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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

I 편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I

 

리차드 레빈스 (Richard Levins)

 

부르주아지의 부흥과 현대 과학의 탄생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더 나은 세상을 향한 프로그램에 이르게 된다는 생각은 맑스보다 3세기 앞선다. 과학은 신흥 부르주아지에게 생산 방법과 항해도구의 발전과 같은 실질적 가치를 주었고, 봉건적 관계에 복무한 신학의 권위에 저항할 수단도 제공해 주었다.

 

과학은 부르주아 혁명의 기치 중 하나였다. 민주주의처럼, 과학의 슬로건은 사회적 토대가 필요로 하는 그 이상까지 나아갔다. 과학은 구체제와의 투쟁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도전과 독립의 수준을 분명히 했기에, 잠정적으로 새로운 부르주아 질서에도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과학의 실용적인 가치만이 논증되었다.

 

잉글랜드에서 과학은 17세기 중반에 사회적 지위를 얻었고, 실제로 영연방의 공식 정책이 되었다. 당국의 중요한 문제를 조사할 때 과학으로 인해 정치 혹은 종교까지 확대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과학에 따른 자유가 위험한 선례를 남기지 않는다면, 유럽의 가장 보수적인 정부까지도 과학 부흥을 지원했다. 대부분 유럽의 기존 과학자들은 이러한 역사적 타협을 받아들였고, 주목받을 만하지만 성가신 것은 발견조차하지 않았다. 혁명적인 갈증은 무뎌갔다. “이 시대 초기에 코페르니쿠스는, 신학을 비판하는 편지를 쓰고, 뉴턴은 신의 최초의 충격(역주- 뉴턴은 최초 물질의 운동에는 신이 개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라는 가설로써 이 시기를 끝맺었다”(엥겔스, 자연 변증법)

 

과학과 철학의 통일

 

과학의 영역에 모든 인간 경험을 포함하려는 사람들은 실험실 과학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실험실 과학은 좁게 경험적이며 신중하고 중립적인 것에 국한하려고 하며, 거대한 인간의 관심사에 개방형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들을 의심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철학과 과학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거부했다.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그들의 모든 철학적 도구로 과학에 접근했고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 철학을 고찰했다. 엥겔스(자연 변증법)는 17, 18세기 과학의 기계론적인 사고방식을 기술한 후에, “자연에 대한 이런 경직된 사고방식에 균열을 일으킨 사람은 자연과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다(칸트의 태양계의 기원에 대한 성운설)”고 보고하였다.

 

맑스와 엥겔스가 발전시킨 세계관은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었다. 완전히 새로운 지적범주로 종합적인 어떤 것이었다. 그 내용에는 사회적 토대, 조직형태 그리고 실천관계를 포함한다. 학계의 필요에 의해, 맑스주의를 전통적인 학문영역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들이 종종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알튀세르의 경우 맑스주의 과학을 맑스주의 철학과 분리하였다. 맑스주의자는 맑스주의를 대학의 경제학부에서, 역사학부에서, 정치 과학, 철학, 문학 혹은 자연과학부에서 가르치지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동료나 학장이 이해하는 그런 경제학, 역사, 철학, 문학일 수는 없다. 확실히 이를 정당화하려는 지적 압력은 존재하고 있다. 단지 학문의 한 분야로써, 기본적인 것만을 성취하려 할 때 맑스주의는 파괴된다. 그러므로 맑스주의의 생존력은 맑스주의 사상의 발전을 위한 별도의 학술적 기반, 출판, 맑스주의 학교, 학회 혹은 정당 등에 의존한다.

 

맑스주의는 부르주아 혁명시기의 과학으로부터 권위에 대한 거부, 논증, (우리의 바램을 제거하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국제적인 지적 상호교류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맑스-엥겔스 시대에, 권위의 폐기란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을 통해 종교적 권위를 폐기하고 모든 권의 도전하는 것 의미했다. 문맥상, 이러한 주장은 순진해 보인다. 편견 없이는 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자유주의 이성에서도 편견은 우리의 형성에 영향을 준다고 하며, 더 깊게 변증법적 이성에서도 편견 없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편견의 폐기는 실제 연구수행이나 과학의 이상적인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니다. 과학에는 자기비판이 요구된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오래된 것을 조망하며, 새로운 것에 접근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 방식을 항상 의심하는 지속적인 자각이 필요하다.

 

각각의 과학에는 실수를 인식하는 자기만의 전통적인 패턴과 그 실수를 피하기 위한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맑스주의의 주요한 방법론적 통찰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유물론자의 가르침이다. 세계 상황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들(특히 이데올로기)은 그 상황[을 구성하는] 일부 정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그 상황 자체를 가지고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원칙은 모두 합쳐, 과학에 객관성과 자연과 사회에 대한 진리 발견을 요구할 때 기초가 된다. 즉 객관성은 [과학이 가진 기본] 조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과정이다. 그것은 우리가 편견을 갖고 세상과 맞서는 과정, 다른 사람의 편견이 우리의 편견과 맞서는 과정이며, 여러 가지 다른 편견으로 우리가 가진 여러 편견과 맞서는 과정이다. 객관화의 과정은 결코 끝이 없다.

 

객관성을 달성하기 위한 우리(맑스주의자의) 방법은 개인 특유의 편견과 다른 그룹의 편견에 대응해서 꽤 잘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같이 공유하고 있는 편견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동물 행동에 관한 연구는 실험의 정확성을 개선하고 해상도를 안정화시킴으로써 매우 정교한 실험을 수행할 수 있다. 반면에 거의 전반적으로 우리가 가진 성적 편견에내에서 연구가 수행된다. 그런 성적 편견은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의 활발한 저항에 의해서만 상당히 균열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이라는 말은 제한된 의미에서만 “객관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레닌이 “실무적인(businesslike)"이라는 말의 의미를 바람직한 성격으로 경험이 많고, 책임 있고, 훈련된 그리고 현실감 있는 성격으로 생각했지만, 교묘하거나 개인주의적이거나 탐욕적이거나 정직하지 못하다는 뜻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적인 말로 ”고결하다“는 의미는 용기 있고, 명예롭다는 뜻으로 사용되지만 지독하고 고집 있거나 성차별주의라는 뜻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이것의 의미는 실제 과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화된 과학을 의미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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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이 글은  1986년 미국의 좌파 잡지 먼슬리 리뷰지에 실린 리차드 레빈스의 글입니다. 하버드대 교수이며 생태학자인 레빈스는 한국에서도 이미 많이 알려진 맑스주의 과학자입니다(참세상에서 “과학, 사회, 혁명운동 그리고 변증법”이라는 글에서 소개된 바 있습니다). 이 글은  좌파가 왜 과학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과학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지를 비교적 명료하게 설명되어 있어 소개합니다. 이 글을 총 3부분으로 나누어 번역하고 있고, 이번에 이어 다음에는 ‘부르주아의 성장과 현대과학의 탄생’,‘과학과 철학의 통일'을 그 담에‘현실 과학 비판‘과 ’좌파와 과학‘을 번역해서 올릴 예정입니다. (급하게 번역하느라 오역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문을 참조해 주세요)

  

우리 자신의 과학 : 맑스주의와 자연 -맑스주의 과학 I


리차드 레빈스 (Richard Levins)


내가 글을 배우기 전에 할아버지(아브라함 색만, Abraham Sackman)는 배드 비샵 브라운 신부(역주- 윌리엄 몽고메리 브라운, 미국 성공회 주교이자 공산주의자. 배드 비샵이라는 별명은 이교도 재판과정에서 붙여졌다.)의 “소년 소녀를 위한 과학과 역사”라는 책을 읽어 주셨다. 이 책에서는 과학과 역사는 서로 연계관계가 있음을 주장하였고, 그런 주장이 나에게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매우 흥미 있는 발견이었다. 할아버지는 사회주의-노동자들을 위한 교육에 최소한 우주론, 진화론 그리고 역사를 의식적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교회에서 파문당한 맑스주의자 배드 비샵은 그의 책에서 과학과 역사를 분리할 수 없는 하나로 보았다. 그에게 인간의 역사는 자연 역사와 연속선상에 있었다.


과학과 역사는 몇 가지 이유로 맑스주의자들에게 중요하다. 첫째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지배계급의 지식 독점과 종교적인 반계몽주의에 저항하는 것이며 특히 신교도들이 인간을 하찮게 여기는 사상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무엇이 건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이 질문에 우리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는 은하수 주변 바깥, 2류 태양 주위를 도는 작은 행성위에서 최근에 살고 있는 하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바위에서 과거를 읽을 수 있고 우리의 노동으로 현재를 변혁하며, 별들의 미세한 빛의 조성을 프리즘으로 알아내고 또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활동을 통해 우리 자신의 미래 발전을 도모한다.


세계를 알고, 지식화해야 한다는 열정적인 책임감은 우리의 적들에게는 오만함으로, 더 심하게 지독한 뻔뻔함으로 인식되었다. 적들은 맑스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 미학의 핵심으로 신비주의, 불가지론, 랜덤함, 비이성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40년대 고전 아서 커스틀러의 《요가 수행자와 인민위원 The Yogi and the Commissar and Other Essays》를 참조)

 

맑스주의자들에게 과학 기술의 발전은 세계에 대한 최신 지식을 얻는 다는 의미 이외에 특별히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기술과 사회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산 수단의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발전은 변혁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과학은 단지 과학적 성취와 응용기술을 나열한 명부가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회 환경에서의 인간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한 학습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야할 대상인 것이다. 최근 들어 점점 더 다양한 이슈들, 지식의 군사화, 건강, 환경 경제 발전, 여성 해방, 인종주의와 계급 서열화의 합리화 그리고 교육 문제 등에 대한 정치적 투쟁에서 과학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혁명 정당은 권력을 잡기 전과 후 모두 과학에 관한 프로그램을 채용해야 하고 이런 저런 과학적 근거를 형성하는 사회 운동과 어떤 식으로 공동 투쟁할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맑스주의 과학자는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이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속박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우리의 삶을 관통하는 자본주의에 대항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한 사회주의자들은 과학의 문제들에 대한 초기의 관심을 부활시키고, 과학을 투쟁 활동과 연구를 위한 실천과제 속에 배치시켜야 한다.


과학을 이해하는 작업은 과학의 주요 모순을 명확하게 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한다. 현대 과학은 지식 성장의 역사에서 한 단계이며, 동시에 서구 부르주아지 계급에 속박된 창조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과학이 그들의 이익과 권력 추구를 위해 필요한지를 묻고, 지금까지 발전된 과학으로 적절한 방법을 적용한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상에 순응할 수 있는 적절한 답을 찾아낸다. 현대 과학은 생산력의 한 부분이면서 생산관계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과학은 상품으로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 사이의 모순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실재(reality)를 해석하고 반영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 실재를 혼미하게 하기도 한다. 또 과학은 부르주아 혁명의 산물이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처럼 부르주아의 욕망과 필요를 초월해서 때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위협이 되기도 하지만 그 근본 태생의 성흔은 결코 털어버리지 못한다.


과학은 지적 자유를 향한 저항의 함성이 되기도 하지만 억압과 지배를 합리화하기도 한다. 조작된 미신에 대항하는 계몽의 무기이기도 하지만 제 3세계 문화의 지식을 인종주의와 맹목적 애국주의로 파괴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학은 우리 존재 조건이기도 하고 정치의 대상이기도 하다. 또 이데올로기 장벽을 넘어 국제 협력의 장이기도 하지만 계급투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길잡이기도 하지만 독단적인 교조의 그리고 자기자랑의 미사여구가 되기도 한다. 내적인 면에서, 작은 규모에서, 한 연구소 규모에서는 과학은 지적 교양을 증가시켜 주는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인 과학 활동 수준에서는 비이성적인 면이 증가하고 있다. 과학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지금 알려진 것으로 가정하고 연구하기도 하는데 종종 그러한 가정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맑스주의자는 이들 모순들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 몇몇 학파들은 액면 그대로 이상화된 과학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많은 서구 유럽 맑스주의자 특히 유로코뮤니스트들 중에는 맑스주의 영역을 진보적인 정치경제 프로그램에만 국한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자연 과학의 오용과 독점을 비판하는 것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개념을 “스탈린주의”로 보고 거부하고 있다.


