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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에 관한 독서 노트 1

한번 날잡아서 제대로 읽겠다 맘만 먹은

미구엘 바터의 마키아벨리 연구를 읽고 있다.

바터의 책은, 박사논문을 출판한 거라 그런지,

처음에 관련 문헌을 한참 열거한 후 자기 얘기를 하는데

워낙 문헌에 대한 소양이 없다 보니까 앞 부분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다른 일이 생기면 본론에 못 들어가고 중단하곤 했는데

이번에 맘을 다잡고 더듬더듬 읽고 있다.


이번에도 역시 앞 부분을 읽는 건 쉽지 않았다.

대낮에 책을 읽다가 오랜만에 졸았는데

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 뒷 부분 내용이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마키아벨리의 virtù-fortuna 도식

(전자는 (변)덕으로 번역하면 될 것 같은데

후자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운세'(運勢)라는 말이 자구적으로는 매우 정확하고

또 '정세'(政勢) 개념과 의미적으로 친화적이라는 점을 가리킬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운세' 따위의 기존 용법이 너무 강력해서 문제지만...

그러나 fortuna도 원래 그런 의미를 가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게 꼭 단점은 아닐 수도 있다.)

전통적인 '자유의지-필연'의 이율배반을 넘어서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변)덕과 운세를 각각 자유의지-결정론이나 주체/주관-대상/객관 등의 도식 아래

포섭해서는 안 된다.


바터는 다른 개념을 도입해 전체 도식을 복잡하게 만들어 이런 위험을 극복하려 하는데

action-times(행위-시대) 개념이 그것이다.

내가 이해하기에 운세는 위의 두 개념이 후자의 우위 하에 결합한 상태,

곧 시대에 부합하는 상태로 행위가 길들여진 즉 '행실'(behavior, 또는 '행태')로 된 상태를 말한다.

반면 (변)덕은 전자의 우위 하에 두 개념이 결합한 상태,

곧 시대를 주도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행위 개념이 능동화된 상태를 이른다.


즉 (변)덕과 운세는 자유의지/주관-결정론/객관의 도식에 따라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통상 자유의지/주관에 속한다고 간주되는 행위가 (행실의 형태로) 운세에도 속해 있고

행실이 행위로 길들여지면 (변)덕의 역량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위라는 모래알 하나로 전체가 무너지는 결정론,

모든 행위를 결정론에서 벗어난 자유의지로 맹신하는 관념론 대신

이제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는 행위 개념 자체의 분할이며,

따라서 유형화된 행위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반성과 함께

행위 일반이 아닌 시대를 바꿀 수 있는 행위란 무엇인가 하는 난문이 출현한다.


이 같은 접근은 철학적 구조주의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해 준다.

(또는 역으로 철학적 구조주의 덕분에 마키아벨리를 이렇게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말할 때

그가 제출하는 것은 자유의지/주관/능동/행위 등의 항에 속한다고 간주된 주체가

실은 구조를 재생산하는 수동성의 담지자일 수 있다는 반성이며

지배는 행위 일반을 억압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과 양립할 수 있도록 행위를 유형화하고 길들이는 데 있다는 통찰이다.


마키아벨리와 철학적 구조주의는 근대성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는데

근대성이란 결국 '변화의 정상화'(월러스틴)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 이제 문제가 질서와 변화, 그 정치적 대응물로서 보수와 진보의 단순화된 이분법

이 아니라 정상화된 변화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로서 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이며

그 지배 이데올로기가 길들여진 변화를 지향하는 '중앙파' 자유주의인 것은 이 때문이다.

맑스가 분석한 것이 자본주의라는 '(정상화된) 변화의 구조'이고

맑스주의 안에 개혁-혁명의 대립이 항상 따라 붙는 것,

그람시가 혁명과 구별되는 '수동 혁명'을 개념화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요컨대 마키아벨리에서 맑스주의를 거쳐 철학적 구조주의에 이르기까지

문제는 변화와 행위에 대한 반성이며,

변화에 대한 변화, 행위에 대한 행위다.

물론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이단점이 있겠지만

나름 하나의 접근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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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6 15:49 2010/06/2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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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OST를 오랜만에 다시 들으며

지나간 드라마를 몇 편 보다 보니

문득 <아일랜드>가 떠올랐다. OST를 구해 듣고 있는데,

그 때의 행복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노희경과 더불어 이른바 '마니아 드라마'계를 양분하는 인정옥이 극본을 쓴데다

무려, 이나영, 현빈, 김민정, 김민준, 이 네 명(!)이 주인공이었으니

(모르긴 해도, 이 넷이 한 극에 출현하는 건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방영 전부터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기억이 닿는 한에서 최고의 드라마였지만,

뭐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대개 그렇듯이 흥행엔 참패했다.

