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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4 최원식 교수 상해 강연 메모

그다지 감흥은 없었으나 반응들을 종합해보면 꽤 흥미로왔다고 할 수 있겠다. 최원식 교수의 강연이 있어 호우에 옷을 다 젖어가며 상해대에 다녀왔다. 요즘 비가 좀 자주 많이 온다. 강연 제목은 '대국과 소국의 상호진화'였고, 백지운 교수와 인하대학 박사생인 중국인 학생이 중한 통역과 한중 통역을 각각 맡았고, 각 지에서 온 네 명의 평론자가 평론을 햇다. 평론자는 한국의 임춘성 교수, 대만의 진광흥 교수, 북경의 왕중침 교수, 상해의 나강 교수였다. 사회는 상해대학의 왕효명 교수가 봤다. 이 주제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중국의 연구자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발표 내용은 2009년 창비에 발표한 바 있는 글을 중국어로 옮겨 발표문을 만들고 중국어권에 소개한 것이라 한다. 창비의 글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대강 도가에 내재한 소국주의의 현재적 가치를 검토하여 동아시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유용한 자원으로 삼아보자 정도라 할 수 있겠다. 기본적으로 국가중심적 사고, 즉 역사과정의 주체로서 국가를 전제하는 사고에 갇혀 있으며, 한/중/일이라는 현대민족국가를 고정된 주체로 사고하는 한계도 갖는다. 도가에서의 소국주의가 유가에 반영되어있고,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이 소국주의적 대국이었다는 긍정적 해석은 일정하게 중국 문명이나 모델의 논의(감양, 왕휘)와 친화성을 가진다. 한/중/일의 대국주의적 경향을 우려하면서, 기존의 한국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 세력과 산업화 세력으로 구분하고, 이 둘의 공통적 한계로서 대국주의적 경향을 지적하는 부분은 일정하게 창비의 정치적 프리즘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했다.

 

토론자들 가운데, 임춘성 교수는 손가 선생과 최원식 선생의 공통점을 몇 가지 추렸는데, 얼마전 한국에서 열린 집담회에서의 토론을 빌려온 듯 하다. 손가 선생의 입장은 나중에 체계적으로 따로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 같다. 나 개인적으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극복해야할 것으로서 문제로 존재할 것 같다는 잠정적 생각을 갖고 있다. 진광흥 선생은 제목에서 줄 수 있는 국가주의 담론으로의 오해를 피해달라는 주문을 했다. 늘 그렇듯이 진 선생은 매우 적극적으로 창비 그룹을 옹호/비호하는데(그는 늘 창비가 한국에서 비주류이고 비판적이며 운동성이 강함을 강조함을 통해 창비의 보수성에 대한 비판을 오해라고 반박한다),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의 아시아 논의와의 친화성 때문일 것이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그의 아시아론은 아직도 구축 중이고, 실질적 내용은 모호하다. 그래서 더욱 상대주의적이며, 실질적으로는 자의적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의 발휘라는 차원에서 충분히 장려될 수 있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나마 흥미로왔던 부분은 그동안 접하지 못했던 중국 내부의 지식인의 반응이었는데, 왕중침 청화대학(북경) 교수는 소국과 대국 등의 담론이 국가정책 결정의 차원에 갇히는 문제를 지적하며 초국적 자본과 기층 노동자들의 삶의 변화라는 시각을 도입할 것을 주문하였고, 나강 화동사범대학(상해) 교수는 현대 민족국가의 실재성에 비추어 그러한 민족국가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역사적 동력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문화적 담론으로서의 '소국주의'라는 것이 어떤 현실적 함의를 갖겠는가라는 비교적 직접적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는 탈정치화 이후 '문화' 담론이 '정치' 담론을 대체하는 상황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중국 내부의 관점이 훨씬 더 비판적이고 진보적이었다고 보이고, 대만과 한국의 관점은 상대적으로 온건하거나 보수적이었다고 보인다. 중국의 토론자들이 대체로 중문학이나 문화연구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실질적으로 중국에서 상당히 왼쪽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반면, 한국의 토론자들은 이념적으로 중간 정도의 위치를 점하는 상황과 관련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중 통역을 맡았던 인하대학 박사생(중국인)은 전체적으로 깔끔한 통역을 해줬지만, 최원식 교수가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에 소국주의적 대국에서 대국주의적 대국으로 나가고 있다는 많지 않았던 비판적 부분을 반대로 해석하여 (무)의식적으로 체제옹호적인 통역을 하였고(의도적인지는 모르겠다), 그 외에도 상당부분 하지 않은 말을 자의적으로 덧붙이기도 했다. 통역의 주요 임무가 그대로 차이와 문제를 드러내는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코뮨'을 '공사' 가 아니라 '공산주의'로 번역하는 등 몇몇 개념의 번역 문제는 상대적으로 그리 크지 않은 문제라고 보인다. 물론 중국 쪽에서 인문사회영역에서 이렇게 한국에 유학도 하고 한국의 사상과 담론을 이해하고 소개할 수 있는 연구자 층이 형성된다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다. 마지막에 최원식 교수의 답변 중에 처음 가본 중국이 '청도(青島)'였다고 한 것 같은데, 이것이 '청두'(즉 '成都')로 잘못 통역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건 문제라기 보다는 내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는 표기법 문제와 관련되어서 조금 흥미로왔다.

