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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8/16
    오랜만에 애국가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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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5/08/15
    주먹밥 만들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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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5/08/10
    아 꿀꿀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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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5/08/04
    할아버지 건국포장 받다. 그러나...(4)
    molot
  5. 2005/08/0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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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애국가를...

어제 부산에 있는 일가들 거의 모두와 광복절 기념식에 갔더랬다.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린 기념식이었는데 재밌는 것이 부산시민회관 옆에는 부산근로복지회관(민주노총 부산본부 사무실)이 있다.

 

뭐 그건 그렇고,,,, 제대 한 이후 거의 처음으로 애국가를 불러봤다. 4절까지 부르라는데 되게 어색하더라. 하튼, 애국가도 부르고 광복회 부산지회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기념사도 듣고..(좋은 말씀 하시더라. 금전만능주의, 자본주의가 판을 치면서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고유의 사상이 땅에 떨어졌다던가..)

 

그 이후에 유족 대표로 아버지가 부산시장한테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부산에선 건국훈장, 포장, 대통령 표창 해서 10명에게 추서됐다. 대통령 표창을 받은 한 유가족은 대성통곡을 하던데 맘이 좀 짠하더라.

 

훈포장을 받는 유족들은 맨 앞줄에 앉았는데 아버지 옆에 앉은 할아버지는 자기 부친이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는데...감동이라기보다는 분개의 연속이었다. 보훈처에서 이거 가져오라 저거 가져오라 그러고 제대로 안되니 브로커한테 돈 주고 관계 서류 구비하고, 또 보훈처 공무원한테 급행료도 주고...뭐라더라 지금까지 한 오백만원 썼다나?

 

한국의 현대사란게 워낙 격변을 많이 거쳐 왠만한 가정이면 가족사 자체가 소설로 몇권이지만, 일제에 고생한 집안들은 그 소설 권수가 좀 더 늘어난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슷한 사람을 또 만난게다.

 

근데 광복절 기념식이 꽤 그로테스크 했다. 기념사를 한 부산 시장, 만세 삼창을 선창한 부산 시의회 의장은 입을 모아 '아펙 이야기'더라. 시장은 임진왜란때도 왜군이 부산에 주둔을 했고 개항도 먼저 됐으니 항일도 부산이 많이 했다는 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를 했고(친일파가 상대적으로 많았을 가능성이 훨 높지) 독립 정신을 이어받아 아펙을 성공적으로 개최해야한다고 중언부언했고 부산시의회 의장도 만세 삼창하러 올라가서 아펙 찬양을 잊지 않더라.

 

골까는 것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부산시립합창단이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리운 금강산' 뭐 이거야 좀 냉전적 노래긴 하지만 장중하고 이런 행사곡으로 많이 불리니까 그렇다 치고, 그 다음 레퍼토리인 '상록수'는 훌륭했는데...그 다음은 뭔고 하니 CM송 메들리를 부르더라.

 

'손이 가요 손이가 새우깡에 손이가'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팔도 비빔면' '열두시에 만나요 해태 부라보 콘' 그 밖에 '옴파로스' 무슨 이런 노래들을 쭉 부르더라.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광복절 기념식에서 개별 상품과 회사 이름이 나오는 CM송을 부른 건지 도통 이해가 안되더라. 맘 같애선 항의하고 싶었는데 걍 참았다. 내가 부산일보, 국제 신문 같은 부산 지역 언론사 기자였으면 아마 분명히 문제 삼았을 건데...지금까지도 이해가 안된다. 더 가과이었던 것은 CM송 메들리가 이어지니까 광복절 기념식 참석한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따라 부르려 했다는 것..ㅠㅠ

 

포장증, 건국포장(훈장 비슷하게 생겼더만)이랑 시장이 준 팔목시계를 받았느데 그 팔목시계는 싯가로 약 1만5천원 정도 되 보이더라. 뒷판에는 지 이름은 떡하니 새겨놓고 ㅋㅋ

 

기념식 끝나고 일가들이 기념식장 인근 식당에서 같이 식사를 했다. 나이 든 고모들은 서훈을 기뻐하시고, 이것 저것 구비서류 찾아서 성공했다고 나한테 칭찬하시던데 송구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어제 밤 엠비시 뉴스데스크가 사회주의자 훈격 일괄 강등에 대해 리포트 했다. 내 인터뷰는 빠졌지만(잘 됐다는 생각도 든다.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뻘쭘하기도 하고)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지냈던 김철수 선생 손자분 등의 인터뷰가 나왔다. 보훈처 공무원들의 말도 안되는 헛소리도 직접 전파를 탓으면 좋았을 텐데 그건 그냥 기자 리포트로 처리됐고...

