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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16
    부안을 지키는 사람들 [2004.2.17]
    꿈꾸는나비
  2. 2006/02/15
    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2
    꿈꾸는나비
  3. 2006/02/15
    여의도에서 [2004.2.12]
    꿈꾸는나비
  4. 2006/02/12
    좋은 만남, 좋은 사람들 [2004.2.16]
    꿈꾸는나비
  5. 2006/02/10
    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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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06/02/09
    꺼지지 않는 우리쌀 살리기 촛불집회 76일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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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6/01/26
    손전화기가 금호강에 빠진 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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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1/23
    [긴급 제안] 지율 스님을 생각하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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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1/22
    마음이 무거운 날 [2003.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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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6/01/21
    울고 싶은 아침 [2001.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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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을 지키는 사람들 [2004.2.17]

부안을 지키는 사람들


잠결에 들리던 보경이 누나와 누나 친구의 대화가 화두로 돌아왔다. 잠에 빠져있는 놈한테까지 배움을 주는 날뫼터였다. 보경이 누나는 잠자기도 아까워하는 귀신(?)인 것 같았다. 경록이 선배님은 언제 일어났는지 콩나물 해장국을 해먹자고 졸라대고 있었다. 날뫼터의 공용 칫솔로 이를 닦고,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렸다. 누에 아줌마(?)는 여전히 구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날뫼터의 책에 잠시 빠져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피켓을 만들자는 소리에 보경이 누나가 크레파스와 종이를 준비해왔다.(날뫼터의 물건을 공짜로 사용한 것임) 피켓을 스스로 만들 본 적이 없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머뭇거리면서 누나들이 하는 거 지켜보았다. 홍철 선배님이 제안한 문구를 쓰기로 했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다. 괜히 잘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크레파스를 잡고 쓰기 시작했다. 이런 글을 적어 부안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그 자체가 더 소중하다 라는걸 깨달았다. 경록 선배, 은경 선배, 성원누님, 보경이 누나 정말 정성껏 만들었다. 민희 누나도 오자마자 피켓을 만들었다. 은경 선배님의 수고로 김치콩나물국으로 제대로 해장을 했다. 밥을 먹고 난 뒤 바퀴벌레 한 쌍도 피켓을 깜찍하게 만들었고, 누에는 잠에서 덜 깼는지 철자도 틀린 피켓을 만들었다.


준희 형이 오길 만을 기다렸다. 회비를 만원씩 거두었다. 보경이 누나와 난 빈털터리라서 성원누님한테 빌렸다. 최소의 경비로 최대의 효과를 누리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고르게 가난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 준희 형이 왔다. 드디어 부안 자치 공동체로 출발이다. 머리털 나고 처음 전라도로 가는 길이라 나에게는 남들보다 더 의미 있는 떠남이었다. 대구를 벗어가기 전에 전농 깃발이 보였다. 한나라당 지구당이었다. 고속도로로 들어왔다. 미끄러지듯이 달렸다.


어제 그렇게 마셨는데도 피곤한 기색이 안 보였다. 벌써부터 부안의 기운을 이어 받는 듯 했다. 경록 선배를 비롯해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 같이 허물이 없었다. 편안했다. 고작해야 만난지 하루 밖에 안됐는데, 발렌타인 선물치고는 너무 큰 선물이었다. 누에, 동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갔다. 추풍령 휴게소에 들러 군것질거리를 샀다. 나누어 먹는 재미도 솔찮이 괜찮았다. 민희 누나는 안치환 노래를 틀어 달라면 주문을 했다. 덕분에 좋은 노래도 많이 들었다.


신태인 나들목을 빠져 나오면서 우리는 환호성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부안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일단 백산초등학교로 향했다. 우리 차 앞에 짭새차의 경호를 받으면서 시꺼먼 고급 승용차가 따라 가고 있었다. 아마 김종규가 타고 있을지 모른다는 동주의 흥분된 소리에 나란히 서길 기다렸다. 절묘하게도 나란하게 신호에 걸렸다. 왼편 창문을 열어젖히고 얼굴을 내밀었다.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한판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꺼먼 승용차에는 운전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싱거운 해프닝이었지만 우리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바탕 웃음으로 마무리 되었다.


백산초등학교에 도착했다. 투표는 종료 되었고, 확인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은성풀님과 길풀님은 새벽 4시에 기상을 해서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빴다고 했다. 주민투표라 해서 무시하지 마시라. 아주 꼼꼼하게 그것도 투표 절차 그대로 하고 있었다는 사실. 마을 위원장님께서 도장을 안 찍고 가셔서 전화를 해 다시 오라고 하는 것 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을 다 참여 할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그렇게나마 분위기라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장소로 갈려고 하는 데 누에 때문에 기다려야 했다.


누에 변명이 무슨 이야기인지는 잘 몰라도 대충 그랬던 것 같다. 머리보다 이마가 더 넓은 아저씨와 담배를 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나, 꼬신다나 당최 무슨 얘기인지. 그게 뭐 텐 미니쳐라나. 종잡을 수 없는 누에 아줌마가 나에게 배꼽 빠질 만큼의 웃음을 주어서 그저 고마울 뿐이다.


부안 읍내에 도착했다. 거리에는 노란 깃발 세상이었다. 열우당과 민주당의 돈 냄새나는 노란 스카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안 민중의 정신이 쓰려있는 그 깃발이 태극기 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자랑스러웠다. 피켓을 나누어 가지고 움직였다. 일단 밥을 해결하기 위해 접선을 했다. 초면인 주요섭 선배님과 정읍에서 두부 공장인가 하신다는 분을 만났다.


김치찌개에 소주를 거시기 하게 먹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분이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지하 조직이라 했더니 흐뭇해하는 표정이었다. 나가시면서 좋은 말씀을 잊지 않고 갔다. 밥이 나오자 아주 조용히 먹었다. 역시 먹는 게 제일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른지 아니면 에너지 충전이 되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민주 반핵광장으로 향했다. 자리를 비집고 들어 가 앉았다. 우리가 만든 피켓이 본격적으로 발휘할 때가 왔다. 문정현 기자님이 직접 생중계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생중계에 아주머니가 주신 따뜻한 오뎅 국물을 마시는 성원 누님이 찍히기도 했다. 카메라 거부증(?)이 있는 나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한총련 행사 때 산 노란 손수건으로, 잠바에 달린 모자로 눈만 내놓고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특이했는지 아니면 일렬로 든 피켓이 괜찮았는지 한동안 서포라이트를 받았다. 기자들 때문에 행사 장면이 안 보인다며 나와 라는 소리도 들렸다. 어쩌면 그건 기자들을 신봉하는 우리와는 다른 나름대로의 의식이 있는 행동의 한 가지 일수도 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르익어 가는 열기는 한바탕 어울림으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신명나는 풍물패 때문인지 병이 도지는 것 같았다. 짜가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땀이 나도록 흔들다가 이제는 손에 손 잡고 강강수월래가 시작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의 손을 잡고 더 크게 더 크게 큰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이 신명과 재미는 돈 주고 가는 나이트클럽과 정치인들이 보내주는 공짜 온천 관광으로 버스 안에서 흔들어 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도 없는 걸 새삼스럽지만 몸으로 또 느꼈다.


