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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번역하면서 흥미로운 부분들을 매일매일 한 두 부분 뽑아서 올려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인터넷 사정이 안 좋아서 안 올렸는데, 최근 이유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블로그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앞에도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는데, 49년에서 50년대까지는 지나갔고, 대약진 이후 대기근 기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이야기 중에 흥미로운 부분을 재인용해 본다. 2년 전에 수업 들을 때에도 조금 놀랐던 내용이었는데...
"적지 않은 지역에서 식인 사건이 벌어졌다. 임하(臨夏) 시 전체 10개 공사와 41개 생산대가 있으며, 5백 88 명이 3백 37 구의 시체를 먹어치웠다. 그 가운데 홍대(紅台) 공사만 1백 70명이 1백 25구의 시체와 살아 있는 다섯 명을 먹었다. 소구문(小溝門) 생산대의 8개 작업대 가운데 6개 대에서 식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23 가구가 57명을 먹어치웠고, 심지어 매장한 지 한 달이나 된 사람도 먹었다. 장금광(藏錦光) 생산대의 마희순(馬希順)은 병든 시체를 먹었고, 자신도 죽었다. 전 가족 11명이 모두 죽었다. 사원 백일노(白一努)는 먼저 8개 시체를 먹고, 그 중에는 아버지와 처 그리고 딸을 포함한 3대가 있었다. 빈농 사원 마아복(馬阿卜)은 굶주려 숨이 간들간들할 때, 그의 딸 마합소비(馬哈素非)에게 “내 몸에 고기가 없으니, 죽은 뒤에 내 심장을 꺼내 먹어라”라고 말하였다. 그가 죽은 후, 딸은 그의 심장을 꺼내 삶아 먹었다. 백장(白藏) 공사 단결 생산대의 빈농 사원 마일부랍(馬一不拉) 부부는 자신의 14세 딸을 산 채로 먹었고, 남편은 죽은 뒤 그 처에 의해 먹혔다. 홍대 공사 소구문 작업대 이소륙(李尕六)은 자신의 죽은 두 아이를 먹었고, 이소륙은 죽은 뒤 사원 호팔(胡八)에 의해 먹혔다. 호팔은 죽은 뒤 숙정지(肅正志)에 의해 먹혔다."
이는 오랫동안 감숙성 부녀연합회 주석을 담임했고, 대기근 당시 영하 회족 자치주의 위원회 서기였던 이뢰(李磊)라는 노부인의 회고록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기근의 원인과 배경 등에 대한 내용을 모택동 등의 지도부와 기층 민중의 언어를 모두 동원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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