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박현채 선생의 사상을 그의 '민족민중론'을 중심으로 재조명해보고자 했던 글이 왕휘 선생의 제안으로 『구역: 아시아연구논총』(청화대학 인문/사회과학고등연구소) 제2집에 실리기로 잠정적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일정한 수정을 해야 하지만, 당분간 번역에 바빠 당장 어떻게 하기는 그렇고, 우선 결론 부분 일부를 번역하여 옮겨본다.
이 논문은 역사에 대한 해체의 차원에서의 '역사적인 것'과 정치에 대한 해체의 차원에서의 '정치적인 것'이라는 두 범주를 통해서 박현채 선생의 사상에 진입하여 역사적인 것으로서의 '민족'과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민중'을 발견하였으며, 이 두 개념의 상호변증법적 결정 관계에 주목하였다. 역사적인 것으로서 민족은 하나의 사회의 개별적 특수성을 드러내주었고, '정치적인 것'의 조건을 밝혀주었으며, 이러한 역사적인 것에 근거하여 박 선생은 민중 개념을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치를 논술하였다. 민족 개념은 역사적 인식을 통해 개별적 특수성의 조건을 드러내주고, 민중 개념은 역사적 정세 속에서 당파성과 진보의 주체 및 그 방향의 지시한다. 민족 개념이 이미 폐기되었으나, 그를 대체할 새로운 개념은 출현하지 않은 21세기적 상황에서, 이와 같은 박현채 선생의 '민족민중론'은 어떻게 '민족' 개념을 재해석하고 '민중'의 내재적 정치화 가능성의 조건을 사고해야하는지의 문제에 대해 일정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창간된 저널인데, 상당히 참신한 포부를 가지고 출발한 듯 하다. 왕휘 선생과 왕중침 선생이 편집을 맡고 있고, 왕중침 선생은 그러고보니 지난번 최원식 선생의 강연에서 날카로운 토론을 보여줬던 그 분이다. 아래는 이 저널의 기획의도 및 1집 목차 스크랩이다.
区域:亚洲研究论丛(第一辑)跨体系社会
作者:汪晖、王中忱
亚洲研究论丛(第一辑)跨体系社会卷首语《区域:亚洲研究论丛》由清华大学人文与社会科学高等研究所(Tsinghua 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 in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编辑。人文与社会科学高等研究所正式成立于2009年,以促进人文与社会的高等研究为宗旨,其前身是清华人文与社会高等研究中心(2006) 。从世界范围来看,高等研究、特别是人文与社会科学的高等研究正在经历重要的变化。以往的高等研究完全以欧洲和美国为中心,虽然也邀请少量的其他地区的学者担任研究员,但研究方案的制定多以欧洲和美国的人文和社会科学研究为中心。在中国设立人文与社会高等研究所至少有下述三个方面的意义:第一,有助于将中国和亚洲地区悠久和丰富的人文学术传统带入高等研究的范畴内,为当代世界的人文-社会研究提供新的资源和视野;第二,有助于将中国社会主义历史和改革过程的经验带入高等研究之中,为当代世界有关经济、社会和文化变迁的研究提供新的活力;第三,有助于在中国学术研究与世界其他地区的学术研究之间展开对话、交流和合作,改变目前主要以欧洲和美国为中心的高等研究格局,为中国和亚洲学者加入国际学术对话提供重要的制度前提。
高等研究所不同于中国研究所或国学研究所,它以跨学科、跨文化、跨区域、跨国界的研究为特征,致力于人文与社会科学领域的基本理论的探索和突破。本论丛标题中的“区域”概念并不是一个特指的地理范畴,而是一个体现着混杂、交往、跨界和多重认同的空间概念。《区域:亚洲研究论丛》发表人文与社会科学各领域的论文,尤其鼓励那些立足基础研究、提出新的问题、视野和方法的作品。本论丛以亚洲研究为中心,但也鼓励跨区域的研究,欢迎投稿,并遵循严格的评审制度,及时向作者做出回复。
亚洲研究论丛(第一辑)跨体系社会目 录卷首语
【区域、民族与跨体系社会】
东西之间的“西藏问题”--东方主义、民族区域自治 与尊严政治 汪 晖 3
历史与反复 柄谷行人 85
激荡的世界地图-- "200年中国”与东亚的历史新阶段 西村成雄 101
肤色的等级--近代中日教科书里的人种叙述 孙 江 118
【跨文化视野中的语言与文学】
晚清“国语”问题与单一语言制: 以政治外交为中心 村田雄二郎 145
闹市中的激进: 寻找一个宜居的世界 孟 悦 171
日本新感觉派文学: 在殖民地都市里的转向 --论横光利一的《上海》 王中忱 205
【文献与阐释】
《易经》身体、语言、义理的开展--兼论《易》为士大夫之学 郑吉雄 247
五代至北宋时期墓志数据的运用思考--文物·文本·语境的解读 刘静贞 274
色戒--宋僧与奸罪 柳立言 292
明、清王朝更替和绅士的向背 吴金成 324
【思想文本的细读】
文本与解释 王 路 351
竹内好的《鲁迅》和《鲁迅入门》 尾崎文昭 370
댓글 목록
藝術人生
관리 메뉴
본문