갈수록 태산이랄까. 짱이다. 인도에 퍼질고 앉아 진정한 술판이 시작된 것이다. 이름을 다 나열 할 수 없을 정도로 빙 둘러 앉아 막걸리에 오뎅 국물에 퍼 마시기 시작했다.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난 뒤 어제의 분위기 그대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각 지역을 대표해서 제주도 대표 동주가 ‘민들레처럼’을 불렀고, 광주 대표, 정읍 대표, 부안 대표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렀다. 박형진 시인이 초대되었다. 자작시 낭송은 술자리를 질적으로 업그레드 시켜주었다. 오뎅을 나누어 주시던 넉살좋은 아주머니는 죽이는 트로트로 우리를 주체를 할 수 없게 했다.


부안 민중의 마음이랄까. 맥주 캔 박스를 가져다주시는 아저씨, 뜨거운 국물을 식기 전에 계속 가져다주시는 아주머니, 귤을 한 봉지 사와 주시는 아주머니, 담배 없냐고 물어 봤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께서 담배 사 피라며 오천원을 선뜻 건네주신다.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하면 될까.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이 세상에 이런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그 고마움에 창렬 선배님의 제안에 동의했다. “기금 마련해 꼭 부안으로 부치자.”


광장에 세워진 평화 유랑단 차에 그려진 그림이 멋있었다. 아니지 전쟁의 비극이 그려져 있어니 슬프다 라는 표현이 정확하겠지. 잊지 않기 위해 평화 유랑단 차 앞에서 민희 누나가 독사진을 찍어주었다. 돈지 공소로 가기로 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평범한 도로 변했다. 아스팔트 위를 비질하시는 아저씨가 보였다. 더러워지거나 파괴 되지 않길 바라는 부안 민중들의 평범한 행동이 김종규보다 더 부안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돈지 공소로 찾아 갔다. 돈지 공소에서는 벌써 술판이 벌어진 상태였다. 녹색연합 회원들과 풀꽃세상의 풀씨들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땅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단체 인사를 했다. 기억에 남는 건 평화와 새들이, 새아의 인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촌닭이라서 그런지 서울 사람들을 만나니 움츠려져 구석에 박혀 있었다. 민희 누나는 어느 새 잠을 청하러 갔고, 창렬 선배님과 은경 선배는 격포까지 트로트 아줌마를 바라다 주러갔고, 보경이 누나는 은성풀님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경록 선배는 전국 순회를 하면 술잔을 비웠다. 거리에서 느꼈던 뜨거움은 아니었다. 그래서 인지 몇 잔을 비우고는 각자의 잠자리를 찾아 갔다. 준희 형님은 피곤했는지 구석에 얼굴을 파묻었고, 동주의 단짝도 잠자리로 갔고, 성원이 누님도 방으로 가버렸다. 막판까지 살아 있는 우리 멤버는 나와 여전히 걸걸한 목소리로 앉아 있는 보경이 누나, 은경 선배, 경록 선배였다.


돈지 주민이라고 말하는 조태경 선배님과 광주에서 오신 이민철 선배님과 정읍에서 오신 선배님과 경록 선배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놓치기 싫어서 수첩에 적었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조태경 선배님께서 같이 먹지 않고 뭐하느냐고 했다. 영광스럽게도 그 자리에 같이 하게 되었다. 소중하고도 나의 정신을 키울 수 있는 자리였다. 남들 다 잘 때 열심히 공부했다 라고나 할까 ^^


민철이 선배는 동학에서 광주로 다시 광주에서 부안으로 오는 그런 정신적 계승과 민주화 성지로 의미 심장한 곳이기도 하고, 주민투표는 힘을 더하는 일이라고 했던 것 같다. 이 말은 나에게 공부할 거리를 던져 준 것 같다. 술기운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논리정연하게 언어 구사를 하는 게 부러워 보였다.


조태경 선배님의 제안으로 환경 청년센터 회원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독기 품은 독사 같은 조태경 선배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주민 자체적으로 엄청 난 의식화가 이루어 졌다며 본인도 놀랐다고 했다. 새벽잠이 없는 동네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보고는 노발대발 하며 저러니까 핵폐기장이 필요하다고 떠들어 대는 거라며 스위치를 내렸다고 했다. 이 자리도 파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다시 조태경 선배 집으로 향했다. 어느 새 갔는지 경록이 선배는 없었다. 고아 신세로 따라 갔다.


집까지 걸어가면서 조태경 선배와 단 둘이서 걸었다. 멀찍이 떨어져 따라 오는 이민철 선배와 정읍 선배와 환경 센터 간사 두 분이 있었지만, 조태경 선배가 나에게 힘을 실어 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마 이건 특권 같이 느껴졌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말했다.
“이 형아는 고퇴다. 남들은 서울대 나온 거로 알고 있는데 아니다. 너는 고졸이라면서”
“예”
“고등학교 때 자살하는 친구를 보면서 더 이상 학교를 못 다니겠더라.”
그래서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녹색연합 간사로 있었냐고 물었던 것 같았다. 그 뒤에 말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해 준 것 같았다.


마당에 모닥불을 지폈다. 마른 장작이 없어서 잘 타지는 않았지만 불씨가 사그라들지 않고 분위기처럼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태경 선배가 직접 삶아 온 쭈꾸미로 안주 삼아 소주를 마셨다. 이민철 선배와 약속을 했다. 광주에 찾아 가면 재워 주고 망월동과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같이 가겠다고. 호주머니의 동전 몇 닢과 담배만 챙겨 온 거지같은 놈에게 부안은 내게 너무 많은 걸 준 것 같았다. 부안을 오게 된 결정적 계기인 땅과 자유에게도 빚을 진 것 같았다. 이러다 대머리 되는 건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이 되었다. 이민철 선배와는 달과 별을 보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소주잔을 비웠다. 두 번 다시 이런 술자리는 없을 것 같았다. 애인과 같이 앉아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뜻이 맞다 는 이유로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조용히 마시다가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조용히 빠져 나왔다. 우리 가족들이 있는 공소로 돌아 왔다. 불이 꺼진 거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코 골이 소리에 자장가 삼아 잠을 잤다. 부안의 첫날밤이 격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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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2

     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2

 

 

2월 1일(수) 밤 늦게 도착해서 2월 4일(토)까지 머물다 온 대추리의 모습을 전합니다. 

 

  

-희망이라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트랙터가 포탄을 얼마든지 몰아 낼수 있다. 어쩔 수 없다라고 모두들 말하지만 사실 내가 포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꾸는 것이라도 제대로 꾸고, 꾼 그대로 행할까 한다.


-이 땅에 미군기지는 물론이고 한국군의 기지 또한 존재의 이유가 없다.

대추리에 집집마다 걸려 있는 깃발은 말하고 있다. 이미 대한민국 국기의 존재의 이유는 없다고.


-대추초교 운동장에서 열린 520째 촛불행사. 같은 날 대구 대백 민주광장에서는 우리쌀을 지키기 위한 촛불집회 71일째가 진행되었다. 방방곡곡이 현장이 아닌 곳이 없다. 각자가 촛불을 들고 있는 그 곳이 전선이고, 투쟁의 현장이다.


-520일째의 촛불행사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서울지역의 인권활동가모임과 박원순 변호사 등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빈집에 민변 법률상담소 개소식이 있기 전 길놀이에서 문정현 신분께서도 어깨춤을 덩실덩실. 대추리 우울증이 했던가. 하지만 이렇게 신명날 때는 한바탕 하고 막걸리 한잔이며 한시름 놓지 않을까요.

 


-신부님께서는 그것도 잠시 곧 쳐들어 올 정부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뭔가를 생각하시고 있는 것 같다.

