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놀러온 친구에게 밥을 대접했다. 친구가 설거지를 자청했는데, 그만 접시를 깨뜨렸다. 꽤나 아끼던 접시였다. 아무리 그래도. “아잉, 좀 주의하지 그랬어!”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이것이었다. 손을 다치지 않았냐 묻거나 접시는 상관없다는 말을 앞질러 그의 부주의를 탓했다. 나는 내가 무서웠다.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가 깨지며 손을 베는 원인은, 따져보면 백 가지도 넘을 것이다. 손을 주로 쓰는 일을 하느라 힘을 주기 어려운 상태였을 수 있다. 고무장갑이 닳았거나 손에 잘 맞지 않아 접시를 효과적으로 쥘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 접시를 쌓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다 괜찮았지만 직장에서 당한 괴롭힘 때문에 도저히 설거지에 집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더 많은 이유를 찾아낼수록 우리는 조금 더 안전할 수 있다.
이유 찾기를 멈추게 하는 말이 ‘노동자의 과실 또는 부주의’다. 2016년 구의역에서 한 노동자가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회사는 2인 1조로 다니라는 수칙을 어긴 그의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는 다치고 병들고 죽게 될 때서야 사물에서 인간이 된다. 일하는 동안 그는 시키는 대로 쫓기는 대로 움직여야 했다. 그의 몸은 그의 것이 아니다가, 죽음으로써 사물이 아닌 인격이 된다. “사고는 유감입니다. 그런데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어요.” “평소에 좀 덜렁댔어요.” “보호장비보다 자기를 믿더라고요.” … 이런 말들을 물리치고 “너의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모르는 그대로다. 지극히 드물다.
세상은 습관처럼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유가족은 항변할 말을 찾기가 어렵다. 산재사망률 세계 1위를 다투는 나라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실과 부주의로 목숨을 잃었겠는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우리가 가까스로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누군가 싸움에 나선 덕분이다. 결국 서울교통공사는 다음과 같이 공표했다. “본 사고는 을의 인력운영과 관리시스템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인에게는 사고의 책임이 전혀 없음(0.1%도 없음)을 확인한다.” 0.1%도 없다. 긴 싸움의 끝에 다다른 자리가 여기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이제 이유 찾기의 방향을 아예 돌리자는 제안이다. 노동자가 부주의하지 않았음을 겨우 입증하고 나면, 관리자가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이유라며 사건은 종결되기 일쑤였다. 건설 현장에서 사고가 났는데 시공업체는 잘못이 없고, 석탄을 나르다 사망했는데 발전소는 잘못이 없고, 배를 만들다가 죽었는데 중공업 법인은 잘못이 없다며, 변화는 멈췄고 중대재해는 반복됐다. 기업의 최고책임자, 원청의 책임자, 실질적인 사용자들을 책임의 자리에 불러와 앉혀야 한다.
이들은 산업안전보건법에 구체적인 의무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책임을 모면해왔고 재해를 막을 방법을 찾지 않았다. 이들에게 유해나 위험을 방지할 포괄적인 의무를 두고 입을 열게 하자는 것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다. 이것은 기업에 큰 선물이기도 하다. 방법을 같이 찾아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사회가 나서서 짚어주고 사법부가 같이 따져줄 텐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발을 빼고 있다. 기업이 걱정이란다. 내가 듣기엔, 방법을 찾는 일에서 자신은 빠지겠다는 말이다.
안색이 안 좋은데 잠시 쉬는 게 어때, 공사 기간보다 네 목숨이 중요하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저기 쌓인 것들을 먼저 치워야 일하다가 안 다칠 거야, 이거 위험한 일이니 채비를 단단히 하고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멈추고 연락해… 사람이라면 들었어야 할 말들. 이런 말들에 연습이 필요한 게 우리 사회다. 그리고 가장 많이 연습해야 할 이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불러내려는 이들이다. 처벌보다도, 우리는 서로 살리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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