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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만에, 학교

광폭한 추석 알바가 일단락됐다.

다음 주에도 일부 있긴 하지만, 이번만은 못하다.

한편으로 보면 여유가 생긴 거지만, 다른 편으로 보면 큰 경제적 난관이기도 하다. ㅠㅠ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에다 정기적으로 돈을 부치고 있는데

그래서 불안정하나마 버는 데도 전이랑 다를 것 없는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좀 편해지는 건 사실이다.

 

어쨌든 지난 주에 알바 외 모든 일에 손을 놓는 바람에

밀린 일들 때문에 이번 주는 정말 정신없게 생겼다.

오늘까지 글 하나는 초벌번역 마치겠지만

그거 손보는 데도 시간이 만만치 않을 테고

이번 주에 해야 하는 수업 발제, 그리고 본격적으로 어려워지는 일본어 수업,

어쨌든 주중 밤시간을 앗아갈 깨알 같은 알바까지,

쉽지 않다.

 

그러니 오늘부터 다시 작업 모드로 전환해서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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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6 10:25 2010/09/2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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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까지 딱 열흘!

글 두 편을 번역해야 하는데

오늘 하루 종일 일해도 한 편을 끝낼까 말까다.

초벌 번역이라 사실 거의 처음부터 새로 작업을 해야 하는 거나 마찬가지고

더욱이 내일부터 나흘간은 죽었다 생각하고 알바만 해야 한다.

다음 주에 발제도 하나 해야 하고, 아마 그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오늘까지는 무조건 한 편에 대한 1차 번역을 마쳐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대략 두 장에 70분 정도 걸리니까

490분. 8시간. 밥 안 먹고 해도 밤 10시나 되어야 마칠 수 있다...

 

뭐 이럴 시간에 한 자라도 더 번역하는 게 맞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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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0 13:53 2010/09/2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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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학기 초라 정신이 없고

그 외로도 할 일 및 알바가 꽤 많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학기가 가면 허무감이 엄습할 것 같다.

현실적으로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건 아닌 것 같고

일단 최소한의 목표를 세우는 것에서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수업 및 번역, 그리고 알바 이외의 시간에는

저 책을 손에서 떼지 않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공부할 문제와도 관련되고, 또 수업이나 번역에도

도움이 될 책이기 때문이다.

 

넉넉잡아 10월까지 저 책을 읽는 게 목표다.

설마 이것도 못 하진 않겠지? --

다행히 어떤 이가 저걸 pdf로 만들어 주어서

항상 휴대하고 읽기 좋게 되었다.

 

그러면 다시 마음을 다잡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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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11:34 2010/09/18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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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또 하루가 가는구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또 하루가 갔다.

내일 오전 알바가 끝나면 조금 여유가 생길 것도 같지만

담주부터 몰아칠 또 다른 알바를 생각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늦어도 월요일까진 일 하나를 끝마쳐야 한다.

사실 그렇더라도 이미 늦다...

 

새로운 생활이라는 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정신이 없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시간을 요령 있게 쓰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꽤 크지만.

내가 멀티플레이어가 못 된다는 걸 새삼 절감한다.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하나씩 일을 마무리짓는 것이다.

그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낼 알바 준비를 해야 하는데

밤이 되니 조금 진이 빠지긴 한다.

그래도 정신을 좀 차리고.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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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6 22:33 2010/09/1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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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turing Reality

 

 

 

"We will begin with the following observation: what we have called Althusser’s most productive period coincided with a new-found interest in contemporary painting and literature, particularly drama. (...) The argument emerging here would become explicit in an unfinished piece from 1968, “Sur Brecht et Marx,” in which Althusser acknowledges that far from Marxist theory helping him understand theater, it was rather that “El Nost Milan played an important role in my research. Seeing El Nost Milan I was better able to understand certain important things in Marx’s thought” (Althusser 1994b, 524)."

- Warren Montag, Louis Althusser, Palgrave Macmillan, 2003, p.17, p.35.

 

알튀세르의 스승 바슐라르는 철학자들에게

"과학들의 학교로 가라!"고 외쳤다.