 


-이 담장도 강제철거로 인해 곧 있으며 무너질 수도 있다. 평화가 살아

숨쉬는 이 담장을 당신들의 법으로 무너뜨리며 평화는 법전 속에만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믿는다. 손을 맞잡고 함께 한다면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고르게 가난한 사회는 이루어 질 것이다.

 



-지킴이네 집에 붙어 있었다. 깃발 들고 함께가는 동지들이 보인다.

라르작에서도 그랬고, 평택에서도 그럴 것이다. 라르작이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평택이 라르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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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서 [2004.2.12]

여의도에서
- 한-칠레FTA 비준안 통과 반대를 위한 농민대회에 참가하면서


여의도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잠바에 민노당 로고와 글씨가 적힌 아저씨를 봤다. 가는 동안도 혼자가 아니고 함께 가는 것이었다. 여의도가 초행길이라 늦지 않게 제대로 찾아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저 아저씨만 따라 가면 될 것 같아 안심이었다.

빌딩 숲을 지나 드디어 도착 했지만, 나락 한 알 회원님들을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손전화로 물어물어 상봉했다. 풀꽃 세상의 풀씨님들과 같이 있었다. 초면이었지만 그렇게 심하게 낯가림을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수많은 깃발 아래 삼삼오오 깡소주를 틀어넣는 아버지 나이 때의 아저씨들, 일하던 그대로 옷차림을 하고 머리띠를 두르고는 담배를 태우고 있는 할아버지들, 아주머니까지도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불콰하게 달아올라서인지 어깨춤을 추며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솔직히 슬펐다. 울컥 눈물이 쏟아질 뻔도 했다. 단련되지 않는 나약한 모습. 들키지 않았지만 이런 감상에 빠지는 것도 싫다.

그것도 잠시, 행진이다.
따라 걷다 보니 단상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물대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짱돌을 쥐고 어연하게 서 있는 사수대의 청년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시장바구니에 돌을 나르던 여학생이 짝사랑했던 애보다 훨씬 더 예쁘게 보였다. 강철대오 같이 측면 방호벽을 대열로 이루고 있던 대학생들이 든든했다.

작으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구호로 고함으로 서 있음으로서 버팅겨 내며, 가사도 모르는 농민가며, 아스팔트 농사를 흥얼거리며 따라 했다. (지금은 귀에 따까리 앉을 때까지 듣고 있습니다.) 초년병이라 장갑도 없이 내복도 안 입고 허술하게 온 결과 춥고, 담배도 다 떨어졌고, 다리도 아팠지만, 동지애로 뭉친 나락 한알님들의 배려 때문에 힘이 생겼다.

김밥에 소주 몇 모금을 털어 넣고, 담배도 몇 모금씩 돌려가며 피웠다. 견디면서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건 국회의원이라는 놈들의 비열함을 몸으로 느끼면서 증오하고 있었다. 개 끌 듯이 질질 끌면서 눈치를 보는 잘난 놈들을 얼굴을 떠올렸다.

환호성과 부둥켜안으면서 비준안 저지를 했다는 승리의 맛.
돌아오는 길이 조금은 가벼웠다. 현장에서 하나 됨의 희열을 느꼈다. 돈 주고는 못 사는 그런 맛이다.

나의 첫 전투적(?) 시위 현장에 나락 한 알님들이 같이 있어서 어떤 빽보다 든든했고, 느꼈고, 배웠습니다. 첫발을 내딛는 나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고마울 뿐이었다. 첫 마음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투쟁의 현장에서 단련되어 가는 강철 새잎 같은 존재가 되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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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 좋은 사람들 [2004.2.16]

좋은 만남, 좋은 사람들 -대구에서 내 삶은 시작되었다


<녹생평론> 사무실로 가는 내 마음이 설렌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것이기에 기대 반 걱정 반이다. 하지만 발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찾아가는 내 발걸음을 결코 멈출 수가 없었다. 밤눈이 어두워서인지 몇 코스를 지나왔다. 만촌 네거리에서 걸어 올라왔다. 드디어 <녹색평론> 사무실 앞에 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문을 두드렸다.


교재 중 <시적인간과 생태적인간>을 구입하지 못했다. 백수 생활의 비참함(?)일까. 경대 서점에서 눈요기로 대충 보고는 씁쓸한 마음으로 나와만 했다. 이런 날이면 서점 주인이 되고 싶어진다. 습벽인지 구입하지 못하면 제대로 책을 읽을 수가 없다. 게으름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수고로움도 없이 어찌 공부를 하겠다고. 한참을 반성을 하게 되었다.


홍철이 선배의 세심한 배려로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공부할 앞부분 읽게 되어 다행이었다. 어느 정도 모인 것 같았다. 자기소개를 하고나서 본격적으로 배움의 봇물이 터지기 시작했다. 발췌문을 다 읽고 나서 조금은 편안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예습을 철저하게 못 한 결과 수박 겉핥기식인 것 같아 나의 게으름을 한번 더 탓하게 되었다. 뜨겁게 확실하게 완전무장하고 2교시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이야기가 불붙기 시작했는지 11시가 가까워져 가는데도 식을 줄 몰랐다. 취중진담이 아니라 맨 정신으로 진지하고 치열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게 조금은 신기했다. 그런 문화를 많이 접해 보지 못 한 촌놈이기에. 뜨거움이 전이되어서인지 공부를 하고 싶다는 배고픔을 느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뒤풀이가 없을 것 같아 아쉬웠는데 그 열정이 금방 식을 그럴 모임이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 무슨 안주가 있더라도 천하일품이 아닐까. 외로움에 쩔쩔매본 놈은 이런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수 있으리라. 술기운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니 몹쓸 병이 도지기 시작했다. 뜬구름 잡는 질문에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인 줄 알면서도 나의 궁금증에 스스로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혀를 내두르는 병이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도 횡설수설 주절거리게 만든다. 언젠간 제 풀에 지쳐 하지 않을 때가 있겠지. 징그러운 몹쓸 병.


부안까지 가게 되는 성과를 거두고서 맥주집으로 몸을 옮겼다. 끝까지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 또는 즐거움이랄까. 분위기는 절정에 이르는 것 같았다. 맥주 집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노래가 시작되었다. 준희 형님의 ‘저 창살에 햇살이’, ‘전화카드 한 장’과 성원 누님의 ‘청계천 8가’, ‘민들레처럼’ 그리고 나의 ‘농민가’ 또 다른 가수들의 많은 노래들이 더 이상 맥주집에 앉아 있지 못 하게했다. 흔하게 맛 볼 수 없는 그날의 뜨거움이 그리워진다.


결국 노래방까지 가게 되었다. 경록 선배님의 처절한 몸부림과 나의 짜가 춤을 합쳐 이판사판으로 만들고 말았다. 진이 다 빠져 파김치가 된 기분이었다. 동이 트기 직전에 날뫼터로 향했다. 내일을 위해 자는 게 맞지만 의리 때문에 라면에 소주 한 잔 마시고 안면몰수하고 사랑스러운 책을 베개 삼아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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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1

  카메라에 담아온 대추리1

 

 

2월 1일(수) 밤 늦게 도착해서 2월 4일(토)까지 머물다 온 대추리의 모습을 전합니다.

 

 

 

-들이 울고 대추리 농민이 우는데 국가는 눈물을 닦아주기는 커녕 법을

핑계삼아 폭력을 사용하겠다고 경고장을 붙이고 있다.

