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워져야겠다

"근데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펑펑 울거나 씩씩거리며 화낼 법도 한 일인데 그냥 무덤덤한 거야. 조금 멍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고 '그렇구나' 하는 목소리가 그냥 어색한 표정이 되는 거지. 그때서야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내가 요즘 그런 상태인 것 같다는. 그런 거 있잖아? 무감동? 무감정? 뭐, 별로 반응이 없는 그런 거. 조금이라도 생각하기 시작하거나 느끼기 시작하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뻣뻣해지는 거. 이를테면, 예전에는 길을 가다가 아이들이 노는 걸 보거나 지하철에 붙어있는 광고를 봐도 막 이런저런 생각들이 번져나가고 글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그랬는데 요즘은 안 그런 거야. 나 혼자 정지된 시간에 쌓여서 걸어가는 것 같은 거." ...



한 친구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우리는 그게 '쿨한 여자 컴플렉스'의 증상이지 않을까 하면서 웃었다. 물론 그때는 오래된 이야기라 이미 그런 상태를 벗어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어서 웃을 수 있었다. 이 블로그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도움이 되었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글들을 쓰면서 자극을 재촉해야겠다는 욕심에 블로그를 시작한 것이다.

 

한 두 달 동안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물론 가끔씩 책을 정리한 글을 올리거나 써야 할 글을 쓰고 나서 옮기기도 했고 굳이 여기 올리지 않더라도 이래저래 쓴 글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쓰지 않은 것에 가깝다. 생각하지 않았고 느끼지 않았으니.

 

딱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작은 것에서 시작된 힘겨움이 자기증식하는 단계로 접어드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끌려다녔던 것이다.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내리면서도 내심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름대로 충격적인 또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나서의 내 반응이, 예전의 그런 상태였음을 일러주었다. 충격적이지도 슬프지도 않았던 내 반응이.

 

굳이 돌아가보면 전범민중재판이 끝날 때쯤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것 같다. 재판이 끝나고 이어지는 계획들을 함께 하기 힘든 상황이 되자 전쟁을 생각하고 평화를 고민하는 것이 힘겨워졌고 '당분간 생각하지 말자'고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 기억에서 평화를 길어올려야 한다고 말해왔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사랑하던 이를 사랑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의 그 느낌처럼.

 

힘겨움이 자기증식하는 단계로까지 갔던 것은 분명 다른 이유이기는 하다. 아니, 다른 이유일 것이다. 아직도 풀어야 할 고민이 겹겹이 쌓여있고 그 중 몇 가지는 좀더 오래동안 지고 갈 수밖에 없는 고민들이니 말이다. 다만 이제서야 분명해진 것은 내가 끌려다니고 있다는 것, 이 증식의 고리를 끊을 용기가 내게 부족했다는 것이다.

 

조금만 가벼워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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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4 20:28 2005/03/14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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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난 요즘

    2005/03/15 00:52

    * 이 글은 미류님의 [가벼워져야겠다] 에 관련된 글입니다. 내가 걱정된다. 생활은 큰 변화가 없는데 갑자기 걱정을 하게 되고 안절부절 못하게 된 건 바로 어제부터이다. '안절부절'이라는 단

  2. 이 곳에 내려와서

    2005/03/23 00:35

    오산이주노동자센터에 내려와서 무엇하나 속시원이 한 것이 없다. 소장님의 경우 바닥을 보지 못하고는 일을 할 수 없다는 말... 맞는 말일 수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현실은 그렇지 않다.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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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anjang_gongjang 2005/03/14 20:45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도 그런 좌충우돌의 시기를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내가 고민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전 누구를 사랑하기전 나를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게 그 긴 터널을 계속 방황하면서 조금은 터득한 생각입니다.
    내 길이 어디가 끝인질 모르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는 건 나를 믿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뭐 저의 경험입니다. 그냥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게 행복함이 아닐까... 부족하지만 지금 자리에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저의 불안은 과연 이 길이 지속될까 입니다.

  2. 뎡야 2005/03/15 04:0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암튼 미류님... 왜 이렇게 좋은 사람인 건지.
    미류님때문에 블로그에 나의 고통같은 거 못 쓰겠어요. 챙피해서=ㅅ=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 같아요. 이런 글도 쓰셨으니 샤샤샥 돌아오세요>_<

  3. 미류 2005/03/15 11:0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간장, 맞아요. 사랑하던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을 때란, 결국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때인 것 같아요. 길이 끊어지면 길을 만들면서 가면 되죠. 쭈~욱 행복하세요. ^^
    뎡야, 부끄럽쓰~ 샤샤샥~ -_-;;

  4. kanjang_gongjang 2005/03/15 13:1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 길을 만들면 되는 것이죠. 참 좋은 말인것 같아요. 길을 찾는 사람들이 한계를 벗어난 듯한 느낌을 받아 흐뭇한 미소 머금고 갑니다.

  5. 붉은사랑 2005/03/15 16:2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따듯한 바람을 맞으러 떠나봐요. 조금 나아질 거야...아마 아주 조금은..

  6. 미류 2005/03/16 11:1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간장, 또 길에서 만납시당~ ^^
    붉은사랑, 고마워. 여기서도 따뜻한 바람이 곧 불어올 지도...

  7. 슈아 2005/03/16 14:3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비슷한 경험일까...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느낌....저도 무지 힘들었는데...근데 그게 참 놀라워요. 다들 그런 경험들을 할터인데 어찌 다들 그리 잘 살아갈까? 궁금...

  8. 붉은사랑 2005/03/16 16:5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슈아// 가끔 슬픔이 즐거움처럼 느껴질때가 있어요.

  9. 미류 2005/03/16 17:1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슈아, 모두들 제각각의 사랑하는 법을 가지고 있는 거겠죠? 슈아의 사랑법도 궁금 ^^
    붉은사랑, 한 수 배워야겠구려. ㅎㅎ

  10. jaya 2005/03/16 17:3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슬슬 약 배달하러 가야겠군...

  11. 슈아 2005/03/17 12:02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붉은사랑//그러니까 그게 궁금하단 거야. 난 사실 슬픔이 기쁨으로 느껴지는 상황을 보면 저 사람은...주로 선배였지...어떻게 계속 할 수 있을까 였거든..여전히 궁금해..

  12. 미류 2005/03/17 16:5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자야, You make me a smile~ ^^

    슈아, 우리 붉은 사랑이랑 언제 담배 한 대 피러 가죠? ㅋㅋ (슈아, 담배를 안 피우나요? 갑자기 헷갈린당 ㅡ.ㅡ;)

  13. 슈아 2005/03/20 00: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저 담배 안피고 있어요. 올해 부터 스탑하고 선언했는데요. 가끔 무지 땡기면 피워요. 근데요. 아무래도 이젠 끊을 때가 된 거 같아요. 가끔 피우면 너무 냄새가 싫어요. 오호....그래도 기분 날때는 가끔 피우니...아마...그러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시작하면 한대 피우고 싶지 않나 싶어요. 오호호...정말 만나서 수다 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