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 N에서 여는 여름 강좌 <인권의 재장전> 첫 강의였다. 강사인 정정훈 씨는 인권이 위기에 처하게 된 세 가지 계기를 시큐리티적 지배의 도래, 인권담론의 위기, 인권감성의 쇠퇴로 설명한다. 유연축적체제에서 배제된 자들이 더 이상 인권의 고려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 한국사회에서 변혁운동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난 인권담론이 현대정치철학의 비판까지 받으며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점, '감성의 분할'과 경쟁원리의 내면화에 의해 공감하는 능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세 가지 계기를 통해 인권의 위기를 헤아려볼 수 있게 한 것은 좋았으나 각각에서 더 짚어봐야 할 문제들이 있다. 

 

배제된 자들, 쓰레기, 예외상태, 몫 없는 자 등 현대정치철학에서는 더 이상 체제가 포섭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을 다룬다. 그러나 '배제된 자들의 인권'이 인권의 위기를 설명한다는 말은 동어반복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배제됨의 증거는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다른 요인에 의해 사회로부터 배제된 '후'에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누군가를 배제하는 시스템 안에 이미 '법'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배제된 사람들의 인권과 '인권' 또는 보편적 인권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인권의 보편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다 보면 배제되는 자리가 사라질 것인지, 인권의 어떤 내적 한계가 배제되는 자리를 늘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입장이 마련되어야 인권을 어떻게 재장전해야 하는지도 밝혀지지 않을까. 사실 '인권'은 언제나 배제하는 힘과 포섭하는 힘 사이의 투쟁을 통해 경계를 만들어왔다. 신자유주의 시대, 배제된 자들의 '인권'이 새삼 쟁점이 되고 있다면 그 배경은 무엇인지, 또는 인권이 왜 '기능'하지 못하는지를 더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인권'담론'의 위기에서도 비슷한 고민. 강사는 80년대 이전 한국사회의 운동에서 '인권' 담론이 주류 담론이었던 것처럼 말한다. 과연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시기에 인권이 '운동'에서나 '대중'들에게나 주도적 담론으로 이해되었을까. 오히려 '인권'이 지금처럼 회자되는 것은 90년대 이후, 특히나 김대중 정권의 시작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회복지사들이 내담자를 만나면서 '인권'을 고민하고 교사가 학생들을 만나면서 '인권'을 고민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대중이 스스로를 인권대통령으로 칭하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되는 등의 변화가 오히려 '인권'을 주류화했다. 그러므로 인권'담론'의 위기를 말하기 위해서는, 인권이 대중화되고 제도화되었던 바로 그때 인권이 어떻게 담론화되었는지, 그리고 '인권'에서 무엇이 삭제되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게 지금 인권운동의 과제이기도 할 테고. 

 

인권감성의 쇠퇴도 이와 연관될 것이다. '인권'이라는 말은 더 흔해졌으나 '인권'의 울림은 더 희미해진 이유는 무엇인지. 강사가 지적하듯 희망버스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나 강정 해군기지 문제 등이 모두 '인권'의 문제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권'으로 쉽사리 공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권'이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는 인권 문제에 적절히 개입할 수 있는 언어나 담론을 찾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인 것 아닐까.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경쟁윤리를 내면화시켰다.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는 몫 없는 자들의 경계를 정함으로써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선가 피어났던 공감과 연대의 힘들은, 언제나 있었다. '감성'을 끌어내는 것이 문제라기보다는, 그 '감성'들과 만나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인권을 주제로 강좌가 열린 것만으로도 참 반가웠다. 여이연의 화요강좌도 듣고 싶은데 시간이 맞지 않아 고민 중이다. 주제넘게도, 이런 강좌를 열어주는 것에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그만큼 더 열심히 듣고 동료들과 고민을 나눠야겠다는 다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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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2 11:10 2012/07/12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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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다바리 2012/07/12 20:09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공감...

  2. 앙겔부처 2012/07/18 15:4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변혁운동에 주변부로 밀려난 인권담론이란 말이 재밌네여. 그래도 한때는 변혁운동이 인권운동을 밀어낼 수 있을 만큼 주류 운동이었나보네 ㅋㅋㅋㅋ< 아 변혁운동에 대한 이해가 나랑 다른 건가...;;

    공감능력 부분도 잘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저도 평소에 그렇게 느끼거나 좌절할 때가 많긴한데, 또 반대의 사례는 더 많고. 오히려 아 이렇게 선량한 사람들이 많다니 놀랍다 싶을 때도 많아서. 그 사람들에게도 인권 담론은 매우 멀어보이는데.. 결국 저는 어떤 일이든지 항상 그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잘 못 해서 문제가 아닌가 하는 똑같은 내용없는 결론으로... 이것은 타인의 운동 입평가가 아니고 나의 운동을 보면서 자주 하는 생각이라고 급변명을 덧붙...<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느끼는 건 결국 사람들 탓하는 거로 수렴이 되더라구여. 저 인간들은 인권 감수성도 존내 없어, 하고 불평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하지만 사회가 공감능력을 키우고 이런 것보다는 살아남는 교육을 시키는 것도 사실이구여. 아 쓰다보니까 짜잉나...ㅜㅡ

    • 미류 2012/07/20 10:24 고유주소 고치기

      ㅎㅎ 그러게요. 인권이 비주류였던 것 같긴 한데, 주류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흠흠.... 공감능력도 강의 들으며 비슷한 생각 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 탓하는 것과 현실을 읽는 것 사이의 경계는 뭘까요? 더 어려운 건, 그래서 어떡하지? ㅜ,ㅜ

  3. 돌~ 2012/07/20 12:0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직도 비주류인 것은 맞으나 그간 계속해서 외친 성과로 인권 쪽에서 말하던 부분을 이해하는 쪽이 더 많이 지는것 같기는 하네요. 아직도 갈 긿은 멀겠지만...
    그 주류와 인권이 바꾸어지는 그 날도 오리라 봅니다.

    • 미류 2012/07/20 13:55 고유주소 고치기

      뭔가 계속 변해가겠죠. ^^ 근데 '인권'이랑 '주류'랑은 잘 안 어울리는 말인 것 같네요. 영원한 비주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