 


-빈집인지 아닌지는 계량기가 있느냐 없느냐로 알 수 있다. 없어진 계량기는

국방부에 잘 모셔져 있을 것이다. 단전이 되면 전기는 물론이고 물도 난방도

안 된다. 이 겨울을 빈집에 거주하겠다고 들어간 전사들의 상황은 설명 안 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협의매수해서 이사를 간 집들은 하나 같이 이렇다. 쓸만한 것 모두

박살나있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 때문인지 더 흉흉하게만

느껴진다.

 


-뜯겨져 나가는 상황에 마냥 있을 수 만은 없어서인지 이를 악물고

카메라를 챙겨들고는 열심히 찍고 있는 마리아. 

 


-오전에는 용접으로 뜯어내더니 오후에는 크레인이 와서 이렇게 부수고

있다.

 


-빈집의 깨진 창문으로 보이는 건 황새울 들녘이다. 그리고 보인다.

머지 않아 저 들판에서 모심기에 정신이 없을 농민의 모습이.

 


-이 땅의 주인은 나락이다.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는냐. 한 평도

내 줄 수 없다.

 



-이 들녘은 끝은 철조망이다.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게 아니다. 라고

김남주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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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우리쌀 살리기 촛불집회 76일째

 꺼지지 않는 우리쌀 살리기 촛불집회 76일째

 

 

 2006년 2월 7일(화)도 어김없이 대백 앞 민주광장에서 7시에서부터 8시까지 진행하였습니다.

 

 

-촛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農은 산이의 미래입니다.

 


-맞은 편의 찬송가 노래 소리에 아랫배에 더욱 힘을 주어 구호를 외쳤습니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서명 열기는 더해 갑니다.

 



-평택미군기지 막아내고 올해도 농사짓자!!  2.12 평화대행진의 선전을 위해 붙인

  달리는 선전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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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화기가 금호강에 빠진 날

 

 

아주 개인적인 일이지만 취기에 용기를 내어 지면을 얼룩지어 볼까 합니다.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지면상으로 넋두리를 풀어 놓기에 부적절하다는 의견 있다면 즉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금껏 살아왔던 삶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진저리나지만 그게 나의 삶이었고, 그 기반으로 분노를 표출하려고 했으며, 그 분노를 자제할 수 없어 어떤 빌미를 빗대어 뭔가를 요구하고 싶어 던 것 같네요. 사상적으로, 논리적으로 허약하고 비논리적일지 몰라도 도저히 제가 풀 수 없는 문제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견뎌왔던 것 같습니다.

 


흔히들 그렇게 말하죠. 콩가루 집안이라고요. 제 집구석이 꼭 그런 것 같습니다. 2년 가까이 몸담았던 곳을 도망치듯이 나와 한 달이 다 갔을 때 쯤, 2년 동안 연락이 없었던 집구석에 연락을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며 어머니께 전화를 했습니다. 근데 제가 하고 싶은 말보다는 목까지 차올랐던 원망을 쏟아 부었습니다.

 


별거 생활 중인 부모에게서 나는 무엇인가. 그래서 전화를 통해서 난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가. 솔직히 말해 따뜻한 말 한마디었을텐데. 결국 그 말을 듣지 못했고, 저도 얼음장 같이 냉정하게 인간이 아니길 선언하듯이 말했죠. 이때껏 살아오면서 빗진 게 없으니 여기서 연을 끊고 사는 게 맞다며 전화를 끊으며 오기인지 끝인지 모르지만, 내 삶의 끝까지 간다는 생각이 머리 속에 가득 찼습니다. 그게 현재 제 모습입니다.

 


그렇게 분을 삭이지 못한 체 잠을 들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사춘기 때 만나는 몽정을 만났습니다. 결국 엄마의 그늘에서 못 벗어나 악몽을 헤매다, 새벽에 잠을 깨고 말았죠. 63일째 촛불을 들고 선배들께서 사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고는 돌아오는 길에 후배의 전화를 받고는 술을 한잔 얻어먹고는 아양교 다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꼬일 대로 꼬인 삶을 억지로 어느 누군가 푼다고 해도 풀리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돈의 문제입니다. 어머니의 삶도 돈의 굴레에 못 벗어나 허덕이는 것입니다. 진득이처럼 부모의 피를 안 빨아 먹는 것 또한 이제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소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차하게 이야기 하는 건 어머니가 전역하면서 마련해준 저의 휴대폰을 아양교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끈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라고! 모순 속에서 제 살 갉아 먹는 논리로 이야기 하지 마라고 충고하셔도 좋습니다. 근데 어차피 제가 어머니의 돈을 받아, 아님 나의 능력으로 생활한다 해도 나의 삶과 어머니의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럼 너와 너의 어머니의 삶은 왜 변해야 하며, 얼마큼 변하길 원하는 데라고 묻고 싶겠죠. 단 한 가지입니다. 따뜻한 말과 소통인데, 지금은 그게 되지 않습니다.

 


피붙이와 인연은 아양교에서 던져진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 문제는 어떤 정권도, 어떤 운동도 해결해주지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자유롭게 살아 볼까합니다. 배가 고프면 고픈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대로.

 


그래서 고르게 가난한 삶이 이상이 아닌, 자위가 아닌 것으로 눈 감을 때까지 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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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자유 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옮겼습니다. 오늘 새벽에 토했던 오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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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제안] 지율 스님을 생각하며

[긴급 제안] 지율 스님을 생각하며

아래 붙이는 글은 작가 김곰치 씨가 쓴 글입니다. 지율 스님의 마지막 호소에 '공명'하기 위한 작은 노력으로서, 김곰치 씨는 이 글을 썼고, 전태일 열사의 모친이신 이소선 여사께도 전달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은 단지 이소선 여사께만 올리는 '사신'은 아닙니다. 지율 스님이라는 존재와 그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에 '공명'하고 무엇을 기억하고, 그리고 과연 무엇을 지금 해야 하느지를 함께 생각하자는 간절한 제안이고 호소인 듯합니다.

 

김곰치 씨는 이 글을 자신의 이메일 주소록에 있는 모든 분들께 보내면서,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자신의 '공명'을 덧붙여 또 자신의 주소록에 속해 있는 분들께 전달하는 방식으로 오늘 하룻동안 만이라도 이 메시지를 우리사회 곳곳에 널리 퍼뜨려 줄 것을 제안했습니다. (물론 홈페이지, 블로그, 카페 등에 올리는 것도 좋겠지요.)

 

우리가 지금 당장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도 한가지 의미있는 온라인 '초록의 공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함께 노력을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바란건대, 내일쯤은 이소선 여사께서 지율 스님을 직접 찾아뵙고 그 앙상한 손을 잡아주시기를, 그리하여 '전태일'과 '지율'이 만나는 하나의 '사건'이 이 땅에 깊은 생명의 파문을 일으키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지율 스님의 그 가느다란 수맥으로 부디, 부디, 초록 생명이 마르지 않고 흐르기를, 그리하여, 앙상한 겨울나무가 봄기운과 함께 겨울의 침묵을 털어내고 연두빛으로 조금씩 조금씩 다시 소생하듯 그렇게 기운을 차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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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선 어머니,
 

제가 '전태일'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학 2학년 겨울입니다. 글쓰기를 해볼까, 하고 문학동아리에 입회하려고 동아리 룸의 쇠로 된 문 손잡이를 돌리면서입니다. 손잡이 옆에 엽서 크기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한 노동자의 유서를 수동 타자기로 찍어 붙인 스티커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눈물이 잠깐 흘렀지만 어쩐지 큰 감동이 없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고, 신학대학교에 다니는 한 여학생과 펜팔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학생이 책을 한 권 보내주었고, 저는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자 열심히 읽었습니다. 민중신학 관련 책이었습니다. 거기서 읽은 서남동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정확한 인용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역사의 현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그리스도적인 죽음을 알아보게 하는 빛이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전태일을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합니다 