20세기 들어 한층 가속된 자연과학들의 진보에 비해

철학은 사뭇 한심한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더러

추상/구체, 사고/경험 따위의 부당한 대립항을 만들어

자연과학의 활력있고 실험적인 실천을 왜곡하는 표상을

자연과학에 뒤집어 씌우고, 그와 상관적으로 철학을 쇄신할 수 있는

새로운 사고의 가능성을 배척해 더 퇴행적인 상태로 뒷걸음했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을 강조하면서

바슐라르의 이 노선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거기가 어디든, 새로운 사고가 돌발하고 운동하는 곳으로 나아가

듣고 배우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는 게 그의 진의였으리라.

알튀세르가 과학 개념을 양보하지 않았다 하여

인본주의자들은 그를 스탈린주의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에게, 맑스주의가 과학이라고 선험적으로 참칭하지 말고

현대 과학들이 실천하는 과학성의 규준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에 비추어 맑스주의가 진정한 과학성에 도달했는지 곰곰이 반성하며

'도래할 과학성'을 위해 힘쓰자고 외친 것이

어찌 스탈린주의일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알튀세르의 '비교조적' 특징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도 잘 나타난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입각해 예술성에 대한 어떤 정상성/규격성(normality)

을 만들겠다고 정색하지 않았다(부르주아 예술 vs 프롤레타리아 예술?).

물론, 그런 유혹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맑스주의 곧 역사과학에 대한 반성을 통해

기존 과학(성) 개념에 개입하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존 예술(성) 개념에 개입하려는 생각이 알튀세르에게 있었고

이 때 그 선의와 상관없이 개입이 점령과 이용(exploitation)이 되는 그런 위험,

예컨대 스탈린주의나 인본주의와는 다르지만

자신의 이론적 반인본주의를 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정전'(canon)을 정립하려는

위험이 항상 출몰하게 되므로.

그러나 알튀세르는 이 사이렌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는데

그 증거 중 하나가, 전통적인 의미의 '미학'이나 '예술론'에 가장 가까운,

"브레히트와 맑스에 대하여"를 완성.발표하지 않은 것이다.

 

예술과 알튀세르가 마주친 지배적 방식은, 위에서 그 스스로 말하듯,

어떤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사고,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정교히 하는 식이었다. 즉 알튀세르에게 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예술에 대한 맑스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맑스주의에 대한 예술의 효과다.

예컨대 예술을 다룬 알튀세르의 가장 유명한 논문 중 하나를 논평하며

워런 몬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알튀세르 자신의 말을 인용한다.

 

"The final sentence of the essay, perhaps one of the most powerful Althusser has ever written, (...) suggesting that his essay is the effect of the play, the play pursuing itself, its themes, its passions in him as in so many others: "I return to myself and the question, sudden and irresistible, assails me: whether these few pages in clumsy and blind way are nothing more than this unknown play from a June evening, El Nost Milan, pursuing in me its unfinished meaning, seeking in me, despite me, all the actors gone and the sets cleared away, the beginning of its silent discourse." (For Marx, p.152)"

- 같은 책, p.30(강조는 나).

 

과학들과 예술들, 그리고 또다른 실천들을

평가하고 서열화하고 경우에 따라 작두로 내려치는

'판관'의 자리에 맑스주의를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물질적 실천들 속에서 출현하고 작동하는 사고들에 귀기울이고

그에 힘입어 맑스주의를 반성하고 변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맑스주의자, 더 넓게는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

지금까지도 가장 많은 영감과 가르침을 주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어제 수업 시간에

Capturing Reality: the Art of Documentary란 다큐멘터리 영화와 마주친 후

영화라는 예술적 실천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을 새삼 얻었다.

지금 자신을 엄습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그게 무엇이 됐든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한 저 현실을 포착하려면,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느낀 것처럼 관객들이 체험하게 만들려면

어떤 형식과 기법(이른바 '방법')이 필요할 것인지에 관해

감독들은 끊임없이 사고하고 실험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내용이 먼저냐 형식이 먼저냐 하는

이른바 '미학적' 대당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대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일반적 '방법론' 따위도 마찬가지다.

오직 구체적이고 정세적인 마주침, 독특한 대상을 포착하려는 '적합화' 노력

만이 있을 뿐이다.

