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교육가족'이라는 이름을 단 사람들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막아 무산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충격과 공포, 라 이름 붙이고 싶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할 말을 잃었다. 이제 단원고의 재학생이 될 신입생들이 처음 학교에 방문하는 날, 그 신입생들을 협박하는 것이, 그들의 말처럼 재학생을 위한 행동이라고 누가 믿어줄 수 있을까?
단원고 교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누구에게도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서야 질문 하나를 얻었다.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참사로 학생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학교는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희생학생들의 부모가 그 질문을 우리에게 건넨 것이다. 이기적이라거나 너무한다는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함께 답을 찾아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유가족이라고 해서 단일한 답을 가진 것도 아니다. 형의 흔적을 마주치게 될까 두려워 단원고에 지망하지 않은 동생도 있고, 언니의 흔적을 느끼고 싶어 단원고를 지망한 동생도 있다. 이제는 졸업했지만, 생존학생들에게도 교실은 하나의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친구와 함께 했던 추억이 남아있는 공간인 동시에, 친구의 부재를 확인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부대끼는 마음들을 제 몫으로 여기며, 많은 학생들이 '단원고'를 살아냈다. 앞으로도 '단원고'는 그/녀들이 살아내야 할 큰 숙제가 되어버렸다. 이미 졸업한 졸업생들도 취업을 할 때 단원고라고 말하는 게 머뭇거려진다는데...
단원고 교실이 사라진다고 세월호 참사로 단원고의 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원고 교실이 사라진다고 슬픔과 분노와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단원고 교육가족'이라는 당신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 보이지 않으면 잊혀진다 했으니.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잊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이미 '단원고'를 살아온, '단원고'를 살아야 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교실을 어떻게 할지, 학교는 어떻게 기억하고 행동해야 할지, 우리에게는 이제 겨우 질문이 주어졌다. 존치가 정답인지 아직 우리는 모른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사람들이 함께 해답을 찾아나가자는 제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기도교육감이나 '단원고 교육가족'은 질문 자체를 봉쇄하고 있다. '교장의 권한과 책임'이라는 말로, '재학생을 위해서'라는 이데올로기로 질문을 묵살하려고 한다. 지금의 갈등은 입장과 입장이 부딪치는 것이 아니다. 제안을 묵살하는 힘의 과시가 갈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당도한 질문은,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건넨 숙제이기도 하다. 한국사회는 아직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는 경험을 충분히 가져보지 못했다. 근래에 위안부 관련 합의에서도 드러났지만, 재난참사를 기억하는 데에는 더더욱 무능했다. 아이들이 사라져버린 빈 교실이 모두에게 소중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다. 아프지만 아픈만큼 성숙해지기 위해서. 그 숙제를 개개인에게 떠넘기지 말고 함께 나누기 위해서.
단원고 교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누구에게도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서야 질문 하나를 얻었다.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참사로 학생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은 사건을, 학교는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희생학생들의 부모가 그 질문을 우리에게 건넨 것이다. 이기적이라거나 너무한다는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함께 답을 찾아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유가족이라고 해서 단일한 답을 가진 것도 아니다. 형의 흔적을 마주치게 될까 두려워 단원고에 지망하지 않은 동생도 있고, 언니의 흔적을 느끼고 싶어 단원고를 지망한 동생도 있다. 이제는 졸업했지만, 생존학생들에게도 교실은 하나의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친구와 함께 했던 추억이 남아있는 공간인 동시에, 친구의 부재를 확인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부대끼는 마음들을 제 몫으로 여기며, 많은 학생들이 '단원고'를 살아냈다. 앞으로도 '단원고'는 그/녀들이 살아내야 할 큰 숙제가 되어버렸다. 이미 졸업한 졸업생들도 취업을 할 때 단원고라고 말하는 게 머뭇거려진다는데...
단원고 교실이 사라진다고 세월호 참사로 단원고의 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원고 교실이 사라진다고 슬픔과 분노와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단원고 교육가족'이라는 당신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 보이지 않으면 잊혀진다 했으니.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잊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이미 '단원고'를 살아온, '단원고'를 살아야 할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교실을 어떻게 할지, 학교는 어떻게 기억하고 행동해야 할지, 우리에게는 이제 겨우 질문이 주어졌다. 존치가 정답인지 아직 우리는 모른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사람들이 함께 해답을 찾아나가자는 제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기도교육감이나 '단원고 교육가족'은 질문 자체를 봉쇄하고 있다. '교장의 권한과 책임'이라는 말로, '재학생을 위해서'라는 이데올로기로 질문을 묵살하려고 한다. 지금의 갈등은 입장과 입장이 부딪치는 것이 아니다. 제안을 묵살하는 힘의 과시가 갈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당도한 질문은,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건넨 숙제이기도 하다. 한국사회는 아직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는 경험을 충분히 가져보지 못했다. 근래에 위안부 관련 합의에서도 드러났지만, 재난참사를 기억하는 데에는 더더욱 무능했다. 아이들이 사라져버린 빈 교실이 모두에게 소중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도 아니다. 아프지만 아픈만큼 성숙해지기 위해서. 그 숙제를 개개인에게 떠넘기지 말고 함께 나누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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