군대를 다녀와 1995년, 저는 한 월간지에 기자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그해가 전태일 사후 25주년이었죠. 제가 어머니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전태일의 수기, 일기 등을 모은 책, 어머니의 구술록 〈어머니의 길〉을 읽고, 전태일의 막내 여동생을 먼저 만났고, 그리고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뭔가 새로운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 후 작가의 꿈을 이루고자 직장을 그만 두었고, 저는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아파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낙향까지 했지요. 불현듯 어떤 한 이야기에 감동해 장편소설을 쓰게 되었고, 그걸 한 출판사에 보냈습니다. 보름 정도 수정 기간을 주면서 출간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몹시 기쁘면서도 저는 무서웠습니다. 이제 곧 책이 나오게는 됐지만, 이 소설 이후 내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가! 단명작가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눈앞의 장편을 수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일주일은 다음 장편을 구상하고, 나머지 일주일에 지금 장편을 수정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슨 인연처럼, 전태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쟁이 치열한 이 사회에서 작가로서 생존하는 것이 두려워 딱하게 몸부림을 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런데 위기의식을 가지고 전태일 생각에 매달리자, 이 자리서 상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전태일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전태일이 몸에 불을 붙이고 숨을 거두기까지의 몇 시간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고, 순간순간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 것 같았습니다. 전태일이 얼마나 신실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는지, 그의 완전한 '진심과 본심'을 제대로 본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전태일에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잠도 거의 자지 못하고 전태일에 홀려 있던 아주 격렬한 1주일 동안, 제 주변에서 괴이한 일이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쩌면 일상의 사건과 뉴스일 뿐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전태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제 이해도를 쉴 새 없이 높여오는, 전태일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아프고 또 아름다웠다니!
  
저도 몰랐던, 제 안에 있는 작가적 기질, 일종의 몰입능력이 활짝 피어났던 것이지만, 전태일에 한없이 몰입하던 그 감정상태가 끝난 것은, 고향마을의 한 선배님이 불의의 화재를 당하고 결국 숨을 거두게 되는 일이 벌어졌고, 그 소식을 어머니한테 전해 들으면서였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음이 되어 책상 위의 장편을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은 사랑입니다
 
 

그 후,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6년 전 1주일간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제 안에 들어와 살아 숨 쉰 전태일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그 감동을 소설로 쓰는 데는 여전히 실패하고 있지만, 제 인생의 시간이 뜻있게 허락된다면, 언젠가는 쓰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친구들한테 "나중에 내가 죽으면, '전태일을 소설로 쓰려고 수십 차례 시도했으나 끝내 못 쓰고 죽은 작가'라고 묘비에 써다오"라고 말하며 각오를 다집니다.
  
제 마음 속의 전태일은, 어쩌면 다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간단하게만 말하면, 그저 그럴지 모릅니다. 어쨌든 서남동 목사님의 말씀이 참 맞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제가 전태일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적인 죽음이자 빛이었다는 것입니다.
  
서남동 목사님은, 전태일의 분신을, 청계천 평화시장 앞에서 분명 물리적으로 실재했던 그 불꽃, 그 시간을 일러 '그 순간 전태일은 시대의 아픔을 완전히 흡수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흡수'라는 말이 정말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마음의 눈이 봅니다. 그 불꽃, 그 시간 속의 전태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그가 온 마음으로 세상의 아픔을 다 빨아들였습니다. 세상의 아픔은 일순 없어졌습니다. 전태일이 다 먹어버렸습니다. 아픔을 자기 속으로 다 흡수하여, 아픔으로 뱃속이 꽉 차서 목까지 올라와 마침내 터져버렸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불이었습니다.
  
병원에 숯이 되어 실려 간 전태일은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사실상 위로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저를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오래오래, 두고두고, 생각해보면, 제가 왜 이랬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의 '오래오래 두고두고'라는 말이 참 깊이 들어옵니다. 즉 전태일 자신이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무서운 행동을 하게 된 것도, 정말 '오래오래, 두고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결과라는 믿음을 줍니다.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사람이 쓴 것으로 믿기지 않는, 수기의 뛰어난 문장이 그의 비범한 사고력을 이미 증명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안심시키려고 그 자리에서 "태일아, 그래 난 이해한다"라고 말하십니다. 그 말씀, 정말 잘하셨습니다! 전태일은, "역시 우리 어머니는 나를 이해해!" 하고 아이처럼 좋아합니다. 인간사에서 가히 유례가 없는 참혹한 순수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태일은 또, 자신의 뜻을 어머니가 대신 이루어달라고 요구합니다. 어머니는 "알았다"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줄 압니다.
  
저는 전태일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 그 추동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신뢰하고 체현하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기관지가 화기(火氣)에 녹아버려 숨쉬기가 힘들어 전태일은 의사를 향해 "내 목을 따라!"고 명령하고, 의사가 목의 붕대를 푸는 도중에 숨을 거둡니다. 사랑으로 존재가 완전해 있지 않으면, 그런 명령이 일체 나올 수 없습니다. 분신행위 자체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8시간 가량 전태일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묻고 또 묻는다면 누구든 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기가 주어지면, 저는 언제라도 전태일에 또 새롭게 몰입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영원히 끝이 날 수 없는 이유는, 전태일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가 없는 존재가 전태일입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원리, 그 추동력이 사랑입니다.
 
 

지율 스님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이소선 어머니, 저는 며칠 전 〈프레시안〉에 글을 하나 써서 보냈습니다. 지율 스님이 왜 또다시 아무도 원치 않는 죽음의 길에 나섰는지를 소상히 밝히려 정말 열심히 쓴 글이었는데, 글 말미에 전태일 생각이 났고, 전태일을 '우리 민족의 은인'이라고 썼습니다. 자기 목숨을 바친 그의 행동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그 후 독재정권의 탄압 속에 타락해버린 우리 민족의 감수성을 결정적으로 씻어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태일의 그런 사랑과 실천이 있어 지금도 한국 민중이 세상을 향해 발언을 하게 하고 또 힘겨우나 뜻있는 실천을 하게끔 하는, 배후의 한 든든한 힘이 되어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어찌 그가 우리 민족의 은인이 아닐 수 있습니까. 한없이 감사를 드리고 싶은 분입니다.
  
이소선 어머니,
  
이제, 저는 어머니께 지율 스님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다 읽으시면, 왜 제가 꼭 어머니께 지율 스님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며칠 전부터 지율 스님 생각에 제가 좀 미쳐 있습니다. 지금 스님이 어떤 형편에 있는지, 어머니도 뉴스를 들어 아실 겁니다. 아니, 스님의 안위가 걱정되어 지관 스님께 전화로 묻기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에 걸친 지율 스님의 단식은, 종교인의 단식'수행'이면서, 천성산을 지키려는 싸움에 있어 하나의 '전술'로도 많이 활용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해 왔습니다. 단식으로 어쨌든 단기적인 목표를 매번 성취했지 않습니까. 몇 차례의 아주 긴 단식을 늘 성공적으로 해내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번 단식 소식을 들으면서도, 스님은 죽지 않으실 거다,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전술적이기도 했던 스님의 단식이 그런데 제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것을 남겼나 봅니다. 그것이 단식'수행'이라면 언제든 감동적이지만, '전술'의 성격이 강하면, 왜 또 저러시나? 이제 저 방식은 제발 그만 좀 하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 단식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이 걱정되어서였지만, 〈프레시안〉을 통해 공개적으로 스님의 단식에 반대했던 한 숨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은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지율 스님이 가을부터 80여 일 동안, 거의 아무도 모르게 단식하였다는 사실이 제 마음을 흔들어 왔습니다. 상식을 뛰어넘는 천성산을 향한 스님의 집착을 두고 여론이 워낙 좋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전술로는 완전히 최악인데, 왜 저러시나? 압도적인 여론을 어떻게 저리 정면으로 거스르나? 이번에는 정말 죽음의 수행을 해야 한다고 판단하셨나? 저는 겁이 났습니다.
  