맑스주의 당에서 이런 독단적 흐름은 과학이 실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는 관심 없게 하고 과학을 객관적 실재와 동등한 것 그리고 (순수한) 진리로만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과학적 사회주의’처럼 ‘과학적’이라는 말을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말로 사용한다. 이미 엥겔스 시대에 “독일 사회주의는 최근에... 한층 더 터무니없는 잠꼬대를 지껄이며, ‘과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뻐기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엥겔스, 반듀링론) 그 이후 수십건의 체계적인 문건에서 단지 한 두 번 일어난 일을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해왔었고, 저자들은 그것을 인정해왔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유로꼬뮤니스트와 독단적인 좌파 모두 과학을 진보적이며 객관적이고 해방을 담지한 힘이라는 이상화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화려한 묘사에 맞지 않은 과학은 그것 자체로 순수하지만 단지 외부에서 탐욕과 ‘이데올로기’로 오염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학에 접근하는 유물론자는 이런 이상적인 정의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 명확히 과학은 자본주의와 함께 진화하는 것으로써 정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역할을 부르주아 혁명에서 해방의 힘으로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를 견고하게 하는 힘으로 평가하고 짧게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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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효율적이라고?

오늘 모처럼 술을 마셨으니.. 한마디 해야쥐~~

우연히 회사 사람과 이런 저런애기하다가 문득 "그래도 자본주의가 효율적이다"는 말을 들었다. 왜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효율적이라고 느낄까?

대충 함 따져 보자 정말 그런지.. 

 

DRAM을 개발한다고 해보자.  DRAM은 과거 IBM도 했고 TI도 했다.. 그리고 삼성도 하고 하이닉스도 하고 STMicroelectronics, 하타치, NEC, 도시바.. 요기다 대만업체까지 더하면 수도 없이 개발하고 있다.  이들은 각자 각자 숨어서 개발한다.   여기에 엄청난 연구비가 투자되는데, 먼저 개발한 넘들이 안 갈켜주기 때문이다. 감추는 비용은 상당하다. 각 기업마다 CIA와 같은 보안 그룹이 있고.. 마치 비행기 탑승장과 같은 x-ray투신기도 있다. 각 컴퓨터 마다 보안프로그램이 깔리고, CCTV나 RFID, 엑티브벳지 등 노동자 감시 기술을 사용하기도 한다. 또 이런 쓰잘떼기 없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드는 비용은 말하기 조차 싫다.  

 

그래서 때로는 먼저 개발된 기술을 몰래 빼끼기도 하고(빼끼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빼긴 기술을 감추기 위해 여러가지 트릭을 쓰기도 한다(역시 많은 비용이 든다). 특허를 피하기 위한 기술은 또 어떤가?  쉽게 애기하면 쓰잘때기 없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엄청난 자본과 노동자들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에 수백개의 기업들에서 이렇게 중복 투자와 함께 노동자들의 자유시간이 투자된다. 단지 쓰잘때기 없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이 게 효율적인가?

 

부가적으로 한마디 더 하면, 국내에는 국가과제를 좀먹는 날 파리들이 많이 있는데.. 물론 대학교에 많다. 이들은 우수한 두뇌를 가졌다고들 한다. (그 이유는 우수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지.. 지 잘나서가 아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정부 관료의 눈을 속여서 중복투자인 것을 숨기기 위해 과제의 제목을 머찌게 뽑는 일들을 한다.  제목을 머찌게 뽑으면 전문가가 아니면 중복투자인 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중복투자는 그렇다치고.. 이들 날파리들이 수행하는 연구 과제가 거의 모두 성공을하고 있단다.. 물론 그 성공이 거의다 거짓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눈감아 준다. 그것마져 없다면 대학교 교육은 완전 파산직전에 가기 때문에...

문제는 성공했다면서 .. 실제로 실패한 경험담을 숨기는 것에 있다. 수백억의 국가 연구비로 연구한 연구 결과(실패한 사례도 .. 그 연구에 진정성이 있다면 아주 훌륭한 결과이다) 중 가장 소중한 진정성 있는 연구 결과를 숨긴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연구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하고 "연구 윤리"어쩌고 하면서 날파리들을 욕하지 말자는 뜻임) 암튼, 수백억원의 국가 연구비가 투자 되지만 진정성있는 결과 하나 남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 또한 효율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다 아는 애긴데..) 지금 이 사회가 효율이라는 걸 따질때 빼 먹는 것이 있다. 두 기업이 경쟁해서 중복투자 해가며 기술 개발을 했고 한 기업이 승리해서 독점했다고 해보자. 이때 다른 한 기업의 노동자들은 쪽빡을 차고 서울역 한 귀퉁이에서 잠을 자야된다. 이 비용.. 이들 노동자들이 공교육, 사교육 해가며 들어간 비용도 있을 것이고 그동안 살기 위해 먹고 마신 비용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용이 모두 서울역 한 귀퉁이에 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 비용은 자본주의 효율성에 고려 대상에서 빠진다. 물론 패배한 기업에 들어간 연구비며 다양한 비용들도 다 고려대상이 아니다.

 

누가 반문을 할지 모른다. 그래도 자본주의에는 "경쟁"이라는 것이 있어 기술이 발전하지 않느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가 사회주의나 기타 대안 사회에서 "경쟁"이라는 것을 도입하지 말라고 한적이 있나? 맑스가 그런말을 한적있었나? 레닌이? 뜨로가? 내가 지식이 짧아서 인지 몰라도 없는 것 같다.  다른 사회(대안사회, 사회주의)에서도 경쟁하면 되지 않냐? 재미있는 경쟁도 많이 있다. 그러한 경쟁은 유치원 다니는 애들도  잘알 듯하다.

 

자본주의 사회가 효율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단 한가지.. 성공한 기업.. 그리고 그 기업을 소유한 극 소수 자본가들만 보기 때문이며.. 자기도 그 자본가가 될 수 있다는 환상때문이다. 일종에 감정이입......

 

명확하다.. 자본주의에서 효율적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 효율성이란 일종에 "구성된 효율성(만들어진, 각색된 효율성)인 것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미국 노동자들이 개발한 기술을 한국 노동자들이 그 기술을 이어 받아 다양한 곳에 적용해서 다시 공개하면 얼마나 좋은가?. 기존에 개발된 기술을 왜 또 개발해야 하나? X신 육갑트는 것도 아니구.. (술이 올라오니까 점점 본성이...)  이 짓이 비 현실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만은 않다. 그누 리눅스가 그러했고.. "과거" 과학기술의 발전이 그러했다.

 

경쟁?

맘에 안맞는 넘들하고 같이 기술개발할 필요가 있을까? 따로 팀을 꾸려 맘에 안맞는 넘들 보다 먼저 개발해서 그 넘들 코를 납작하게 할 수도 있다.

 

날파리?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고, 그 주인이 자신의 돈을 사용한다고 해보자.. 중복투자할 필요도 없고.. 중복투자를 받기 위해 날파리 짓을 할 필요도 없다. 또 실패를 숨길 필요조차 없다.

 

무임 승차와 보상(동기부여) 문제? 또 공유지의 비극??  (술깨고 추가함)

 

음.. 또 자본주의에서는  "무임승차" 문제와 "보상(동기부여)"문제가  없기 때문에 혹은 대안사회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효율적이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무임승차는 오히려  자본가들이다.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땅, 부동산 부자들이고 또 금융자본가들이다.  그들의 보상은 정당하며 효율적인가?  

 

보상문제(동기부여)와 무임승차 문제 그리고 공유지의 비극이 그럴싸하게 보이는 이유는

첫째로

개인의 본성을 이기적이라고 '선험적'(몰역사적, 자본주의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이기적이다라는 주장)으로 규정해 버리고.. 그 잘못된 규정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혹은 과학(?) 적으로 주입시켜.. 무임승차와 보상 그리고 공유지들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게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기적유전자.. 등등)  

 

둘째로

 "분배"라는 문제만을 보기 때문이다. 분배의 문제만 보면 어떻게 생산했는지는(또 생산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생산된 것을 어떻게 나눌 건지만 생각한다. 그러면  한정된 파이만 보이게 되고 이 파이를 찾이하기 위한 경쟁만을 생각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문제로 보인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도 문제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도 문제가 된다... 공유지도 문제고, 무임승차도 문제고 보상을 못받아서 담에 생산안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로 보인다.  결국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자본가들(혹은 국가관료들)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일만하는 것이 하나의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체로써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를 같이 참여하고 결정을 했다고 하면.. 그 속에서 혁신을 일으킨 사람들에 대한 보상 문제도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물론 여기에 관료주의 문제가 남아있다) 그리고 동기부여가 보상으로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교환을 목적으로 생산하는 사회가 아닌, "필요에 의한 생산"이 주가 되는 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필요하기 때문에 생산한다.  "필요" 자체가 동기 아닌가?  물론 개인 개인이 필요한 것을 각자가 생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때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주체들이 민주적으로 논의하는 그 과정은 개인과 집단을  (변증법 적으로<-- 사실 이 말이 쉽게 와 닿지는 않는다.. ) 묶어줄 수 있다고 본다.

 

또 공유지의 비극은 사라진다.  완전히 격리된 개인들에게 공유지를 맡긴다면 공유지의 비극이 있을 것이지만, 공동관리하고 계획하는 그런 공유지라면 공유지의 비극은 없어진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제.. 노동자가 주체로 설 수 없게 하는 단 하나의 문제 "노동자와 자본가와의 문제"만 남는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주인이라면.. 생산하든 하지않든 "굷어 죽지 않을 권리가 있는" 그러한 사회여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뭐 이만하자.. 글 적다 보니 화가나네.. (술먹은 다음날 다시 추가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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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의 빅뱅, 제로존 이론(?)

인류역사의 빅뱅, 제로존 이론(?)


이랜드 사태 등 비정규직 투쟁으로 정신없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지난 8월 <과학동아>도 아닌 <신동아>는 과학 역사상 엄청난(?) 특종을 발굴했다. “한국 재야 과학자의 제로존 이론, 세계 과학사 새로 쓴다!”는 제목으로 “길이, 온도, 질량, 시간의 무차원화… 소립자에서 우주까지 대통합”한다는 이론을 발표한 것이다. 이 잡지는 제로존 이론을 “바벨탑 이전의 세계로 복원"하고 "인류 역사에 빅뱅 초래"할 만하며, "노벨상 0 순위"라고 평가하고 있다.

아마추어(그들은 ‘재야’ 과학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과학자 양동봉씨(표준반양자물리연구원장)에 따르면, 제로존 이론으로 질량(㎏), 시간(초), 길이(m) 등 7개 기본단위를 숫자로 변환해 모두 통일시킬 수 있다고 한다. 즉 사람의 키와 몸무게를 차원이 다른 숫자로 바꾸어 더하거나 뺄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과학이론을 숫자로 통일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이비 종교의 교주이기도 한 피타고라스를 연상케 한다.


이 이론에 대한 지지층도 만만치 않다. 전 KIST(한국과학기술 연구원) 부원장이자 단국대 부총장(전기전자공학)인 오명환 교수는 “양원장의 발견은 (중략) 물리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줄 것”이라고 평가했고, 제주대 교수 이현주 교수(원자핵 공학)는 “기존 패러다임의 중대한 전환을 초래할 것이다. 노벨물리학상을 기대해도 될 것 같다”, 서울대의 문병로 교수(컴퓨터공학부)는 “그가 발견한 방법은 매우 신기하고 놀랍다.” 한국생산기술 연구원 이상목박사는 “산업적 가치는 상상의 범위를 넘어설 것이다. 실험하지 않고도 결과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에 실험활동의 90%는 사라지고 진짜 필요한 실험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이것만 해도 경제적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아울러 정보, 컴퓨터, 재료, 소립자, 생체공학 등에 끼칠 영향은 ‘엽기적’일 것이란 표현도 부족하다.”고 평가했다(지지자들의 발언은 더 있지만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지지 발언이 이쯤 되면 제로존 이론의 진실성과 무관하게 왠지 줄기세포의 악몽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제로존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 중에 물리학자는 한명도 없다.


물리학계에서는 사태 진압에 나섰다. 한국물리학회는 지난 6일 기자회견에서 '제로존이론'을 과학적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학회는 "양 원장과 그의 지지자에게 3차례에 걸쳐 논문 제출을 요청했으나 논문을 받지 못했“으며, 양 원장이 논문을 투고한 '유러피언 피지컬 저널 C'의 편집자로부터 논문 수준이 심사에 회부하지 못할 정도로 낮아 편집자가 즉각 `게재 불가(reject)' 판정을 내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제로존 이론과 인터넷


양 원장 측은, 물리학계가 검증을 위해 논문 제출을 요구했을 때, “유럽 물리학회지에서 현재까지도 심사 중인 논문을 공개한다는 것은 논문심사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어느 나라에서든 심사 중인 논문을 심사종료 전에 물리학회 등을 통하여 미리 공개한 사례는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과학자들 중 많은 수는 논문지에 발표하기 전에 인터넷 arXiv(http://arxiv.org)에 올려 토론하고 논쟁한다. 때로는 arXiv에 올려 많은 비판을 받고 논문지에 실리기 전에 스스로 철회하기도 한다. arXiv의 특성상 표절이나 거짓 데이터를 올리기 힘들다. 인터넷에 올라온 논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접근해서 오랜 시간 동안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이라도 조작된 데이터를 올렸다가는 그 흔적이 두고두고 남기 때문에 좁은 과학기술계에 살아남기 힘들다.