 

OST 중 <그대로 있어 주면 돼>는, 특히 장필순의 목소리를 거칠 땐,

마이너한 이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쓸쓸하면서 따뜻한 위로였다.

"버리고 싶은 건 네가 아니었어 버려지는 건 내가 되어 줄게"

가진 게 없으므로, '버려지는 것'을 선물했던 그/녀들.

 

<아일랜드>가 앞으로도 쉽게 잊히지 않을 이유는

이 극이 비와 연결된 이미지를 내게 남겨 줬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의 마지막 장면,

중아와 재복이 빗속으로 손을 뻗으며

어디엔가 있을 서로의 손을 찾고, 또 비를 매개로 부딪치는 장면이 그것이다.

 

당시 오규원 시인의 시를 조금씩 읽고 있었으므로

그 장면은 <오후의 아이들>이라는 아래의 시와 자연히 얽히게 됐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파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을 열며 걷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눈을 번쩍 뜨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우뚝 멈추어 서고 있다

 한 아이가 공기의 속에서 문득 돌아서고 있다"

공기와 비,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는,

따라서 멀리 떨어져 만날 수 없고, 어쩌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사람들의 손끝을 맞닿게 해 주는 매개물.

중아와 재복을 이어주는 붉은 실.

 

갑자기 <아일랜드>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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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2 23:35 2009/07/12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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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if', 위로와 치유의 가정법

돈 버는 일을 하면서 이하나의 '그대 혼자일 때'를 듣고 있다.

 

중간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늦었다고 말해도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시작해도 되죠 우리 함께 가요
난 여기에 살아 있죠"

 

이하나의 다정한 목소리와 이 가사가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어울려 내 마음을 위로해 준다.

 

위로라는 말을 좋아해 본 적 없었고

그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던 걸 보면

내 인생에 그리 커다란 실패는 없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좀 들었나. 이제 위로에 대해 냉소하지 않기로 했다.

 

몇 년 전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란 잠언이 인용된 적 있었다.
(지나치는 김에 말하자면, 공익하던 중 싸이 미니홈피에

일기라 생각하고 여러 글을 끄적여 둔 게 참 다행이다 싶다.

그 기록마저 없었다면, 내 과거는 거의 흔적 없이 사라졌을 것이고,

지금 나는 훨씬 더 허무했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이 잠언을 보면서 'as if'에 관한 단상을 편 적 있었다.

그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허구는, 현실에 익사할 지경으로 푹 잠겨 있을 때
현실로부터 개체를 '분리'시켜 주는 것임과 동시에
현실 안으로 개체가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기입'될 수 있게 해 주는
'취해진 거리의 공백'이며 '유희의 공간'
일 것이다. 혹은 그런 한에서만 의의를 가질 것이다.
즉 분명히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고 상처를 받았고
나를 듣고 있으며 돈이 필요하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 아니라는
'현실'을 알고 있어야만, 다만 그 현실에 고착되지 않으면서
거기서 거리를 두고 다시 시작
(이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리라. 이미 나는
'원점'에서의 '그' 개체가 아니니까)
할 수 있게 해 주는 '매개'로서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즉 허구는 이중의 의미에서 지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학습'을 도외시해선 안 되고
동시에 '실험'과 '유희'(또는 '비틂'(twist))의 장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인내'와 '변덕'이라는
두 가지 덕목을 다 품고 있어야 한다."
 

'as if', 이 가정법의 시공간은

학습과 실험/유희의 장일 뿐만 아니라,

위로와 치유의 세계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금의 나는 추가하고 싶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일에 아직 사로잡혀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일이 분명히 있었지만,

그 일을 없던 '것처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저 'as if'의 위로란, 그 자체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작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가장 큰 힘 중 하나일 것이다.

 

이하나의 저 다정한 노래를 지금 나에게 전해 준

저 기록이란 유령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더 힘들었을 것이다.

떠도는 말과 마주쳐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힘을 얻는다.

나름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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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2 16:25 2009/07/12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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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맨 김동길

며칠 전 김동길이 노무현 장례식에서 통곡한 DJ를 “진짜 웃기는 사람”이라면서

“공자도 제자 안회의 장례식에 갔지만 통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안연이 죽었을 때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까지 말했고,

『논어』 곳곳에서 자신의 감정을 비교적 솔직하게 표현했던 공자가

안연의 죽음에 크게 슬퍼하지 않았을 것 같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너무 자신 있게 얘기를 하길래

아마 『논어』에 ‘통곡’ 같은 표현이 직접 나오지 않았나 보다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엊그제 우연히 『논어』를 봤더니 <선진> 편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왔다.