 

천의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처럼

혁신적 사고 역시 그렇다. 때로 그 곳은 문학일 수도, 영화일 수도 있고,

생물학일 수도, 정치철학일 수도 있으며, 많은 경우 그런 것처럼 (대중)정치일 수도 있다.

어느 곳엔가 뿌리를 두더라도,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놀라운 사고들과 마주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

서랍 속에 간직해 두고 수시로 꺼내 보아야 할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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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9/14 12:55 2010/09/1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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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되니까

참 편한 게 많다.

 

무엇보다 웹 사전으로 단어 특히 숙어를 빨리 찾을 수 있다.

최근에는 네이버에서 불어 사전까지 서비스를 해

더 편해졌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인데

자신이 찾은 단어를 단어장에 저장할 수가 있다.

단어장을 여러 개 만드는 것도 가능해서

읽는 책마다 단어장을 만들어 정리할 수도 있다.

대개 단어를 찾을 때 가장 눈에 띄는 단어만 보고

일단 그걸로 번역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중에 다시 찾아서 찬찬히 비교해 보면

매끄럽게 번역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또 원서를 읽을 때, 각 사람이 장을 나눈 다음

그 장의 단어를 꼼꼼히 찾아 저장해 둔 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단어 찾는 번거로움이 훨씬 줄어들 것 같다.

비단 원서뿐이겠는가. 한글 소설 등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어장 공유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찾아보면 이렇게저렇게 방법이 있겠지.

 

그동안 인터넷 없이 도대체 얼마나 작업을 힘들게 한 것일까?

새삼 지난 시간이 안타까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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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2 20:57 2010/09/12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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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배달부의 이름이 키키인 이유?

 

 

 

 

이번 주부터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왕초보도 할 수 있다고 하여 들어갔는데

초보가 아닌 사람들이 많아 바짝 긴장하는 중.

히라가나 50자를 외워야 하는데

아직 외우지 못해 진땀을 흘리고 있다.

 

어쨌거나 외우면서

그냥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배달부 이름이 키키인지에 관해서. 히라가나로

'마녀'의 '마'는 ''라고 쓰고

'키키'의 '키'는 ''라고 쓴다.

왠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뭐 구글을 뒤져봐도 그런 해석이 딱히 없는 걸 보면

그냥 내 생각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히라가나 ''를 볼 때마다 나는 키키를 떠올린다.

''(누)를 보면서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꼬리를 휘날리는 이누야샤를 떠올리는 것처럼.

(얘 꼬리가 밖으로 보이던가? 뭐 어쨌든 개니까 옷 속엔 있겠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라도 외워야지 뭐 별 수 있나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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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0 16:57 2010/09/1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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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izenship'의 번역어에 관한 단상

오늘 수업에서 'citizenship'의 번역어에 관한 토론이 잠깐 있었다.

입학 서류 중 하나인 연구계획서를 낼 때

이 문제에 관해 거칠게 고민한 게 생각났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이지만, 뭐 여기는 일종의 연습장 같은 곳이니까,

앞으로 계속 고민하자는 차원에서 옮겨 놓는다.

내가 'citizenship'의 새로운 번역어로 떠올린 '시민'(市民)이란 말은

구글 검색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다만 유일하게 신학 쪽에서

제자직(discipleship)과 시민직(citizenship)을 대립시키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 예가 눈에 띄는데

논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내 생각(곧 '직책/직분'으로서 시민이라는 관념)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보인다.

한문으로 市民職을 치면, 중국 쪽에서 이 단어가 쓰이는 예가 검색되기는 하는데

중국어를 몰라서 이게, 예컨대 '시민직(업)훈(련)' 식으로, 다른 단어의 일부로 쓰이는지,

독립적인 단어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

 

시민권에 관한 연구를 할 때 우리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은, ‘시민권’(市民權)이라는 번역어가 'citizenship'이라는 서양어의 진의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최현, 2006).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ship'을 번역하기 위해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에서 채택하는 ‘권’(權)이라는 번역어다. 본래 'ship'이란 접미어는 예컨대 'kinship'의 예에서 보듯 ‘~임’이나 ‘~다움’이라는 뜻, 즉 지위나 특성, 자격 따위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볼 때 'citizenship'의 일차적 의미는 시민이라는 ‘지위’에 있으며, 이로부터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자격이나 요건, 시민이 수행하는 활동 및 이를 위해 요청되는 덕성(virtue) 등 다양한 의미가 파생된다고 할 수 있다. ‘시민권’이라는 번역어를 비판하는 이들은 이 번역어가 'citizenship'의 한 측면에 불과한 권리의 측면만을 도드라지게 하고, 나머지 의미들은 부차화한다고 비판한다.