조마조마 하고 있는데, 병원으로 옮겨진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다행이라고 안심한 것도 잠시, 스님이 그 어떤 치료도 거부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래도 참 다행인 것이 외진 시골집에서 큰 병원으로 가셨고 위급한 상황이 오면 언제든 의료진의 조치가 취해질 테니 쉽게 돌아가시진 않을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지율 스님을 자주 만난 스님 한 분이 "딴 건 몰라도 밥 굶는 데는 도가 텄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한참 웃었던 기억도 납니다. 절대 허망하게 돌아가실 분은 아니라고 저는 용감하게 믿고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월 16일,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스님이 언론에 처음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전날! 저는, 지율스님에 대해 꽤 자주 보도를 하던 한 언론이 '내일 병실을 공개한다'며 '지금 스님은 몸무게가 39Kg로 알려졌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 제 마음이 아주 복잡해졌습니다. 병원에 가기 전에 30Kg이라 하더니…. 스님이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스님 측 사람들이 과장한 것이었나? 병원에 입원해 어쩔 수 없이 몸무게를 재보니 실제로는 39Kg로 나왔나? 한 달은 더 버티시겠네. 그 사이 뭔가 대책이 나오겠지.
  
생각해 보면, 경북 안동에서 서울 병원으로 옮길 때도, 제가 본 사진 속의 스님은, 예상보다 처참하지 않았습니다. 모포에 가려 있어 얼굴을 잘 볼 수 없었기도 했습니다. 저는 '39Kg'라는 기사에 왠지 지율스님한테 속았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전술로서의 단식은 이제 완전히 끝났어!
  
그런데 언론에 막상 병실이 공개된 날 침대에 누운, 사진 속의 스님은,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제 머리를 누가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 같았습니다. 완전히 '미라'였습니다. 예술적 감성 하나는 정말 영민했던 지율 스님이 기력이 딸려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을 보는 것이 제일 괴로웠습니다. 얼굴 살이 없어 표정이 일그러져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사진에서 지율 스님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이제야 지율 스님의 본 뜻을 알겠습니다
  
 

제가 받은 충격은, 사실 무엇보다 죄책감입니다. 꽤 오랫동안 지율 스님을 옆에서 봐 왔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저는, 지율 스님이 정말 산과 함께 죽을 수 있는 분이라고는 한 번도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39Kg'이라는 터무니없는 오보를 믿었습니다. 아, 이렇게 자학할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을 따뜻하게, 아니 정확하게 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스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간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싸움의 목표를 수 차례 얻어낸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어쩌면 저는, 누구보다도 스님의 모든 것을 믿고 싶어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제 나름의 인식 기준에서 도대체 완전히 이해되지 않고 또 안 믿어져서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교활한 지식이 끝없이 공격해 와서 스님을 완전히 믿기가 참 힘들었습니다. 끈질기게 의심하고 끈질기게 믿으려 했습니다. 그러다 스님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도 했습니다. 쉽게 생각이 끊어지더군요. 그런데 사진 속의 스님을 보자마자 그 모든 의심이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죽음 목전에 이른 스님의 사진을 보고서야 저는 스님과의 지난 모든 기억, 그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지난 세월, 스님의 모든 행동, 말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였는지, 갑자기 새로운 빛으로 거의 완전히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설마, 설마, 했는데, 지율 스님은, 정말 산이 되어, 산과 함께, 아니 산보다 먼저 죽을 수 있는 분이었구나!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그러자 바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사실 굉장히 겁 많고 여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만약 지율 스님이 돌아가신다면,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고는, 제가 몽둥이를 들고 한국철도시설공단 사무실의 기물을 때려 부수는 상상이 다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스님을 알고 난 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스님을 제법 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다고 착각했던 게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입니다. 착각한 대로 간사한 입이 그저 못 참아 마구 평가해대기 때문입니다. 스님은 이런 사람, 스님은 저런 사람, 그 편의적인 입들! 스님을 만나 무엇보다 용서해 달라고 빌고 싶고, 스님을 따뜻한 눈물로 안아드리고 싶어졌습니다. 당장 서울로 가자,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지금이라도, 그동안 내가 하지 못한, 스님이 원한, 내가 할 일을 하자, 하자, 하자…. 근데 무엇을 할 것인가!
  
충격과 분노와 자책과 참회와 깨달음과 혼란….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참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복잡한 감정의 파도가 지나간 뒤,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정말 좋은 감정이 저를 휩싸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천성산을 향한 스님의 사랑, 그 안의 온갖 생명붙이들을 향한 집념어린 스님의 사랑이 새삼 너무나 놀랍고, 스님을 향한 경외심이 불같이 일어납니다. 저는 제 인생에서 두 번째로 '본심과 진심'을 똑똑히 본 것입니다. 지금 현재 진행 중인, 실제 존재하는, 세계의 본심과 진심을! 이 세계에 본심과 진심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 확신이, 제게는 왜 이리 감동적인 일이었을까요!
  
무엇을 할 것인지 명확해졌습니다. 내가 본 이 본심과 진심을 세상에 알리자! 지금 이 세계의 본심과 진심, 지율스님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저는 바로 책상에 앉아 며칠째 밀려 있었던 글부터 번개같이 마무리지었습니다. 단 하루라도 열심히 글을 쓰고 나니, 죄책감이 많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율 스님이 바로 '전태일'입니다
 
 

이소선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제가 쓴 글을 보지 못하셨겠지만,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했습니다. 〈프레시안〉 의 댓글 게시판에는 스님에 대한 독한 욕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제 글을 찬찬히 읽어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지율스님에 관한 글이라면 아예 읽으려 들지 않고 공격부터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다시 두려워졌습니다. 너무 늦은 일일까. 이제 와 아무리 해도, 스님의 뜻을 살릴 길은 없는 걸까. 그 뜻을 전술적으로 잘 알리려면, 글을 쓸 때 지율의 지자도 들어가면 안되는 걸까. 세상이 너무 냉정하다. 오래 전에 지율스님을 포기해버렸다!
  
낙담하고 있는데, 구원이 왔습니다. 〈부산일보〉에 근무하는 손문상 화백이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손 화백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함해 시대의 여러 아픔을 신문 지면에 참 열심히 그리는 분입니다. 〈동아일보〉에 근무할 때 데스크와의 의견다툼 때문에 결연히 사표를 낸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형이라 부르는데, 형은 제 글을 애정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생명, 생태보다 노동에 훨씬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 글 마지막에 한 말이 참 맞는 것 같네. 전태일이 노동자들 인권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다 하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쳐 분신을 한 것처럼, 지율 스님은 천성산과 자연을 위해 하다하다 안되다가 결국 저리 되신 거 맞아. 전태일 때는, 전태일이 누군지 아무도 모르다가 사건이 터지고 나서 사람들이 아, 하고 알게 되었는데…. 죽어가는 방식도, 지율스님이 평소 말하는 생명, 생태처럼… 얼마나 생태적이냐. 노동자 전태일은 한날한시 몸에 불을 확 지르고 죽고, 스님은 몇 달째 나무처럼 빼빼 말라 비틀어져서 끈길기게, 끈질기게… 근데 이제 어쩌니?"
  