“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 而誰爲?”

(“안연이 죽자 공자께서 통곡하셨다. 공자를 따르던 한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님께선 너무 슬퍼하십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무 슬퍼한다고? 그 사람을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슬퍼하리요.”” (가지고 있는 번역본인데, 문체가 좀 기품이 없다. ㅋ))

 

나름 보수주의자라는 작자가 『논어』도 제대로 모르다니.

물론 헛갈렸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공자와 안연의 관계를 조금만 알아도 하기 어려운 실수라,

글쎄, 무식하다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봐도 김동길은 ‘엑스맨’인 것 같다.

DJ와 노무현을 ‘공자’와 ‘안연’에 비교하는 것이

그들을 더할 나위 없이 높여주는 것이란 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까?

(당장 노사모 게시판에, '김대중의 통곡에서 공자의 통곡을 보았다'는 글이 올라왔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런 정신 나간 놈들 때문에

DJ와 노무현 같은, 사실 충분히 나빴고, 그래서 다 죽은 줄 알았던 자들

(세상에 언젯적 DJ고, 언젯적 '행동하는 양심'인가!)

이 ‘민주화 투사’로 다시 화려하게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니 10년만에 정권을 탈환했다고 기뻐하던 평범한 보수 세력들의 낯빛이

갈수록 어두워질밖에. 내가 보수주의자면, 진짜 저런 놈들 다 총살하고 싶었을 것이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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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2 18:58 2009/07/02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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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2아웃

2년 전쯤, 이런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

수애가 나와서 꼭 보고 싶긴 했는데, 제대로 챙겨보지는 못했고

별이 부른 'Fly Again'이라는 OST가 신나고 좋아서

그 무렵 늘 이 앨범을 듣곤 했다.

 

이 드라마의 큰 줄기는

스물아홉 동갑내기들이 서른을 앞두고 겪는 통과의례,

그리고 30년 소꿉친구인 수애와 이정진이 티격태격 끝에 연인이 되는,

아다치 미츠루 만화에서 많이 다뤄지는 이야기였다.

 

처음에 무척 기대를 했던 이 드라마에 점점 흥미가 떨어진 이유 중 하나는

평범하고 약간은 찌질한 스물아홉 난희와 수애 사이의 괴리감,

어떤 사람이 '난희와 수애 사이'라고 표현한 것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희도 그닥 푸념할 게 있을까 싶은 나쁘지 않은 삶이었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거기까지는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그 푸념을 수애가 하는 걸 보니 별로 공감이 안 갔던 것이다.

(말하자면 극히 평범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

를 심은하가 연기할 때 느낀 괴리감과 비슷하다고 할까.)

 

어쩌면 내가 그 때 막 서른살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아주 어릴 때 <사랑이 꽃피는 나무>나 <내일은 사랑>, <우리들의 천국> 따위를 보면서,

이 드라마들은 그냥 사랑 얘기만 나오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의 고민과 아픔을 그리는구나

(그러나 그 때 대학 다니던 선배들은 그 드라마를 보면서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식으로 생각한 것처럼, 내 나이 20대 초반에 그 드라마를 봤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서른살의 나이에 서른살을 다룬다는 드라마를 봤기 때문에,

더구나 어쨌든 약간 특이한 삶을 살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 더 괴리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남들이 그 나이에 한창 겪는다는 아홉수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가

뒤늦게 아홉수 비슷한 걸 호되게 느끼는 요즈음,

갑자기 그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어진다. 어쨌든 서른살을 다룬 이야기니까.

서른이라는 나이는, 수애처럼 아름다운 이에게도, 지금 만나는 이 아이와 헤어지면

또 사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일으킬 수 있는 나이이고,

작가라는 꿈은,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고 돈을 벌고 있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처지

(물론 난희가 다니는 출판사 상황은 좀 안습이긴 하다)의 사람에게도,

내가 지금 뭐하고 사는 거지 하는 불안을 일으킬 수 있는 꿈이니까.

 

어쩌면 다행일는지 모른다. 늦게나마 아홉수를 잘 치르고 나면

뭔가 길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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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8 22:43 2009/06/28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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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달성하는 계획을 짤 땐

반드시 시행착오의 시간을 포함시켜야 한다.

