을 ‘샘플링(sampling)’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두장의 LP판을 동시에 틀면서 원하는 부분을 연결시켜(샘플링해서) 비트를 맞추며 즐겼고, 1980년대 중반에는 디지털 샘플러가 등장하면서 힙합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보통 유명 힙합 음악은 수천 개의 소리를 샘플링하여 만들어진다. 물론 샘플링이 전부가 아니다. 주요 기술에는 턴테이블에 올린 LP판의 속도를 달리하는 디제잉(DJing), 컴퓨터의 전자 사운드를 음악적으로 배치하는 미디(MIDI) 등이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힙합을 작곡하는 사람을 작곡가라고 부르지 않고 ‘프로듀스’라고 부른다. 비극은 이들이 엄청난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시작됐다. 거의 모든 음악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음반사들은 힙합 그룹들을 고용하였다. 이 때부터 저작권 소송분쟁이 시작됐는데, 유명한 힙합 그룹 드 라 소울(De La Soul)도 “You Showed me”의 밴드 Turtles와 법정싸움에 휘말려 170만 달러를 배상해야 했다. 저작권은 힙합 그룹에게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음악을 둘러싼 권리에는 저작재산권과 저작인접권이 있다. 저작재산권은 말 그대로 음악에 대한 소유권이고, 저작인접권은 음악 실연자, 음반을 제작자 혹은 방송사업자 등이 갖는 권리를 말한다. 뻔뻔하게 다른 사람의 음악을 모두 표절한 사람은 한 사람의 저작재산권만 침해한 것이다. 그러나 수천 곡을 샘플링해서 만든 힙합은 수천 명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 된다. 그리고 저작재산권과 저작인접권을 모두 침해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힙합 그룹들이 선택할 길은 몇 가지 없는 듯하다. 음원을 독점하고 있는 거대 음반사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소유권이 없는 음악만으로 샘플링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힙합음악을 그만두어야 한다. 미국 흑인 민중들의 독특한 음악 생산 방식은 저작권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자유소프트웨어 재단을 이끌고 있는 리차드 스톨만이 한국에 왔을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은 마치 (저작권이라는) 지뢰밭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힙합 뮤지션들도 같은 기분일 것이다. 힙합 음악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단지 스스로 즐기기 위해 기존의 음악을 샘플링해서 새롭게 만든 것이다. 그누-리눅스(자유소프트웨어)도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서로의 프로그램을 샘플링하며 새롭게 만든 소프트웨어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필요한 것(즐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생산하는 것이다. 힙합의 자유로운 정신과 리눅스의 자유는 여기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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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더러운 청정에너지-수소에너지

그들만의 더러운 청정에너지-수소에너지

기관지노힘  제59호

 

전기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생산 과정을 바꾸어 놓았다.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한 레닌도 전기 도입을 국가 핵심과제로 보았고 전기관련 기술을 전쟁과 혁명으로 파괴된 러시아를 소생시킬 핵심기술로 믿었다. 1920년대 의회에서 그는 "코뮤니즘이란 소비에트 권력과 국가 전체에 전기 시스템 도입(전기화)을 합친 것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기는 그의 이런 희망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전기 생산이 주요 원료인 석유의 매장량은 중동에 65%가 밀집되어 있다. 이 중 사우디는 25%, 이라크는 11%에 이른다. 이러한 희소성은 아랍의 왕족들과 소수 석유자본의 독점을 용이하게 했고, 때로는 그들 사이에 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전기 생산을 위해 방출되는 배출 가스는 심각한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한 연구 보고에 따르면 지구 평균기온은 이미 지난 세기에 비해 0.6℃ 상승하였고 2100년까지 1.0℃∼3.5℃ 더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으며, 이것은 지난 1만년동안 나타났던 것보다 더 큰 기후변화라고 한다.

에너지원으로서의 물(H2O)

만약 물을 이용해서 전기를 생산하고, 이 전기로 자동차를 굴릴 수 있다면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배출되는 것이 다시 물이라면 물은 최고의 에너지원일 것이다. 또 물은 어디에나 널려있어 대동강 김선달이 아니면 독점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많은 과학기술자들은 수소 연료 전지(Hydrogen Fuel Cell)라는 것을 연구하고 있다. 수소 연료 전지는 말 그대로 수소를 연료로 하여 전기를 발생시키는 기술을 말한다. 수소는 물에서 추출되고 이 수소는 연료전지를 통해 다시 산소와 결합하여 물을 배출하고 전기를 발생시킨다. 물을 원료로 수소를 만들고 다시 물을 방출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이 기술이 완성된다면, 물을 이용해서 누구나 자유롭고 저렴하게 전기를 이용할 수 있게 되므로 가장 먼저 석유자본이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이상 이라크 전쟁과 같은 비극은 없을 것이다. 『노동의 종말』 저자 제러미 리프킨도 그의 저서 『수소혁명』에서 "수년 안에 컴퓨터, IT혁명이 수소 에너지 혁명과 융합되면서 사상 초유의 진정한 민주에너지로 자리 잡을 것이고 수소는 그야말로 에너지 연금약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쩌면 레닌이 전기에 대해 가졌던 기대가 21세기에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기대해 본다.