 

서훈 받은 것 자체보다 오히려 사회주의자 훈격 강등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부족하나마 매체 몇 군데 보도된 것에 대해 나를 더 칭찬 해주고 싶다. 민주노동당 모 의원실로도 문제를 제기했는데, 거기선 '아이구 그러십니까 우리도 적극 대응하겠습니까'라고 응답했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아마 그 의원은 815 하느라 바쁘고, 국내`국외 사회주의 항일인사들이 이북이랑 그닥 사이가 안 좋게 종결된 탓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리라 짐작은 된다만...쳇

 

이번 서훈이 고생만 하다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그리고 이 땅에 살아있는 그 분들의 자녀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길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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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 만들기

붉은사랑님의 [휴가] 에 관련된 글.

산에서 주먹밥 만들기가 쉽잖을 텐데...

 

하튼 보통 만드는게, 소고기 볶음 주먹밥, 참치마요네즈 주먹밥, 볶음김치 주먹밥, 소고기고추장 주먹밥.

 

일단 밥을 한다. 그 다음 밥을 주걱으로 뒤젂여 주며 열기와 수분을 약간 날린다. 밥과 단촛물을 섞는다(단촛물 만들기= 식초를 끓이고, 설탕과 소금을 약간 씩 넣는다. 분량은 밥에 섞었을 때 약간 새콤할 정도로. 식초 다섯스푼이면 설탕 두스푼, 소금 반스푼 정도.. 단촛물이 좋은게 여름에 밥이 상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하거등)

 

주먹밥을 만들어서 산에 가지고 가는지 아님 산에서 만들어 먹는지 모르겠지만...산에서 만들어 먹는다 치고..단촛물을 만들어 갈 것을 제안하는 바임. 밥을 뜨겁게 해서 단촛물 섞으면 되니까..할 때 마다 단촛물 만들기는 번거로우니까..

 

소고기 볶음 주먹밥은 갈아놓은 소고기, 스몰다이징한 당근(여유가 되면 우엉도 포함할 것)을 간장에 볶아 고명을 만든다(굴소스를 섞으면 더 맛이 좋음) 모든 주먹밥에 공통적인게 고명은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니 간을 세다 싶을 정도로 해야한다는 것.

 

참치마요네즈 주먹밥은 참치캔에서 기름을 따러내고 숟가락등으로 균일하게 부스러뜨린 다음에 마요네즈, 소금 약간, 후추 약간을 넣어 마구마구 섞어 고명을 만든다.

 

소고기고추장 주먹밥은 소고기, 참기름, 고추장을 볶아 볶음 고추장을 만들어 고명을 만드는 것이지 

다진 소고기에 다진양파, 생강 참기름, 다진 마늘, 다진 양파등으로 재워 고추장, 참기름, 설탕 약간 해서 달달 볶아 주세요. 설탕은 마지막에 넣어 졸여줄 것. 막판에 참기름 투여해 약고추장 만듬.

 

이렇게 고명을 만들면, 밥으로 만두를 빚는다는 생각으로 주먹밥을 만들면 됨. 밥약간 손에 쥐고 고명 넣고 밥약간 덮는 식으로 주먹밥 만들어주세요. 만든 이후 검은 깨 살짝 뿌리면 됨. 빨리 빨리 만들지 않아 밥에서 수분이 날아가면 나중에는 잘 쥐어지지 않음.

 

산에서 주먹밥을 만들어서 먹겠다면, 산 아래서 약고추장, 소고기 볶음(안상하게 할려면 좀 짜게)을 만들어 간다음에 고명으로 삼는게 어떨까 싶음. 약고추장,소고기 볶음,  단촛물을 다 만들어 가라는 것이지..참치마요네즈는 물생기니까  만들어 가긴 힘들테고..

 

그건 그렇고 나도 지리산 가고 싶네ㅠㅠ

 

시판하는 국시장국(가스오부시, 소고기 국물맛 다양하게 있음)을 한 병 사가면 그다지 무겁지도 않고 물만 끓여 그것만 풀어도 그럴듯한 국물이 되니 휴대하면 후회는 안 할 듯.

 

근데 얼굴 본지도 오래됐는데..

