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을 거부해야겠다

얼마전, 만약 병역거부를 한다면 어떤 사유서를 쓰겠냐는 질문을 마주하고 난감했다. (당시 질문에 포함되어있던 한국의 군사주의나 국가주의,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평화나 생명이 그리 쉬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에도 이런 꾸물거림이 있지는 않았을까. 얼마간 그 질문을 게워내다가, 나도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후배가 너무 미웠던 적이 있다. 십여 년 전인 듯하다. 계속 나를 피하던 후배를 겨우 만났던 날,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먹을 쓸 줄 알았다면 한 방 날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참 다행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때릴 줄 몰랐다. 그게 조금 억울하기도 했지만 곧 세상에는 몰라서 좋은 것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십여 년이 흐른 지금, 나는 한 사람을 때린 적이 있다. 진심을 다해 따귀를 날린 적이 있다. 그래서 이제 안다. 나도 누군가를 때릴 수 있구나.

 

나는 또 모르겠다. 내가 마주한 컴퓨터 모니터 같은 화면을 보여주며 버튼을 눌러야 하는 상황이 될 때, 그 화면에서는 전해지지 않는 단발머리 소녀의 눈웃음을 떠올릴 수 있을지, 허리가 굽은 노인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버튼을 누르지 못할까, 내가? 누군가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일방적인 폭력을 가할 때, 만약 내 손에 칼이 들려 있다면, 칼날의 끝이 상대를 향하도록 움켜쥐는 걸, 못할까?

 

그래서 나는 병역을 거부해야겠다. 폭력이 아닌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우리 모두. 어떤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배운 것들이 누군가를 때리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학교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한 아이의 소식을 듣고도 안타까워 탄식을 하는데 수많은 사고를 필연적으로 낳는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 건 다만 생명의 소중함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여성연쇄살인범의 행적에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이, 연쇄살인범보다 더 연속적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사람에게 ‘군인’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심지어 고마워하는 모순도 다른 방법을 못 찾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이 ‘전쟁’이라며 오히려 빚진 마음을 강요하는 ‘국가’에게, 당신이 가르치려는 것들을 나는 배우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해야겠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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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8 10:08 2011/06/0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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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거리 2011/06/08 11:4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시인 육사의 두가지 이름의 의미
    1.陸士-당면한 투쟁과제에 절대 피하지 않는다.
    2.陸史-史的으로 그 모순을 장기적으로 투쟁해 나간다.
    장거리는 안됩니까?

  2. 42.195KM 2011/06/10 00:01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글은 읽어 볼수록 의미가 새로운 글이군요
    평화의 언어?
    그 책이 그렇게 삶의 중요한 의미를 같습니까?
    인권에 대하여 잘 모르지만 흔한 인권의 말은 많이 들었죠
    특히 인권위가 국가기구로 부터 독립할 것인가,아니면 정권의 부속기구가 될 것인가?그때는 인권운동을 모르는 나도 상당히 관심을 가졌죠
    우리의 사법부의 현실을 볼때 인권위의 독립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이 올 것이라고 믿었죠
    아마 인권운동 하던 분들도 당시 신문을 보면 독립적 인권위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는 심정을 표합디다.
    한분의 책은 옥중서간으로 3권이 나왔죠
    옥중에서 한글을 배우며 깨우쳐 나가는 것이 한글사전을 옆에두고 철저하게 삶의지혜를 찾더군요
    평화의 언어는 이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또다른 관행화 된 말을 바꾸는 어떤 인식이 있겠죠
    좌도우도 아닌 인권운동,가능할까요?

  3. 장거리 2011/06/11 09:4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우리안의 보편성"
    이것을 써보려 했는데
    평화의 지혜가 부족하여 안되겠군요

  4. miru 2011/06/13 07:2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헉..설마 전가요 -0-

  5. 장거리 2011/06/13 20:50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며칠간 서울에 있었죠
    정독도서관에서 책을 좀 봤는데
    전문적으로 학문하는 분들의 글모음의 책이 있었습니다.
    제목이 위와 같았는데 나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고민에는 보편성의 담론이었는데 보편성의 민주주의와 인권등 동아시아 영역까지 확장되는 학문사회의 고민들이었죠

    보편성은 어떻게 보면 동아시아 각국들의 병역제도가 있고 일국의 병역도 상당한 규모이겠죠 그렇다면 이러한 동아시아의 가국들의 정치와 경제등 이것을 하나의 기득권의 체제에서 우리의 병역제도 징병제도 같이 고민되어야 할 겁니다.
    (생략하고요)

    아마도 어떤 단체에서 일한다면 일년의 사업체계에서 자신의 부서의 사업방향과 계획이 있겠죠 보편성이란 바로 현실의 문제이며 학문의 사회와 다른 사회활동의 공간에서 그 책이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다양한 보편성의 문제가 어디에서 논리적으로 보편성의 개념으로 정립되는가?

    따라서 우리는 보편성의 해석이 아니라 실천의 행위에 대한 각 카데고리를 사업적 고민으로 대화를 전개하는 글이될수 있는 거죠
    말하자면 문제인식을 던지고 전개되며 육사처럼 1,2가 될수도 있겠죠

    그런데 체력이 안되요-끝

  6. 임재성 2011/06/19 13:2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우연히 방문했다가, 너무 좋은 글이어서. 제 블로그에 퍼가도 될까요? ^^;

    • 미류 2011/06/20 09:17 고유주소 고치기

      좋게 읽으셨다니 제가 더 고맙지요. 퍼가시는 거야 물론 원하시는 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