양 원장 측은 재야(?) 과학자답게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류에 대한 저항에서 찾기도 한다. 주류 과학계는 그물망처럼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기존 이론에 대해 매우 보수적이다. 주류이론에 도전하는 경우 논문지에 실리지 못하거나 왕따 당하기 쉽다. 양 원장 측도 같은 이유로 물리학계의 논문 검증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비밀주의는 해답이 아니다. 오히려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은 해결책을 주기도 한다. 한 예로 양자역학 전문가인 Shahriar Afshar 박사는 보어의 상보성 이론을 부정하는 실험 방법을 제안한 바 있다. 보어는 음악에서의 바흐와 같이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입지적인 존재이다.


빛은 입자적 특성(국소영역에 모여 있는 특성)과 파동적 특성(전 공간에 퍼져있는 특성)이 모두 관측된다. 상보성 이론이란 파동성과 입자성이라는 모순적 특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이 상보성 이론에 반하는 이론이란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측정할 수 있는 실험에 관한 것이다. 참고로 자연 변증법을 옹호하는 쪽에서는 상보성 이론에 반대하고 있다. 자연 변증법에 따르면 모순은 물질 내부에서 발생하고, 공존해야 하기 때문에 동시에 관측되어야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주장은 좌파 내에서 맑스의 이윤율저하의 경향에 반대하는 규모로 생각할 수 있다. 아무튼, Shahriar Afshar 박사는 자신의 논문과 제세한 실험 결과를 웹 블로거에 올려 공개토론을 제안하였고 (http://irims.org/blog/index.php/questions), 이를 통해 오히려 주류 과학계에 도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왜 이런 사건들이 반복될까?


양원장 측은 그들의 이론으로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표준 & 원천기술 국가로 확고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고, 21세기 대한민국의 차세대 성장 동력을 자연스럽게 획득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논문지보다 신동아에 먼저 발표한 이유 역시 해외 유명 학술지에 제출된 “논문의 게재 승인을 계속 기다리다가, 시기를 놓쳐 핵심 정보가 관련 외국학자들에게 유출되는 위험에 봉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즘 들어 이러한 종류의 사건들이 자주 반복되고 있다. 2005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김현탁 박사팀이 노벨상을 수상 가능성이 높은 금속 절연체 이론을 개발했다고 언론에 크게 보도한 바 있다. 이 기술로 1천억 달러(한화 약 100조원)로 추정되는 세계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과장 보도였음이 드러났다. 30조 이상의 국익을 안겨줄 것으로 예측된 황우석 줄기세포 사건도 또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유지가 발견되면 누가 빨리 점유하느냐 경쟁을 해야 한다. 배타적 소유만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므로, 안정적인 소유권이 확보될 때 까지 비밀스럽게 작업해야 한다. 과학기술은 이미 인류의 공동자산이 아닌 한 국가 혹은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배타적 소유가 확보될 때까지 숨기는 풍토는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풍토는 제로존 이론의 아류를 반복 생산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돈이 되지 않는’ 기초연구에 투자 받지 못하는 현 과학 기술계의 현실도 여기에 한 몫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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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만세II

오늘은 진짜루 술먹었다..

지난 8월 6일인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4시간 정전이 되었다.  정전이 되면..클린룸을 유지하는 모든 장치들이 멈추기 때문에 공장내에 각종 먼지들이 들어 올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반도체 공장의 정전은 큰일이다.

 

요기서 잠시 상식적으로 하나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클린룸이라는 곳은 그리 클린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깨끗한(?) 첨단산업의 더러운 비밀"에 대충 적어 놓았다.

암튼,

이 사건으로. 400억 혹은 1천억인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1천억은 좀 오버인듯하다) .. 큰 손실이 발생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음 황창규 사장의 발언은 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황 사장은 이날 기흥반도체 공장에서 기자들과 만나 "안전에 대한 사전 투자, 임직원들의 비상상황 대처 능력 등으로 인해 사태가 아주 빨리 정상화될 수 있었다"고 설명한 후 "이번 정전 사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고 말했다. "


황창규 사장은 이번 정전사태에도 불구하고 아주 빨리 "정상화"되었다고 한다. 정상화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암튼 이전상태로의 회복이라고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빠르게 정상화되었는데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다. 큰 피해가 없었는데.. 왠 전화위복? <--이 말은 좀 큰 낭패를 겪었을때 하는 말 아닌가??

다음 기사를 보자.  난 이거 보고 오싹했다.


"황창규 삼성전자(621,000 상승세19,000 +3.2%) 반도체 총괄 사장은 6일 정전 사태와 관련해 "심려를 끼려 드려 송구스럽다"며 "전공정이 완전 정상화됐으며, 이를 3분기 실적으로 증명해 보이겠다"고 밝혔다"


한 여름..오싹하지 않은가?

무슨 소린가 하면.. 일단 정황상 이번 정전으로 상당한 피해가 있었다. 그런데 그 피해를 3분기안에 만회 하겠다는 것이다. 3분기면 7,8,9월 아닌가.. 8월과 9월 2개월안에 손실을 만회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황사장은  주주자본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황창규 사장이 어떻게 그 피해액을 만회할 수 있을까? 

방법은 단 하나

주말도 반납하며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3분기에 더 쪼아 붙이는 방법!

요거 요거~~~  노동자는 (노동이 아닌) 노동력을 팔았다. 일단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들은 정해진 시간에 얼마나 쪼아 붙이느냐에 따라 자기에게 떨어지는 수익이 틀려 진다. ...  자본가들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같이 보이는 거.. 쪼으면 쪼을 수록 황금알을 낳아 주는 거!!  

그래서 3분기 실적은 무쟈게 좋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한번 외치자.. 삼성만세..


PS. 요기서 3분기 실적이 좋겠끔..장부 조작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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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만세

 

삼성전자, 인력 구조조정 시작됐다고 한다. 기사 함 보자 - 술은 안먹었다.


삼성전자는 12일 “사업부문별 상시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라 올 상반기에 60~70명의 희망퇴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희망퇴직 대상은 차·부장급(임원 제외) 5천여명이며, 통상 1년치 임금이 위로금으로 지급된다. 

 

이 기사만 보면
삼성이 올해 무쟈게 적자 났구나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올 2분기만해도 흑자가 났다.

 

삼성전자가 매출 14조 6,300억원, 순이익 1조 4,200억원, 영업이익 9,100억원의 2분기 실적을 발표했다.  사업 부문별 실적을 살펴 보면, 반도체 부문 매출은 전분기 대비 5% 감소한 4조 2,600억원, 영업이익은 39% 감소한 3,300억원을 기록했다. (삼성전자, 2분기 실적 결과 휴대폰 '선전' 반도체 '감소' 2007-07-13)

 

다만 영업이익이 39% 감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3천300억원 흑자를 냈다.. 얼마나 어마어마 한 돈인가!! 암튼 작년대비 올해 이익이 엄청 감소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고질적인 과잉생산 때문에...

작년에 삼성이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자.

 

반도체 업황이 나빠진 지난해에도 삼성전자 전체 영업이익(6조9300억원)과 맞먹는 6조6400억원을 반도체 설비에 쏟아부었다. 고비를 넘기면 또다시 ‘대박 주기’가 찾아 올 것이란 셈법이다. (삼성, 대박좇는 ‘기술 제일주의’ 함정에 빠졌나. , 한겨레, 2007-06-28)

 

여기서 국내 반도체 산업의 특징이 나온다. 특징이란건 다름이 아니라 거의 놀음판이라는 것이다. 번돈을 다 꼬로 박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려야 한다. 조마 조마 하며.. 시장은 항상 불확실하다. 아차 하면 쪽박이고 여차하면 대박이 날 수도 있다.


다 꼬로 박아야 하는(올인 해야하는) 이유는 개발되지 않은 기술들을 개발해야하기 때문이며, 기존의 장비중 핵심 장비를 모조리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핵심 장비중에 100억대를 호가 하는 장비도 있다). 대박이 나는 이유는 기술이 개발되고 다행히 그것을 흡수할 시장이 생긴다면 대박이다(특별잉여가치를 톡톡하게 챙겨먹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 70nm공정, 60nm 공정에서 Apple의 iPod라는 시장이 열렸었다. 그러다 작년 60nm에서 50nm로 ...양산 기술은 개발했으나 뚜렷한 시장이 안열렸다. SSD(Solid state disk)라고 플래시 메모리를 노트북용으로 개발했으나 HDD가 플래시메모리보다 가격이 8배 정도 싸기 때문에 시장이 열리지 못했다. (올해는 Apple의 IPONE/PMP/GPS 등에 적용을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나마 잠시.. ..

그리고 왜~ 공급과잉이 났을까? 그것은 자본주의 고질적인 문제다... 또 한번 기사를 보자.


문제는 설비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져 수익성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동안 삼성의 대규모 투자에 밀렸던 일본과 대만의 메모리 업체들은 최근 활발한 합병·제휴로 덩치를 키워 삼성에 맞서고 있다. 엘시디 분야에서도 삼성이 지난해부터 양산 중인 7세대(40인치대) 설비에 이미 대만 업체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경쟁적인 설비 투자로 공급 과잉이 좀처럼 해소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재범 엘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과거처럼 ‘대형 투자→원가 낮추기→경쟁업체 도태→수익 극대화’로 이어지는 전략이 이젠 잘 통하지 않게 됐다”며 “기술 격차도 크게 좁혀져 초기 시장에서 고수익을 누리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기사)

 

그렇다면 확실해진다. 수익율이 저하된 것은 자본주의 고질적인 문제인 경쟁과 시장의 불확실성에 따른 과잉생산이며, 또 전자산업에서는 그나마 재미를 본 특별잉여가치를 누릴 수 있는 기간도 3년에서 1년 단위로 줄었기 때문이다. 이미 착취의 법칙인 '황의 법칙'에서 잘 반영되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 그 자체이다. 그리고 두번째 핵심은 그 속에서 경영진의 경영 잘못이다.

그래서 경영진도 물갈이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악명높은 황창규 사장은 반도체 총괄과 메모리 사업부를 겸임하고 있었다. 이제 반도체 총괄만 한다고 한다. 김순택 사장도 겸임해 온 기술총괄직을 삼성전자 출신 임원에 맡겼다고 한다(삼성전자 ‘반도체발 물갈이’ 회오리). 그러니까 위기의 주범들/악명높은 노동착취의 대명사 장본인은 겸임한 것만 짤렸단다. (장난치나?)

 

매년 철야/특근으로 흑자를 냈지만 단 1년 흑자가 감소했기에

고액 연봉의 노동자들도 이제 굶어 죽을 "자유"를 누린다. 

 
 삼성그룹의 한 고위임원은 “10~20%씩 무더기로 잘라내 조직이 유지되겠냐”면서도 “전자 계열사가 어려워 사업·인력조정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만큼 예년보다 희망퇴직이 꽤 늘지 않겠냐”고 말했다. 올 하반기에는 희망퇴직 규모가 더 커질 전망이다. 삼성그룹은 지난달 초부터 계열사별로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경쟁력 강화 방안을 마련 중이다. (삼성전자, 인력 구조조정 시작됐다)

 

 

희망퇴직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희망이 없는 노동자들인가? 암튼 그들은 짤린 노동자들의 몫까지 일을 하기에..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이윤을 내야 하기에 더 많은 착취가 기다리고 있다.  

삼성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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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에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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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좌파들중 과학기술자들은 몇명이나 될까?

술먹고 하는 소리들... 이란  잡담란이 맹글었다.  물론 술먹고 맹글었다.

 

회사에서 한 친구가 있다.

학교다닐 때 공부만한 친구였으며(ㄷㄷㄷ),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친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최근 공산당 선언, 세계사편력, 러시아 혁명사,  트로츠키 자서전 (원서) '나의 생애'를 연달아 읽어

버린 친구였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한 친구다...

 

그가 질문했다.

 

"주위에 이런 애기를 할 사람이 없다... 왜 그럴까요?"

(요기서 주위란 자신의 친구들인 이공(대) 출신을 말한다.)

 

몇일간 고민해 봤다... 왜 그럴까?

 

소위 좌파들중 과학기술자들은 몇명이나 될까?  

 

잘되면 내탓 못되면 남의 탓!

... 일부 좌파들이  유물 변증법의 증거를 자연 과학에서 찾는 것을

 '깡" 무시해서 이지 않을까?

 

그들은 자연과학의 논리를 어떤 철학으로 해석해 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전혀 답을 주지 않는 무책임함을 보인다.. 그 무책임함은 자연과학 자체를

절대화 하거나... 우파의 논리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면 수용해 버리기 까지

한다.

 

과거에는

유물변증법과 자연과학은 가까웠고 그 것을 통해 유물변증법을 고민했고..

