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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주의decolonialism의 타율성

번역 중 틈틈히 박사 논문 관련한 자료들을 찾아보곤 하는데, 그러다가 진광흥 선생이 짧은 글을 발견해서 메모해 둔다. 이는 탈식민주의의 타율성에 대한 논의와 연관된다.

 

진광흥 선생이 '독서' 지에 발표한 지난 해 쓰여진 글로, 제목은 '방법으로서의 인도'인데, 중국과 인도의 사상교류활동을 기획하면서 쓴 글이다.
http://www.chinese-thought.org/whyj/008772.htm

 

이 글은 그의 지난 10여년 작업에 대한 기본 생각을 잘 정리하고 있다.

 

두 가지 부분이 나에게 있어 흥미로운데, 간단히 인용하여 번역해보면,

 

"내가 생각하기에 여기에 이번에 요청하여 방문하게 된 평민연구(서발턴 스터디) 역사학자 Dipesh Chakrabarty가 '유럽의 지방화 provincializing Europe'라고 부르는 사상적 방안, 또는 2010년 7월 서거한 미조구치 유조(沟口雄三) 교수가 제기한 '중국을 방법으로, 세계를 목적으로'라는 사상 정신이 존재한다."

 

"이 사상방안의 전제는, 문을 걸어 잠그고 본토주의적 자폐방식으로 생산한 국수주의는 이미 현대로 빨려 들어온 자아를 명확히 볼 수 없으며, 단지 휘황찬란한 과거에 빠져서 스스로 좋은 기분을 유지할 수 있을 뿐이며, 문을 열고, 단지 구미를 초월하고 따라잡을 대상으로 삼는 참조방식은 이미 효과를 상실했기 때문에, 반드시 민족국가의 내부에서의 본토주의(nativism)와 구미 중심의 세계주의 (cosmopolitanism) 이 양자의 바깥에서 새로운 참조체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식인에게 있어서 이러한 지식생산에 있어서 운동으로서의 탈식민주의(decolonialism)는 불가결한 시각이자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안은 기존으 지식에 대한 해체의 역할과 새로운 지식을 위한 참조체계의 구성의 역할을 하는데, 문제는 새로운 참조체계의 구성에 있어서 그 계기, 매개, 또는 기준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내게 있어서 '역사성'에 대한 관심 속에서 현재 발생 중인 '정치성'의 문제를 무시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의미있는 '역사성'은 단순이 '잊혀진'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곳 속에도 있고, 이 역시 기존의 지식을 해체하는 자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성 또는 정치적인 것'은 마땅히 지식생산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 진광흥 선생은 본문의 다른 곳에서 '지식을 위한 지식'(역사가 부재한 대문자 지식을 위한 지식)을 비판함으로써, 적어도 탈식민주의적 지식생산에 부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것이 갖는 위험, 즉 '지식인을 위한 지식'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이다. 게다가, '지식인을 위한 지식'은 역시 '타자'를 가지는 것으로 그리 자율적이지 않은데,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다시 정치의 장에 놓이게 되고, 때로는 우익적이고 보수적으로 '자기'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보아온 역사가 증명한다.

 

한 발 더 나아가면, 나는 이러한 위험이 '문화연구' 일반과 관계되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한편, 진 선생은 근래 거의 언급이 없지만, 사실 인용문에도 있듯이, 그 역시 '현대'로의 진입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 공통적 내용 또는 그 관계성 및 구조를 어떻게 들여와서 정합성을 갖는 논의를 만드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현재는 그것이 자주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는 것 같고, 그래서 현대성 자체가 배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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