그런데 부시 정부가 수소연료(전지)를 개발한단다

부시 정부는 2003년 의회 연설에서 12억 달러를 연구 자금에 사용할 것을 제안하면서 "미국은 (수소 연료전지를 적용한) 청정 수소 자동차(일명 '자유-차','Freedom-Car') 개발에 선도적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2020년까지 전체 수송에너지의 20%를 수소에너지로 충당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석유 기업 출신이며 석유자본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부시는 최근 수소 연료 기술을 지원하고 있다. 부시는 물론이고 체니 부통령, 내무부 장관, 재무부 장관 모두 석유기업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 부시도 현재 석유 기업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석유가 아닌 다른 에너지원 연구를 지원한다고 한다. 또 미국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 중 36%를 배출하고 있는 가장 큰 오염원인 국가이다. 더욱이 부시 정권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규제하기 위한 교토의정서에 비준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시 정권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걱정하면서 청정 수소 자동차를 개발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 기간의 일시적인 쇼로 보기에는 너무나 진지하다.

부시의 수소 연료(전지) 기술에는 다른 것이 있다

일반적으로 수소는 자연 상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소를 다른 원료로부터 추출해야 한다. 수소를 얻기 위한 원료로는 화석 연료인 탄화수소나 물이 있을 수 있고, 곡식으로부터 얻은 에탄올도 가능성이 있다. 천연가스에서 나오는 탄화수소로 수소를 얻는 기술은 현재 사용 중인 기술인데,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기 때문에 청정에너지로 볼 수 없다. 그리고 물을 통해 열적/화학적/전기적 방법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소를 얻을 수 있는데, 이때 태양력이나 풍력을 이용할 수도 있고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이 중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한 기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를 구별해서 '원자력 수소'라고 부르기도 한다. '원자력 수소'는 물을 연료로 한다고 하지만 원자력 발전이 갖고 있는 모든 모순들 즉 핵 폐기장 문제, 방사선 문제 등을 가지고 있으며, 독점적이다. 원자력 발전을 분산적으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자력 수소는 물을 연료로 하지만 독점이 용이하다.

이러한 다양한 기술 중에서 부시정부가 어떤 기술을 선택할까? 부시정부는 '악의 축'의 면모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국가 수소 에너지 로드맵」에서 수소 연료를 천연가스 등에서 90%를 나머지 10%는 원자력에너지를 통해 양산할 계획을 밝히고 있다. 태양열이나 풍력 등을 이용한 지속가능한 개발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현재의 기술을 이용해서 손쉽게 수소를 얻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개발한 수소 연료는 전혀 청정하지도 석유자본에 독립적이지도 않다. 애초 부시정권은 이러한 가치에는 관심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예산은 화석연료나 원자력을 통한 수소 연료 개발에 집중되고 있고 청정에너지 분야에는 오히려 삭감되고 있다.

석유자본들은 이미 다가올 수소시대에도 이윤을 챙기기 위해 체계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은 1999년부터 국가나 과학기술자 주체의 수소 연료전지 관련 조직에 빠짐없이 참석해서 주도권을 잡았고, 수소 연료전지의 주류 연구 방향을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와 원자력에너지를 이용하는 방향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아울러, 수소 연료 관련 핵심 기술을 보유한 중소기업을 인수 합병하는가 하면 주요 특허들을 수집하고 있다.

원자력 에너지 기업들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에서 2번째로 크고 10기의 원자로를 운영하고 있는 엔터지(Entergy)사는 수소와 전기를 동시에 생산할 수 있는 "자유-반응로(Freedom Reactor)"라는 원자로를 미국에 건설하려고 추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79년의 스리마일 아일랜드(TMI) 원전 사고 후 원전건설의 신규신청이 없었지만 부시정부가 들어서면서 2010년까지의 원전의 신규건설을 촉진하기 위한 '원자력 2010년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힘을 얻고 있다.

20세기 환경오염의 주범인 석유 자본/원자력 자본은 그들의 독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물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태양이나 바람과 물을 에너지원으로 개발했을 때, 그것을 석유라는 상품처럼 독점하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고, 핵에너지처럼 중앙 집중식으로 통제하는 것도 힘들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태양을 독점해서 '태양 이용료'를, 바람을 독점해서 '바람 이용료'를 받아 낼 수 있을까?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그러나 그들이 희소성이 없는 풍부한 대안 에너지를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처럼 경찰력을 동원해야 하고 엄청난 이데올로기 공세를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을 자본 스스로 개발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부시 정부는 자본주의 철학에 맞게 지구온난화 방지보다는 다국적 석유자본과 핵에너지 자본의 이윤을 보장을 우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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