그것을 배우면서 비판했고.. 2%부족분을 더 매우고 싶어 했다.

 

그런데

 요즘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이와 관련된 책이나 고민을 찾아 보기 힘든거 같다.............

 

결론적으로 유물변증법에 대한 깡 무시에서 비롯된 자연과학(혹은 과학기술)에서 논쟁의 부재.....

이것이 문제가 아닐까?

이에 대해 한 수 부탁드린다.  (술다 깼다)

PS.

 예를 들어..

'논쟁이 왜없어? 니가 공부를 안해서 그렇지!!" 하면서

.뭣뭣에 대한 책을 참조해라(특히 쉬운 것 부터...) 는 등 애정어린 소개 부탁~~~

혼자 이것 저것 찾는데.... 한계가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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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복제는 안 돼! 그런데 동물 복제는?

인간복제는 안 돼! 그런데 동물 복제는?

/* 노동자의 힘에 기고한 내용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황우석 논문 사기 사건이후, 논쟁의 한 주역이었던 서울대 수의대 이병천 교수팀은  스너피 복제에 이어 아프간하운드 암캐 3마리의 복제에 성공했다. ‘보나(Bona)'라는 이름을 가진 개는 2006년 6월에, 피즈(Peace)와 호프(Hope)는 7월에 태어났다. 예전과 같이 열광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들의 과학적 성과와 노력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인간 복제의 경우 그 위험성만큼이나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서 몇몇 사이비 종교 집단이나 소수 과학자를 제외하고는 인간복제에 찬성하는 사람은 없다. 특이하게 1997년 당시  ‘인간 복제권 연합전선(CRUF)’이라는 단체를 구성한 동성애자들은 인간복제를 지지하였다. 그 이유는 ‘이성애자 동성애자 할 것 없이 자신의 유전자를 지닌 아이를 못 갖는 사람들에게 인간 복제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성애자 문제와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가지는 문제와는 큰 관련성이 없다.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갖는다고 동성애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신의 유전자에 집착하는 것은 유전자 결정론 혹은 우생학 등의 주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보인다. 아무튼 생명공학자들은 인간 복제가 논란이 일자 배아(인간이 되기 직전단계) 복제로 한발 뒤로 물러 났어나, 역시 난자 매매 문제 등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한발 더 뒤로 가서 동물복제의 경우는 어떤가?


동물복제의 경우 종교계나 동물 보호 단체와 환경운동가들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동물복제의 목적이 인체에 유용한 단백질을 확보해서 대량의 값싼 의약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라면, 인공장기를 가진 동물 복제 기술을 통해 인간에게 간, 심장, 허파, 콩팥 등을 제공하려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수 종자로 복제된 동물을 통해 식량문제를 해결할 목적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장기이식은 항상 부작용의 위험성이 있다. 과학자들은 동물의 장기를 유전적으로 조작해서 부작용이 없는 인간 장기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또 그것을 복제로 대량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분명 이러한 전망은 장기를 이식 받지 못해 죽어가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는 큰 희망이다.


질병 치료를 위한 동물 복제의 경우 ‘복제동물 새끼는 부모 유전형질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여러 마리가 아주 흡사한 성장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복제 동물을 ‘이용하면 비슷한 조건의 동물에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어 질병 치료법과 신약 개발이 훨씬 쉬워진다’ 예를 들어 ‘당뇨를 앓는 암수 컷을 여러 마리씩 복제한 뒤 자연교배로 많은 새끼를 낳게 하면 자라면서 같은 병에 걸리는 새끼들을 연구해 당뇨의 발병 원인을 구명하고 치료법도 찾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동물 이용을 동물 학대라는 이유로 혹은 종교적 이유로 반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미 인간은 동물들에서 음식에서부터 가죽까지 얻고 있고 한국에서는 개를, 중국에서는 원숭이를 식용으로 먹고 있다. 그리고 암 연구를 위해 ‘개발된’ 하버드 마우스라는 쥐는 유전자가 조작되어 항상 암에 걸려 태어난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에서 동물복제를 단순히 동물 학대나 종교적 이유로 무조건 모라토리엄(연구 중지)을 선언할 수 는 없다. 소외받는 환자들에게는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그것이 삶의 전부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물복제 기술의 경우, 노동자-민중의 관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 하면 과학기술자도 그 기술을 정확하게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오직 이윤의 논리 속에 강제적(무의식적으로)으로 끌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생명과 관련된 것은 엄청나게 많은 환경 변수들이 장기적으로 상호작용 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병명을 모르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주변 환경 역학조사는 하지 않고 이 약 저 약 먹여 보는 것이 치료의 전부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제약 회사의 이윤만 늘리는 것이지 결코 의사라는 과학자가 해야 할 치료 행위가 아니다.


어느 정도 명확하게 과학적 사실이 밝혀진 경우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비타민 C가 감기나 암의 예방에 좋다 통설이 있는데, 이는 노벨 화학상과 평화상 수상자인 폴링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실험을 통해 비타민 1g 이상 먹은 사람의 45%가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고 또 하루에 10g 비타민 C를 복용한 말기 암 환자 100명의 수명이 복용하지 않은 말기암환자에 비해 3∼4배 연장되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국립암연구소(NCI) 실험 결과 분석에서 비타민 C는 심리적 효과이외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폴링의 암환자 실험의 경우는 환자 선정 방법 자체가 틀렸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결과임을 밝혔고, 또 자체 실험에서도 큰 효과가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거대 제약회사에서 제조된 비타민 C는 병원에서 약국에서 절찬리에 팔리고 있다. 이 처럼 생명체에 대한 실험 결과의 경우 항상 숨어 있는 1인치가 있다. 


숨어 있는 1인치 - 바이러스와 종의 다양성(species diversity)


의료용 동물 복제에서 위험성은 동물 속에 존재하는 바이러스에서 찾을 수 있다. 보통 바이러스가 다른 종의 동물로 이전되면 더 치명적인 새로운 종으로 변종될 수 있다. 독감은 돼지나 오리에서(물론 조류독감은 조류에서) 전염된 것이고, 페스트(흑사병)는 쥐에서, 천연두, 홍역과 결핵은 소에서 그리고 백일해는 개와 돼지에서 전염된 것이다. AIDS 역시 아프리카 야생원숭이가 지니고 있던 바이러스가 인간으로 전이되어 치명적으로 변종된 것이라는 증거들이 있다. 복제동물에서 생산된 장기로 장기이식을 한다면 이러한 위험성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예로부터 자연 상태의 동. 식물의 종(혹은 유전자)은 매우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구 환경이 갑자기 변한다 하더라도 생태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다양한 생물 종들이 존재한다면 변화된 환경에 잘 적응하는 동. 식물들이 존재할 확률은 높아지고, 이들이 번식해서 생태계는 유지되었다. 그런데 특정 자본이 선택한 동. 식물들에 의해 종(혹은 유전자)의 다양성이 사라졌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시점에 갑작스러운 환경변화가 있을 때 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동식물들은 멸종할 것이다. 확률적으로 다양성이 사라진 특정 동. 식물들이 우선 멸종할 것이다. 또 자연계는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기에 생태계 전체의 교란까지 예상할 수 있다. 자칫 종의 다양성을 해친다면 후대 사람들에게 우리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게 될지도 모른다.


형질전환이란 외부로부터 주어진 DNA에 의하여 생물의 유전적인 성질이 변하는 것을 말한다. 형질 전환의 경우 자연적으로 발생하기도 하며 생물학적인 교배나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위적으로 발생되기도 한다. 모든 식물들이 오랜 진화 기간 동안 형질 전환을 거쳐 왔다. 문제는 형질전환이 인위적일 경우 종의 다양성, 유전자 다양성은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해충과 제초제에 저항성 유전자를 갖는 유전자 변형작물(GMO)의 경우 이들 유전자는 쉽게 생태계속으로 전이되었다. 그래서 슈퍼잡초와 슈퍼 해충을 발생시키고 다시 더 강력한 제초제가 필요한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결국 생태계는 교란되고 여러 가지 종들이 파괴되고 획일화되었다. GMO를 가장 많이 생산-수출하고 있는 미국의 환경청(EPA)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숨어있는 98인치-자본주의


동물 복제 기술은 생물 종의 다양성 문제에 기여할 수 도 있다. 희귀동물이나 멸종위기 동물을 복제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세포 복제 동물의 경우 정상 동물 보다 질병에 약하거나 비정상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복제양 돌리를 다시 복제해서 태어난 새끼 양들은 비정상적이었고 정상적인 새끼 양에 비해 사산하는 비율이 여덟 배나 높았다고 한다. 복제양 돌리 역시 초기에 노화조짐이 보였고 5살 때는 관절염을 결국 6살 때 폐질환을 앓다가 안락사 당했다. 희귀동물이 체세포 복제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야생상태로 돌려보낼 수 있을지 미지수이다. 무엇보다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천억의 연구비를 투자해서 얻은 기술을, ‘돈이 되지 않는’ 희귀동물과 멸종위기의 동물을 복원하는데 사용할 이유가 없다.


복제동물을 이용해서 장기를 생산할 경우, 설사 아무 문제 없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의학은 정작 중요한 그 질병들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다만 그 질병에 대한 치료에만 관심이 있다. 그래야지만 질병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또 치료약에 대한 요구는 증가하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자가 직장 내 작업환경에 의해 간이 나빠져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의사는 간 이식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 당장 급한 것은 간이식일 것이다. 하지만 간이 나빠진 진정한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그 노동자는 이식 후 다시 간이 나빠질 것이다. 또 간을 이식하고, 또 간을 이식하고, 결국 노동자의 삶은 피폐해지고 자본가의 주머니는 불룩해 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량 동물의 대량복제는 식량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지구상에서 식량문제는 식량부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현재 생산된 세계 식량은 인구의 두 배 이상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제 3세계의 민중들은 1초에 한명 꼴로 굶어 죽고 있다.  동물복제를 통해 이러한 왜곡된 구조를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숨어있는 99인치를 찾는 해법


 우리는 동물복제 기술에서 99인치를 보고 있고, 나머지 1인치만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동물복제 기술은 언론과 과학 저널을 통해  1인치만 보일 뿐이며, 나머지 99인치가 숨어 있다. 이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대부분 과학기술자에게도 역시 마찬가지 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숨어있는 99인치가 1인치(장미빛 기술)와 같은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첨단 기술들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가 동물복제 연구에 대한 모라토리엄(연구 중지)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것은 동물복제 기술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통제가 필요한 강력한 이유가 된다.  


그 시작은 동물 복제 기술에 대한 노동자-민중 관심이다. 퀘퀘먹은 이야기 같지만, 노동자-민중들이 첨단기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해야 한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년한해 동안 '디시 인사이드'의 '찌질이'들은 당시 세계적인 과학자(황우석)와  세계적인 과학저널(사이언스)지를 대상으로 세계적인 논문의 위작 여부를 밝혀 내었다. 일반 노동자-민중들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통제할 수 없는 과학기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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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옥~꼭 숨어라. 노동자가 보인다.

 

위성위치추적시스템(GPS; Global positioning system)은 이제 일상 속에 필수품이 되어가고 있다. 길안내 뿐 아니라 과속 범칙금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있다. 휴대폰의 위치기반서비스(LBS: Location Base Service) 등 요즘은 GPS를 내장해서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된다.


GPS는 내브스타(NAVSTAR : Navigation Satellite Timing and Ranging)라는 위성을 통해 위치를 확인한다. 이들 위성은 2만 200km의 지구 상공에 있는 6개의 원궤도에 원자모형처럼 분포되어 있다. GPS수신기로 3개 이상의 위성으로부터 정확한 시간과 거리를 측정하여 3개의 각각 다른 거리를 삼각 방법에 의하여 현 위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민간용의 경우 수평·수직 오차가 10∼15m 정도이며 속도 측정 정확도는 초당 3cm정도나 되며,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 천리안(千里眼)의 GPS 기술은 많은 것을 찾아 준다. GPS 칩이 내장된 목걸이와 반지 등을 이용해 잃어버린 아이나, 치매 노인 그리고 애완동물을 찾아준다. 자동차, 항공기, 선박에서는 길을 찾아 주고, 생태연구를 위해 희귀동물을 추적해 주기도 한다. 심심찮게 자살을 막았다는 소식도 들린다. 또 성범죄자의 재범을 막기 위해 감시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플로리다 주(2005년)와 위스콘신 주(2006년)에서 성범죄전과자 'GPS 발찌'를 채우는 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GPS와 같은 첨단 정보 통신 기술을 이용한 상품은 최근 들어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CCTV, 인터넷도 있고, RFID 및 IC카드도 있다. 이들 기술들은 점점 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며 점점 더 많은 것을 찾고 또 감시하게 설계된다.



