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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되는 꿈을 꿨다. 시국이 그래서 그런가.ㅋㅋ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비례대표로 당선이 되어서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했던 것 같다. 나에게도 어떤 정치가적 욕망이 있었나보다. 암튼 어젯밤 이런 꿈을 꾸고 얼마 안 지나 손호철 선생님과 임영일 선생님의 글을 보게 되었고, 간단히 논평을 페북에 올려보았다.
먼저 꿈꾸기 전에는 이런 논평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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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권파에 대한 도덕적 비판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보수 언론이나 정당의 비판과도 다를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당권파는 남한 좌익 운동의 한 운동 문화를 보여준 것일텐데, 아마도 집단성을 개체성 보다 우위에 두는 논리가 핵심인 것 같다. '위기'는 적당한 변명 거리를 제공했다. 아래로부터의 주체화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와 해방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운동의 이념과 문화의 혁신이 전제되지 않는 한, '위기'적 상황에서 이러한 패권주의는 계속 반복되게 되어있다.
그런데 사실상 통합진보당 자체가 진보진영 안에서 MB에 의한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모종의 거짓 '위기'를 핑계 삼아 다양한 진보의 목소리 위에 군림하고 통합을 강요한 것 자체가 패권 아니었던가? 그것 자체가 집단성, 즉 '통합'과 '단결'을 아래로부터의 주체형성 위에 두었던 '집단 논리' 아니었던가?
진보좌익운동의 대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대안적 세력이 부재한 것이 현재 목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해방 주체화와 사회 변혁을 정세적으로 결합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민족문제와 민중운동을 결합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민족' 없는 민중운동은 변혁적 전망을 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사회구성체논쟁이 다시 진지하게 재검토되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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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20507084833§ion=01&t1=n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손호철 교수의 칼럼은 매우 흥미로운 분석을 하고 있다. 당권파 이정희 대표와 자유주의 세력 유시민의 밀월관계와 그 파탄이 갖는 의미에 대한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러한 분석에 '민주주의'의 문제를 한반도와 남한의 좌익 전통으로부터 분리하여 외부화하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나는 NL당권파의 패권주의가 잘못된 관행이든 무엇이든, 사실상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당권파를 중심으로 한... NL이 갖는 물질적 힘, 나아가 그 역사적 힘 때문이었다고 본다. 더 긴 안목에서 보면 이 힘은 민족적 역사가 부여한 힘이었고, 정세적 변화 속에서 긍정적으로 전유되어야 할 힘이었다. 이른바 PD는 이러한 힘의 타락에 대해 비판할 수 있었지만, 이를 새로운 힘으로 긍정적으로 전환시키지도 못했고, 대체할 수 도 없었다(어쩌면 이 실패는 필연적이었다). 결국 이러한 전환의 지체는 손호철 교수의 칼럼이 주목한 것처럼 유시민과 같은 외부세력에 의해 '극복'될수도 있는 상황까지 왔다. 이는 유시민의 좌익에 대한 기여인가? 아니면 좌익의 자유주의로의 포섭인가? 답은 결국 민주주의의 타자에 대한 사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손 교수는 이 지체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거나, 그저 당권파의 도덕적 문제로 치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우리 좌익 이론의 한계를 직시할 때가 왔다고 본다. 계급적이고 민중적인 보편적 분석으로는 우리 사회를 역사적으로 조건짓는 개별적 구조들에 맹목적일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이론은 저항을 추수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어찌보면 그것은 실천적 이론이 아니다. 본래 이론은 보편적 명제를 특수한 사례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 특수성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통해서 보편성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만 비로소 대중의 정치적 저항의 힘이 구성적인 변혁의 힘으로 조직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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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redian.org/index.php/archive/2348
임영일 선생의 '하방'은 궁극적으로 아래로부터의 노동운동의 논리에서 나온 판단이지만, 그 의미는 이중적으로 노동운동을 넘어서는 것 같다.
... 본래 당 운동이나 민족운동(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은 노동운동 등의 민중운동의 결과적 총합일 수 밖에 없는데, 기층이 무너지는 과정을 극적으로 드러낸 노동운동으로부터 그 과정의 한계를 더욱 명확하게 판단한 것이다. 나는 어쩌면 당 운동은 곧 민족운동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기본적으로 변혁운동이다. 그런데 변혁운동은 민중 주체의 해방운동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대중과 유리된 엘리트주의적 정당 내지는 대중을 기만하는 포퓰리즘적 정당 이상의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게다가 그러한 당은 그와 결합된 해방적 주체의 역량을 지속적으로 무화시키고 변혁의 전망을 지속적으로 연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임영일 선생의 '하방'은 이미 노동을 넘어 민중운동 전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다른 차원도 있는 것 같다. 이론적 측면에서의 '하방'은 무엇인가? 나는 이론적 측면에서는 기어코 재조직될 민중의 해방적 운동을 기다리면서, 한편으로 변혁의 방향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 기층의 해방적 민중운동이 당 운동 또는 민족운동과 같은 변혁의 역량으로 조직될 수 있도록 진정한 무기를 벼리는 이론적 '하방'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론에 있어서의 이 '하방'은 여러 운동이 하나의 사회 속에서 유기적 역량으로 아래로부터 조직되어 수렴될 수 있도록 매개해주는 개별특수적 '민족'적 심급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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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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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손호철교수의 칼럼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역사의 간계 혹은 도구 운운한 부분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어요. 우선 이런 부분."마르크스는 잘못된 서구중심주의적 시각이긴 하지만 영국의 인도지배를 분석한 글에서 영국의 식민주의가 탐욕의 산물이고 잔인무도한 부도덕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도의 오랜 봉건적 질서를 파괴하기 위한 '역사의 도구'라고 분석한 바 있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바라보며 문득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다."