 

원래 진도대로 되면 좋겠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대로 됐던 적이 없다. 전 날엔 너무나 유망하고 탄탄했던 길이

다음 날 보면 완전히 잘못된 길로 판명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때로는 며칠 동안 간 거리보다 더 먼 거리를 단 한두 시간만에 독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잘 풀렸던 때를 기준으로 계획을 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해서 작업이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즉 작업이 선형적이고 단계적으로 진전되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작업의 리듬이 빨라지는 그 순간, 사람들이 흔히 '사건'이라고 부르는,

예견할 수 없고 우발적인, 때로는 아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순간과 마주치기 위해서는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한다.

(물론 들인 시간과 그 순간과의 마주침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없다.

어떤 이는 하루 만에, 어떤 이는 한 달 만에, 또 어떤 이는 한 해 만에 그 순간과 마주칠 것이며,

여기에는 개인의 능력도 다소간 영향을 미치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사실 '운'이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을 많이 허비할 줄 알고, 그동안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알튀세르는 『맑스를 위하여』에서 (아마도 『에밀』의) 루소를 인용하며,

'시간을 잃는(lose time) 방법을 아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대학 시절 선배들에게 들은, '모든 이에게는 방황할 권리가 있다'라거나,

'대학교 1~2학년 때는 뭐를 해도 뻘짓이니 '그때 더 잘할 걸' 같은 생각은 하지 마라'

등의 얘기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기들은, 앞서 루소를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넓은 의미의 '미성숙/미성년자'의 교육에 주로 관련된 것들이고,

서른이 넘은 시점에 스스로의 갈팡지팡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기엔 좀 낯뜨겁다.

그렇긴 해도, 적어도 나의 경우엔, 이 같은 미성숙 상태가 일종의 상수인 것 같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시간을 잃어야 할 것 같다.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어쩌면 이게 나에게 있어서는,

시간을 버는 나름의 방식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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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5 23:53 2009/06/25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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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가 제기하는 쟁점

"I would suggest, however, that ‘‘we the people’’ in the symbolic sense of the term, but also much more concretely and practically ‘‘we’’ the citizens, ‘‘we’’ the public opinion, are seldom aware of the extent to which the official democracy has a reverse side, becomes practically restricted or denied to many, and involves the implementation of ‘‘laws of exception,’’ if not the establishment of camps."

- Etienne Balibar, "Historical Dilemmas of Democracy and Their Contemporary Relevance for
Citizenship", Rethinking Marxism, Volume 20 Number 4 (October 2008), Routledge, p. 528(강조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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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배제의 맞짝으로 '사회 통합'을 내세우려는 배제 분석은, 많은 경우 반동적이다.

그렇긴 해도 배제가 정치에 어떤 쟁점을 제기하는지에 관해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배제를 좌익적 사고의 중심에 올리려는 시도가 많은데,

내 생각에 한 쪽 끝에 아감벤이, 다른 쪽 끝에 랑시에르가 있는 것 같다.

주지하듯 아감벤은 배제의 문제를 '수용소'(camp)의 일반화와 연결시킨다.

이에 대해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We do not live in democracies, Neither, as certain authors assert — because they think we are all subjected to a biopolitical government law of exception — do we live in camps. We live in States of oligarchic law, in ohter words, in States where the power of the oligarchy is limited by a dual recognition of popular sovereignty and individual liberties. We know the advantages of these sorts of states as well as their limitations."

- Jacques Rancière, Hatred of Democracy, Verso, 2007, p. 73

 

랑시에르의 이 같은 지적은 일리가 있다.

발리바르는 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면서, 그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What he wants to avoid, and I share this concern, is a transformation of the debate into a metaphysical alternative between ‘‘true democracy’’ and ‘‘camps’’ — that is, generalized totalitarianism, or ‘‘evil,’’ which in practice deprives the democratic conatus (as Spinoza would say) of its possibilities and its concrete objectives. In short, we should agree on the necessity
associated symbolically with the motto of equaliberty to retrieve the ‘‘lost tradition of revolutions’’: the tradition of the first modernity which its protagonists in Europe and in North and South America called insurgency — albeit in completely different conditions."

- Etienne Balibar, 위의 글, p. 528

 

하지만 앞에서 발리바르가 말한 것을 실마리 삼아 가설을 제기해 보자면,

랑시에르는 배제, 특히 현대적 배제가 산출하는 종별적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못하는 것 같고,

그 결과 '갈등'(일반적인 의미에서 '계급 투쟁')과 '배제'를 같은 수준에서 다루지 않나 싶다.

