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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전리군(2011)] '포스트' 모택동 시기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늘상 모택동 시대가 평등한 시대였다는 신화와 가상을 제조해내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모택동은 평등을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절대 평균주의의 극단을 향해 걷기도 했습니다. 모택동 시대의 특권과 오늘날 중국 사회의 특권은 질적이나 양적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택동 시대의 특권과 양극화는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존재입니다. 모택동 시대에 있었던 연속적으로 반복되어 발생한 민간의 ‘반특권’ 투쟁이 과녁없이 활을 쏜 것은 아닙니다.

모택동 시대는 부단히 대립면을 설정하고 계급투쟁을 제조하여,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의 모순을 고도로 정치화하였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고도로 긴장시키고 악화시켰으며, 그 결과 인간에 내재한 살육성을 유도해 내었습니다. ‘부단혁명’의 구호 하에서 서로 다른 이익 집단 간에 끝을 모를 상호 살육, 즉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이 제조되었고, 무고한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정치적 고압과 유혹 아래에서 “거짓말, 아부, 남을 다치게 해 자신을 살찌우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지간, 사제지간에 강제로 선을 긋고, 상호 검거하고 밀고하도록 강조하고 고무하였으며, 사람들이 도덕의 최저선을 넘어서도록 압박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진정한 도덕의 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물론 개인의 도덕품성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도덕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도덕 위기는 중국 원시기 사회주의의 본질적 특징입니다. 이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역시 동일하게 모택동 시대가 도덕이 숭고하고 순결한 시대라는 신화와 가상을 제조하고자 하는 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고준이 이야기한 중국 원시기(原始期) 사회주의는 모택동 이후까지 줄곧 연속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공화국 60년을 하나의 전체로 관찰하고 사고하며 토론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보기에 뒤의 30년의 개혁개방은 그 기초를 모택동이 놓았을 뿐(이는 우리가 이후에 토론할 것이다) 아니라, 전혀 모택동 시기로부터 빠져 나오지 않았고, 또는 이를 ‘포스트 모택동 시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절하며, 더욱 역사의 진실과 본질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택동에서 등소평까지, 강택민에서 호금도까지, 네 세대의 지도자가 완성하고자 했던 것은 원시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사명이며, 이는 하나의 완결성을 갖는 역사과정입니다. 그 기본특징은 고준의 말을 빌리면 곧 “야만적 방식”으로 “호구경제”를 세워, 중국인의 밥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조금 확대하면, 중국의 독립 및 통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른바 “야만적 방법”은 모택동 시대에 정치적 수단으로 부단히 계급투쟁과 대약진을 동원하여 원시적 자본축적을 완성하였다면, 포스트 모택동 시대는 경제적 수단으로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자본주의의 시장 방식을 이용해 경제의 고속 성장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시 축적과 고속발전은 앞의 분석처럼 모두 자원 대파괴와 기층인민, 특히 농민에 대한 대대적 수탈을 대가로 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 역시 공통적 특징을 가집니다. 경제의 고속발전과 특권이 심각하고, 사회불평등, 도덕 최저선의 파괴, 엄격한 사상통제, 문화의 거듭된 파괴 등이 그것입니다. 그것의 의존한 것은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일당전제 하의 ‘저(低) 인권의 우위’였습니다. 이는 모택동 시대의 ‘정치적 강대함’과 포스트 모택동 시대의 ‘경제적 강대함’의 비밀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모택동 시기와 포스트 모택동 시기의 연속성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집중적으로 드러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관점이 중국 내외부의 어떤 경향과 비판적 선을 긋는지 엿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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