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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현대사상 계획 토론회 방청 메모

"Modern Asian Thought Project: 2011 East Asian Critical Journals Workshop in Shanghai"
 
어제 상해대학에서 열린 이 회의의 둘째 날 일정을 방청했다. 창작과비평, 대만사회연구, 현대사상, 返風, IMPACTION, Inter-Asia Cultural Studies가 중심이 되어 '아시아비판간행물회의'를 지난 몇 년간 진행해왔고, 이번 상해 회의는 그동안의 작업을 일단락하면서 구체적 실천 계획을 잡으려는 시도로 계획된 것 같다.
 
자료집 5페이지에 기본구상이 나와 있다. 기본적으로 탈냉전 시기 그동안 단절되었던 아시아 내부의 접촉이 빈번히 발생하면서 이를 유럽/미국의 시각으로 밖에 인식할 수 없는 한계를 함께 확인하였고,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그동안 인식 대상으로 배제되었거나 유럽중심주의의 시각으로 인식되었던 아시아 내부를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을 통해 사상적 자원을 발굴하고 유통시키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이러한 '인터 아시아' 또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시좌는 국가차원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국가주의에 비판적일 수 있고, 동시에 '세계'적이지 않다는 의미에서 보편주의에 비판적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방법으로서의 유럽', '방법으로서의 아프리카' 역시 가능한 것이다. 이는 매우 긍정적 시좌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시좌에서 아시아 내부의 개별적 특수성을 발견하여 구성하는 '현대/아시아/사상'이라는 것이 일정한 '방법으로서의 탈정치'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 올바름이 이미 유럽중심주의적인 개념과 인식틀에 묶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의 사상을 발굴하는데 이러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 발굴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상의 발굴은 정치와 거리를 두어야 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일종의 패권이 된다는 것이다. 정치적 입장이 어떠하다고 해서 사상적 자원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일정하게 '정치성'의 장과 '역사성'의 장의 충돌이 소묘된다. 나는 둘 다 자율적일 수 없다고 보는데, 그럼에도 어느 한쪽으로 환원되어서도 안 됨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에도 개념적 사유 없이 인식행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무리 '방법으로서'라고 해도 정치성을 역사성에 환원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진광흥 선생과 손가 선생의 논리이고, 이 회의의 지배적이고 주류적 논리이다. 그것이 물리적으로 소수라고 하더라도. 나는 어제 여기에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그들은 정치와 개념을 버렸다고 하면서 '자율적인 정치와 개념'을 가지고 말을 하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다.(손가 선생은 마지막 자유토론에서 한 젊은 연구자의 논의를 반박하였는데, 그 연구자는 아시아적인 것을 구성하려는 상해대학 채상 선생의 본질주의적 위험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이에 대해 손가 선생은 본질주의의 비판이 정치적 비판이 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였다. 이는 왜 백원담 선생의 국가주의 비판이 토론될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어제 회의 공간 자체는 다른 논리도 존재해서 일정한 긴장을 드러냈는데 공교롭게도 그런 긴장은 결정적 순간에 모두 진압되는 것 같았다. 백원담 선생이나 백영서 선생 그리고 대만에서 온 조강 선생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반(反) 탈정치'의 관점을 드러낸 것이었기 때문에 '비주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치성'의 차원에서 보면 백원담 선생이 공개적으로 표명한 창비의 소국주의의 국가주의 문제는 그 자체 논의가 봉쇄된다. 이것은 손가 선생이 경계했던 이론적 정치적 패권의 역패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패권을 한국에서 오신 선생님들은 어떻게 의식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에 이 패권의 효과는 한국에서 거의 대표성을 가지지 못하는 분단체제론이 아시아 현대사상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과잉대표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정치성의 관점에서 보면 창비는 정치적으로 '비정치적 사상형성공간'을 이용하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백영서 선생은 '역사성'의 차원에서 비주류이면서, '정치성'의 차원에서 주류가 된 반면, 백원담 선생은 두 영역에서 모두 비주류가 되는 것이다.
 