물론 양자의 경계가 애매하고 따라서 서로 뒤섞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양자를 구별하는 것, 좋았던 옛 맑스주의 용어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와 '룸펜프롤레타리아트'

를 구별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발리바르는 프랑스 사회학자 로베르 카스텔의 개념을 빌려

현대적 배제의 핵심을 '탈퇴'(disaffiliation) 또는 '부정적 개인주의'(negative individualism)

로 규정하고, 그것이 낳는 고유한 정신적 동요를 지적한다.

이는 예컨대 『끝없는 이야기』에서 바스티안이 겪은 다음 상황과 같다.

 

"여러 낮과 밤을 방랑하면서 움튼 외로움 때문에 바스티안은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것, 어떤 집단 속에 받아들여지는 것, 주인이나 승리자나 특별한 자로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이들 중의 하나, 어쩌면 가장 하찮은 자나 가장 중요하지 않은 자로, 하지만 물론 거기에 속하고 그 공동체에 참여하는 자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소원하게 되었다. (…) 위스칼나리들에게는 서로 다투거나 불화가 생길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아무도 자신을 개체로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해 견해 차이를 극복할 필요가 없었고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다(…)."

 

내가 제기하는 가설은, 랑시에르는 배제된 이들에게 가해지는 정신적 파괴, 이에 따라 규정되는

배제된 이들과 '통합된 이들'(심지어 갈등적으로 통합된 이들) 사이의 소통의 어려움,

이것이 해방의 정치에 제기하는 장애물과 이를 극복하는 문제,

특히 현대에 고유한 배제에 관한 사고를 충분히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아감벤 등에서 보듯, 이 문제를 잘못 사고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위험,

예컨대 허무주의와 그 맞짝으로서의 주의주의(푸코의 저 위대한 분석의 리스크)

사이에서의 동요는 아주 분명하다. 어떤 점에서 랑시에르는

분석을 성글게 하고, 평등의 지위를 '전제' 편에 놓는, 다소 거칠고 야성적인 논의 전개를 통해

완전히 통합된 '일차원적 인간' 따위의 숙명론에 항체를 제공하는

역설적인 진리 효과를 만들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때 지젝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더라도 배제의 문제를 훨씬 더 정교하게 분석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훨씬 중요할 것이다. 배제된 소수자를 다시 '자명한 주체'로 부당전제하는 경향,

그렇지만 배제가 기존의 갈등과 정치 전반에 제기하는 파괴적 효과를 충분히 제기하지 못한 채

배제에 맞선 투쟁과 계급 투쟁을 부당대립하는 경향(오늘의 정세에서는 양자의 변증법을

긴급한 문제로 제기하고 해명하지 못하는 것 자체가 실천적으로 이 같은 경향으로 귀결된다)

모두가 낳는 '비사고'에서 벗어나려면,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를 사고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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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16 19:05 2009/06/1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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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세상이 어찌 되려는 건지

요새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사람들이 노무현 시대를 그리워하는 심정을

(여전히 동의는 못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들 알듯,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폭력이나 심지어 죽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은 열사는 물론,

전용철, 홍덕표, 하중근 열사처럼 경찰에 맞아 죽은 열사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대추리에 투입된 군대는 또 어땠는가.

그리고 조중동 어느 신문에선가 이야기한 것처럼, 노무현 때에도 시청광장 봉쇄는 있었고,

횟수는 (뭐 이명박 정부가 아직 2년이 안 됐으니까 단순 비교를 할 순 없지만) 더 많았다.

 

그렇지만 그 때 느낀 감정은, 지금 이명박 정부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과는 좀 다르다.

전자의 경우 (혹시나 하는) 기대와 배신, 분노와 비극 뭐 이런 감정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마치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한, 어이없음과 실소, 엽기 같은 감정이 더 많다.

 

예컨대 유인촌이 그렇다. 한예종 앞에서 1인시위 하는 학부모한테 한 발언은

참으로 엽기적이다. 동영상을 보면 볼수록 정말 막장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한예종 문제에 관해 내가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없지만, 그냥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서,

이념/정치적인 이유로 과를 없앤다는 발상이라든지,

심대한 실책이 아닌 '성과 부족'을 이유로 교수를 징계, 것도 해직/파면한다는 건

참으로 몰상식하다. 더구나 이번 사태의 중심에는 황지우 시인이 있었는데,

그의 사상이나 행적 여부를 떠나서, 어느 칼럼에서 김연수가 말한 것처럼,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인을 잡범 수준으로 만들어 내쫓"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얘들을 보면 정말 막되고 무례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진중권 스토커 드보르잡의 소송 건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막장드라마 보는 느낌으로 이 싸움을 구경하고 있지만

고소의 이유로 드보르잡이 제시한 '불법적 표현'('듣보잡')이라는 단어가

참 어이없으면서 동시에 섬뜩하다. 세상에, '모욕적'인 표현도 아니고, '불법적'인 표현이라니!

