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을 기억하는 말들은 정말 전태일을 기억하고 있을까? 미끄러지는 말들에 머뭇거릴 때가 있다.
“우리가 분주히 일을 하면서도 그 안에서 스스로 ‘사람’임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덕분”이라고 국민의힘이 말했다. 더불어민주당도 약속했다. “법의 사각지대로 노동 밖에 놓인, 가려진 노동까지 더 뜨겁게 끌어안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훈장을 추서했다. “노동존중사회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고, 발걸음은 더디지만, 우리의 의지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전태일의 후예를 자처하는 걸 말릴 수는 없다.
제 몸을 불살라 노동 현실을 일깨운 사람. 많은 후예들이 분신과 각성의 서사를 이어갈 때, 전태일의 기억은 노동자의 자리에 있지 않다. 그러니 변함 없는 의지로 끌어안아도, 끌어안겨야 겨우 사회에 발 딛을 수 있는 노동자의 자리에 변함이 없다. 사회에 ‘노동자’의 자리를 만들지 않아 그 이름 얻기도 어려우니 노동존중이 가까울 리 없다.
분신을 결의와 희생으로 설명하는 일은 언제나 곤혹스럽다. 억울하고 분한데, 부정의를 고발할 방법이 없어, 함께 행동하자고 제안할 길이 없어, 분신을 선택해야 하는 시간은, 그때도 지금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나도 감히 ‘숭고한 희생’의 서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더욱 기억되어야 할 것이 있다.
재단사들의 모임 ‘바보회’. 그들은 일깨우려 하기 전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함께 바꾸기로 했다. 노동자들의 결사 또는 결사한 노동자들. 전태일을 따르는 일은 깨우침을 고백하기보다 서로 깨치는 결사를 이루고 촉진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를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 전태일을 기억하기란
주간미류
2020/11/15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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