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기 딱 좋은 때

어제(11/12)의 집회와 행진을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가는 듯하다. 나도 참여자 1인이 되어 여기저기에서 느낀 것이 많지만 굳이 의견을 보탤 마음은 없다. 지금 국면에서 대규모 집회의 정치적 위상은 매우 크지만, 지금 분출되는 힘들은 집회 한 번의 기획에 좌지우지되지 않을 것이다. 훨씬 더 깊숙한 곳에서 훨씬 더 큰 반경으로 움직이는 힘. 운동이 이 힘을 읽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제다. 집회의 기획이나 전술은 매우 중요하지만 기조나 전략이 없을 때 논쟁은 산으로 간다. 

어제 오후 광화문에서 김제동의 사회로 진행되었던 행사를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추게 했던 말이 있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한 아주머니였다. “나는 지금껏 속고만 살아왔다. 시장한테 속고 공무원한테 속고 지자체에 속고 …. 순 거짓말하는 사람들만 있고. …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들한테도 민원이 들어오면 잘 들어주고 언론은 어려운 사람들 얘기도 들어달라.” 뭐에 속고 뭐에 속았다며 울분을 토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가 몇 년 전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트랜스젠더이고 HIV/AIDS 감염인이었던 이에게서 구청에 같이 가달라는 연락이 온 적 있다. 기초생활보장수급권이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데 뭔가 신청할 일이 있다고 도움을 구한 것이다. 내가 간들 보탤 말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녀의 요청을 거절하지는 못하고 일산까지 다녀왔다. 역시나, 내가 보탤 것은 없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주장하고 일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다 말할 수 있었다. 조금은 시간이 아깝다고도 느꼈지만 그녀가 큰 도움이 됐다며 연신 인사를 하길래 다행이라 대답하며 돌아왔다. 
그때는 몰랐다. 인권활동가인 내게도 알량한 권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가 구청에 가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야 할 때, 그녀의 삶을 통해 익히 짐작할 수 있는 공무원의 시선을 견디며 혼자 말하는 것과, 무슨 인권단체 활동가라는 사람을 옆에 앉혀놓고 얘기를 할 때 똑같지가 않다는 것을. 

광화문광장의 아주머니가 마이크를 내놓으라며 흥분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앞서 박원순 시장이 마이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자신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마이크 달라고 여러 번 외쳤지만 오지 않던 마이크를, 박원순 시장은 덥썩 잡아채어 바로 하고 싶은 말을 시작했던 것. “짜고치는 거 아이가? 여기서도 짜고치는 거면 여기도 국민 속이는 거 아이가? 억울한 사람들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이가?” 
운동의 현재를 돌아보게 되었다. 세상이 거대한 불의와 부조리로 가득차 있음을 운동은 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일상을 운동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까.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빼앗기면서 켜켜이 쌓인 억울함들을 구조적 문제라는 설명으로 대체해버린 채 곁에 서는 방법을 못 찾은 것은 아닐까. 그 결과가 민주노총의 조직률이나 대학마다 학생회가 힘을 잃어왔던 모습으로 드러났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절반을 넘어선 시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싸울 방법은 여전히 막막하다. 
지금 분출하는 힘,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고 더욱 두텁게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기존의 운동이 충분히 알아차리지 못했던 힘이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갑자기 솟구친 것처럼 보이는 힘이 오래 전부터 일상의 불의와 부조리를 살아내며 여성들이 얻은 지혜와 용기로부터 만들어진 힘인 것처럼. 운동이 그 힘들을 충분히 만나지 못해왔던 것이다. 이것은 특정 운동의 한계가 아니라 한국사회 운동 전체가 처한 위치이자 지금 놓여있는 조건이다.  

물론 운동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앞서 싸워왔다. 지금 분출하는 힘이 아무런 예비도 없이 솟아난 것 또한 아니다. 이 사회의 모순에 먼저 부딪쳐 깨져야 했던 사람들이 포기하지 않고 싸워왔기 때문에 지금의 힘도 솟아오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운동이 자신감을 가질 필요도 있다. 그리고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그간 싸워온 사람들에게 조금은 고마워해주기를 바란다. 먼저 피해를 입어 혹은 먼저 불의를 알아차려 외롭게 싸워야 했던 사람들이,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도 이 길을 열어왔다는 것을. 
그러나 누군가 먼저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우연히 그리고 다행히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싸우지 않았던 사람들이, 때로는 먼저 싸우는 사람들을 힐난하기도 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모르거나 배가 불렀거나 삶이 만족스러워서 싸우지 않았던 게 아니다. 운동에 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겪게 되는 불의가 운동의 언어와 별로 만나지 못하고, 저항을 북돋을 관계와 장소들을 만나지 못한 채, 일상을 홀로 견뎌야 했던 사람들의 고단함과 분노를, 운동이 알아차리면 좋겠다. 그/녀들이 살아낸 힘으로부터 무언가 배워야 함을 기억하면 좋겠다. 
앉아있다 가는 사람들이라거나 보수언론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들이라며 평가하기 시작하면 운동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진다. 고작해야 어떤 기획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거나 만족시킬까 궁리하거나 어떤 논리로 사람들을 깨우쳐야 할지 궁리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미 그/녀들은 힘의 생산자라는 것이다. 광장과 거리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힘들을 잘 읽어내면 좋겠다. 87년 이후 운동이 놓쳐온 힘들. 운동은 그/녀들의 동료가 되어야 한다. 

