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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권리로 말하기 | 평등해야 안전하다 (16.6.14.토론회)

1. 그녀가 죽었다 

강남역 인근 건물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되었다. 사건이 알려진 후 인터넷 커뮤니티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추모의 행동이 이어졌다. 애도의 말들은 목숨을 잃은 그녀를 향한 것만이 아니었다. 우리 안의 무언가가 함께 사라졌음을 고백하고 절규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고백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그리고 우연에 기대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함을 선언한 것이기도 했다.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로 명명하는 것은 구조적 폭력을 직시해야 한다는 외침이다. 그래서 ‘강남역 여성혐오살인사건’은 새로운 사건이다. 여성혐오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여성혐오에서 비롯된 수많은 사건들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음을 선언했다는 점에서 새롭다. 
억울하게 죽은 이를 위해, 우연히 살아남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실을 밝히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찾는 것이다. 경찰은 ‘여성혐오’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해 피의자의 정신질환이 범죄의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언제나 그랬듯 권력은 구조를 지우고 사건을 개인화한다. 이번 사건이 여성혐오살인이라고 할 때 그것은 피의자가 여성혐오자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피의자가 범행에 이를 때까지,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까지,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드러날 때조차, 여성혐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의 여성혐오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야말로 이번 사건에서 밝혀져야 할 진실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글은 여성혐오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사건 현장을 찾아간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건을 단순한 여성혐오 범죄로만 볼 것이 아니라 범죄취약 계층인 여성과 아동에 대한 안전 강화가 필요하다는 차원으로 인식해야 한다.” 여성혐오‘로만’ 보지 말자는 말은 여성혐오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해의 부족만은 아니다. 여성혐오야말로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데도 여성혐오와 안전을 대비시키는 이유는 분명하다. ‘여성혐오’는 발화주체들이 권력을 겨누며 저항하는 말이고, ‘안전’은 권력의 꽃놀이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여성혐오 사건들을 다뤄온 권력의 접근 방식이다. 강남역 여성혐오살인사건 이후 기존의 틀과 단절을 선언했다면 우리가 만들어야 할 틀은 어떤 것인가. 안전할 권리에 대한 모색은 이런 출발선에 있다. 
안전에 대한 욕구는 편안하고 온전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다. 여성이 범죄에 취약하다는 말은 여성이 안전할 권리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동안 ‘안전’은 인권의 언어가 되기 어려웠다. 생명, 자유, 안전의 가치는 근대 인권담론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었고, 90년대 중반부터 ‘국가안보’에 붙들린 안전 개념을 비판하며 ‘인간안보’ 담론이 사회보장 영역까지 확장되어 왔지만 신자유주의적 ‘안전’ 담론은 또 다른 옷을 입고 인권을 억압하는 위험한 말이 되었다. 인권운동이 안전을 권리로 말하게 된 것은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다. 절박했다. 정부가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내놓을 정책이 뻔히 내다보였고(실제로 그랬고) 그대로라면 우리는 안전할 수 없음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제 안전할 권리를 말하기 위해 우리의 이야기를 더욱 섬세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인간안보는 안전을 삶의 안전까지 확장한 개념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안전을 말할 때에는 우선 신체의 안전(physical integrity/safety)에 초점을 맞춘다.) 