 

태생의 한계


1978년 미국에서 처음 발사한 내브스타(NAVSTAR : Navigation Satellite Timing and Ranging) 위성은 군사 목적이었다. 냉전이 한참인 1982년에는 핵탐지 장치를 내장했고 실제 걸프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1990년대 들어 내브스타 위성 수가 24개로 늘어났고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GPS 뿐만 아니라 CCTV, 몰래카메라, 전자신분증, 생체인식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인터넷도 시작은 군사 기술이었다. 1969년에 미 국방성은 알파네트(ARPANET)라는 컴퓨터 네트워크(망)을 구축했는데, 연구원들과 군납업체간의 정보공유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역시 1990년대 이후 대중화되었고 아주 빠른 속도로 상업화되었다.


잘나가는 첨단 군사 기술이 시장에 진입하려는 이유는 냉전 종식이 주요한 원인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마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첨단 기계와 같은 고정자본의 비율을 늘여왔다. 그것이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의 과학기술 혁명이었다. 그러나 고정 자본의 확대는 생산을 용이하지만 상품의 가치도 하락시켜 장기적으로 이윤율을 감소시켰다. 이로 인해 자본 간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졌다.


치열한 경쟁 속에 자본이 살아갈 방법은 2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방법이고(요즘 유행하는 말로 블루 오션(Blue ocean전략)이라한다) 나머지 하나는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를 높이는 것(Red ocean전략)이다.


인터넷, GPS 등의 첨단 정보 통신 군사 기술은 소위 블루 오션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들 첨단 술이 시장에서 성공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인터넷으로 불어온 신경제의 거품, 이어지는 나노 기술과 황우석으로 대표되는 바이오 기술의 거품만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기술은 점점 레드 오션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런 첨단 기술은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보다 확실한 고객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고객은 일반 노동자-민중, 자본가들, 그리고 국가(기관)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 중 자본가와 국가는 군사기술의 특징을 매우 필요로 하는 확실한 고객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술은 고객의 필요(needs)에 반응한다.


첨단기술의 고객 I : 국가-정부


 국가라는 개념 자체에서 한 계급에 대한 독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래서 누구도 완전히 민주화할 수 없다. 국가가 정보 통신 기술의 고객이 되는 경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새로운 시장을 위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노동자-민중의 투쟁을 감시하기 위해서 이다.


 전형적인 모습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한 미국에서 볼 수 있다. 최근(2006년 10월) 부시 정부는 테러리스트 활동의 패턴을 찾기 위한다는 구실로 블로그와 E-mail에서부터 정부 문건과 보안 문건에 이러기 까지 광범위한 양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 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2001년 9·11테러 이후 소위 '애국법'을 통과시켜 미국 정부의 감시권을 인터넷으로까지 확대 시킨바 있다. 그 결과 연방수사국(FBI)은 법원명령 없이도 인터넷 사용자들의 진짜 신원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미국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 : NSA)주도하에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5개국의 국가첩보 기관에서 ‘에셜론(Echelon)’이라 불리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1971년부터 도입된 이 에셜런은 전 세계 전화, 이메일, 인터넷 다운로드, 위성송신 등을 포함하여 매일 30억 통신을 가로챌 수 있으며 첨단 장비를 도입해 가장 핵심적인 정보만 걸러 수집할 수 있다고 한다(http://www.echelonwatch.org/) 본래는 테러리스트들을 겨냥해서 만들어진 에셜론은 그린피스나 영국에 있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같은 그룹들을 모니터하는데도 사용되고 있다.


일본도 지난 2003년부터 총 400억 엔(약 4천억 원)을 투자해서 `주민번호 네트워크'를 구축하였다. 이 제도를 통해 모든 국민에게 11자리수의 번호를 부여하고 각 지방자치단체의 컴퓨터와 연결해 국민정보 관리를 일원화하였다. 


정보 통신 기술이 일찍부터 뿌리 내려온 한국의 경우는 이 분야에 있어서는 선진국(?)이다. 1968년 박정희 군사 정권 때부터 손가락 10개 모두 지문날인을 강요하고 각 개인마다 13자리의 고유번호를 할당하는 주민증 제도를 도입하였다. '간첩 색출'을 위해 도입하였다고 하지만, 이후 독제 정권에 저항하는 노동자-민중을 색출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러나 군사독제가 사라졌다는 지금 순간까지도 이 제도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인터넷 등 정보 통신 기술을 발판으로 더욱 확대되고 있다.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는 기존의 주민증 제도와 정보 통신 기술이 결합하여 노동자-민중의 개인 정보를 전자적으로 통합관리하기 위한 전자 주민 카드 제도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때 발표된 전자주민카드에는 주민등록증, 주민등록 등초본, 운전면허증, 의료보험증 정보, 인감 및 지문 등 6개 분야 총 42개의 정보가 저장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자주민카드를 반대했던 김대중 대통령(국민의 정부)이 당선되자 이 사업은 전면 백지화 되었다.


국민의 정부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주민등록증을 플라스틱으로 교체하면서 또다시 10손가락 지문 날인을 강요하였고 통합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려 하였다. 그리고 2001년에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구축해서 당사자의 동의 없이 학부모와 학생들의 개인정보를 시 도 교육청으로 이관해서 통합관리하려고 한 바 있다. 교직원 노동조합과 인권 사회단체에서 강력하게 반발하자 2003년에 교육, 학사 입(진)학 등의 분야를 분리하고 나머지 24개 영역을 NEIS로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참여 정부에 와서는 오히려 과거 전자주민 카드 부활을 꾀하고 있다. 노무현 참여 정부는 ‘정보화 시대에 적합한 주민등록증 발전모델(2006년)’을 발표하면서, 현재의 주민등록증을 IC칩을 장착한 스마트카드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실행되면, 지하철, 버스, 현금카드 인출기, 주민등록 등초본 발행기 그리고 병원 등 현금거래를 하거나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는 모든 곳에 스마트카드 리더기가 설치될 것이다. 이 스마트카드 리드기는 중앙의 데이터베이스와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기관(예를 들어 경찰, 공무원)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특정 개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 통합된 데이터베이스가 유출될 때의 위험은 말할 것도 없다.


 정부가 끈질기게 통제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이유는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위험수위이거나 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더 이상 노동자-민중의 안정된 생존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이유는 자본이 신기술로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안정적인 발판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전자주민증의 장당 가격은 1만 원 정도이므로 2009년쯤 발급대상 인구를 4000만 명으로 보아 소요예산을 5000억 원가량으로 예측하고 있다. 신규발급과 재발급을 포함하면 해마다 200만장 정도가 새롭게 필요하므로 끊임없이 매출을 일으키는 신통한 요술방망이인 셈이다. 전자주민카드의 필요를 강하게 주장하는 곳은 한국조폐공사 컨소시엄인데 여기에 삼성에스디에스 등 대기업이 두루 참여하고 있다.


첨단기술의 고객 II : 공장-자본가


공장(작업장)은 노동자-민중들이 삶의 중요한시기를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공장이라는 곳은 좀 이상한 특성을 가진 공간이다. 21세기에 부자 세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도 하며, 중요한 의사 결정권은 한 사람, 혹은 돈을 주고 구입한 표(일명 주식)가 많은 사람에 의해 독단적으로 결정된다. 불행히도 노동자는 이러한 고약한 공장(회사)에서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자유밖에 가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자유 의지(?)'대로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상품처럼 판매해야 한다.


문제는 노동자의 노동력은 일반 상품과 같이 구매되지만, 인간과 분리할 수 없는 독특한 상품이며, 계약된 시간동안 노동량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자본가는 보다 많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 노동력을 뽑아내고자 하지만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재충전하며 보다 인간다운 생활을 추구하고자 할 것이다. 이로 인해 공장 속에서 자본가는 자연스럽게 노동자를 '통제'하고 '관리'할 필요성(욕구)을 느끼게 되고, 첨단 감시 기술에 대한 욕구가 생긴다.


2004년에 미국의 모바일 트래킹 업체인 조라(Xora)는 넥스텔 GPS폰 용 소프트웨어를 선보였다. 당시 1600여개 기업들이 이 서비스를 신청한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된 적 있었다. 이 서비스는 직원이 허용구역을 벗어나 술집이나 공원 같은 제한구역으로 진입할 경우 사무실에 경고를 보내는 기능이 있다(ZDNET 2004년 10월 1일) 미국의 경우 GPS 기능이 가능한 휴대폰을 7천여 개 기업들이 구매해 수만 명의 직원들에게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으며(USA Today 2006년 8월), 해마다 감시 장치를 도입하는 기업들은 늘어나고 있다(표 1참조)

부문

항목

2001년

2005년

컴퓨터

웹사이트 감시

63%

76%

컴퓨터 파일감시

36%

50%

E-mail감시

47%

55%

전화

전화사용 시간 번호감시

43%

51%

 

녹음된 내용감시

12%

22%

CCTV

노동자 

15%

16%

 

 표 1. 2001년과 2005년 노동자 감시 비교. 자료:American Management Association. 2001년 435개, 2005년 526개 기업 대상

 

대규모 공장 제도가 발전하던 19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장인의 기질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숙련 노동자를 통제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에게는 기술 숙련도만큼 상당한 권한과 작업상의 자율성이 인정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공장이 "병영적 규율이 만들어져 이 규율이 감독 노동으로 발전한"공간이 되어 버린 것은 19세기말 테일러주의(Taylorism) 노동관리 방식과 포드 주의 생산 방식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이때부터 소위 주어진 시간에 최대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과학적 관리'가 시작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은 보통 사건을 분석할 때 그 원인을 독립적인 최소단위로 나누어, 각각의 특성을 분석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원인을 그 최소단위로만 해석해 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위장이 나빠서 찾아온 사람에게 위장과 인간을 분리해 생각하고 다시 위장에서 박테리아균을 찾아낸다. 그리고 대응책이란 단지 그 박테리아를 없애는 일이다. 그러나 환자는 의사가 처방한 약만 먹다 간이 나빠져 다시 병원을 찾게 되거나 내성이 생긴 변형된 박테리아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과학이란 그 박테리아가 생긴 원인이 무엇인지, 그 속에 환경적 사회적 영향은 없는지, 그리고 박테리아를 죽이기 위한 처방이 다른 장기에는 어떤 영향이 있는지 등은 복합적인 분석을 필요로 한다. 노동자의 노동을 일면적으로 분석한 테일러 주의도 마찬가지의 부작용을 낳게 된다.


테일러주의의 과학적 관리의 핵심은 구상과 실행으로 분리(소수 관리자에게로의 모든 지식과 정보의 독점)해 노동자들의 숙련을 제거하고 이 중에 구상 기능을 관리 영역에 두어 공장 관리를 재조직 하는 것이다. 여기서 숙달을 숙련을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숙달은 주어진 일을 문제없이 단순 반복적으로 수행해서 몸에 익숙해진 것이고, 숙련은 변화와 이상에 대한 대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오랜 시간 누적적으로 축적되며 정신적 육체적 능력을 말한다.


또 분리된 실행영역을 완벽하게 통제하기위해 노동자의 신체 및 도구 공구 등을 분석할 수 없을 정도까지 미세하게 분할해서 관리자들에 의해 최적의 상태로 재조직 한다. 심지어 정신까지 분석해서 노동과정에서 일체의 불필요한 낭비를 제거한다. 이를 통해 작업 순서도, 공정도, 표준 동작 및 작업 기준들이 관리자들에 의해 구축되었다. 노동자의 통제를 위해 의사 결정에 있어 강력한 중앙집권화와 노동의 광범위한 분업체계가 확립된다. 맑스의 말대로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래 공장은 보다 완벽한 통제를 위한 사용자와 노동자들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테일러주의의 완벽한 통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상 생산성 향상에 따른 일정 몫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해주는 타협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되는 이윤율 하락으로 이 타협안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결국 테일러주의적 관리와 통제 기제들은 노동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었고 더 이상 생산력 증가를 기대하며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팀제와 같이 '유기적' 조직과 스스로 '책임자율성' 을 갖는 통제 방식이 등장했다. 이는 노동에 있어 구상과 실행을 일정 부분 통합하고 노동자들에게 자유재량권을 일부 양도해 주고 있다. 이것을 노동자 저항에 따른 자본가들의 양보로 볼 수도 있고 또 노동자가 노동과정에 의식적인 참여를 증대하고 저항의 요소를 더욱 강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인터넷, GPS 등 정보통신 기술이 감시 기술로써 자본가들에게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상당한 통제 능력을 부여해 주고 있다면 이야기는 틀려진다.


전자 판옵티콘


기존의 통제 방식이 작업반장이나 감독에 의한 수동적 통제 방식이라면 정보통신 기술은 자동화된 통제 방식을 제공한다. 자동화된 통제 기술은 자본이 원하는 모든 기능을 쉽게 구현하게 한다. 우선 24시간 감시가 가능하며, 선택적으로 감시 장치를 보이게 하거나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 전화, 인터넷, CCTV 등 이미 일상화된 전자 장치들을 서로 연결해서 네트워크화 하고 다시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할 수 있다.