지금 분출하는 힘을 운동이 쫓아가기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어제 집회를 보면서는 얼추 쫓아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운동이 스스로를 얼마나 갱신할 수 있는지에 따라 판세가 달라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잠시 불안해지기도 했다. 나 역시 인권운동을 한다며 이런저런 활동을 하지만 스스로를 넘어서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긴급하게 하나의 조직을 만들 때 그 조직이 스스로를 넘어서기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말이다. 
하지만 조금은 희망을 엿보게 된다. 87년 이후 운동의 한 시기가 저물어가는 지금, 다시 3.1과 4.19와 5.18과 6.10을 상기하며 해방을 도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에 시민이 없고 노동운동에 노동이 없고 민중운동에 민중이 없고 여성운동에 여성이 없는 현재, 같은 이유로 인권운동에는 인권이 없는 현재. 그러나 이와 같은 현재는 일면일 뿐이다. 현재를 직시하는 운동의 자기 갱신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빛나는 성과는 없었을지 모르나 소중한 변화들이 있었다. 그걸 잘 되새기면서 서로가 서로의 임계치를 넘겨주는 관계가 되면 좋겠다. 
광장과 거리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때, 우리가 만나기 딱 좋은 때이지 않을까. 박근혜 퇴진을 이루며 우리가 닿아야 할 목표도 바로 그것이지 않을까. 그게 해방의 또다른 역사를 만드는 과정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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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3 18:44 2016/11/1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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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藝術人生 2016/11/13 21:54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대중과의 관계에서 활동가나 지식분자의 겸허함은 때로는 표현될 필요도 있지만, 역으로 책임회피의 방식이 될 위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러한 겸허함은 그동안 미류가 해왔듯이 대중의 현장에서 진심으로 더욱이 실천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봐요.

    87년 이후에 읽지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러한 '해방공간'이 민중의 삶의 힘과 논리를 만나는 장소인지에는 물음표...

    • 미류 2016/11/13 22:03 고유주소 고치기

      겸허함이 책임회피의 방식이 될 위험도 있다는 우려는 어떤 말일지 짐작되기도 합니다. 제가 우려하는 바와 닿아있기도 하고요. 이 글에서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겸허함과는 다릅니다. 운동이 더욱 영민해야 할 때라는 고민이기도 하고요.
      마지막 문장은 무슨 말씀인지 짐작이 안 되고... 저를 아는 분인 듯한데 뉘실지 귀뜸이라도 해주면 얘기하기가 조금 더 편할 듯합니다.

    • 미류 2016/11/13 22:08 고유주소 고치기

      아 마지막 문장도 좀 짐작이 되는군요. 광장과 거리가 그런 장소인지 의문이라는 뜻? 여기가 전부도 아닐 테고, 여기가 충분하지도 않겠지만, 지금 운동이 이곳에서도 민중의 힘을 만나고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디 간들, 만날 수 있을까요?

  2. 藝術人生 2016/11/14 00:3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아... 그동안의 관심이 좀 일방적이었던 모양이네요. 석진이 친구인데...ㅎ

    광장과 거리가 충분하지 않지만 또 필요한 것은 분명한데, 광장은 소통의 장소는 되겠지만, 소통의 내용 자체를 생산하고 담보하는 것은 아닐테니까... 광장에서 가져야 할 관심은 소통의 내용 자체보다는 우리가 여러 영역에서 쌓아온 내용이 소통이 되는가라는 실험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주관적 희망과는 달리 광장 자체의 담론 수준이 이미 처음부터 너무 강고하게 짜여져 있어서 소통 보다는 이미 가진 내용도 프레임에 의해서 왜곡되기 쉬운 그런 상황이 이번의 경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민이 위대하다는 저 프레임이 얼마나 폭력적인가요? 저게 너희들은 가만이 있으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요?