나는 분단체제론이든 뭐든 어떤 사상적 자원이 정치적 정확성/올바름을 배제한 사상적 발굴작업을 통해서 발견했다고 했을 때, 그것을 사상적 발견이라고 판단하고 위치지을 수 있는 근거가 비/탈/정치적 사상논의 내부에 있다고 볼 수가 없다. 사상의 형성 또는 발견 나아가 재발굴이 정치라는 '타자'를 배제하고 논의될 수 없다는데 내 생각이다. '사상' 자체가 본래 정치적이지 않은가 반박하고 싶은 것이다. "역사에 대한 정치의 우위"라는 테제는 이런 관점에서 제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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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2

진보신당의'3대세습' 비판과 같은 북한 체제 비판을 중국이나 쿠바 등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그런 비판에는 모종의 외부적/자유주의적 시각이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중국의 인권운동가 유소파의 노벨상 수상 및 구속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대만에서도 석방 요구를 위한 서명에 서명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가지고 좌/우가 불분명한 우리 선생님들이 편을 가르기도 했었다. 북한에 비해서 훨씬 개방된 중국에서도 이 문제를 파악하기는 그다지 간단하지 않아 보였다. 이유는 그것을 자유주의적 법적 권리의 차원에서 보면 간단하지만, 이를 중국 내부의 주체화와 이데올로기의 차원으로 확장해서 보면 그다지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유주의적 중국 체제 비판은 일정한 역사적 전통을 갖지만 현재 미미한 세력으로 남아있는 중국 내부의 ‘민주적 사회주의’와 대립적 측면을 갖는다. 현재의 역학관계에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무시할만한 수준이지만, 중국 당대 역사를 관통하는 모순이 독재체제와 자유주의 개혁세력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기층 민중과 국가주의적 착취체제 사이에 있다고 할 때, 후자의 모순과 관련한 진보의 이념은 여전히 ‘민주적 사회주의’를 계승할 수 밖에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 정치의 계급투쟁이 진정한 모순이 아니라 독재와 자유주의의 모순으로 왜곡되어 표상되는 것이다. 물론 북한에서는 이러한 왜곡적 표상 조차도 그다지 뚜렷하게 표면화되지 않는 상황인 듯 하다.

 

그런데, 북한이 '후진적 사회주의 독재 체제'라고 하더라도 그 사회가 유지되고 재생산되는 데는 일정한 동의와 강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의가 조금 오래된 것이고 강제가 지배적이게 되면서 화석화되고 있다고 해도. 이 전제가 있어야 진정으로 북한의 주체적 민주주의적 변혁을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 체제의 내부적 구조, 즉 계급관계 및 이데올로기적 모순 등에 대한 분석이 없이는 조망되지 못하는 북한에서의(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순수히 이념적 차원에서 외부적 시좌를 가지고 논의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같다.

 

진보신당의 비판은 '북'에 대한 민주적이고 좌익적 ‘개입’을 목적으로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진정한' 사회주의의 가치를 제시하면서 그 역사적 비판을 진행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을 경우'북한'의 붕괴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우파의 논리와 전혀 차이가 없게 된다. 이는 북한에 대한 상당한 역사적 연구를 전제해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정치의 가능성을 도출해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보신당은 얼마나 북한을 연구하고 이런 입장을 제시하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합의문에 적힌 '국민 정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물론 다 같이 합의한 것이지만) 사실상 자의적 필요에 따라 빌려 쓴 남한 우파의 자유민주주의 또는 반공주의 논리인 것으로 밖에 안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는 북한을 거의 중국에 비유해 놓고, 즉 북한을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혁명 경험을 가진 타국이라는 전제로 전개된 것이다. 이 논의 구도는 북한과 남한이 각각 민족국가로서 일정한 현실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논의는 분단과 통일이라는 역사적 문제가 잠정적으로 배제된 것이다. 문제는 분단과 통일을 배제할 경우, 남한과 북한 모두 분단과 통일 등의 역사를 거쳐 왜곡되어 형성된 현재 남북한 사회를 역사적으로 성찰하기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공동체의 변혁이 그 역사적 구성의 내적 논리를 극복하고 전환하는 것이라 할 때, 현재의 남한과 북한 사회의 구성의 기초를 놓은 분단의 극복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분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역사화하지 않는 한 남한사회의 개별적 특수성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고 이는 정치의 불가능성의 원인이 될 것 같다. 이는 남한의 진보적 연구자들이 착목해야 할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운동과 이론에 있어서 NLPDR이 NL과 PD로 분리되는 과정은 일정하게 이러한 개별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포기하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외부적 관점으로의 분기를 내포하는 듯 하다. 물론 이 극복이 반드시 맹목적 통일이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통일이 된다고 분단이라는 내적 논리의 외화가 자동적으로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분단을 초래하고 공고히 했던 자본주의의 국가와 자본의 논리들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올바른 통일을 지향할 것이다. 북한을 타국으로 놓고도, 남한의 사회운동은 현재적 갈등과 모순을 중심으로 일정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정한 문턱을 넘지 못하는 원인은 바로 북한과 관련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역사적인 것’ 없는 ‘정치적인 것’, 즉 ‘민족’ 없는 ‘민중’이 갖는 한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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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전리군(2011)] '포스트' 모택동 시기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늘상 모택동 시대가 평등한 시대였다는 신화와 가상을 제조해내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모택동은 평등을 강조했습니다. 심지어 절대 평균주의의 극단을 향해 걷기도 했습니다. 모택동 시대의 특권과 오늘날 중국 사회의 특권은 질적이나 양적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택동 시대의 특권과 양극화는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존재입니다. 모택동 시대에 있었던 연속적으로 반복되어 발생한 민간의 ‘반특권’ 투쟁이 과녁없이 활을 쏜 것은 아닙니다.