2. 정부의 안전 대책, 문제를 심화시켰다 

강남역 여성혐오살인 사건 이후 정부는 ‘여성대상 강력범죄 및 동기 없는 범죄 종합대책’을 발표(6.1.)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범죄안전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환경 개선, △정신질환 및 알콜 중독에 대한 치료지원 강화, △재범 방지를 위한 치료 및 관리 강화, △강력범죄에 대한 엄중한 처벌, △피해자에 대한 다각적인 지원, △양성평등문화 조성. 그동안 여성이나 아동을 대상으로 한 흉악범죄가 있을 때 발표했던 대책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 공중화장실 분리나 포털사이트에서 혐오표현을 자체 필터링하도록 하겠다는 등의 세부 내용에 차이를 보일 뿐이다. 
2007년 ‘특정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아동/성폭력범죄를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국가형벌권 강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2008년 3월 일산에서 10세 여성을 엘리베이터에서 납치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며칠 후 일산경찰서를 직접 방문하였고 4월 <아동 여성 보호 종합대책>이 발표됐다. 2012년 8월에는 나주에서 한 초등학생이 집에서 납치된 후 성폭행당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해 9월 정부는 <아동 여성 성폭력 근절대책>을 발표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가장 큰 책무”임을 강조하며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범 불량식품 등 4대 사회악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고 거듭 밝혀왔다. 2013년 6월 정부는 <성폭력 방지 종합대책>을 수립했는데 그동안 대책이 개별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면 이 대책은 주요 국정과제로 ‘선제’ 추진되었다. 2015년에는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이 불거지자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 근절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처벌을 강화하고, 재범을 방지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고, 안전 사각지대를 해소하겠다는 내용이 반복됐다. 대책들마다 주요 내용은 한결같고, 그때마다 인권단체와 여성단체들은, 실효성이 없으며 오히려 인권침해 우려만 높아진다는 비판 입장을 밝혀왔다. 물론 우리는 아직까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나 폭력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대책들마다 헛발질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곳곳에서 안전을 위협 당하는데 ‘사각지대’로 시야를 한정시키듯 정부 대책은 문제의 본질을 은폐하며 폭력/범죄를 일탈적 사건으로 축소 규정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을 근간으로 한 접근은 오히려 문제를 심화시켰다. 
첫째, 특정 집단을 배제함으로써 안전이 달성된다는 환상을 주입시킨다. 신고된 성폭력 중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행이 80%에 달한다는 통계는 알려지지 않는다. ‘낯선’ 가해자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들만 사회적 문제로 부각된다. 낯익은 대다수의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온정주의가 발휘되며 가해자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 때에는 노골적으로 가해자가 보호된다. 일상에서든 법정에서든 사회적으로든. 가해자가 외국인이거나 정신장애인이거나 홈리스이거나, ‘배제하기 쉬운’ 존재일 때 그것이 안전의 문제로 등극한다. 형벌 포퓰리즘이 강화될수록 구조적 폭력도 강화된다. (같은 맥락에서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는 무시된다. 이때의 가해자들은 쉽사리 배제할 수 없는 ‘정상성’을 구현하므로 오히려 피해자 유발론으로 귀결된다.) 
둘째, 여성이나 아동은 ‘피해자’가 되지 않고서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피해자’가 되기 위해 여성은 ‘보호받을 만한’ 존재여야 하며 스스로 안전을 지키기 어려운 ‘취약한’ 존재여야 한다. ‘꽃뱀’이 아님을 입증해야 하거나, 장애여성이나 아동은 ‘저항할 수 없었음’을 입증해야 했다. 안전할 권리는,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이기 때문에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다. 인정받지 못한 피해자는 비난당한다. “걔는 원래 그런 애야.” “속내는 다른 걸 노리고 있는 거야.” ‘피해자’는 다른 의미에서 다시 배제된다. 그녀들은 피해에 대해서 말할 것을 강요당하는 반면, 권리를 주장할 때는 차단당한다. ‘목소리 큰 여자’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징벌’의 대상이 된다. ‘범죄취약계층’이 범죄에 취약한 이유는 그/녀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폭력과 범죄의 대상이 ‘될 만하다’(‘때려도 된다’)고 사회가 승인하기 때문에 그/녀들이 취약해진다. 정부의 안전 대책은, 근본적으로 동등한 인간이라는 출발선에서 여성을 밀어내는, ‘보호’의 외피를 입은 혐오일 뿐이었다. (여성뿐만 아니라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과 그 대책들도 마찬가지다.) 