 

끝나고 강사 한 명과 대학원생 몇몇과 식사를 하면서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중국에서 한국의 사상과 담론에 대한 소개가 일정한 사람과 단체 등을 중심으로 소개되는 수동적 상황이 논의되었다. 이는 대만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현재로서는 별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싶다. 주체적으로 한국 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역량이 부재한 상황에서 선도적인 몇몇이 주도하는 것은 불가피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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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讲题目:大国与小国的相互进化

2011年6月14日,15:00 –17:30
上海大学新校区J楼201室

演讲人:崔元植(韩国仁荷大学)
翻 译:白池云(韩国延世大学)
主持人:王晓明(上海大学)
评论人:林春城(韩国木浦大学)
陈光兴(台湾交通大学)
王中忱(清华大学)
罗 岗(华东师范大学)

主办:上海大学中国当代文化研究中心

 

http://ishare.iask.sina.com.cn/f/16247966.html (녹음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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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북한 문제가 결국 계속 갈등을 만들어내는가보다. 남북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좀 더 깊이 있게 논의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현채 선생님의「분단시대의 국가와 민족문제」, ≪창작과비평≫제59호(봄호)에서 인용한다. 나 나름은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아직 좀 어렴풋하다. 북한이라는 고리를 해명하고 관련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서 중국 연구자들이 해야 할 몫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좌익적 관점에서 중국은 일정정도 북한을 보는 창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은가...

 

전후 분단국가에서 독일의 경우나 한국의 경우는 군사적 점령이 선행적인 것으로 주어지고 거기에 한 사회의 내부적 모순이 결합한 유형이다. 이에 비하여 중국.베트남의 경우는 한 사회의 내부적 모순에 따른 내전이 민족해방전쟁의 과정에서 보다 치열해지고 이것이 외압에 의해 관철되지 못하고 분단상황에 그친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이데올로기 문제가 개입되면서, 한 사회의 내부모순의 발현으로서의 계급적 대립이 현상화된 그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외화되어 마치 이것이 외부적 조건에서 오는 것인양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245)

 

분단의 책임을 외압에 돌리고 이데올로기를 외화하는 것은 이들 나라에 있어서 분단된 한쪽을 민족적 요구에 따른 정통으로 설정하고 다른 한쪽을 외세에 영합하는 비정통적인 것으로 규정하게 하는 중요한 근거이다. 이데올로기적 기반을 한 사회의 사회구성 속에 있는 모순관계에서 보지 않고 밖으로부터 강요된 것 또는 수입된 것으로 보는 것은 한쪽을 민족사의 정통으로 자처하게 함으로써 서로간에 1민족 2국가를 정당화시키는 것으로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민족사의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합법화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이나 국민이라는 이름 밑에 한 사회를 구성하는 다원적인 계급.계층적 요구를 부정하면서 일방적인 계급적 편향을 드러내놓는 것일 뿐이다.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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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

원래 번역하면서 흥미로운 부분들을 매일매일 한 두 부분 뽑아서 올려보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인터넷 사정이 안 좋아서 안 올렸는데, 최근 이유는 모르겠으나 갑자기 블로그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앞에도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는데, 49년에서 50년대까지는 지나갔고, 대약진 이후 대기근 기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이야기 중에 흥미로운 부분을 재인용해 본다. 2년 전에 수업 들을 때에도 조금 놀랐던 내용이었는데...

 

"적지 않은 지역에서 식인 사건이 벌어졌다. 임하(臨夏) 시 전체 10개 공사와 41개 생산대가 있으며, 5백 88 명이 3백 37 구의 시체를 먹어치웠다. 그 가운데 홍대(紅台) 공사만 1백 70명이 1백 25구의 시체와 살아 있는 다섯 명을 먹었다. 소구문(小溝門) 생산대의 8개 작업대 가운데 6개 대에서 식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23 가구가 57명을 먹어치웠고, 심지어 매장한 지 한 달이나 된 사람도 먹었다. 장금광(藏錦光) 생산대의 마희순(馬希順)은 병든 시체를 먹었고, 자신도 죽었다. 전 가족 11명이 모두 죽었다. 사원 백일노(白一努)는 먼저 8개 시체를 먹고, 그 중에는 아버지와 처 그리고 딸을 포함한 3대가 있었다. 빈농 사원 마아복(馬阿卜)은 굶주려 숨이 간들간들할 때, 그의 딸 마합소비(馬哈素非)에게 “내 몸에 고기가 없으니, 죽은 뒤에 내 심장을 꺼내 먹어라”라고 말하였다. 그가 죽은 후, 딸은 그의 심장을 꺼내 삶아 먹었다. 백장(白藏) 공사 단결 생산대의 빈농 사원 마일부랍(馬一不拉) 부부는 자신의 14세 딸을 산 채로 먹었고, 남편은 죽은 뒤 그 처에 의해 먹혔다. 홍대 공사 소구문 작업대 이소륙(李尕六)은 자신의 죽은 두 아이를 먹었고, 이소륙은 죽은 뒤 사원 호팔(胡八)에 의해 먹혔다. 호팔은 죽은 뒤 숙정지(肅正志)에 의해 먹혔다."

 

이는 오랫동안 감숙성 부녀연합회 주석을 담임했고, 대기근 당시 영하 회족 자치주의 위원회 서기였던 이뢰(李磊)라는 노부인의 회고록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본문은 이러한 기근의 원인과 배경 등에 대한 내용을 모택동 등의 지도부와 기층 민중의 언어를 모두 동원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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