우리는 이 같은 지적이 일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으로 시민권이라는 번역어가 갖는 이점도 있다. 그것은 시민권이 무엇보다 ‘권리’의 문제라는 점,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리의 본질 및 조건을 개념화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는 권리에 대한 다른 접근법, 특히 한편으로 신분적 ‘특권’(privilege), 다른 한편으로 ‘인권’ 개념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시민권, 특히 근대 시민권은 전근대 시대를 특징짓는 신분적 특권 개념과의 단절을 통해 성립했다. 정치 공동체 안에서 모든 구성원 곧 시민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권을 부여받는다. 이 같은 ‘내포적 보편성’은 근대 시민권의 핵심을 이룬다(Balibar, 2007a). 동시에 시민권은 인권, 특히 ‘천부권’이나 ‘자연권’ 등 인권 개념에 대한 관념론적 해석과 구별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견해를 따르는데, 아렌트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파시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국가 없는 사람들’과 ‘권리 없는 사람들’에 관해 성찰하면서, 시민권보다 더 광범위하고 독립적인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민권이 제거되거나 역사적으로 파괴되면 인권 역시 파괴된다는 점을 증명한 바 있다(아렌트, 2006; Balibar, 2007b). 이 때 아렌트가 말하는 시민권이란 이런저런 실정적 권리라기보다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a right to have rights), 즉 실정적 권리들을 실현․보장하는 정치 공동체에 평등하고 자유롭게 속하고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이르는 것이다.

요컨대 발리바르와 아렌트 등이 재정식화한 근대 시민권 개념은, 권리 문제를 다룸에 있어 특권 개념에 대해서는 보편성의 차원을, 인권 개념에 대해서는 실효성의 차원을 강조하는 독특한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특권 개념과 인권 개념의 나쁜 점을 버리고 좋은 점을 취한 이상적 개념이 아니다. 차라리 보편성과 실효성, 확장성과 안정성, 또는 운동과 제도라는 모순적 경향들 사이의 끝없는 갈등 및 일시적 균형으로 시민권을 정의하는 것이 개념의 정신 및 현실에 부합한다 할 것이다. 시민권 개념을 이렇게 정의하면, 다양한 사회에서 권리가 실현되는 양상을 보편적이면서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이상에서 시민권이 권리 문제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이를 확인한 채, 시민권이라는 번역어에 대한 비판을 재검토해 보자. 비판의 요점은 이 번역어가 'citizenship'이라는 지위에서 파생되는 권리라는 한 가지 측면만을 부각시킬뿐더러, 이 말이 갖는 객관적․제도적인 동시에 주체적․인간학적인 이중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시민권’이라는 한글 단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당장 서양어에서도 영어 'citizenship'과 불어 'citoyenneté'의 용법이 다르고, 더 나아가서는 일찍이 언어학자 에밀 벤베니스트가 증명했듯이 'citizenship'의 어원을 이루는 그리스어 'politeia'와 라틴어 'civitas' 자체도 시민과 정치체, 시민의 권리에 관해 상반되는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벤베니스트, 1998; Balibar, 2008). 즉 'citizenship'이라는 서양어 자체가 다양한 해석 사이의 갈등에 시달리고 있고, 따라서 문제는 이 말에 대응하는 정확한 한글 단어를 찾는 것을 넘어, 'citizenship'의 핵심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관해 설득력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번역어를 채택하는 문제는 이 논의의 일부이지, 이것과 별개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citizenship'을 공적 공동체 안에서 시민이 점하고 실행하는 ‘일차적 직책/공직’(primary office)이라고 규정하는 네덜란드의 정치학자 헤르만 판 휜스테렌의 ‘신공화주의’(neorepublican)적 접근에 주목한다(Gunsteren, 1998). 이 같은 규정은 'citizenship'이 갖는 지위로서의 측면을 분명히 부각시킬 뿐만 아니라, 이 지위의 ‘공적’ 성격을 강조한다. 'citizenship'이 ‘공직’인 한에서, 이는 ‘자연적’으로는 실존하지 않으며, 오직 시민에게 이 공직을 부여하고 권한을 인정해 주는, 그리고 그 권한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동료시민들과의 ‘인공적’ 상호작용 속에서만 실존한다. 또한 ‘공직’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citizenship'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본분과 의무를 유순하게 수행한 대가로 상위 공동체가 ‘하사’하는 신분적 ‘특권’―직분과 의무에 상응하여 부여되는 보상이야말로 특권의 본래적 정의다―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능동적 권한과 그에 필요한 덕목, 그리고 이 권한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 등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이렇듯 공직으로서 'citizenship'이라는 규정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자연권 및 특권과 구별되는 시민권의 고유한 의미와 잘 어울린다. 사실 휜스테렌의 이 같은 접근은, 시민을 ‘무제한적인 공직’(archē aoristos), 곧 전문적 영역이나 임무를 갖지 않으면서 모든 정치적 사안에 관해 발언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공직자로 정의한, 시민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민주주의적인 정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시민권의 기원에 있는 핵심 원리를 부활시킨다는 장점도 갖는다(아리스토텔레스, 2009).

