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돌리면서

일요일 영화제가 끝나고 한숨 돌렸다 싶으니 벌써 앙코르 상영회다. 이번에는 나도 영화를 챙겨서 봐야겠다. 국내작들 중 처음 들어온 편집본과 다른 것이 꽤 있다고 해서 그것도 챙겨 봐야겠다. 해외작 중에는 버마VJ와 또다른행성, 브루크만의 여성노동자들을 꼭 챙겨보려고 표시해뒀다. 현장에서 어찌될런지는 모르겠다.

 

어쩌다가 폐막식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갑작스런 제안이 부담스러워 조금 피하고 싶었다. 기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우리는 쓰다 버리는 일회용 소모품이 아니다! 를 보고 나니 왠지 공연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마음이 흔들렸다. 사무실 들어가서 이를 닦고 나왔다.

막상 하기로 했지만 이름하나못짓고가 할 수 있는 곡은, 언제나 그렇듯, 한 곡 뿐이다. 우리는 간다. 한 곡 더 찾아보자고 이전에 공연했던 곡들을 떠올려봤지만 마땅한 곡이 없어 하나만 할까 하던 중 님을 위한 행진곡을 누군가 제안했다. 재영 또는 일숙이었는데. 그거, 하고 싶었다. 막막하긴 했지만, 재영이 기타를 먼저 치고, 멍구가 젬베로 리듬을 잡아주니 어떻게 부르면 좋겠는지 조금 감이 왔다. 두 번 맞춰보고 나니 폐막식이 코 앞이었다. 공연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에 호흡을 맞춰가는 느낌이 참 좋았다. 밴드라는 게 그런 거겠지? 같이 못한 멤버들 살짜쿵 아쉽.

 

폐막식 무대에 올라가게 돼서 얘기도 몇 줄 하게 됐다. 공연도 겨우 준비했으니 얘기는 준비도 안됐는데, 사실 대충 적당히 얘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두 곡 사이에 모두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언제나 있어야 할 곳에 있는 사람들이 되자는 얘기를 하는데, 준비가 안된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인권영화제를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겉으론 살살 웃었지만 속으론 엄청 후달렸다.

인권영화제는 인권운동사랑방이 주최하는 것이긴 하지만 한 단체의 행사가 아니다. 그건 인권영화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역사도 그렇고 올해 인권영화제가 개최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렇다. 그런데 내가 어느 순간 인권영화제를 사랑방이 준비한 행사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발언을 하는데 내가 밴드의 보컬이기보다는, 인권영화제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이기보다는,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라는 점에 가장 붙들려 있었던 것.

올해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워낙 준비해온 사람들이 안으로 단단하게 뭉치는 것이 중요하기도 했지만 그러는 사이에 인권영화제를 세상에 내어놓는 데에는 소홀했던 것 아닌가 싶었다. 앙코르상영회까지 끝나고 나면 차분히 잘 생각해봐야겠다.

 

짐 정리하고 마무리하면서 살짜쿵 신경이 곤두섰다. 넉넉하게, 하던 대로, 유쾌하게 해도 되는 일들을, 신경질적으로 한 듯. 그때 옆에서 불편했던 모두에게 미안미안. 뒷풀이 자리 가기 전에 꽤 다스렸는데 다 가라앉지는 않아, 눈물을 쏟아내기도 했다. 역시나 옆에서 불편했던 모두에게 미안. 고생한 사람들 한 명 한 명 얘기도 못 나누고 눈물 삼키느라 낑낑댔다. 많이 힘들었던 거지.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 정말 모두들 고생했어.

 

새벽녘부터 자다가 오후에 일어나 순천향병원에 들렀다. 게시판에 쓴 글은 늦게서야 읽었고, 그냥 보고싶겠다, 보고싶다는 마음으로 들렀다. 이런저런 얘기 주고받는데 얼굴이 뭔가 다르다. 조금 힘들어 보이기도 하고, 하기는 수배생활 벌써 4개월째다. 나라면 잘 견딜 수 있을까? 자신없다. 그래도 밖에서 후배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 보면서 반갑기도 했겠지. 가까이에서 나누지 못한 기운이 그래도 흠뻑 전해지기를. 조만간 같이 뒷풀이를 해야지.

