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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0120301-20120306

청강을 준비하면서 진광흥 선생의 <제국의 눈>, 중문판 <去帝國>, 영문판 asia AS METHOD를 상호 대조하면서 전반부를 다시 읽어봤다. 예전 느낌과 또 많이 달랐는데, 아주 특이한 경험이라 할 수 있을 듯 하다. 한글판(2003)은 가장 먼저 나온만큼 구성상 조금 미진한 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일부 이론적 부분은 내용이 수정된 부분도 있는데, 예를 들면 한글판에서는 알튀세르에 대한 원용이 매우 약한데, 영문판이나 중문판은 매우 명확하게 알튀세르의 structure in dominance를 통해 식민체제를 이해하고 있고, 대안적 주체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제시되는 비판적 혼합과 타자되기 전략 역시 이러한 구조 안에서의 윤리적 원칙으로 제시된다. 여기에서는 원칙적으로 계급, 인종, 성 등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하되, 각 영역 안에서 다른 영역의 원리를 내부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차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실천을 내재화한 노동운동 같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식민지에서는 식민 체제가 지배적 심급의 구조라는 설명이다. 물론 식민 체제의 극복은 식민자와 거울유희에 빠지는 독립과 현대화가 아니라 탈식민이어야 한다. 그리고 탈식민과 탈제국이 식민지와 제국에서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제국주의가 신제국주의로 넘어오면서 냉전이 전개되고, 진정한 탈식민과 탈제국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탈식민과 탈제국에 다시 탈냉전이 추가되어야 한다. 탈냉전의 과제에는 냉전시기에 심화된 왜곡된 현대화(제도와 정신)를 성찰하는 것이 포함된다. 진광흥 선생은 탈냉전의 시기에 지역통합과 세계화 담론이 등장한 것을 적극적으로 탈냉전을 추진하여 탈식민과 탈제국으로 나갈 수 있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그러면 냉전의 시기와 탈냉전의 시기는 식민지 시기와 지배적 심급이 어떻게 다른가? 식민 체제가 지배심급일 때, 핵심적인 비판은 제국과 식민지 모두에서 국민화와 국가주의에 의해 형성되는 체제 재생산에 기여하는 주체성에 대한 것이 된다. 기존의 사회구성체 논의에서 한 국가 내부의 국민적 주체성과 계급적 주체성(나아가 기타 하위주체성들)이 심급들을 구성했다면, 파농을 거쳐 진광흥 교수가 제시하는 식민지리 역사유물론에서는 국민적 주체성이 식민/제국적 쌍방향의 관계적 주체성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정치경제학이 역사유물론에 의해 '역사화'되었다면, 이 역사유물론은 다시 공간적 해방을 거쳐 유럽중심주의를 극복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식민지리 역사유물론이 모종의 새로운 '국가' 이론의 방향을 제시하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제국의 관계적 주체성은 국가주의와 국민주의에 의해 재생산되는 식민/제국 체제(국가간체제 보다 좀더 이데올로기와 주체성의 문제를 고려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닐까?)에 대한 탈식민/탈제국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사회구성체 내부의 계급/성/인종 등의 다른 주체성을 비판적 혼합이라는 윤리적 원칙 하에 매개해주는 포괄적 주체성이기도 하다.  이는 마치 내가 박현채 선생의 '민족' 개념이 갖는 대안적 성격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한 것 같다. 다시 말해 이는 '민족' 없이 '민중' 없다는 나 나름의 박현채 해석과 관련되는 것 같다. 만약에 이를 '민족'과 같은 것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면, 신식민/신제국적 상황에서도 여전히 지배 심급은 변화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지배적'이라는 의미가 인과적 관계 속에서 결정적이라는 의미이기 보다는 여러 심급들을 둘러싸는 포괄적 매개라는 의미로 전환되면서, 탈중심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냉전은 탈식민과 탈제국의 과제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어 놓은 셈이다. 특히 인식론적 차원에서 장기간 봉쇄된 탈식민과 탈제국의 과제를 탈냉전의 시기에 다시 제기하는데는 첫째로 역사 속으로 접근하기 위한 시도가 필요하고, 둘째로 이를 공백기 동안 진행된 변형된 사회 구조의 맥락에 정확하게 위치짓는 의식적 노력('당대 contemporary' 문제의식)도 필요하다. 즉, 여기에서 내가 그동안 고민해온 '역사성'과 '정치성', 그리고 '민족'과 '민중'의 변증법이 논의될 수 있을 것같다.

 

여기에 상당히 복잡한 이론적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생략되어 있는데, 당장 풍부하게 논의하기는 어려울 듯 싶다. 조금은 상투적인 질문을 남겨 놓고 나중에 더 고민하도록 하자.

 

비판적 혼합의 '타자 되기'의 곤란함은 어디서 오는가? 도덕주의적 명령으로 문제는 해결되는가? 이는 심급들 사이의 차이를 설정하지 않는 무차별성(이는 급진주의 운동을 통해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성노동자 의제와 관련한 페미니즘의 곤란)에서 오는 것 같지만, 그것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순간 심급간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게 되고, 그것을 어떤 '표출적' 인과성 또는 '정세'에 맡기는 것도 인식론적으로는 무책임한 듯 하다. 오히려 심급들의 형식이나 구조의 차이를 분석함을 통해서 서로의 관계를 다르게 설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화요일마다 청강하는 진광흥 선생의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입문' 수업에 함께 팀을 이룬 두 친구가 있는데, 하나는 예전에 사카이 나오키 수업을 같이 들었던 이탈리아 여학생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에서 온 남학생이다. 내 영어가 좀 딸리긴 하지만, 매주 수업 전에 한 시간씩 읽은 내용을 토론하고 수업 중에 정리하여 발표하면서 많이 배우게 된다. 이번주 이들과의 논의에서 느낀 바이지만, 내가 진광흥 선생의 알튀세르 용어가 정확히 알튀세르의 것인것 같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을 때, 그들도 모두 동의했지만, 흥미롭게도 모두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 그냥 넘어간다. 이론과 개념은 충분히 (또는 불가피하게) 자기 방식으로 이해/오해되고 사용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 본다.

 

* 3월 24~25일에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의 미래>라는 행사가 학교에서 열리는데, 오랜만에 한국에서 여러 선생님들이 오시는 모양이다. 다들 훌륭하신 분들이지만, 나는 아직도 이 분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 홍콩에서 열리는 전리군 신간 토론회에 6월 9~10일 참여할 것 같은데, 그 직전에 우리 연구소에서 <동아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워크숍>이 열린다. 기획자인 류 교수가 박현채 관련 글을 발표할 것을 권유했지만, 부족함이 많은 글이고 수정하고 보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을 내야 하는 바, 홍콩 행사에 전념하기로 하고 고사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백승욱 교수가 오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고민하는 부분과 많이 연결되어 있을 것 같아 기대를 하고 있다.

 

* 일요일에는 인터아시아 여름학교 동기들과 핵 발전 반대 집회에 가고, 끝나면 우리 집에서 고기를 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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