 

하여튼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고 돌아와 주위사람한테도 마구마구 지리산의 정기를 나눠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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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꿀꿀해

비 오다 말다 한다. 간만에 일찌감치 출근해서 점심 먹은 직후 까지는 정신 없이 일 했는데 갑자기 할 일이 없다. 심심하다. 

 

날씨도 꾸리꾸리하고 꿀꿀한 노래 무한반복 듣고 있으니 아흐 기분이 완전히 바닥을 파고 들어 모호로비치치 불연속면을 뚫고 들어가 맨틀에 닿을 지경이다. 차라리 맨틀에 닿으면 거긴 온도가 높으니까 뜨거워지기라도 할텐데 그렇지 못한게 아쉽다.

 

아웅~ 오늘 같은 날이 굽굽한 날은  김치찜 혹은 갈빗살 아니믄 녹두전에 소주 or 오뎅 꼬치에 청주 or 노가리에 맥주를 먹어줘야 하는데...

 

지난 일요일 '젊은 인생을 술로 탕진하지 마라'는 사장님의 사자후가 있은 후 며칠 안 되서 그런지 사무실 분위기는 영....파이다. 하긴 휴가다 뭐다 해서 사람들도 얼마 없기도 하지만. 

 

집에 일찍 들어가서 맛있는거 해먹을까? 멸치와 다시마로 국물 낸 후 가쓰오부시로 좀 더 우려내는 것이야..그래서 멸치, 다시마, 가쓰오부시는 버리고 무 반개 나박나박 썰고 갖가지 오뎅을 넣고 끓이다가 양파 반개 납작납작 썰고 고추 3개, 대파 반개 쫑쫑 썰어서 한 소끔을 더 끓이는 것이지.

 

겨자를 푼 간장을 마련하면 준비 완료. 비 구경하면서 오뎅탕이랑 청주 홀짝 홀짝 캬~

 

아무리 생각해도 청승이다ㅠㅠ 접때 혼자 메밀소바 맛있게 만든 다음 맛없게 먹은걸 생각하니 또 그러긴 정말 싫다.

 

아 평소 인간관계가 이럴 때 뽀록이 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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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건국포장 받다. 그러나...

3일 보훈처에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을 포함한 214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서훈을 추서한다고 밝혔다. 이번 명단에는 우리 할아버지도 포함이 됐다. 국내항일로 건국포장을 받았다.

 

호적상 이름 윤억병, 가명으로 우병을 쓰기기도 했던 우리 할아버지는 1938년 2월 일본경찰에 피체됐다. 정부공식 기록으로는 청년동지회 활동, 학계 자료에 따르면 칠곡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 경북지역 사회주의자 동맹 등으로 불리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일년 8개월 동안 지낸 우리 할아버지는 1939년 10월 14일 90여명의 동지들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검찰에 송치됐고 이 중 26명이 구속, 대구형무소에 투옥됐다. 1941년 3월까지 7회의 구류갱신처분을 당한 끝에, 1941년 3월 1년형을 언도받았으나 이미 경찰에서 20개월 형무소에서 17개월을 지냈기에 미결구류일수 산입으로 석방됐다.

 

당시 모스크바라는 별명을 받았던 대구 경북 답게 큰 조직 사건이었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대구에서 공부하던 인물들이 대거 향리인 칠곡, 왜관 지역으로 낙향해 조선공산당 재건에 나선 것이다.(프로핀테른의 떽을 받았단다.) 왜관은 경부선 개통과 함께 커진 신흥 상업도시였지만 일개 면에서 터진 사건에 연루된 조직원이 90여명이 넘고, 구속자가 20명이 넘었다는 것은 당시 그 동네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심지어 도쿄등지에 조직원을 파견하기도 했단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우리 할아버지는 사회주의자 였단 말이다. 적용받은 법규는 치안유지법(국가보안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법이다. 20년대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하에서 급증한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위해 쇼와 시대에 만든 법이다.)

 

지금은 일흔을 훌쩍 넘긴 고모들, 생전에 할머니의 전언에 의하면 형무소에 면회 갔더니 손톱이 다 빠졌더라는 등 딱히 알만한 온갖 고문들을 다 받은 모양이다. 또한 듣기로, 해방 이후에 더 힘들었단다. 일제 때 치안유지법 위반 '전과자'는 예비 검속 대상이었고 대구 경북지역에서는 10.1 항쟁등 사건이 계속 터진데다가 어찌나 못살게 굴던지 견딜 수가 없어 부산으로 식구들이 이사했단다.