자본가가 감시 장치를 은폐하는 경우는 보통 국가가 선진 노동자-민중을 감시하는 경우와 유사하다. 2004년에 삼성 SDI가 ‘친구 찾기‘라는 이동통신사의 위치추적 서비스를 이용해서 '일반 노조위원장' 등 6명을 감시한 사례와 같이 노조 설립을 방해하거나 기존의 민주 노조를 와해할 목적이 있을 경우에 사용한다. 이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많은 사회단체에서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사용자는 전자장비에 의한 감시기법을 도입할 때 사전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해당 노동자에게 제시해야 하고 △사용자는 감시기법을 도입할 때 공개적이고 투명한 방법을 통해야 하며 △도입을 하더라도 극히 제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사실상 이 주장은 전자 감시 장치의 도입을 오히려 합법화 시켜버리는 역할을 한다. 자본가가 감시 장치 도입할 때는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기도 하지만, 기입비밀 보호라는 명목으로 (CCTV, E-mail 및 인터넷 감시, 전화도청) 혹은 노동자들이 위험에서 방지하기 위해서(CCTV) 때로는 경영혁신 혹은 업무 성과를(ERP, 타코미터, GPS) 위해 혹은 감시 인력(관리 인력)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에 도입된다. 또 극히 제한적인 영역(?)(화장실 제외, 휴게실 제외, 노조사무실 제외)에 설치된다. 사실 인터넷과 같은 것은 제한된 영역이란 것이 무의미하다. 그리고 모든 감시 장치들은 노동자들이 확인할 수 있는 곳에 설치되고 감시하고 있음은 사전에 ‘투명하게’ 공지된다.


미국경영협회와 e폴리스학회가 2005년 발표한 '전자 모니터링과 감시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526개 기업 중 5%(25개)가 휴대폰을 모니터하기 위해, 8%(46개)가 회사차량을 추적하기 위해 GPS를 사용하며, 약 75%는 직원들의 웹사이트 접속을, 65%는 부적절한 웹사이트로의 접속을 차단하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감시 형태도 다양해서 콘텐츠, 키보드 사용 및 시간(36%), 직원들의 컴퓨터 파일을 저장해 검토(50%), 이 메일을 저장해 검토(55%)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발신 전화 추적은 2001년도에 9% 였지만 이 보고서(2005년)에서는 51%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한국의 노동자도 이러한 감시 통제 기술에서 예외는 아니다. 지난 1998년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에서는 노동자의 모든 행적으로 추적 감시할 수 있는 RF카드를 도입하였다. 또 한국타이어 대전공장은 DAS라는 작업관리 컴퓨터시스템을 도입하여 생산계획량에 미리 시간․분․초 단위로 책정하여 노동을 통제하였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화장실과 휴게실에 갈 때도 컴퓨터에 입력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2003년 7월, <노동자감시근절연대모임>의 발표에 따르면 조사사업장(207개)의 89.9%가 감시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감시방법도 CCTV 설치, 전화 송수신 내역조회, 인터넷 사용 및 하드디스크 감시, 전자신분증 사용 등 이중삼중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레미 벤담이 19세기에 설계한 판옵티콘(Panopticon)이라는 원형 감옥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바깥쪽에는 죄수들의 방이 있고 중앙에는 감시탑이 놓여 있다. 죄수들의 방은 항상 밝게 하고 유리로 되어 있어 언제든지 볼 수 있지만 감시탑은 항상 어두워, 누가 감시를 하는지 심지어는 사람이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벤담의 판옵티콘은 현대 공장(작업장/회사)과 유사하다. 감옥과 같은 골방은 아니지만, 8시간 이상 공장이라는 곳에 갇혀 있다. 그곳에는 전자 감시 장치를 통해 언제나 감시받고 있고, 감시 장치들의 위치는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감시자는 정보통신 기술 뒤에 숨어 은폐되어 있어 보이지 않는다.


판옵티콘 속에 죄수들은 설사 감시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항상 감시 받고 있음을 느끼며 생활하게 된다. 항상 감시 시선을 내면화하여 감시자가 없어도 스스로를 규제하며 감시받는 것과 같이 행동한다. 공장의 전자 감시 장치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효과가 있다. 설사 감시자가 없다고 하더라도 항상 감시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에 감시 자체를 내면화 해버린다. 한마디로 알아서 기게 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하다. 그런데 전자 감시 장치는 실제로 24시간 작동 가능하며 지역적 한계를 초월하여 모든 행적을 자동적으로 추적할 수 있기에 판옵티콘 보다 오히려 더 엄격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감시 장치가 있기에, 자본가는 노동과정에서 구상과 실행을 통합을 허락하며 팀제, 자율책임자와 같이 노동자들에게 자유재량을 줄 수 있었다. 말하자면 공장은 자율을 가장한 '전자 판옵티콘'인 것이다.


첨단 기술을 통한 역감시-역생산의 전제조건


다양한 경로로 모여진 노동자들의 개인 정보는 자동 분류, 분석 선택되어 간단한 작업지시와 평가 보상을 위한 정보를 제공한다. 실제로 자신이 노동한 만큼의 보상을, 즉 '노동에 따른 분배'를 받고 싶어 하기에 CCTV와 같은 감시 장치 설치를 찬성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그러나 감시의 목적은 노동에 대한 보상이 목적이 아니라 보다 많은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기위해 노동 강도를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가장 강도 높게 노동한 노동자들의 기록은 감시카메라에 생생하게 기록되고 이를 통해 보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순간일 뿐이고 이후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 만큼의 노동은 강요한다.


이것은 '노동에 따른 분배'라는 주장에 깔려 있는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른다. 노동에 따른 분배를 위해서는 그 노동을 평가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평가자와 피평가자가 있고, 평가자는 반드시 피평가자를 감시해야 한다. 이렇듯 감시의 문제는 바로 생산의 문제(노동과정의 문제,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노동생산-감시의 악순환을 끊을 방법도 이 관계 속에 있다. 만약 자신이 매우 필요한 물건을 만든다고 할 때, 감시 장치가 필요할까? 그렇지 않다면 해답은 간단하다.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생산해야 하는지를 지역이나 공동체에서 토론하고 그 정당성을 생산자와 이용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 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산, 계획에 참여 한다면 감시 장치나 감시자는 필요 없을 것이다. 정보 통신 기술은 감시 장치가 아니라 토론 장치 혹은 의견 수렴 장치로 개발되어 지역 간 차이와 시간적 비용을 줄여 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유토피아적라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공간에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와 같은 방식으로 개발하고 발전하고 있다.


혹자는 이런 식의 생산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예비 상품들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해 쓰레기통으로 사라지는 모습들, 이미 개발된 기술인데도 특허를 피하기 위해 2중 3중의 중복 개발하는 모습들, 수 천 원 하는 식수 문제만 해결해도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지만, 부유층의 질병을 치료에만 수 조원의 연구비를 투자하는 왜곡된 기술 생산구조! 이러한 지금의 시스템 보다는 매우 효율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인터넷, GPS 등 첨단 군사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본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것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그들의 의도대로 변형 발전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의 일관된 욕구는 노동자-민중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이들 기술이 시장에서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수용할 때부터 노동자-민중을 위한 가능성을 포함하게 되며, 만약 노동자-민중의 투쟁이 있을 때는 그 가능성은 증폭된다.


예를 들어, 국가차원에서 혹은 공장 내 도입되는 감시 장치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투쟁은 첨단기술이 감시 장치로 이용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인터넷은 초기 군사 기술로 시작했으나, 상업화되기 이전에 학교와 연구소를 축으로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악명 높은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도 초기 인터넷의 위력을 과소평가해,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이 인터넷을 다른 첨단기술보다 빠르게 노동자-민중들의 욕구를 수용할 수 있게 하였다.


현재 인터넷은 자본의 개입으로 상당히 왜곡된 모습으로 변형되고 있지만, 때로는 저항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멕시코 농민 반군 사파티스타의 사례는 정부군을 감시한 모범적인 사례로 소개된다. 그들이 Fax를 통해 자신의 소식을 좌파 언론에 전달하면 이들 언론기관과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에 전송되었다. 멕시코 정부의 허위 정보와 정부군의 유혈진압은 인터넷을 통해 고발되어 수많은 주목과 연대를 이끌어 내었다. 이러한 사례는 가까운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학교 내 교사의 폭행을 휴대폰 카메라를 이용해 인터넷에 고발하는 학생의 역할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을 ‘역감시’라 부른다)


또 인터넷은 아직 토론과 공유의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생산자 스스로 필요한 기술을 생산하고, 발전시키고 있는 공동체(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도 있어 자본과 대립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음악, 영화, 책 등 무차별적으로 공유하며, 요즘은 디지털카메라, 캠코더를 통해 직접 콘텐츠를 창작한다. 이를 UCC(User Created Contents)라고 한다(이것을 ‘역생산’이라 부르자). 이들의 문화는 부족하긴 하지만 분명 변화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문화가 소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성과가 인터넷 포털 자본의 이익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 이것이 문화영역뿐 아니라 다른 생산의 영역에 까지 확대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본가와 국가의 감시 장치를 노동자-민중에 의한 역감시 장치로 돌리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그것은 ‘현실 공간’에 자본가-국가를 규제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위협적인 실체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소프트웨어 공동체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이토록 위협적인 이유가 기술적으로 정치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강력한 실체의 역할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사파티스타의 인터넷 역감시가 그토록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현실 공간에 투쟁의 구심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레닌이 당시 첨단 통신(?)장치인 전국적 정치신문 [이스크라]를 발간하면서 밝힌 목적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이 신문을 통해 "동지들 사이의 논쟁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였고,”존재하는 차이의 깊이를 분명히 하고, 모든 각도에서 논쟁되는 문제를 토론하고, 혁명운동의 다양한 견해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전문분야‘의 대표자들이 필연적으로 빠지는 극단과 투쟁하기 위하여 모든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노동자들의 모든 견해들이 펼쳐지는 공개적인 논쟁"을 벌여 나갔다, 무엇보다도 그가 정치신문을 발간하려는 주요한 목적은 “공장과 도시노동자들 사이에 강고한 혁명조직을 창출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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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과학철학 IV

 *) 노동자와 과학철학III은 현장에서미래를 2006년 9.10월호(제123호)에 실려 있습니다.

 

[번역]노동자와 과학철학 IV

[출처]http://easyweb.easynet.co.uk/~socappeal/philosophy/chapter6.html

 

포퍼주의 철학의 빈곤


일부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만큼 그렇게 불합리한 것은 없다.

- 키케로 Cicero, 예언에 대하여 De Divinatione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일종에 코미디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가장 거만하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과학적인 이론들이 다른 모든 철학 사조를 밀쳐내고 그들 스스로 과학 철학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파티에서 불청객과 같은 지식인이었다. 때때로, 파티에 사람들이 너무 얌전하거나 떠들썩한 것을 싫어해서 문을 닫지 않고 파티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그 불청객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만약 누군가가 안에서 ‘그래 괜찮아 그들은 내 친구야’라고 소리친다면 [그 불청객이 파티에 참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닐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들은 함께 일했으며, 소위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들의 접근에는 차이가 있다. 보어는 기본적으로 실용주의적 과학자였고, 하이젠베르크는 더 철학적으로 접근이었고 한동안 논리 실증주의 이론을 받아 들였다. 결과적으로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 전체에 주관적 관념론의 정신이 스며들었다.

 

이러한 경향이 철학의 영역에서 ‘현대과학’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들은 과학자들에게 그들의 작업을 가르쳐야 했다. 만약 그들이 정말로 과학 철학이라면 모든 과학자들은 그것들을 중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학적 방법’으로 일을 진행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사실 바보라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사람들이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혹시 농담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면, 정신분석학에 그들이 한 일들을 보기 바란다[1].

 

문제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소위 논리적 타당성의 기준은 실제 과학 실천 자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다. 가장 실천적 과학자들은 과학철학자들이 세운 기준에 찬성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이없어한다. 그리고 파티에 불청객이 떠들거나 말거나, 파티에 시끄러운 불청객을 피해서 부엌에 가 있는 사람처럼 과학자들은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수행한다. 물론 그 과학자들은 시끄러운 잡음을 내는 불청객을 막을 수는 없다.

 

가장 시끄러운 불청객 중에 한 사람이 칼 포퍼였다. 마치 스스로 황제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처럼 포퍼는 그 스스로 과학 철학자로 명명했다. 그리고 특정 주제에 대해 국민투표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전 세계 규모의 재판을 열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 맑스에 반대해서 맹렬하게 논쟁하는 중에, 그는 많은 (완전히 일방적으로 해석한) 과학적 방법에 대해 글을 썼다. 이런 난센스는 그렇게 오랫동안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은 현대 철학에서 공백의 척도를 보여 준다.