 

이런 짓들을 하니, 사람들이 노무현 시대를 그리워하게 되는 거다.

노무현의 나쁜 짓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브루투스, 너마저!' 같은 것이었다면,

이명박과 그 수하들에 대한 반응은, '이거 정말 미친 놈들 아냐!'가 아닐까.

이건 그 말의 이중적 의미에서, 즉 황당하고 섬뜩하다는 의미에서, '엽기적'이다.

"독재자, 살인마, 배신자를 거쳤더니, 이제 '미친놈'이라니!"가 사람들의 심정 아닐까?

 

물론 이런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대개는 부차적인 쟁점이 많다.

이런 쟁점이 더 중요한 사안들을 뒤덮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다.

여튼 이 미친놈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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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12 18:27 2009/06/12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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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어서일까

나이 들었다는 얘기를 하는 건,

특히나 훨씬 더 많이 든 사람들이 들을 게 예상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래도 개인 블로그니까, 그냥 적는다.

 

전에도 약간의 조울증은 있었지만,

서른이 넘고 나니 빈도와 강도가 조금씩 심해지는 것 같다.

아직 그리 많이 먹은 나이는 아니니, 이 나이 들어서 뭐 하나 이룬 게 없다,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지금 진도로는 몇 년 뒤에도 제자리일 것 같다는 두려움이 더 큰 것 같다.

 

스무 살 무렵부터 자기 일을 시작한 사람 얘기는 아예 차치하고,

대학 마치고 군대 다녀와서 막바로 사회에 나갔다 치면,

내 나이엔 대략 7~8년차 정도가 된다. 이건 좀 빠르다고 쳐도,

취직한 내 동기들이 5년차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다들 뭔가를 이룰 나이는 아직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나이이고,

아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뭔가를 할 위치에 있다 할 것이다.

 

지금쯤이면 20대의 적어도 어느 시점에 시작한 일에서 다소간 결실을 보고,

30대 내내 매진할 일에 적어도 '진입'은 했어야지 싶다.

작년 정도까지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글쎄...

 

때때로 인간은 개별자로 회귀하는 것 같다.

사실 그건 부정적인 건 아니고, 어떤 점에서는 그를 위해서나 그가 속한 집단을 위해서나

좋은 일일 수 있다. 특히 '타락'이나 '관성'에 일침을 가한다는 점에서.

그랬을 때 문제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다른 방식의 조직에 속하는 데,

또는 기존의 삶과 조직에 다른 방식으로 속하는 데,

이 개별자가, 적어도 잠재적이라도, 다소간의 능력, 또는 차라리, '기술'

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내가 우울한 진짜 이유는, 아마 그렇지 못해서일 것이다.

 

어쩌면 지금은 기회일 수도 있다.

나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게을렀다기보다는,

다른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여,

다양한 상황에 능동적으로 반작용할 수 있는 '변용력'을 갖추지 못한 데 있고,

그렇다면 문제는 나태보다는 '여유부족' 쪽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대의 터널은 어두웠다.

그런데 어쩌면 20대는 너무나 밝아서 눈이 껌껌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불이 가장 활활 타오를 때라서 그 빛에 눈이 머는 것이다.

[그러니] 터널 안이 어둡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상은의 이 말을 들은 게 2004년이었다.

몇 년 전에 이 말을 들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다들 30대가 되면 슬프다고 말했지만, 20대의 나는 이 시간만 지나고 나면,

뭔가가 열릴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차, 20대를 허송했으니까.

또는, 20대에 내가 하던 그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 일을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분명한 것이지만, 내 일만의 책임은 아니다. 문제는 좀더 복잡하며, 나 자신의 책임이 실은 크다.

나 이외의 다른 것을 원망하는 걸로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덜 우울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문제는, 나의 주된 욕망이 아직 '학생'이나 '도제' 쪽에 있는데,

나의 나이는 내게 좀 더 책임 있는 역할을 요구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명쾌한 해결책은, 좀 더 책임 있게 살거나, '도제'로서의 욕망에 좀 더 충실하거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리라. 전자를 위해서는 내 나이를 좀 더 기억해야 할 것이고,

후자를 위해서는 내 나이를 좀 더 잊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사태를 정식화한다고 할 때, 여기서의 문제는

내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도제의 욕망을 떠올릴 때, 나는 내가 무책임하게 사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에 시달리고,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욕망을 떠올릴 때, 나는 과거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 가지 배움에 대한 욕망을 누르거나 또는 일을 이유로 그것들을 배반하며 살다가, 언젠가

더 강한 욕망을 더 늙어서 만나서, 이제는 어찌 해볼 도리도 없는 우울증

에 빠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사실 정답은 아주 간단하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면 된다.