사태를 새삼 안타까워하는 형의 말씀이 너무 고맙고, 제게 큰 용기가 되었습니다. "지율 스님은 지금 치료를 시작한다 해도 소생 가능성이 극히 적은데, 저는 이제부터라도 스님이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해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겁니다!" '소생가능성이 극히 적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그래도 나는 스님이 꼭 사셨으면 좋겠네…."라고 하십니다.
  
그 말이 또 참 고맙습니다. 스님의 사진을 본 이후, 제가 정말 이상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스님을 걱정하는 말 하나하나가 그냥 무조건 고맙습니다. 또 그런 말을 듣거나 보면 그냥 눈물부터 나오려 합니다.
  
이소선 어머니,
  
어머니 말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어머니께 드리는 이 편지를 볼 것입니다. 지율 스님 사진을 보고 충격과 죄책감에 빠지고, 이어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불같이 일어나면서, 사진을 본 이후 지금 이 순간까지 닷새 동안 정말 놀라운 심리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이해될 것 같고,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고, 그 어떤 악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6년 전 제가 전태일 생각에 홀려 있을 때와 아주 똑같은 심리 증상입니다. 저는 '지율 스님 안티'들에게마저 알 수 없는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정도입니다.
  

산을 위해, 다른 하찮은 생명을 위해 자기가 죽을 수 있는, 정말 죽는 스님을 보니, 그분의 사랑이 너무 놀랍고 감동적이어서, 제가 그 사랑에 완전 감전된 것만 같습니다. 스님의 진심과 본심을 저조차 때때로 의심을 했기 때문에, 저는 '지율 스님 안티' 분들을 미워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저보다 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때 '안티'였기 때문에 나중에 참회와 깨달음의 감동이 저보다 훨씬 더 엄청나고 격렬한 것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제 자신부터 사랑하고 싶어졌습니다. 과거의 의심들, 스님의 호소에 겨우겨우 감동했던 제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지만, 그러나 스님의 진심과 본심을 똑바로 보고 똑바로 믿고 제 속으로 받아들이자마자 마치 존재가 승격된 것처럼 제 자신에 대한 신선한 애정을 느낍니다. 온몸에 힘이 솟습니다! 이건 아무래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가 없는, 너무나 신비로운 변화입니다. 지율 스님의 사진을 보기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가히 마음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뭔가 어떤 진정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고, 그 사건이 정말 진정하지 않다면, 한 치의 거짓이라도 개입돼 있는 사건이라면, 이런 신비로운 마음의 기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 인생에서 꼭 두 번째입니다. 제 마음 안의 재현된 전태일 사건, 그리고 바로 지금 지율스님 사건입니다.
  
좋은 감정이 많은 새로운 다짐을 연이어 낳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아, 스님처럼, 나도 세상을 사랑해야겠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다! 하고 이를 악물고 결심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절망과 냉소의 이유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 절망과 냉소에 굴복하여 스님이 이 세상을 심정적으로 포기하셨다면, 한국의 법제도를 지금처럼 신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망 직전의 너무나도 힘겨운 상황에서 스님이 지금에도 간절한 마음으로 대법원을 바라보며 "공명해주세요"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이 돌아가시면, 저와 변호사님이 재판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스님의 부탁이기도 하고요"라고 오랫동안 스님과 함께 해온 부산의 손정현 님이 전화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스님은 대법원이 올바른 판단을 내려줄 거라고 지금도 믿고 계신 것입니다. 스님은 사실 이 세상을 천성산만큼 사랑하고 싶은 분입니다. 늘 기다리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지금의 세상 꼴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는 없지만, 스님의 천성산 사랑의 열도와 깊이를 생각하노라면, 누구보다도 이 세상을 안쓰럽게 연민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수없이 스님에 대한 제 개인적인 옛 기억을 새롭게 깨달으며 감동의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납니다. 스님의 블로그에 들어가 예전에는 상투적으로 읽기도 했던 스님의 글들이 한 구절 한 구절 너무 무겁게, 너무 빛나게 읽힙니다. 그러나 이런 감동의 시간에서 저는 순간순간 벗어나기도 합니다. 죽어가는 스님을 향해 냉소와 비하를 퍼붓는 이를 보면, 그때마다, 이 사태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저들이 언제쯤 스님을 제대로 볼까, 그래도 저마다 여린 마음이 있는 한 인간인데, 나중에 후회를 어찌 감당하려고, 싶어집니다. 인터넷 공간의 실물 없는 아이디들이지만, 저 아이디가 제 누이, 여동생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말을 보는 것이 사형장면을 보는 것처럼 무섭습니다.
  
이소선 어머니,
  
전태일과 지율스님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두 분 다 그저 너무너무 고마운 분입니다. 제 일생 일대의 감동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스님을 의심하기도 했던 제 마음이 진정한 감동의 시간을 계속 연기시켜 왔다고 할지 모릅니다. 완전한 확신이 아니면 제게 이런 감동은 오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스님에 대한 의심이 분명 있었습니다. 세상의 온갖 작은 것들에 대한 애정이 저리 많은데, 그 애착 때문에라도 스님은 못 죽는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정말 죽을 정도의 사랑인지는 참 몰랐습니다. 죽을 정도의 사랑은 죽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방식이 단식이어서 우리는 스님이 죽음에 이르기 전에도 죽을 정도의 사랑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병상의 스님은 완전한 인간이 되어 있습니다. 저의 경험에는 전태일에 이어 두 번째 완전한 인간입니다.
  
 

어머니, 지율 스님을 만나 주세요
 
 

어머니, 지금 지율스님은 이미 살고 죽는 문제를 떠난 분입니다. 오직 한사람이라도 더 마음의 눈을 뜨기를, 시체 같은 모습으로 그러나 맑은 목소리로 공명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스님의 공명을 거부합니다. 저래 봤자 터널은 뚫리게 돼 있잖아! 하고 도대체 끝날 것 같지 않은 패배감을 나날의 양식으로 먹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님의 사진을 보고도, 고집 부리다 저렇게 가는구나, 하고 차가운 눈길마저 얼른 거둬내고는 생활의 일에 일희일비하며 경박하게 살아갑니다.
  
어머니, 저는 이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 부탁 하나를 드리려고 어머니께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노령에 몸이 많이 불편하실 테지만, 병원을 한번 방문하여 주세요. 지금 지율스님은 면회가 불가능한 상태인 줄 압니다. 때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맑은 정신일 때는, 최근 손봉숙 국회의원을 만나서는 1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합니다. 면회가 안 된다면, 어머니가 스님의 여동생이라도 만나 손을 잡아주세요. 아, 제발 면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기다리셨다가 스님이 의식을 차릴 때, 병실에 들어가 주세요. 그러나 부탁하건대,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제발 살아달라'란 말부터 하지는 마십시오. 스님의 이야기를 우선 좀 들어보세요. 5분만 이야기를 나누어도, 이 사회의 숱한 죽음의 현장에 섰던 지혜로운 어머니는, 스님이 전태일인지 아닌지, 바로 알아볼 것입니다. 현실의 벽에 부딪쳐 죽는 사람은 많지만, 이렇게 온전한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죽음은 정말 귀합니다. 어머니가 보시기에 지금 스님의 죽음이 전태일과 다르지 않다면, 세상에 꼭 알려주세요. 누가 우리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놨느냐! 이 어리석은 세상에 불호령을 내려주세요!
  