3. 안전이 인권의 언어일 수 있을까 물었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법질서와 안전을 강조해왔다. ‘국민행복’은 ‘법치와 안전’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박근혜 정부의 입장이었다. 이번 대책을 낸 기구도 ‘법질서 안전 관계장관회의’다. 대한민국은 ‘국가안보’를 내세우며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키고 인신의 구속에 거리낌이 없으며 심지어 정당도 해산시키는 국가다. 그러나 이명박과 박근혜가 내세운 ‘안전’은 또 다른 맥락에 있다. 집회시위가 예전에는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시민의 안전을 위협한다며(시민 대 집회참가자의 구도) 진압한다. 
‘법질서 정치’는 전 지구적 흐름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빈곤과 불평등은 심화됐고 복지는 후퇴했다.(혐오가 사회적 현상이 되는 시대적 배경이기도 하다.) 삶의 불안정성에 기인한 저항을 탄압하기 위해 정부들은 범죄로 인한 위기를 과장하고 불안을 이용해 분할전략을 구사한다. 특정 집단을 ‘위험’으로 간주하여 배제한다. 위험한 집단은 언제나 소수자였고 그/녀들은 단속당하거나 추방되었고 강제퇴거되거나 구속되었다. 이런 정책들은 소수자혐오에 기대는 동시에 소수자혐오를 부추겨왔다. 안전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이자 누구나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인데 안전을 권리로 요구하지 못하는 난감한 상황들이 계속되었다. 인권운동은 수년째 토론을 이어가며 전전긍긍했다. 
세월호 참사를 마주했을 때도 그랬다. 인권운동의 대응을 모색하기 위한 긴급 간담회에서 ‘안전’에 대한 토론이 길어졌다. 안전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은 자신(만)을 어떻게 지킬지 궁리하는 것으로 쉽게 귀결되어왔다. 위험은 언제나 낯선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정해진 경계 안에서 정해진 규칙대로 사는 것이 안전하기 위한 최선책이었다. 안전을 위협당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타자’를 배제하는 것은 손 쉬운 선택이 된다. 스스로 취약하다고 느낄수록 무력감을 느끼는 동시에 공포와 불안은 더욱 커진다.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더라도 오히려 회피하기 쉽다. 개인이 손댈 수 없는 거대한 문제라면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존 질서에 의존하는 것으로 불안을 달래게 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일깨운 안전에 대한 감각은 달랐다. 정해진 경계 안에서 정해진 규칙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안전은 낯선 존재가 아니라 낯익은 구조에 의해 위협받고 있었다. 안전을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거니와 더욱 적극적으로 안전을 권리로 말해야 했다. 권력이 말하는 영토와 재산의 안전이 아니라, 억압과 불평등의 질서를 지탱하기 위한 안전이 아니라, 생명과 존엄을 위한 우리의 권리로서 안전을 말해야 했다. 
참사 2년이 되던 날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이 선포되었다. “안전한 삶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권리다. 안전은 통제와 억압으로 보장될 수 없으며,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유, 평등, 연대 속에서 구현되는 인간의 존엄성이야말로 안전의 기초”(4.16인권선언 전문)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4조(안전을 위한 시민의 권리와 정부의 책임)를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모든 사람은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를 가지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참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위험을 알고, 줄이고, 피할 권리가 있으며 이를 보장할 일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곳곳에서 진행된 인권선언 풀뿌리토론 참여자들이 저마다의 경험에서 길어올린 권리의 실마리들을 내어준 덕분이다. 그리고 준비 과정에서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해온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피는 과정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정부는 ‘국민안전처’를 신설하고, ‘안전혁신마스터플랜’을 만들었으며, ‘국가안전대진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가 말하는 정책들로 우리가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 누구도 속지 않는다. 안전산업을 육성해 안전을 더욱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이나 규제완화를 포기하지 않는 아집을 그냥 두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알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명보다 이윤을 앞세우는 기업을 처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익혀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도 너무나 많은 참사를 목격했으며, 메르스 사태나 가습기 살균제, 구의역 참사 등에서 똑같은 문제들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참여할 권리’는 “수많은 우리가 다시 말하고 외치고 행동하는 과정 속에서 완성되어”(4.16인권선언 후문) 가고 있다. 