모택동 시대는 부단히 대립면을 설정하고 계급투쟁을 제조하여,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의 모순을 고도로 정치화하였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고도로 긴장시키고 악화시켰으며, 그 결과 인간에 내재한 살육성을 유도해 내었습니다. ‘부단혁명’의 구호 하에서 서로 다른 이익 집단 간에 끝을 모를 상호 살육, 즉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이 제조되었고, 무고한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정치적 고압과 유혹 아래에서 “거짓말, 아부, 남을 다치게 해 자신을 살찌우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지간, 사제지간에 강제로 선을 긋고, 상호 검거하고 밀고하도록 강조하고 고무하였으며, 사람들이 도덕의 최저선을 넘어서도록 압박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진정한 도덕의 위기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는 물론 개인의 도덕품성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도덕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도덕 위기는 중국 원시기 사회주의의 본질적 특징입니다. 이를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역시 동일하게 모택동 시대가 도덕이 숭고하고 순결한 시대라는 신화와 가상을 제조하고자 하는 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고준이 이야기한 중국 원시기(原始期) 사회주의는 모택동 이후까지 줄곧 연속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공화국 60년을 하나의 전체로 관찰하고 사고하며 토론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보기에 뒤의 30년의 개혁개방은 그 기초를 모택동이 놓았을 뿐(이는 우리가 이후에 토론할 것이다) 아니라, 전혀 모택동 시기로부터 빠져 나오지 않았고, 또는 이를 ‘포스트 모택동 시기’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적절하며, 더욱 역사의 진실과 본질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택동에서 등소평까지, 강택민에서 호금도까지, 네 세대의 지도자가 완성하고자 했던 것은 원시기 사회주의의 역사적 사명이며, 이는 하나의 완결성을 갖는 역사과정입니다. 그 기본특징은 고준의 말을 빌리면 곧 “야만적 방식”으로 “호구경제”를 세워, 중국인의 밥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고, 조금 확대하면, 중국의 독립 및 통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른바 “야만적 방법”은 모택동 시대에 정치적 수단으로 부단히 계급투쟁과 대약진을 동원하여 원시적 자본축적을 완성하였다면, 포스트 모택동 시대는 경제적 수단으로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자본주의의 시장 방식을 이용해 경제의 고속 성장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시 축적과 고속발전은 앞의 분석처럼 모두 자원 대파괴와 기층인민, 특히 농민에 대한 대대적 수탈을 대가로 하며,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 역시 공통적 특징을 가집니다. 경제의 고속발전과 특권이 심각하고, 사회불평등, 도덕 최저선의 파괴, 엄격한 사상통제, 문화의 거듭된 파괴 등이 그것입니다. 그것의 의존한 것은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일당전제 하의 ‘저(低) 인권의 우위’였습니다. 이는 모택동 시대의 ‘정치적 강대함’과 포스트 모택동 시대의 ‘경제적 강대함’의 비밀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모택동 시기와 포스트 모택동 시기의 연속성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집중적으로 드러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관점이 중국 내외부의 어떤 경향과 비판적 선을 긋는지 엿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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