 

저녁에는 맛있는 밥 먹었다. 이채 님 블로그에서 작년 봄에 알게 된 밥집,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가게 됐다. 쫌 많이 비싼 밥이었지만, 그냥 맛있게, 맛있게만 먹었다. 가게를 옮겨서인지, 처음 알게 됐을 때 기대된 분위기와는 다르지만 어쨌든 밥은 맛있었다. 밤도 맛있었다.

 

어제 저녁엔 오랜만에 주거권운동네트워크 활동하던 이들 만났다. 오며가며 얼굴은 자주 보지만 진득하니 앉아서 술 마셔본 건 오래다. 얼굴 한 번 보자는 얘기도 몇 번, 차마 얼굴 보자는 얘기를 하기가 무거워서 마음으로만 삭인 적도 몇 번, 그러다가 보게 된 얼굴이 있었다. 쫌 좋아지기는 했더라. 다행이야. 건강해야지. 솔직히 무슨 말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왜 아픈지 알면서, 약도 없는데 그걸 쑤시고 싶지는 않고, 토닥토닥 다독이기에는 나도 그 아픔을 직면할 자신이 없고. 소주 몇 잔 하면서 미친 척 얘기했다. 너 그렇게 살면 안돼. 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아무 말이라도 입 밖으로 쏟아내야지, 안에서 삭히면 병이 되는 것들은 얼른 꺼내줘야지. 눈물이 되어 흐르기 전에 꺼내야지. 부대끼는 마음들 추스리기도 전에 큰 일들이 잇달아 터져 마음 고생 심했을 텐데, 어제서야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는 얘기 들으면서 마음이 짠했다. 그동안 그 고민을 혼자 어떻게 쥐고 있었을까. 혼자가 아니어야 할 텐데. 자주 만나면 좋겠다.

 

어쨌든 요즘. 나는 쫌 좋은 언니들한테 너무 막하는 경향이 있다. 말을 높이지 않는 것은 서로 익숙해져가고 있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말을 하다 보면 너무 '친구처럼(?)' 말이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다. 미묘한 무언가가 있다. 친구가 되는 건 좋은 일이긴 한데, 불편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딱히 권위적이거나 위계를 중요시하거나 선배로서의 대우를 기대한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그냥 문득 당혹스럽거나 불쾌할 수도 있는 거니까. 어쨌든 조금 더 차분히 또는 찬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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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0 09:56 2009/06/1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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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르는돌 2009/06/10 10:1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앙코르 상영회는 무엇인가요? 인권영화제 홈피에도 공지가 없길래... 언제 하는 건지좀 알려주세요~~

  2. schua 2009/06/10 13:1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고생했어. 참 좋은 시간과 자리를 만들어줘서 참 좋았어. 사람들도 참 좋아하는 거 같고.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는 거 너무 좋더라. 그리고 부럽기도 하고. ^^

  3. 紅知 2009/06/10 13:2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요즘 사무실에서 시간 날 때면 베이스 초큼 까딱까딱 거리는데...넘 오래 같이 못해서 미안요...ㅠ.ㅠ;;;; 하고 싶은 노래들 생각해 놓은 것두 있구 그런뎅...이궁...ㅠ.ㅠ

  4. 미류 2009/06/10 18:5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구르는돌// 인권운동사랑방 홈페이지나 영화제 홈피 상영일정 참고하시면 되요. 11일(목)부터 14일(일)까지 성미산 마을극장(망원역 인근)에서 올해 상영작들을 한번씩 더 상영한답니다. 국내작 감독과의 대화도 있어 더욱 좋은 시간이 될 듯해요. ^^

    슈아// 하나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좋았어. 같이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지. 당신도 개근이잖어? ㅋ

    홍지// 얼렁 얘기해조조조~~~ 나는 '조율'하고 싶어서 한동안 연습했는데 ㅋ 조만간 같이 할 기회가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