제가 맑스 연구자도 아니고 맑스를 많이 읽은 사람도 아니지만 서구중심도 아니고 서구중심주의라는 표현은 납득이 가지 않네요. 맑스가 영국이 역사의 무의식적 도구 노릇을 했다고 한건 그 상태에서는 인도에서 근본적 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맑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의 인도의 정치적 양태가 아무리 변화 무쌍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 사회적 조건은 먼 옛날로부터 19세기까지의 첫 10년에 이르기까지 변화하지 않은 채 존속해 왔다."
무려 2천년동안..
헤겔도 인도는 중국과 달리 자신들의 역사를 기술할 능력이 없다고 해요. 인간들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박되어서 자연상태에 머물러 있고 헤겔이나 맑스나 역사의 진보를 인간이 공동체의 부품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가는 발전과정으로 보고있는데 인도는 그 상태로는 가망이 없다고 봐요. 그런데 유시민이 영국이 인도에 저지른 짓처럼 근본적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지식인의 호들갑이라고 생각해요.
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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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손 교수가 NL운동이 상징하는 역사적 의미와 성과를 전유하고자 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한편, 서구중심주의나 유럽중심주의는 보통 포스트식민주의Post-colonialism이나 탈식민주의De-colonialism/De-imperialism에서 제기하는 핵심적 논점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동일한 비판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경우 80년대 후반 이후 그런 경향이 강해지면서 분단이라는 특수성을 사고하지 못하는 NL과 분리된 PD가 등장했던게 아닌가 생각해 볼 수도 있구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제가 마르크스주의적 보편성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그것만으로 역사를 진정 '유물론'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회는 자본주의적 현대화 이전에도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현대성과 맞물리면서 서로 다른 궤적을 갖는 역사를 그리게 됩니다. 저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변혁이 세계적 수준에서 성공한다고 해도 무차별적인 공동체로 갈수도 또 가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할지는 몰라도 일종의 세계주의적/보편주의적 독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처음부터 '무'에서 온 것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무'로 가지 않을 것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의미에서 보편성의 논리는 무엇보다 먼저 특수성을 전제로 해야지 외부적 보편주의적 관점에 의해 타자화되지 않는 1) 반엘리트주의적 기층 대중운동, 2)반제국(보편)주의적인 사회변혁과 맞물리며 세계적 변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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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포스트식민주의나 탈식민주의에 대해 전혀 몰라서 그 부분에 대해 고민을 공유할 수 없음이 가슴 아프네요. 다만 제가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영국의 인도지배를 있는 그대로 읽었을 때 맑스의 그런 관점을 잘못된 서구중심주의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어쨌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님이 언급하신 부분에 대해서 제 생각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모든 사회가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 그건 특수성이 아니라 고유성 혹은 개별성(singularity)이겠죠. 특수성이라는건 우리처럼 분단의 역사를 갖고 있는 사회에 해당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저의 얄팍한 독서로는 맑스는 역사를 특수성의 극복의 문제로 본 것 같아요. 그렇다면 과연 계급없는 사회로 가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 자들이 부르주아 통치 자체의 위대함과 과도적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못할수록, 이 머슴짓은 더욱더 역겨운 것으로 되어간다네."
藝術人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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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역사를 특수성의 극복이라고 봤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무차별적인 공동체들의 묶음을 의미할 수도 있는 것이고, 국가 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언급이 역사적 제약 속에 있었다고 한다면 마르크스를 이렇게 단정짓는 것은 정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개별성이나 고유성의 문제는 특수성과 분리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는 고유성을 역사유물론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수성을 매개로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인식론적 판단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고유성은 특수성에 환원되지 않지만 일정하게 갈등적이고 변증법적인 관계에 있지 않나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이는 당대 속에서 이전의 역사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되기도 하지요.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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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괜한 얘기를 해서 본문과는 상관없이 대화가 이어져 죄송하군요. 어쨋든 제가 아는데로만 얘기하자면 맑스와 헤겔에게서 보편성-특수성-개별성 범주는 보편성이 출발점, 특수성이 매개항, 개별성이 종착점을 이룹니다. 그러나 이 범주는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개인에 해당되는겁니다. 그룬트리세 서설 맨 처음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사회 속에서 생산하는 개인들 - 따라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개인들의 생산이 당연히 출발점이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개인들이 바로 특수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개인, 따라서 생산하는 개인도 비자립적이고 더욱 커다란 하나의 전체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맑스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해방이지 국가나 민족의 특수성이 아닌것 같습니다.
더 이상은 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