제 마음의 눈이 완전하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전태일이 노동자의 인권만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처음에 그렇게 시작했었지만, 결국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연약한 생명을 향한 불같은 사랑을 가진 이가 되었지 않습니까. 10년 전, 제가 어머니를 취재할 때, 거실 벽에 걸린 아들의 유서에서 '나를 아는 모든 나, 나를 모르는 모든 나'를 가리키며, "내 아들은 다른 모든 존재를 자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전태일 이름은 많이 알아도 이런 진짜 전태일의 마음을 사람들은 모른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전태일의 진심은 천성산이 바로 자기라고 하는 지율스님의 진심과 똑같습니다.
  
어머니, 이 세상에 전태일을 사랑하는 분들은 참 많습니다. 그 사랑하는 전태일이 지금 저렇게 죽어가고 있다면, 어찌 이리 무관심하고 냉정할 수 있을까요. 지금 전태일님은, 숱한 단식으로 몸이 많이 아픈 채 동국대학교 일산병원에 누워 계십니다!
  
전태일만큼 세상의 연약하고 안쓰러운 것들을 사랑했고 그 사랑이 너무 아파, 그 사랑을 도무지 어쩌지 못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신 분, 지율스님은, 스님의 지금 단식은, 전태일이 몇 개월에 걸쳐 길고긴 분신행위를 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여동생의 손만 잡아주어도, 그것을 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 하고 지금 벌어지는 이 끔찍한 사태의 본질을 새삼 분명히 깨달을 것입니다. 사회의 부정의와 부패, 냉소와 불신, 무기력과 만나 싸우고 설득하고 끝없이 사랑과 자비를 호소한 스님을 제대로 알아볼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거대한 사랑의 울음이 터져 나와 세상을 적실 것입니다. 돈독이 잔뜩 오른 이 민족의 감수성이 또 한 차례 깨끗이 씻기는 것입니다.
 
 

지율 스님의 '사랑'을 기억합시다
 
 

전태일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은, 이 글을 여기까지 다 읽으셨다면, 조금이라도 공명하셨다면, 대법원에 탄원서를 보내주시기를 간청하고 싶습니다. 대법원을 하늘처럼 섬기며 현명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진심으로 써 주십시오. 과장 없이 솔직하게 개인적인 공명의 이야기를 써주십시오. 저도 미력이나마 제 할일을 계속 하려 합니다.
  
이 글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면, 저는 언제라도 쓰겠습니다. 어떤 하찮은 댓글의 내용도 다음 글에 다 담아 제가 해명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지율스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아보는 날까지, 수천수만 매의 글을 쓰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세상 어두운 곳에서 울고 있는 모든 눈물을 이제는 정말 사랑합니다. 패배감과 무기력에 빠져 그 눈물을 회피했던 지난 많은 시간을 참회합니다. 지율 스님의 천성산 사랑을 사랑합니다. 제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 이 사랑을 지키겠습니다. 
   
 
 
  김곰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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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거운 날 [2003. 12. 24]

안산 정확히 말하자면 시흥에 올라온지 이틀째다.

아직은 백수라 일자리를 구해야 된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걱정이 앞선다.

소주 한 잔이면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 질것 같다. 안개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지역 특성상 안개가 심하게 끼여있다. 이틀 동안 안개가 낀 흐린 날뿐이었다.


 

잘 할 수있을까?

스스로 물어보지만 잘 모르겠다.

내가 정말 해야 할 일과 먹고 살기 위한 일이 있기에 착잡한 심정이다. 룸메이트인

친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기에 담배와 술을 하지 않는 바른 생활맨이다. 그래서인지

흐트러지는 마음이 다 잡아진다.


 

지리 파악을 위해 두발로 엄청나게 걸어 다녔다. 그래도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다.

지하철 타고 중앙역에 내려 하릴없이 걷다가 서점이 보이길래 서점에서 불안한 내 마

음을 진정시켰다. 책만 보면 왜 이리 편안해지는지.

빨리 일자리를 잡아서 정신없이 일에 몰두해야겠다.

너희들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내 마음도 괜히 무거워 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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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은 아침 [2001.04.06]

4월 6일 맑음


 

벚꽃의 화려한 자태와 따스한 봄 향기가 코를 유혹하는 봄날은 어김없이 왔다. 계절의 봄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듯이 국방의 의무 또한 우리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소 도살장 끌려가듯 하나 둘씩 갔다.


 

날선 잠에 실눈을 부비며 일어났다. 노래방 일을 마친 병희와 지친 걸음으로 역으로 갔다. 월급을 아직 받지 않아 편도 차비 700원 밖에 없었다. 미안 했지만 병희한테 신세를 졌다. 혼자 가기 싫어 병희에게 같이 가자고 했고, 영민이 혼자 안 나오면 좀 그렇다고 해서 병희가 전화해서 나오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간만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얼굴을 다 보게 되었다. 병희가 건네준 말보르 레드 담배로 착잡한 마음을 누그뜨렸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재훈이 오기 전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어 기분이 싱그러웠다.


 

술이 덜 깬 상태로 우거지죽상을 하고 나온 영민이, 산뜻하게 발랄하게 변신하고 나온 미애. 그렇게 못 잡아 먹어 안달이든 상극지간인 성배가 훈련소까지 가고. 하여튼 작은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정렴이 생각이 났다. 입소 당일 마중을 못 해준게 씁쓸하게 가슴 한 곳이 시려왔다. 드디어 차 시간은 다 되었고 짧은 대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재훈이와 처음으로 한 악수. 착잡함과 무거움이 전해지는 악수였다. 개찰구를 지나갈때 재훈이 어머니 눈가는 붉어졌고, 아버지는 마른 그늘이 얼굴에 져 있었다. 플랫폼에 섰을때 내가 해 준건 손을 흔드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기차는 출발했다.


 

쓸쓸하고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미애는 학교가 있는 부산행 기차로, 영민이는 재훈이 아버지 차로, 병희와 난 버스를 탔다. 중고생들 등교 시간이라 꽉 찬 버스에 앉았다. 병희와 난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차창 밖의 풍경만 멍하니 바라 볼 뿐이었다.


 

교복 입은 중고생들이 부러워 보였다. 집 근처 에서 내렸다. 고교때 국어 선생님을 뜻밖에 마주치게 되었다. 가벼운 인사로 지나쳤다. 멀리서 들려오는 경쾌한 새소리. 내 감정과는 상관없는 듯한 눈부신 햇살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짧은 시간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을 어떻게 가라 앉힐 수 있을까. 조금은 서러운 듯한 울음을 터뜨릴 수만 있다면 시원 해질 듯한데. 밝음이 살아 숨쉬는 아침에 울음이 어울리지 않는지. 억지로 울 수도 없고 환장 하겠다.


 

재훈이는 군대가고, 버스에 탄 중고생들은 학교에 가고, 그 국어 선생님 또한 학교에 갈 것이고, 난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알 수없는 서러움이 일때면 자책을 하는 버릇에 괜히 초라 해진다.


 

끝내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던 아침. 그렇게 울고 싶었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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