이제껏 이런 문제에 부딪쳤을 때 나는 이렇게 결론짓곤 했다.

하지만 30대의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나는 별다른 제약과 규율 없이,

나의 여러 욕망들을 위해 열심히 살 만큼 성실하고 활력 있는 위인이 못 된다.

나에게는 영웅적인 자제력 따위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욕망이 '배움'이라기보다는 '도제'인 것은,

나에겐 내 욕망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자극하며 때때로는 강제하기까지 하는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치에 진입하려면, 시간(책임있게 살려면 이런 곳에 허비해서는 안 되는!)이 필요하고,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

 

지금껏 대개는 허비하고 말았지만, 전보다 시간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여전히 나이에 걸맞는 책임에 대한 욕망이 있고, 그것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강해지지만,

그것과 부분적으로는 겹치고, 부분적으로는 타협가능한 것을 중심으로

시너지가 가능하거나 적어도 눈감아줄 만한 욕망을 도모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이 때 아주 구차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돈이다.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가난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내 우울함은 조금 덜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더 늦기 전에 결심을 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적어도 일주일간은 그런 결심의 시간조차 없긴 하지만.

이번에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 삼아,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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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6/04 17:32 2009/06/04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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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어떤 오역에 관한 지적

2005년 쯤이었나,

더듬더듬 불어를 읽기 시작하고, 영어를 조금 읽을 수 있게 됐을 때였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리바르의 '인권의 정치란 무엇인가'의 영역본을 보았는데,

그러다 국역본 관련 대목에서 꽤 중요한 오역을 발견했다.

공부 삼아서 그 오역 전후의 문장이 왜 그렇게 나오게 되었을까 에 관해서

개인 미니홈피에 적어 두었다가

아는 사람들이 그 글로 세미나를 한다고 해서

참고하라고 내 글을 그 클럽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다.

 

그 글을 번역하신 분이

내가 그의 번역이 오역 투성이라고 비난했다고 말했다는데

그 얘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단 하나 있다면 위의 사례인데,

글쎄, 내가 그 글을 다시 읽어 보았지만 별로 비난은 아니었고,

또 그를 욕보이려고 여기저기 퍼뜨린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오역에 관해서 지적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폭력/비폭력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따라서 큰 정치적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이런 논변에 관한 오역 지적은, 다시 생각해 봐도,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대단한 권위자도 실수를 할 수 있고

따라서, 적어도 중요한 대목의 경우에는, 원문을 직접 읽고 내 머리로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는 교훈을 남긴 경험이었다. 뭐 이런 태도를 '이론주의'라고 부른다거나,

'활동가의 본분'을 넘어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평가의 타당성 여부에 관해서는 보는 이들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얘기가 나온 김에, 그 때 내가 쓴 글을 다시 옮겨 놓는다.

 

----------------------

 

안녕하세요.
 
<인권의 정치란 무엇인가>를 하신다니,
제가 전에 이 글 마지막(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각주 오역에 관해 써둔 게 생각나네요.
이거 세미나할 땐 항상 이 문구가 문제가 됐지만 대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끝났었는데
혹시 그곳에서도 그러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적어봅니다.
별로 다듬어지지 않은 글이니, 그냥 적어둔 영문판을 참고하시는 용도로 사용하시면 될 것 같아요.
참고로 http://www.generation-online.org/p/fpbalibar1.htm
에 가시면 영문판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문제가 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별도로 검토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제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들 전체를 내포한다. 그것은 도덕주의, 법률주의의 무덤이며 또한 그것들의 추상적 전도이다. 부의 불비례성이 적수를 절멸시킬 수 있는 능력의 불비례성과 전에 없이 짝을 이루는 세계에서, 그 주된 경계(남-북이라고 불리우는 것, 또는 달리 불리우기도 하는 것 ― 왜냐하면 '남'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가 인류를 폭력을 항상적으로 감수하는 인류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는 인류라는 두 개의 인류로 분리시키는 경향을 갖는 세계에서, 인권의 정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이제 그것은 그 유명한 귀절에서처럼 폭력(대중의, 피지배자의)은 "새로운 사회를 배고 있는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라는 관념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영역본 관련 구절은 다음과 같다:
"I will have to come back to this question: in a sense it contains, in its turn, the totality of the aporias of a politics of the rights of man. It is the tomb of moralism and legalism as well as of their abstract reversals. In a world in which the disproportion of wealth goes hand in hand, now more than ever, with that of the capability of annihilating the adversary, a world in which the principal frontier (whether it is called North/South or otherwise, for the "South" is everywhere) tends to separate two humanities, one which is constantly subjected to violence and one which is constantly girding itself against it, a politics of the rights of man cannot be "nonviolent" in principle. Nor however can it fail to go beyond the idea that, according to the famous saying, (the) violence (of the masses, of the oppressed) is "the midwife of every old society which is pregnant with a new one" (Capital, vol. I, 916)..."
 