4. 불평등한 사회는 위험하다 

정부가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엉뚱한 대책을 내놓는 과정은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과정과 다르지 않다. 먼저, 그들은 원인을 다르게 지목하고 문제를 축소하거나 왜곡한다. 초기부터 정부여당에서는 ‘사고일 뿐’이라는 해석적 부인에 나섰다. 마치 유병언이 참사의 최고 책임자인 듯 반상회까지 소집하며 유병언몰이에 나섰고 종편들은 그의 ‘이상행각’을 연이어 보도했다.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참사를 규정했지만 구조에 직접적 책임을 져야 할 해경은 123정장 한 명을 제외하고는 기소되지도 처벌되지도 않았다. 참사 초기부터 낡은 배를 들여와 증개축하고 과적을 일삼았던 사실은 비난의 대상은 되었지만 제대로 처벌되지도 않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도 강구되지 않았다. 세월호의 화물 고박을 맡았던 업체의 부회장은 20대 총선에 여당 공천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둘째, ‘순수한 피해자’ 운운하며 피해자를 고립시키고 배제한다. 희생자 가족들이 눈물만 흘리고 있으면 손 잡아주지만, 농성을 하고 집회를 열면 ‘불순한’ 것으로 규정하고 음해했으며 피해자들 사이의 분열을 조장했다. 피해자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혐오의 표적이 되었다. 참사 초기부터 온오프라인으로 막말과 비방글들이 많았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서던 즈음부터는 조직적인 음해와 혐오 선동이 시작되었다.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싸우는 피해자들을 보상 더 받으려는 이익집단으로 몰아가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 정부는 이런 움직임에 쐐기를 박기는커녕 진상규명을 거부하며 배보상 절차를 서둘러 끝내고 입을 막으려고 했다. 
셋째, 정부는 사람들이 모여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탄압한다. 세월호 참사 초기부터 정부는 허위사실 유포 등에 대한 엄포를 놓으며 온오프라인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가로막아왔다. 함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요구하는 집회시위는 철저하게 탄압되었다. 여당 국회의원은 세월호 가족대책위를 해체하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며 공안기구는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을 구속하기도 했다. 모여서 말하고 함께 행동하는 것을 불온시하고, 그것은 ‘순수하지 않다’고 규정한다. 혼자 슬퍼하며 우는 것만이 ‘순수한’ 추모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국가는 시민들이 스스로 그리고 더불어 권리를 도모하는 것을 억압한다. 권리의 주체인 우리가 직접 참여하고 토의하며 행동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민주주의가 불순한 것이 되어버리고 안전은 권리가 아닌 국가의 시혜가 되어버린다.  
선언은 “평등한 사회가 안전하고 불평등한 사회는 위험하다. 근원적인 평등이 안전을 위한 길”(4.16인권선언 제안문)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것은 재난참사의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안전을 해치는 것은 위험 자체가 아니라 사회가 위험을 어떻게 다루는가의 문제다.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지만 그것이 재난참사가 되는 것은 철저하게 권력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핵은 그 자체로 위험하지만 핵마피아 세력은 핵을 안전한 에너지로 둔갑시키고 숱한 사고가 발생해도 핵발전은 포기되지 않는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이 잦아지고 대형화되지만 피해의 발생은 불평등에 기인한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뉴올리언스만 덮친 것이 아니지만 대부분의 피해는 빈곤층(주로 흑인) 밀집지역에 발생했다. 더욱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작업장에서의 안전‘사고’도 마찬가지다. 직업병을 포함해, 용광로에 빠져서 맨홀에 빠져서 전철에 치어서 죽어야 했던 노동자들이 있다. 이윤을 위해 생명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자본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지만 국가는 누군가의 죽음을 ‘경제를 위해 감수해야 할 것’으로 만들며 오히려 기업의 편에 선다. 변화가 유예될수록 위험은 더욱 불안정한 조건의 노동자에게 전가된다. 권력이 이런 구조를 지탱하는 방식은 유사하다. 불평등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런 구조가 유지되지 않는다. 
불평등에 조금 더 주목해보자. 신자유주의는 위험을 개인에게 전가하고 안전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데 이것은 ‘위험’, ‘안전’을 전체화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위험은 누구나 가리지 않고 찾아드는 것처럼, 안전은 사회 전체가 안정될수록 획득되는 것처럼 몰아간다. 누구의 안전이 더 위협당하고 있는지 묻지 않고 하나의 ‘안전’으로 문제를 설정하며 내부의 불평등을 은폐한다. 예를 들어, 학교폭력이 문제가 되면서 ‘안전한 학교’를 위한 여러 정책들이 제안되지만 그들이 말하는 학교폭력에 성소수자 괴롭힘은 없다. 성소수자 학생은 오히려 학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학교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로 낙인찍힌다. 