귀납과 연역?


포퍼는 1934년에 당시, 비엔나에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포퍼는 귀납적인 방법을 완전히 거부했고 모든 결론은 논리적 연역으로만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포퍼는 관찰에 기초한 귀납적 방법을 배제하였다. 포퍼에게서 “과학적으로 가치 있다.”는 증명서를 받기 위해서, 과학 이론들은 내적으로 연속성이 있어야 하고 같은 말을 반복(동어 반복)하지 않아야 하며 실험해야 할 것들이 예측되어야 한다. 게다가 그는 논증의 결과는 이론을 증명할 수 없고 단지 거짓임을 입증(반증)할 수만 있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참신하게 들린다. 그리고 형식논리학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과학에서의 실천과 관계가 거의 없다. 한 물리학자는 “포퍼의 생각은 전략적으로 튼튼해 보이지만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허술하다. 바꾸어 말하면 (형식 논리학적) 이론은 정교하지만 구멍이 많은 우산처럼 의도한 목적을 위해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귀납(라틴으로 inducere 유도하다)은 논증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알려졌지만 베이컨과 갈릴레오가 지지하였고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논증 형식으로써 귀납법은 개별 사실들로부터 일반 명제를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항상 경험에 기초해서 일반화를 시킨다(이끌어낸다). 종종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귀납적 논증의 예를 들어보자. 한 아이가 불에 손을 데였다. 그리고 경험에 따라 불에 너무 가까이 가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불은 (일반적으로) 탄다.” 이것이 귀납적 논증이다- 구체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이끌어 내는 방법. 이 경우 결론은 유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완전히 확실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예를 들어 보자. 칠면조는 매일 아침 손에 옥수수를 든 친절한 숙녀의 방문을 받았다. 귀납적 논증법에 의해 칠면조는 이 친절한 숙녀의 방문은 바로 음식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수백 번-364번- 반복되는 동일한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이 농부의 아내가 도살장 칼을 쥐고 나타났다. 여기서 칠면조의 귀납적 논리는 문제가 있으며 존재의 딜레마를 명확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과학적 귀납법은 어떤 한정된 수의 계체를 이용해서 전체 계체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특정 수의 계체를 통해 연구한 요소들에서 전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연관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필연적 연관관계를 발견하는 일은 자세한 관찰과정을 포함한다. 그래서 귀납적 방법은 물질에 대한 실험적 연구를 중요시하고 개별 사실로부터 일반화를 시키는 방법이다.


연역적 방법은 귀납적 방법에 정확하게 반대 개념이다. 연역법은 논리학의 법칙에 의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전제로부터 결론을 유추해 내고 증명하는 방법이다. 연역적 방법은 특별한 경험에서 시작하지 않고 소위 공리(axioms)로부터 시작한다. 공리는 처음부터 올바르다고 가장된다. 이것은 수학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예를 들어 고전 기하학은 유클리드 공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수세기 동안 절대 진리, 즉 시간과 환경에 관계없이 항상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연역적 논증은 일반 법칙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귀납과 연역사이의 투쟁은 17세기, 두 명의 위대한 과학 사상가-베이컨과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사람인 베이컨은 실증주의와 귀납법의 아버지였다. 그는 관찰된 사실만으로 이론을 이끌어내었다. 그러나 베이컨은 관찰에 집착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가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였다. 그는 눈으로 닭고기를 보관하는 실험과 같은 냉동기의 초기 실험 과정에서 얻은 기관지염으로 죽었다.

데카르트는 베이컨과는 대립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에서 과학에 접근했다.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그의 모델로 받아들여 순수 이성으로부터, 의심스러운 감각의 증거들에 의존하지 않고 일관되고 정합적인 이론(consistent and coherent theorems)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성주의적 방법으로 프랑스의 전통이 되었다. 베이컨의 경험주의는 운하를 건너 타 지역에서 발전하였다. 두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과학의 원인을 진보시켰고 중요한 발견을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연역법과 귀납법 각각으로는 전체 그림을 볼 수 없다. 베이컨의 문제는 [관찰된] 사실들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선 무슨 관찰을 해야 하는 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초기 이론(가설)이 필요하다. 게다가 귀납법의 결론은 항상 일시적인 특성을 갖는다. 예를 들어 수백 마리의 백조를 관찰한 사람이 모든 백조가 희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하자. 이것은 귀납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어떤 백조는 검은 것도 있기 때문에 이 결론은 잘못되었다. 엥겔스는 관찰에만 의존하는 실증주의는 결코 적합한 필연성을 증명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자연변증법, p. 304.)

 

우리는 귀납적 논리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칼 경(Sir Karl Popper)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귀납법을 부정하는 것은 프라이팬이 뜨겁다고 불길로 뛰어드는 격이 된다. 귀납법은 과학에서 그리고 모든 일상생활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바다 물이 소금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반드시 바닷물을 다 마셔봐야 할까? 포퍼가 과학에서 귀납적 방법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연역과 귀납법 사이의 진정한 관계와 과학이 실제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완전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19세기 말까지 연역적인 방법은 수학에만 거의 배타적으로 사용되었다. 20세기에는 물리학, 생물학, 언어학, 사회학 등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러한 학문들이 대표하는 주장은 인상적이지만 공리적-연역법은 과학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경험으로 알 수 있다. 귀납과 연역의 논쟁에는 핵심이 빠져 있다. 실제로 귀납법은 연역법과 항상 같이 존재한다. 어떤 것도 방법으로써 자기 완결적인 것은 없다. 그래서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연역법과 귀납법을 실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측면, 즉 서로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를 결정하는 것으로 결합시킨다.


이미 이코노미스트지(Economist)의 한 기사에서도 포퍼가 귀납적 방법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비판들이 지속되어 왔다.


“많은 철학자들 역시 포퍼가 귀납법을 거부한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했다. 귀납법은 논리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불가피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세계에 대해 연역적 추리는 그들이 발판으로 삼고 있는 세계에 대해 가정하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기본 가정들로부터 내린 결론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것과 같이 이러한 가정은 귀납법에 의존한다. 가설을 설정할 때 그리고 그것을 검증하고 해석할 때 모두 과학자들은 하나의 기본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자연이 지금 여기에서 움직이듯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도 똑같이 움직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귀납적인 가정이다.

 

제니퍼 트러스티드(Jennifer Trusted) 박사는 귀납법에 대해 올바른 견해(in perspective)를 밝힌 영국의 철학자이다. 그녀는 귀납법은 본질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실재 세계의 지식을 얻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연역법에 대해서도 똑 같이 말할 수 있다. 고 지적한다.”


이 마지막 의견은 절대적으로 옳으며 물질의 핵심에 다가간다. 귀납법이나 연역법 중 둘 중 하나를 취하면 어떤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 이 둘을 결합해야 하며 이것이 변증법적인 것이다. 연역법은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귀납은 연역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더욱이 모든 연역은 최종 분석에서 물질적 실재로부터 유추되어야 한다. 이것은 ‘순수 이론’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공리도 사실은 물질적 실재로부터 유추된 것이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 공리 중 직선은 두 점을 잇는 가장 짧은 거리라는 것도 사실은 오랜 관찰과 경험의 결과이다. 엥겔스는 연역법과 귀납법 이 두 가지 방법을 서로 각각 취했을 때 그 일면성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귀납법과 연역법은 종합과 분석처럼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편파적으로 다른 하나를 희생하며 하나만을 찬미해서는 안 되고 각각을 적절하게 적용해야 한다. 또 그것들이 상호 내재되어 있고, 서로를 보충관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적용해야 한다.”(자연 변증법 p. 302.)

 

예측할 수 있는 것만 과학인가?


모든 결론을 연역법에 의해 이끌어 내야한다는 포퍼의 주장은 실재 과학 실천 활동과 맞지 않는다. 사실 입자 물리와 우주론과 같이 연역적 방법과 추상적 추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과학 분야도 있다. 그러나 이 분야는 깊고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포퍼가 주장했듯이 새로운 가설은 증명할 수 없다. 상당히 불충분한 한데도 단순히 가장 최선이라는 이유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많은 이론들이 있다. 예를 들어 공학자들이 물질의 스트레스와 스트레인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후크의 법칙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1981년 이코노미스트 지 12월호 과학 부분에 매우 통찰력 있는 글에서 (불행히도 저자명이 없다) 과학에 대한 포퍼의 견해는 탐구 분석에 있어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결과를 ‘예’ 혹은 ‘아니오’라는 대답으로 제한할 수 없는 실험결과들이 많이 있다. 또 극단적으로 해답이 무엇인지를 해석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다. 그것들은 소위 측정하고자 하는 신호에 대한 잡음비 때문이다. 만약 실험을 여섯 번 반복하여 단지 두 번만 예측된 결과가 나왔다면 그 예측은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혹은 여섯 번 중에 네 번은 실험은 잘못된 것인가? 생물학에서 이러한 결과들이 일반적이다. 자연의 변덕은 악명이 높다.


과학자들은 명확한 답을 추구하지만, 종종 덜 명확한 답에 만족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어떤 예측된 이론에 대해 확실히 반증된 결과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반증된 것이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완전히 격리된 가정만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과학자들은 검증된 가정들 이외에도 지식의 피라미드로부터 훨씬 더 많이 생각을 가져온다.” (이코노미스트 12월 26일자, 1981, p. 101.)


반드시 정확하게 예측 가능해야지만 과학 방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조건은 실재 과학에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천체 과학자는 때때로 지금부터 수백만 년 전 별의 위치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다윈은 백만 년 이후에 어떤 종이 진화 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지질학자는 지진이 발생할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예측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기상학자에게 희망을 갖지 않는다. 현대 컴퓨터와 인공위성 기술로 그들은 최대 3일 정도로 기후를 어떤 정확도내에서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덧붙이자면 천문학조차도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정확한 과학은 아니다. 우주론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현상들이 있다. 다음별이 태어날 장소를 정교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무도 천문학이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예측의 본질과 실험적인 ‘검증’의 형식이 실험실 시험관 규모에서부터 천문학적 거리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고 다양하지만 실재과학은 확실히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예측과정을 포함한다. 그러나 어떤 것을 예측할 수 없고, 예측 자체가 없다는 이유로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고 배제해서는 안 된다. 여러 과학이 존재하고 여러 예측들이 있다. 단순히 선형계에 속하는 예측은 매우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지만 복잡계는 정밀하게 예측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모든 인공위성과 컴퓨터를 동원하더라도 정확하게 3일 이상의 날씨를 미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기상학은 과학일까 아닐까? 지진은 예측할 수 없다. 어떤 산뜻한 실험실의 실험도 지질학의 이론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질학은 과학이 아닌가? 병원 의사의 예측은 무엇인가? 최고의 의사도 진단할 때 실수를 하고 때로는 그 실수가 치명적일 때가 있다. 그렇다면 의학은 과학인가? 확실히 그것은 물리학류와 같은 정교한 과학은 아닐 것이다.


심리학의 영역에 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과학으로써의 심리학은 여전히 유아적인 수준이다. 이러한 가장 복잡한 영역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추동하는 기본적인 힘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완성되고 정리된 생각들(body of ideas)을 아직 이야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 대중들의 복잡한 행동을 다루는 사회학에 까지 오면 어마어마한 양의 변수들로 인해 예측이 이중 삼중으로 어려워진다. 물론 이 경우 예측은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인간사회에서 행위에는 어떤 패턴이 있고 어떤 과정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명확하게 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고 실천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지만 예측도 할 수 있다. 단지 실험실에서와 같이 정교한 실험으로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사회에서 가장 일반적인 경향은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예측은 경험에 비추어 수정되고 부가되어야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개정되어야 한다. 결국 이 이론들은 어떤 사건들에 의해 수많은 이유들로 반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유능한 의사의 진단이 오진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고 의사의 진단을 일반적으로 비과학적인 업무이며 시간 낭비라는 결론을 내려야할까? 아니면 다시 오진의 원인을 분석하여 그것으로부터 다시 배워야 할까?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사회적 진화를 지배하고 있는 일반 법칙이 있고, 그 법칙들을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하다고 믿는가? 만약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그러면 더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우연의 연속이라고 본다면 그러면 그것을 이해하려고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과학이 아주 작은 양의 귀중한 화석으로 아주 오랜 과거에 인류발전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러면 왜 지난 10,000년 동인 우리 종족의 진화를 결정하는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그러나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포퍼 교수에 게서 나왔다. 포퍼는 이러한 시도들을 모두 가증스러운 역사주의라고 비난한다.


그래서 우리는 멀리 떨어진 은하계에 대해 그리고 가장 작은 입자 물질에 대해서는 질문할 수 있지만, 만약 우리가 사회에 대한, 역사에 대한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부터 왔는지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시도 한다면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포퍼의 논리가 정말 과학과 관련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형태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 어떤 기득권 이익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미래 우리가 살기를 원하는 사회 형태에 대해 혹시 그들에게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 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그들은 과학과 무관하다.


