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환아, 우리 만난 지도 벌써 1년이구나. 네가 보내준 비디오테잎은 잘 봤단다. 그동안 네가 한번도 말한 적 없었던 5년의 시간들, 슬쩍 눙치며 말을 돌리곤 했던 네가 서운할 때도 많았는데... 고마워.


전에 같이 만난 적 있지? 인권운동사랑방 친구들 말야. 네가 없는 자리에서 네 얘기를 하려니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빈곤이 우리 삶에 깊숙이, 그러나 잘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있다는 데에 많은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라.

 
네가 소년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렇지 않을까.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네 아버지와 적당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던 네 할머니, 그리고 가족에 의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한국사회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너. 네가 돈을 훔치려고 했던 것을 덮어주려는 건 아냐. 삶의 우연이라고 여겨지는 사건들 속에서도 빈곤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지.


네가 소년원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고민들을 하고 조금더 자랐다고 느낀다니 참 다행스러워. 사실, 소년원이나 교도소에 갇힌 많은 사람들이 갇혀있는 동안 많은 기회와 자유를 제한당하는 때문에 나와서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 네가 말하기 힘들었던 것처럼 여전한 차별과 편견의 시선들이 ‘전과자’들을 괴롭히기도 하구. 그래서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지.


친구들은 네가 할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인왕전,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권투경기에 도전하는 너를 보면서도 빈곤을 이야기했어. 워낙 휴지조각만도 못한 건강보험제도가 사람들이 막상 아플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급하게 수술은 마쳤다고 하지만 혼자 살아가야 할 할머니에게 재활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었잖아. 저소득층에게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충분히 보장해줄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면 너는 권투경기에 도전하는 대신 공부를 하거나 다른 기술을 익힐 수도 있었겠지.


물론 권투가 다른 것에 비해 가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누구에게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것이겠지. 할머니가 쓰러지시지 않았더라도 넌 권투를 선택했을 지도 몰라. 그리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을 테지. 병원비를 마련하는 것보다 너 스스로를 다지는 것이 소중했던 것이니까. 다만, 네가 권투를 계속하지 않는 지금, 그때의 시간들이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 친구들도 그런 맘이었을 것 같아.


나는 무엇보다도 네가 한창 이런저런 일들을 꿈꿔볼 수 있는 시기에 소년원에 들어가야 했고 그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좁은 기회에 갇혔다는 사실이 아쉬워. 또래의 아이들이 그림을 배우거나 춤을 배우거나 자동차 정비기술을 익히면서 미래를 설계할 때 너에게는 네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 그게 빈곤인 것 같아.


누군가의 삶을 한 단어로 설명하는 건 주제넘은 일일 꺼야. 네 삶 역시 빈곤이라는 단어로만 설명될 수 없겠지. 하지만 빈곤이라는 단어를 빼놓고 너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해보여. 우리 만나면 먹고 싶은 거 참기도 하고 놀이공원 앞에서 발을 돌리기도 하고 시사회 초대권 열심히 모아서 영화를 보러다니는 게 조금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늘 즐거웠잖아. 그리고 앞으로도 너와 함께 시원한 저녁바람 맞으며 한강을 따라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게 늘 설레는 행복일 꺼야.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기회들을 지금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조건이나 처지와 상관없이 삶에 기본적인 권리들이 보장되고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 그리고 정말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싶어. 네가 함께있을 꺼라고 믿으니까. 밥 잘 챙겨먹고 건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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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에 대해 인터넷을 통해 이야기나눌 수 있는 홈페이지를 준비하면서 쓴 글이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매개로 빈곤의 다양한 모습을 돌아보고 인권의 시선으로 빈곤을 어떻게 보아야 할 지를 고민해보기 위한 기획이다. 내가 맡은 것은 <주먹의 운다>의 상환(류승범)이었다. 애인이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애인이라면 이런 편지를 쓰지 않았겠다. 어렵다. 빈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번주에 찾아가기로 한 인터뷰도 묵지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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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9 17:45 2006/08/2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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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철 2006/08/29 20:2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주먹이 운다.>를 제가 있던 교도소에서 찍었잖아요. 권투부 규율이 세서 많이들 힘들어했었는데... 글구 편지는 사회단체 근무하는 이모가 쓴 것 같아요. ^^

  2. 미류 2006/08/30 21:2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나두 영화보면서 네 생각했다. 그들 만나느라 힘들었겠다는 생각도 새삼 들었구... 이모가 쓴 것 같다는 네 말이 정말 와닿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