 

하여튼, 뭐 정부에서 사회주의자들까지 서훈대상에 포함한 것은 전향적인 것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훈격이 문제로 터졌다. 경찰 유치장 20개월, 교도소 17개월 동안 옥살이 한 우리 할아버지는 아무리 보수적인 기준을 적용해도 건국훈장 애족장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 등급 낮은 건국포장을 받은 것이다.

 

보훈처 공훈심사과 실무자는 '사회주의자는 한 등급을 낮추기로 결정했다'고 말해주더라. 공식적인 기준이냐는 말에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기준을 정했단다. 그러면서 이 전 정권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전혀 포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일도 전향적 인 것이란다.

 

차라리 안주고 말던가 자기들이 선심쓰는 것도 아니면서 사회주의자는 한등급 낮춘다는 기준을 어떻게 삼을 수 있는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거지 동냥주는 것도 아니고...열받은 아버지는 이것을 받아야 되냐 말아야 되냐신다. 

 

게다가 청년동지회(보훈처 공식 표현), 칠곡공산주의자 협의회, 사회주의자 동맹으로 할아버지와 같이 옥고를 치룬 분들중 다수는 이미 노태우정권인 90년, 김영삼 정권인 95년에 훈장을 받았다. 그건 어떻게 된 거냐 물어보니까 역시 보훈처 직원은 '그때는 모르고 줬을 거고 이번엔 알았기 때문에 한 등급 낮춘거다' '형평성 문제는 우리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 분들걸 하나 낮출 수도 없는것 아니냐'고 되묻더라.

 

결국 정부에서는 사회주의자 47명을 포상했다고 떠들석하게 선전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훈격조작이 숨어 있고 사회주의자=2등 독립운동가 라는 기준이 서있는 것이다. 

 

옥신각신 끝에 보훈처 담당자는 "선생님 할아버님 같은 경우에는 순수 민족주의 활동을 한 것은 밝혀진 게 없고 사회주의건만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순수 민족주의 활동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있어야 사회주의의 흠집을 가릴 수 있단다. 

 

난 할아버지 얼굴도 본 적이 없으니 그 분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30년대 후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다. 민족해방의 경로로 사회주의를 택한 사람들인게다. 물론 그 안에서도 좌우 대립이 있어서 민족주의를 탈피해야 한다는 측도 있었고 우리 할아버지께서 그 안에서 좌파였는지 우파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정부에서 이런식으로 재단 당해야 할 행위를 한 것은 아니고, 부끄러워해야 할 바는 전혀 아니라고 확신한다. 보훈처 직원은 심지어 '사회주의자였던거 아시죠? 재건공산당 사건이었잖아요'라며 비아냥 혹은 협박 식으로 이야기 하더라(그렇게 들린 건 내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나도 열받았다. 그래서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수훈 공훈록(서훈을 받으면 이러이러한 공적으로 이런 상을 수상한다는 공훈록을 작성하게 돼 있다)에 '재건 공산당활동 결과로 건국포장을 수여한다'고 명기해달랬다. 그니까 돌아오는 답은 '선생님이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 도 있지만 국민감정이나 또 일가 친척분들도 그걸 원하시지 않을 것'이란다. 하긴 그 말이 맞지 우리 일가 친척들이 그걸 원할런지는 나도 자신 없다.

 

도대체, 90년에 이미 같은 사건으로 동지들이 서훈을 받았는데 자기들이 알아서 연루자를 찾아 서훈을 해도 될까 말까한 판국에 개인이 쎄빠지게(국립문서보관소에서 관련 자료 찾느라 작년에 고생좀 했다) 찾아서 올린 것도 열받는데 사회주의자는 한 등급 낮춘다니 , 무슨 선심 쓰는 것인가?

 

열받는다. 이래 놓고 국민통합이니 사회주의자 재발굴이니 선전하고 앉았다. 그래 머 국가에서 주는 훈장 받으면 머하고 안 받으면 또 머하냐 싶긴 한데...이런 식은 아니다. 누가 누구를 평가하고 감히 사회주의자는 한 등급 낮춘다는 기준을 누가 정할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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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바 없고, 머 어쩌라고? 사발 풀기도 힘들고, 사발 푼 다음에 감당키도 힘들고, 니미럴...따져보니 약속은 딱 2주 남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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