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문태준의 시집 <가재미>를 읽었다.

"평면적으로 솟"는 넝쿨과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는 전나무 숲도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인, "빈집의 약속" 사이로 오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단정했다. 매미의 괄괄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무도 기대어 울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가 고마웠고 "나무는 이렇게 한번 크게 울고 또 한 해 입을 다물고 산다"고 말하는 그가 솔직해서 좋았다. 어항처럼 번지는 소국 향기를 물고 들어오는 바람물고기와 "물빛을 가진 짐승이 꼬리를 물고 구부려 오래 누워 있"는 저수지를 만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내내 맴도는 한 단어는 '무릎'이다. "뭘 담아도 슬픈 무게로 있"는 자루를 보며 "아버지 무러워요 무러워요"라고 말한 때문일까. 무릎은 바깥으로 꺾여있어 들여맞기보다는 내치기에 적당한 모양인 것만 같은데. 무러운 것과 무릎이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무릎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물의 몸"에도 "뼈가 없"으나 "무릎은 있"다고 한다. 물렁물렁, 미끌미끌, 여린 볕처럼, 물비늘처럼...

 

"선잠 들라고 내"주어 본 적 없는 나의 무릎과, 내 마음을 뉘고 싶은 누군가의 무릎이, "텅, 텅, 텅 헐겁게 운다."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문태준, <가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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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8 12:03 2006/08/1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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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류 2006/08/29 11:1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문태준이 시를 쓰면서 무릎을 잃은/얻은 덕분에 나는 ...

    시를 쓴다는 건, 읽는다는 건 어떤 것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던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