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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놀이터 쉼 '엄마, 안녕'

전태일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아마 어머니였겠지요. 그렇지만 마음 속 이야기를 얼마나 털어놓을 수 있었을까요? 그가 분신을 하기로 마음을 먹는 날 아침, 그는 세 번 씩이나 어머니에게 현장에 그의 항의행동을 보러 오라고 부탁합니다. 나는 관련자료에서 이러한 서술을 읽고 전태일이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 보고 이 잔혹한 화면을 보러 오라는 모진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가 현장에 있어야만 더 용기를 가지고 자신의 몸을 불 사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나는 이 문제를 연출 연습과정으로 가져가 조금씩 발전시켰습니다.

 

한걸음 씩  전태일의 내적 영혼 세계로 들어가면서, 뜻 밖에 나는 그의 마음 속 고통을 느낄 수 있었고, 이는 그가 반드시 혼자 자신을 불사르는 육신의 제전(祭典)으로 가야했을 때, 이 숙명적 고독감이 사람을 더욱 모질게 만든다는 데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나는 예수가 수난 직전 무릅꿇고 기도하며, 하느님께 가능하다면 이 잔을 그에게서 거두어 달라고 기원했던 것(마태 26, 39)이 일종의 공포 앞에서의 연약함이었고, 생명 속에서 이러한 연약함이 출현할 때, 그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대면하며, 예수처럼 하느님에게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의 뜻에 따르소서’라고 말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연약함 속의 실재적으로 담겨 있는 더욱 큰 용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이로 인해 사람의 연약함은 사실 죽음을 회귀로 받아 들이는 신성한 용기를 발산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묵림王墨林 의 '연출의 변' 에서)

 

지난 가을에 이어 대만 공연을 마치고 한국에서 다시 공연을 한다고 한다. 방금 '연출의 변' 막 받아서 번역해 보내줬다. 예수와 전태일... 성경이 조금 궁금해졌다. 죽음은 회귀이다. 돌아가는 것이다. 가진 자들은 가진 것을 잃을까 죽음이 두렵겠지만,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가끔 죽음을 두려워 하는 나를 보며 도대체 나는 무엇을 가졌기에 죽음이 두려운가 생각해 본다.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암튼 안타깝게도 정작 나는 이 연극을 볼 기회가 줄곧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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