이처럼 ‘직책/공직’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citizenship'의 고유한 차원을 잘 포착하는 것이라면, 'citizenship'의 번역어로 ‘시민’(市民)이라는 신조어를 검토해 볼 수 있다. 시민권이라는 번역어가 이미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대체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밝힌 것처럼 여기서 요점은 'citizenship'에 대응하는 더 ‘정확한’ 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citizenship'의 핵심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관한 관점이다. 시민권을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된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되는 공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형식적으로 보장되는 권리의 내용뿐만 아니라, 이 공직을 사람들에게 부여하고 배제하는 기준, 이 공직에 따르는 권한과 의무의 구체적 내용 및 그 변천 과정, 그리고 이 공직의 실효적 획득과 행사를 둘러싸고 동료시민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대와 갈등 등 역동적 과정을 시민권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휜스테렌이 ‘진행 중인 시민권’(citizenship in the making)이라 부르는 이 같은 접근은, 특히 시민권의 형식적 보장과 다소 독립적으로 이루어지는 시민권의 실질적 행사, 그리고 아직 법률 등으로 명문화되지는 않았지만 새롭게 등장하여 시민권의 미래를 개척하는 갈등적 과정 등을 포착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더불어 특정 집단을 권리에서 배제하려는 시도와 역으로 완전한 권리를 쟁취하려는 시도 모두가 시민권의 언어를 빌어 이루어지는 역사적․정세적 현실 앞에서, 시민권에 대한 전면적 거부나 무비판적 수용 양자와 구별되는 태도를 가능케 해 줄 것이다.

 

<참고문헌>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천병희 옮김, 숲, 2009.

에밀 벤베니스트, 『일반언어학의 제문제 : 공시언어학과 통시언어학의 만남』, 김현권 옮김, 한불문화출판, 1998.

최현 , 「한국 시티즌쉽(citizenship)」, 『민주주의와 인권』 제6권 1호, 2006.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이진우, 박미애 [공]옮김, 한길사, 2006.

Balibar, Etienne, "Debating with Alain Badiou on Universalism", 2007a. (http://www.ciepfc.fr/spip.php?article21)

Balibar, Etienne, (De)Constructing the Human as Human Institution, social research Vol 74: No 3; Fall 2007b.

Balibar, Etienne,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Rethinking Marxism Volume 20: Number 4; October 2008.

Gunsteren, Herman R. van, A theory of citizenship: organizing plurality in contemporary democracies, Westview Pres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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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9/09 19:42 2010/09/0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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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이 생겼다

얼마 전부터 컴퓨터가 말썽이었다.

아래한글만 쓰는데, 5분에 한번씩 다운이 됐다.

좀 상황이 심각했고, 일에도 지장이 많았다.