5. 우리가 안전할 권리를 외쳐야 한다 

인권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권리로 좁게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구조적 폭력에 무력한 언어일 수도 있다.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도 비슷하다. 사형제 폐지를 주장할 때는 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이름도 없이 스러진 수많은 사회적 타살들까지 생명권의 감각이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권이 가진 힘의 근원은 권리의 목록에 있지 않다. 인권은 인간의 존엄을 사회적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외침이자 명령이다. 권리의 여러 이름들은 우리가 존엄하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위협당하고 있으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밝히는 실마리일 뿐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스스로 권리의 주체임을 말해야 한다.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안전을 말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 
어디선가 홈리스들에게 미니 텐트를 배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홈리스들은 텐트를 오히려 불편해했다. 박스집을 만들 때는 바깥을 살필 구멍을 만들어놓는데, 구멍이 없으니 바깥 상황을 알 수 없고 위험에 대비하기 불리하다는 이유였다. 우리는 위험을 알 수 있어야 하고 지목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을 피하고 줄일 수 있어야 하며, 제압하고 저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특정 정책이나 제도에 대한 권리를 넘어 우리 스스로 행동할 권리이기도 하다. 
인권의 침해는 언제나 권력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안전할 권리 역시 마찬가지다. 소수자일수록 위험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권리가 절실하다. 서울역에서 노숙인을 강제퇴거할 때 철도공사는 ‘선량한 시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홈리스들은 오히려 범죄에 취약하다. 전문 범죄집단에 의한 명의도용, 감금 등이 예사롭게 발생한다. 홈리스들이 노숙 장소를 선택할 때 고려하는 것 역시 동료와 안전이다. 게다가 국가는 정책적으로 혐오와 폭력을 정당화한다. 국제회의 개최를 명분으로 홈리스를 단속하거나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한다. 혐오는 사회적으로 재생산된다. 성소수자를 겨냥한 증오범죄도 몇몇 ‘혐오하는’ 가해자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사회가 그/녀들을 위험한 존재로 다루고 모욕하기 때문에 증오범죄가 가능해진다. 
정체성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정체성이 호출되는 역학, 그 정체성에 할당된 권리의 경계, 그 정체성에 허용된 말하기의 내용과 형식의 한계가 문제를 구성한다. 여성혐오에 대해 ‘나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는 항변이 무의미한 이유도 그것이다. 혐오는 남성이 여성을,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향해 쏟아내는 감정이 아니다. 혐오는 오히려 이런 구분된 위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배치하는 힘-역학이다. 그래서 혐오와 차별은 다른 것이기보다 차라리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혐오는 그냥 ‘감정일 뿐’인 것으로 보이지만 목숨의 부지, 생존의 유지, 삶의 긍지를 훼손한다. 
‘혐오 돌려막기’라는 저들의 전략에 맞서 우리는 ‘평등으로 가로지르기’를 감행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사건을 두고 많은 이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말하게 되는 이유도 그것이지 않을까. 지배권력은 우리를 분할하고 서로 다른 위치로 밀어낸다. 그러나 그 위치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더욱 잘 듣게 된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해본 사람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다르기 때문에 평등으로 가로지를 수 있다. 평등해지는 만큼 우리는 안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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