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에 관한 몇 가지 생각

깊이 읽지 못했지만

내게 가장 많은 관심과 흥미를 일으키는 철학자가 바로 데리다다.

 

최근까지 그의 작업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개념이

바로 '불가능성'(the impossible)이었다.

페넬로페 도이처가 쓴 'HOW To READ 데리다'(웅진 지식하우스)

(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이 책 역자인 변성찬 씨가 역자 후기에서

들뢰즈와 데리다가 각각 유물론과 관념론 진영에 속한다

고 내린 평가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데리다를 얼마나 읽었는지 모르지만 그 용기가 부럽다.

이와 함께 'negotiation'을 '타협'이라고 번역한 것도 문제다.

통상 'compromise'를 타협이라 새기고, 'negotiation'은 교섭/협상으로 새긴다.

이 논리는 노조가 자본가와 '교섭/협상'하는 것이 곧 자본가와 '타협'하는 것이라는 얘기와 같다.

자신이 텍스트 '외부'에 주목하는 보다 혁명적인 진영에 속한다고 뽐내는 거야 본인 자유지만

그러려고 다른 이의 주장을, 그것도 역자가 이런 식으로 폄하하는 것은

내 상식으론 참 이해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페넬로페 도이처도 참 좋아하는 철학자인데

이 역자 후기 땜에 짜증이 확 났다.)

를 읽다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물론 틀릴 가능성이 많겠지만...

 

칸트와 데리다 모두에게 불가능성은 '이상'(the ideal)의 문제와 관련된다.

하지만 칸트에게서 불가능성은 실재적/현실적 차원의 문제이지만,

데리다에게 불가능성은 상상적/상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닐까?

즉 칸트에게 있어 불가능성이란 실재/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상상/상징계에서 규제적 이념(regulative idea)으로 역할할 수 있다.

반면 데리다에게 있어 불가능성이란 실재/현실에서는 (매양, 또는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지만,

기존 상상/상징계의 지평, 이 지평 안에서 우리가 '가능한 것'(the possible)으로 체험하는

'정상적인 것'(the normal)을 깨뜨리는 효과를 낸다.

 

예컨대 과거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은

실재/현실적으로는, 또는 물리 법칙 면에서 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사회적인 상상/상징계에 따라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 곧 불가능한 일이 된다.

예컨대 우리가 '말도 안 돼!(That's impossible!)'라고 외칠 때 우리가 체험하는 바로 그것을

데리다는 '불가능성'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이건 지젝이 이야기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사실 지젝이 데리다(또는 알튀세르)를 폄하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면서도,

그가 하는 모든 이야기가 결국 다른 누군가가 한 이야기라는 데서 오는 불안의 결과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불가능성은 체험할 수 없는 것이기는커녕

우리가 (매양, 또는 드물게) 체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체험/경험의 문제가 나오는데

내가 데리다에 관해 가장 모르는, 그의 중요한 지적 원천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현상학

의 비판적 전유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 같다.

좀 더 고민할 문제.

 

시간이 없어서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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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8/11/12 17:14 2008/11/12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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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강 2008/11/13 23:28 # M/D Reply Permalink

    이거 번역 뒷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다른 번역자가 하게 된 거였는데, 갑자기 변성찬 선생님한테 갔다는 거

    그리고 웅진의 출간 일정에 맞추어서 일주일만에 날림으로 번역해야만 했다는 거

    그리고 웅진은 거의 손을 보지 않고 그냥 출간해 버렸다는 거...

    요즘 매주 세미나를 함께 하고 있는데 이 책 이야기만 나오면
    한숨만 쉬시더군요..ㅡㅡ;

  2. 평발 2008/11/14 14:14 # M/D Reply Permalink

    음... 그 책이 일주일만에 번역된 것이라구요? 거참... 갠적으로 번역서와 원서를 같이 놓고 보는 것 만큼 한심하게 느낄 때가 없는데. 가라타니 고진 책을 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주요한 고전들에 대한 인용이 대부분 일본 번역서로 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 좋은 번역자 리스트라도 공유해야 할까봐요...

  3. 아포리아 2008/11/16 15:15 # M/D Reply Permalink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어째 재발명 같은 단어도 괄호로 (reinvention) 식으로 표기되어 있어 초벌 같다고 느끼긴 했습니다. 이런 번역이 책으로 나오면 역자로선 참 당혹스러운 일이지요.
    그렇긴 하지만, 제가 주로 문제를 삼은 부분, 즉 역자 후기에서 들뢰즈와 데리다를 비교한 평가, 그리고 negotiation을 '타협'으로 새긴 것은 여전히 남는 것 같습니다. "관념론", "사소한 트집잡기", "하버마스적인 '합의'와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타협(negotiation)'의 정치"... 이게 역자 후기에 나오는 표현인데, 전 이걸 읽고 도대체 왜 이 책을 번역했지 하는 생각을 누를 수 없었습니다. 예컨대 레닌주의자가 베른슈타인을 번역하는 것처럼, 비판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번역한 것도 아닌 것 같고, 저런 정도의 표현을 쓸 정도면 데리다적 사고를 독자들에게 제안하려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원래 변성찬 씨가 번역하기로 했던 게 아니라고 하니 조금 이해가 되기도 하고, 전반적으로 지지하는 이론가라 하더라도 어떤 부분에 관해서 이견을 말하고 비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 상식에서는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역자 후기인 것이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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