 

알바비가 나오는대로 부득이하게 컴퓨터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마침 군대 가는 지인과 얘기가 되어 그가 쓰던 노트북을 인수했다.

그래서 드디어 인터넷 되는 내 컴퓨터가 생겼다!

 

노트북 치고는 좀 덩치가 큰 편이고

충전 용량도 그리 넉넉하진 않아서

여기저기 갖고 다니긴 좀 그렇지만

뭐 그러려고 산 건 아니니까.

학교 연구실에 컴퓨터가 따로 없어서

매번 갖고 출퇴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게 때문에 약간 걱정이 되긴 한다.

행복한 고민이긴 하지만. ㅋ

 

어쨌든 집에서 맘 놓고(아직도 남의 인터넷 해적질하는 거긴 하지만. ㅋ)

인터넷을 쓸 수 있게 된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그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튼 지금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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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9/03 22:21 2010/09/03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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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호니히를 읽으며

단상이라도, 꾸준히 글을 쓰자고 결심했건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쨌든 개강을 했고, 전보다는 웹 접근이 나아지므로

앞으로는 꾸준히 써볼 작정이다.

 

개강을 했는데, 학부 때부터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까,

10여 년만에 수업다운 수업을 듣는 셈이다.

뭐 수업 자체에 엄청난 기대가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이런 다소 강제적인 형태로 공부하는 것에 관해서는 기대가 있다.

이번 주는 대략 개요이고,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될 텐데

나름 설렌다.

 

이제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어서

충동적으로 책을 막 대출했다.

그 중 하나가,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보니 호니히의 <Democracy and the Foreigner>다.

 

 

 

 

그녀의 다른 글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다

우연히 웹으로 읽게 된 이 책 1장이, <오즈의 마법사>
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걸 보고 꼭 읽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오즈의 마법사>와 <셰인> 같은 대중적 장르부터

<사회계약론>이나 <모세와 일신교> 같은 이론적 글,

<성경>의 "룻기"부터 오늘날 등장한 정치철학 텍스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기록들을 가로지르며 '외래성'(foreignness)과 '민주주의' 문제를 다루는

그녀의 접근 방식에 깊은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해서

수월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글 자체는 재미있는 듯 하지만

한동안 제대로 책을 붙잡고 공부하지 않은 터라

다시 습관이 잡힐 때까진 시간이 좀 필요할 듯.

 

다만 한 가지 독서 화두는 적어두려 한다.

호니히는 이 책에서 외래성과 민주주의 사이의 긴장을 탐색하는데

이때 그녀가 환기하는 심상 중 하나가 (<셰인> 같은) 서부극이다.

물론 나에게는 (<셰인>의 영향을 직접 받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나 <쓰바키 산주로>가 더 익숙하고 생생하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서부극을 말하면, 적어도 나로서는,

알튀세르가 말년에 언급한 '유물론적 철학자의 초상',

'기차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채

달리는 기차(세계의 흐름, 역사의 흐름, 그의 삶의 흐름)를 잡아타는 사람'

이라는 심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더 읽어보긴 해야겠지만,

호니히가 민주주의와 외래성 사이의 어떤 긴장적 관계를 말하고

알튀세르가 외래성과 유물론적 철학자(또는 아마도, 마키아벨리적인 정치 행위자)

의 친화성을 말하므로

외래성을 매개로 민주주의와 (철학적인, 그러나 특히 정치적인) 유물론의 관계를

탐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자연히 생겨난다.

 

최근 발리바르를 읽으면서 '이방성'(strangeness)의 문제를

고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 때문에 새삼 호니히의 책에 관심이 생긴 것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제 사회학 공부를 시작했으니, 이 문제를 중하게 다루는 사회학 전통,

한편에 '고전'에 속하는 게오르그 짐멜이 있고

다른 한편에 가장 현재적인 지그문트 바우만이 있는

이 전통을 읽는 나름의 방식을 위의 이론가들로부터 얻고 싶다는 마음도 생겨난다.

 

이로써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 조선족과 재일조선인, 탈북자 등

여러 이산민(diaspora)과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권의 문제를 연결시키는 데 쓸모가 있는

지적 수단 중 하나를 다듬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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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10/09/01 15:47 2010/09/0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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