[왕휘 선생의 코멘트]대만에서 주류적인 아시아 담론에 대한 불만을 솔직히 이야기하였고, 그 가운데 가장 주요원 원인은 아시아 문제를 외부관계로 연결짓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부득이 하게 민족주의를 방법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민중의 시각이 없이, 일종의 진정한 국제주의는 전개될 수 없으며, 각 국가 내부의 사회투쟁은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 20세기 민족해방운동은 민족해방의 깃발 아래 전개되었는데, 그러나 민중투쟁과 계급투쟁의 각도에서 전개되어, 서로 다른 국가의 사회운동이 오히려 더욱 깊은 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인 것의 전개이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투쟁 모델을 반복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 운동이 포함하는 기타 가치검토의 문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운동의 개방정 잠재성을 발굴하고자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초국적화와 관련된다. 단지 초국적인 의미에서 토론하고, 투쟁 공간으로서의 민족국가와 기타 투쟁 공간 사이의 관련을 토론하지 않으면, 공동투쟁의 맥락 속에서 전개되는 역사적 연대를 만들어낼 수 없다. 서방에의 호소, 또는 공통의 전통의 호소 등등이 비판적인 태도이든 보수적인 태도이든 간에, 최종적으로 연대가 구성되기 어렵다. 이러한 내용은 내부적임 잠재력을 발굴한 후에 비로소 실질적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藝術人生
관리 메뉴
본문
이 글은 일정한 구도와 절차를 갖는 개인적 연구 작업의 출발점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국제주의적이며 반국가주의적인 대안적 정치성의 구성이라는 전망을 위해 세계주의적 보편성에 환원되지 않으며, 일국적/특수주의적 틀에 갇히지 않는 지역적 또는 인터아시아적 방법을 통한 사상적 자원의 발굴과 교류 및 공유의 작업이 필요함을 긍정하면서, 한국적 시좌의 재구축을 위해 박현채 선생의 사상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나의 중국 당대 사상 및 문화의 연구에 있어서 참조점이 되어, 중국 내부의 시좌에 갇히지 않으면서, 동시에 보편주의적 타자의 시좌에도 갇히지 않는 중국 당대 사상에 대한 구역적이고 인터아시아적 독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일정하게 ‘역사적인 것’으로의 우회가 불가피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것’에 그 성과가 누적된다.藝術人生
관리 메뉴
본문
복기를 해보면, 최근 정치와 역사라는 두 범주를 중심으로 사상형성을 사고한 것은 왕휘 선생과의 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언젠가 '역사가 멈추는 곳에서 정치가 시작된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이 범주를 형식적으로 분리하면서도 일종의 '부재하는 원인'으로서의 상호 타자성을 전제하면서, 상호 관련성과 결정성을 고민해보았다. 물론 최종적으로 정치성의 우위라는 테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는 일종의 존재론적 사유에 의한 뒷받침을 요하는 것 같다. '정치적 인간'이라 할 수도 있고, 또는 '사회적 인간' 속의 정치의 본질적 의미 같은 것 말이다. 다른 한편 정치와 역사라는 두 범주를 포괄하면서 그 긴장과 상호결정성을 작동시키는 행위, 일종의 지적 실천의 행위는 무엇인가? 기존의 언어로는 '학제간 연구'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내용이 없는 구호에 불과하다. '문화연구'는 어떤가? '문화'라는 개념은 일정하게 이러한 지적실천을 담아낼 수 있는 것 같다. '문화연구'를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藝術人生
관리 메뉴
본문
전리군 선생의 '57년체제'를 음미하면서, 이른바 '87년체제'와 '97년체제' 등 근래 한국에서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역사적 개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또는 역사적으로 87년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우리의 역사적 시좌를 제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는 공히 '민중'을 중심으로 한 '정치성'의 담론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좌'와 '우'의 정치적 경향의 대립이 중심이 된다. '좌'와 '우'를 결정짓는 역사적 조건과 그 외연의 구체적 역사적 형성의 문제가 사라진다. 그래서 박현채 선생의 논의를 복원할 필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비록 장기적 작업이지만, 여기에 왜 이러한 우회를 통해 전리군 선생의 작업을 조명하면서 동시에 다시 한국사회를 비추는 참조점으로 전리군 선생의 작업을 가져오려는지의 이유가 있다. 97년체제나 87년체제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48년체제 및 해방공간을 역사적으로 재해석하고 이 역사성을 재전유하는 작업이 결여되어서는 87년체제와 97년체제 등의 정치성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일정하게 한계적 또는 과소결정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