(영역본이 맞다고 가정할 때)
국역본은 세 부분을 오역함으로써
위 문구 전체를 수수께끼로 만든다.
 
1. 영역본에 따르면 the tomb에 걸리는 것은
'(of) moralism and legalism'일 뿐만 아니라
'(as well as of) their abstract reversals'이다.
반면 국역본은 이 대목을
"도덕주의, 법률주의의 무덤이며 또한 그것들의 추상적 전도이다"라고 번역함으로써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가 도덕주의, 법률주의의 추상적 전도라는 의미를 낳는다. 하지만 원문은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가 도덕주의, 법률주의 뿐만 아니라
그 추상적 전도[곧 '대항폭력주의' - 이번에 추가]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이 첫 문장의 구조는 이후 논변 전반의 구조를 집약하는 것인데
첫 문장을 오역함으로써 이후 논변도 오역의 위험을 안게 된다.
아래서 이를 살펴볼 것이다.
 
2. 가장 결정적인 오역은 역시
"인권의 정치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밖에 없다"
는 대목이다. 영역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a politics of the rights of man cannot be "nonviolent" in principle",
즉 "원칙적으로 '비폭력'일 수 없다"이다. 불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une politique des droits de l'homme ne peut être "nonviolent" par principe",
즉 영역본과 같다.
이런 오역은 사후적으로 앞 문구에 대한 해석을 규정한다.
국역본은 부의 불비례성이 절멸능력의 불비례성
을 동반하는 한에서 현재의 대항폭력은 어떻게 하더라도
기존 폭력과 겨룰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전술적' 가치가 없고
오히려 저 비대칭적인 폭력 사용의 빌미만을 제공함으로써
의도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거둘 뿐이라는 뉘앙스를 준다.
(그리고 여기에 분명 얼마간의 진실이 있기 때문에
오역도 가능했고 그 수용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본래 번역은
폭력의 과잉이 계급투쟁을 점점더 깊이 규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압도함으로써
'인권의 정치'가 벌어지는 지형을 바꿔놓는다는 뉘앙스이며
이는 결국 '도덕주의, 법률주의'적 방식으로 대항폭력을 불법화
하려는 부르주아의 시도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스피노자적인 노선,
즉 대중들의 폭력을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국가 또는 제도와 연결시켜 사고하려는 노선과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앞 문장에서 제시한 테제('무덤')를
현 정세와 연결시켜 전개시키는 것이다.
반면 국역본은 발리바르의 이전/이후 사고와 대립될 뿐만 아니라
도덕주의, 법률주의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사실 국역본의 뉘앙스야말로
대항폭력을 비판하고 비폭력을 주장하는 이들이 매양 말하는
'현실적 근거'가 아니던가?)
 
3. 국역본은 이 문장 다음을 '이 때문에'라는 접속사로 잇는다.
반면 영역본은 'Nor however'라고 하면서 역접을 사용한다.
원문은 여기서 'cependant'을 사용하는데
이는 '그렇지만'이란 뜻으로 '이 때문에'의 의미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는 그러므로 우선 자구적인 오역이다.
(그러니까 'however'를 'so'라고 오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눈에 뻔히 보이는 오역이 생겨났을까?
그건 물론 앞 문장을 '비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라고 번역했고,
뒷 문장이 나이브한 '대항폭력'론을 비판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반면 원래 문단의 논변 구조는
1)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는 도덕주의/대항폭력론 모두의 무덤
2) 도덕주의 비판
3) 나이브한 대항폭력론 비판(이 문장 이하에서 본격화될)
이며, 그런 한에서 2)와 3)이 'cependant'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좀 과장해서 말하면
전반부 문장을 오역한 것이 'cependant'의 오역이라는
'사후복수'로 나타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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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아포리아

2009/02/10 17:37 2009/02/10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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