연역법과 특히 형식논리학을 부각시키려는 포퍼의 시도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일면적이고 경직된 풍자를 하는 중세시대 독재적인 교회의 21세기판과 같다. 다시 한 번 과학을 엄격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관념론자들의 도식으로 구속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무릎 꿇게 하는 절대 진리의 권위를 주장하려는 것이다. 불행히도, 통제되지 않고 반항적이며 모순적인 자연은 그러한 처분에 맥없이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모순이 없는 논리학은 그 속에서 해답을 줄지 모르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꼭 맞는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사실 우리가 봐왔듯이 21세기 논리학과 수학은 그것 내부의 [논리적] 모순조차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를 들어 다음 문장은 참인가 거짓인가?) “다음 문장은 거짓이다. 앞 문장은 참이다.” 논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여러 ‘변칙’들이 해결되고 있는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칼 포퍼의 아류들은 아무런 걸림돌 없이 자신들의 철학이 인간의 사상 전체 영역에 대한 법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천연 그대로의 물질세계에 과학이 있다는 점이다. 그 속에는 모순을 포함하고 있고 대부분 비선형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과학과 과학철학이 서로 맞을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칼 포퍼는 이러한 불일치에 대해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만약 과학이 엄격한 검증의 원칙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과학을 위해 더 불행할 뿐이다! 이 위대한 사람이 이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했는지 들어 보자.


“과학은 확실하거나 잘 정립된 진술로 이루어진 시스템도 아니며, 최종 상태를 향해 착실하게 진보하는 시스템도 아니다. 우리의 과학은 지식(episteme)이 아니다. 그것은 진실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심지어 확률처럼 진실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과학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존 가치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 그것은 단지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진리와 가능성 어느 것도 얻을 수 없지만 지식에 대한 노력과 진리 추구는 과학 발전의 가장 강력한 동기이다.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추측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추측은 우리가 어떤 규칙성과 법칙을 밝혀내거나 발견할 수 있다는 비과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생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있지만) 믿음에 따른다. 베이컨처럼 현재의 과학에는- ‘사람이 지금 일상적으로 자연에 적용해서 추론할 수 있는 방법’에는- ‘예감, 성급함 그리고 미성숙 그리고 편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페리스 Ferris 인용, pp. 797-8, 강조는 저자.)


1936년 옥스퍼드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에서는 듀링(Herr Duhring)의 전통을 이어 받아 전형적인 온순한 스타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이 강의를 본 사람은 적었지만 이후 강사는 이 강의를 회상하며 화를 내며 말한 적이 있다. “청중들은 [칼 포퍼의 철학을] 농담이나 역설로 받아들이며 웃으며 박수를 치더군요.” 확실히 그 청중들은 칼 포퍼를 알지 못했다! 강사는 의도된 농담을 한 것이 아니라 진심을 말한 것이었다. 포퍼와 그의 제자들에게 과학의 목적은 세계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단시 체스나 교체 단어 퍼즐과 같이 형식 논리학의 연습과 같은 것일 뿐이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그들은 과학의 발전이 전대미문의 정상을 도달한 21세기 초에 과학은 실제로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해 우리의 견해는 다음의 판단과 같다.


“이론과 사실사이에 차이는 존재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이론을 가정한다. 그 사실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내에서 확실히 진실임을 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 이론은 다른 이론으로 대체되는데, 논쟁을 통해 더 나은 것으로 대체된다. 논쟁할 것 없이 명확한 것은 알려진 사실들이 누적되고 있다는 점뿐이다.

대체적으로 과학은 ‘진리’이다. 사람이 중세시대보다 자연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물론 어떤 과학적 발견은 거짓이며 과학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것을 알려낼 때 종종 약간씩 비이성적일 때도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학에 진실에 대한 강력한 척도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 남은 대안은 소가 아플 때 마녀를 탓하는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 같은 책, p. 103.)


일반적으로 포퍼주의와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은 그들이 자랑하는 모든 주장들이 실재 과학과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은 과학자들의 태도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에 동정적이라고 기대했던 과학자들도 포함된다. 코펜하겐에서 과학자들과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양자역학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회의를 마친 후 닐 보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로서는 실증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거부한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 모든 실증주의자들이 하려고 하는 것은 현대과학의 과정에 철학적 편견을, 정당화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면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전 철학 개념에 과학적 개념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은 일반 철학자들이 논쟁하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무시해야 하는 가짜 문제로 생각한다. 개념이 명확해야 한다는 실증주의자 주장은 확실히 인정할 수 있지만, 단순히 깨끗하고 명료한 개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폭넓은 이슈들에 대한 모든 토론들을 의미 없다고 하는 것은 그리 유용해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태도는 양자 이론을 이해하는 것에도 방해된다.” (페리스 인용, p. 822)


유명한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는 논리 실증주의자들을 단지 형이상학이라는 용어를 욕설과 같은 것, 잘해야 비과학적 사상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예전 철학자들이 정교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사상과 고민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매우 불합리해 보인다. - 이 점은 닐 (보어) 역시 동의했다. 사실 종종 이들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이해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그것들을 항상 현대 언어로 변역하고, 새로운 해답을 던져주는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페리스 인용, p. 824.)


마지막으로 실형을 구형하기에 앞서 논리실증주의 측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증인-하이젠베르크-를 불러 보자. 사실 그는 처음부터 원자 수준이하에서 ‘불확실성(비결정성)’을 주장하였고, 이 이론을 바탕으로 관찰을 통해서는 물리적 진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한마디로 논리실증주의를 잘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심오한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로써 하이젠베르크는 물리세계의 객관적 진실과 타협을 해야만 했다. 결국 자칭 과학 철학자의 불합리한 주장은 그도 더 이상 동의할 수 없었다.


그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실증주의자들은 단순한 해법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확실히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누군가 더 핵심이 없는 철학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불확실한 모든 것을 생략해 버린다면 아마 완전히 관련이 없는 것이나 그러나 하찮은 동어 반복적인 것들만 남게 될 것이다.”(같은 책, p. 826.)


건조한 사막에서 수십 년 동안 방황 후, 마침내 가장 전향적인 과학자들은 자연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철학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카오스와 복잡성 이론의 출현은 과학철학의 협소함에 깨부수는데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해 주었고 자연의 변증법적 견해에 접근했다. 생물학자 스튜터트 카우프만(Stuart Kaufmann)이 왜 그가 철학을 거부했는지에 대한 그의 결론에서 현 철학 사상에 대한 신세대 과학자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내가 철학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 속에 어떤 경솔함을 믿지 않는다. 현 철학자들은, 적어도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철학자들은, 세상속의 사실들이 아니라 어떤 개념과 그 개념이 의미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을 통해 당신이 말한 것이 설득력이 있고 적절하고 통일성이 있는지는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마첼 월드롭, M. Waldrop, 복잡성 Complexity, p. 105.)


영국속담에 “소인은 하찮은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있다. 이들은 과학에 대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과학은 과학에 대해 ‘진정으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버린다. 단지 복잡한 질문을 단순하게 대답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불평을 한다. 이렇듯 과학철학을 대표하는 이러한 낡은 주장은 문에 박힌 못처럼 쓸모없는 것이다. 맑스가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에게 말한 것을 바꿔 써보면, 과학철학은 이 세상에 있기에는 너무 과분하다.


실존주의


실존주의는 니체(Nietzsche)와 키에르케고르 (Kierkegaard)로 대표되는 19세기 비-합리주의자에 근거하고 있으며, 아주 다양한 형태와 정치적 색체를 띄고 있다. 종교적인 경향(마르셀(Marcel), 야스퍼스(Jaspers), 베르다예프 (Berdyayev)와 부버(Buber))과 무신론적 경향(하이데거 (Heidigger), 사르트르 (Sartre), 까뮈 (Camus))이 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극단적인 주관주의이다. 이러한 경향은 그들이 선호하는 단어-슬로건에 의해 반영되어 있다. 예들 들면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 ‘공포’ ‘걱정’ ‘죽음을 향한 존재’ 등이 그러하다.


독일 수학자였다가 철학자로 바꾼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에 의해 주관주의 경향은 이미 예견되었다. 그의 ‘현상학’은 중심에 자아를 갖는 개인, 직접 경험된 것으로 개인세계에 기초를 둔 주관적 관념론이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도 확실히 종교적이며 신비주의적이었다. 그는 철학의 목적이 ‘존재의 계시(revelation)’라고 하였다. 장-폴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nothingness)의 두려움’, ‘선택의 자유’, ‘의무’” 등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프랑스의 일부 지식인층에서 나타난 분위기를 표현한 것으로 ‘대 전쟁’이후 자유주의의 심각한 위기, 그 결과로 나타나는 대 격동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직시하지만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개인에 의존해서 대안을 찾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수반되는 절박한 숙명적인 느낌과 무력감 그리고 ‘공포’들이 그들의 글을 채우고 있다.

 

실존주의는 독일고전철학과 계몽운동의 합리주의- 미쳐가는 세상 속에 잘못 놓인 합리주의에 반작용으로 비이성적인 것을 옹호하였다. 실존주의자들은 독일 고전철학자들이 세상을 주체와 객체(대상)로 나누는 것을 비판한다. 그들에 따르면 주체와 객체의 통일이 바로 존재이다. 존재를 알기 위해서 중요한 임계 상황, 예를 들어 죽음에 직면해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세계는 사람에 “직접적으로 가까이”있다. 그래서 존재는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관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의 중심에는 선택의 자유에 대한 문제가 있다. 여기서 자유란 무한히 많은 가능성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말 그대로 개인의 ‘선택의 자유’이다. 그리고 자유는 필연과 반대되는 대립물로써 완전히 추상적인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은 주의주의(voluntarism)로 귀결된다. 이것에 따르면 개인은 객관적인 주위 환경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사회로부터 격리된 개인들의 ‘자유’를 의미하며, 바로 로빈슨 크루소의 ‘자유’이다. 이것은 자유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유의 문제를 추상적인 도덕(윤리)의 문제로 돌려 버린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자유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이다. 현실에서 사람이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속박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낭떠러지로 뛰어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실존주의에서 현대 철학을 완전하게 통합(융해)하려는 움직임을 볼 수 있다.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를 맑스주의와의 통일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물과 기름은 썩기지 않는 법이다. 더욱이 사르트르의 사상을 철학사상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철학은 다른 여러 철학 특히 데카르트와 헤겔로부터 빌려 온 개념들을 무질서하게 혼합해 놓고 있다. 결국 앞뒤가 맞지 않고 총체적으로 불일치를 보이며 허무주의와 비관주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이해할 수 없고 불합리한 존재의 본질 때문에, 사르트르에게 근본적인 철학적 경험은 혐오감, 매스꺼움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모든 것은 무(nothingness)로 용해되어 버린다[2]. 이것은 헤겔의 풍자이다.[3] 헤겔은 확실히 세상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르트르의 저서에서 헤겔 주의적 특수용어는 헤겔의 가장 불명료한 문장조차도 명료한 모델로 보이게 하는 식으로 사용된다.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은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는 지식인, 적대적인 세계에 직면해서 격리된 지식인의 무력감이다.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개인주의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은 사르트르의 유명한(악명 높은) 문장으로 요약된다. “지옥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다(L’enfer, c’est les Autres).” 어떻게 이러한 전망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혁명적 낙관주의와 일치할 수 있는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사르트르의 일관성에 대해 비난한 적이 없다. 물론 그것은 베트남과 프랑스 1968 학생과 노동자들의 운동에 연대하는 등 진보적 운동을 지지에 대한 그의 명성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적이며 심리학적인 견해에서 사르트르는 맑스주의에는 완전히 낯선 것이다.(끝)


[1](역주)비트겐슈타인은 이천 년간 내려온 철학의 문제들을 하나의 질병으로 보고 그것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퍼에 따르면 점성학, 형이상학, 마르크스주의 역사이론, 프로이트주의 정신분석학과 같은 사이비과학은 반증가능성의 원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경험과학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Adolf Grunbaum는 정신분석학은 반증가능하며, 사실상 틀렸음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비판자들과 옹호자들 간의 논쟁은 때때로 매우 격렬해져서, 이러한 논쟁들은 프로이트 전쟁으로 불린다.(위키 백과)


[2] (역주)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의 인간의 실존, 특히 타자(他者)와 대치(代置)할 수 없는 자기 독자의 실존을 강조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우연성(偶然性)’과 ‘무상성(無償性)’으로 대표된다.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는 것이다.


[3](역주) 실존주의는 헤겔이 주장하는 보편적 정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간 정신을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것으로 보아 개인의 주체성이 진리임을 주장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헤겔의 「정신 현상학」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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