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 김보화 편저,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서해문집 

강남역 여성혐오살해사건 이후 만들어진 페미니스트 그룹/단체/조직의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해일이 오는데 조개를 줍고 있다'는 수사에서 착상한 제목이 아닐까. 책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개나 줍고 있다고요? 우리가 해일인데요? 조개나 줍고 있었던 건, 젠더 인식이라고는 없는 정치개혁 같은 과제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던/생각하는 당신 아닌가요? 세상이 지금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보고 있나요?

촛불 전후의 한국사회는 여성주의를 통하지 않고서는 진단할 수 없다. 그건 여성주의가 유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주의의 가능성을 변혁의 실천으로 전환시킨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책은 스스로 해일이 되어, 이제는 해일이 덮친 땅의 지형을 변화시키는 활동가가 되어 살고 있는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어떤 작은 변화나 떨림이 만나 거대한 해일이 되었는가. 페미니스트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오는 벅찬 순간들의 이면에 어떤 고민과 속앓이가 있(었)는가. 지금 서있는 자리는 얼마나 허약하며 그래서 다시 어떻게 강해지고 있는가. 긴 시간이 흘러 되돌아보면 다르게 기억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나눌 수 있는 감동에 흠뻑 젖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많은 인터뷰이들이 앞선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이 싸운 성과 위에 자신들이 서 있다는 얘기를 했지만, 내게는 전혀 다른 싸움을 시작한 것처럼 느껴지는 대목이 더 많았다. 백래시로 더 힘든 조건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말 그대로 다른 싸움. 대부분의 이야기는 온라인 세계에서 펼쳐지는데 그곳은 오프라인 세계를 그대로 옮겨간 곳이 아니라 새로운 폭력과 차별을 생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실천이 세계의 지형을 어떻게 바꿀지, 나로서는 아직 충분히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인가 책을 읽으며 내가 든 느낌은 경외감이었다. 책이 가장 간절하게 전하는 메시지가 연대였지만 그럼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대단하다는 느낌을 덮을 수는 없었다. 

3.1운동의 백 년을 기념하는 날이라면 지금 누가 독립을 위해 싸우는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선택한 사람들. 내게는 여성, 난민, HIV/AIDS감염인을 살아내는 어떤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런 사람들은 언제나 먼저 싸운 사람들을 발견해내고 기억하고 역사로 만들며 자신 또한 역사가 된다. 역사를 되새긴다는 건 우리가 해방의 꿈을 꿀 수 있도록 지금 누가 싸우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이런 날 읽으면 더욱 좋을 책.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 조직의 구성과 운영에 대한 고민도 흥미롭고 반가웠다. 인권운동사랑방이 고집스럽게 유지하는 모습과 문제의식이 매우 닮았기 때문. 대표나 직위 없는 수평적 관계의 활동가 조직. 유난스럽거나 이상적이거나 어쨌든 이례적인 것으로 여겨지던 구조가 오히려 일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분위기. 사실 대표나 직위 없음 자체는 수평성을 보증하기보다 수평성을 독촉하는 것에 가깝다. 인터뷰에 응한 그룹들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수평성이 흐르게 할 조직의 모습이 훨씬 다양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갖게 되고 그런 도전과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바람도 생기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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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1 15:23 2019/03/0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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