    • 미류 2016/11/14 15:55 고유주소 고치기

      (댓글은 다시 달게요 ^^;;;) 일단 "시민이 위대하다는 저 프레임이 얼마나 폭력적인가" 를 조금만 더 설명해주시면 고맙! 저도 약간 고민 중이던 건데 알 듯 말 듯한... ㅎ

    • 藝術人生 2016/11/14 23:47 고유주소 고치기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하긴 하지만...

      '시민'은 '국민'과도 다르고 '민족'과도 다른 것 같아요. '민중'과는 엄연히 다르구요. 저는 '시민'을 위로부터 부여된 명칭으로 읽고 있어요. 그런데 또 '부여된' 부분만 잊으면 마치 '주체'적이라는 착각을 낳기도 하니까 복잡한 것이겠죠. 여기에서 아마 엘리트와 대의정치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가 과연 '시민'이었던 적이 있던가? 이건 사실 우리가 '현대'를 살아봤던가... 와 유사한 질문이죠.

      우리는 여러 모순을 안고 살아가고, 광장은 그것들에서 유래한 여러 감정들, 인식들이 소통되고 나아가 소통을 통해 '공동체'적 변혁의 방향을 찾아나가는 공간인데, '시민은 위대하다'는 저 프레임은 그러한 모순들은 지우고 따라서 여러 가능성들을 이미 규정된 '시민' 안으로 제한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 모순들을 단순하게 병렬시키는 효과를 갖는 것 같기도 하죠. 이는 '시민'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관 때문인 것 같구요. 세계와 시민과 개체라는 존재론 같은... 참으로 분석하기 좋지만 현실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지식담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민족' 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생각... 이 이야기는 좀 너무 길 것 같으니, 나중에...^^

  3. 미류 2016/11/15 16:0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누군지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하네요. ㅎ 하지만 한자로 된 아이디 앞에서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는 ^^;)

    지금 광장에서 가능한 담론이 한계는 있겠지만 그것 확장시키면서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운동의 과제라고 생각해요. 물론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겠지만. 그런데 그건 모두에게 마찬가지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랄까...

    '시민은 위대하다'는 프레임은 이 글의 문제의식과 만나는 것 같네요. 비슷한 고민이 아닐지.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1142044035&code=990100&med_id=khan#csidx806a815b6574ecb9ca7cd8245c46f75

  4. 藝術人生 2016/11/15 23:2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사실... 탁구 외에는 마땅히 기억도 가물가물하고..ㅎ)

    권영숙 선생님의 글은 적어도 저를 비롯한 저희 세대 가운데 다소 급진적인 운동을 경험한 경우에게는 매우 익숙한 논리죠. 물론 요즘은 저런 논법을 구사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아졌지만...

    권 선생님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열어 놓은 채로 글을 더 진행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저와 유사한 문제의식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권 선생님이 쓰지 않은 부분들과 관련해서는 아마도 여러 다른 의견들이 예상되네요. 열려진 부분에서 저는 문제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좀 많이 끌고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에요. 이론의 급진성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죠.

    그런데 지는 싸움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더 힘들 수도 있고, 더 중요할 수도 있죠. 야구에서는 이걸 패전처리라고 하죠. 그런데 패전처리도 결국 나중에 이기려고 하는 거니까 고민은 계속되겠죠. 20세기 내내, 특히 분단 이후 남한에서는 계속 지는 싸움만 해 온 것 같아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대단함은 진 것도 이긴 것처럼 포장되는 가상성에 있죠. 역사를 끊어냄과 동시에...

    지는 싸움을 보면 우선 주체적으로 준비된 바가 없고, 객관적으로도 변화한 바가 없어요. 이 상황을 우리가 준비한 것일까? 착시효과가 아주 크죠. '국민'과 '시민'들이 갑자기 각성을 한 것 같구요. 이 부분을 명확히 하면서 지는 싸움을 하시는 분들께는 당연히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대부분은 '스펙터클'한 광장의 분위기에 압도당하면서 갑자기 주객관적 조건이 바뀐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특히 다수의 민주/진보/좌익에서 보이는 모습은 '기회주의'적인 면이 있어요. 이런 기회주의가 가장 잘 구사하는 화법이 '위대한' xx죠. 같은 기회주의이지만 그걸 구사하는 주체에 따라 주관적으로 투사된 '위대한' xx가 다양하게 출현할 것이지만, 기회주의는 늘 부수적이고 중심에 설 수 없으니, 결국엔 본래 의도한 세력에 의해 정리될 것이예요. 그러고 나면 그들의 '자족적'인 정리발언이 나오겠죠...

    • 미류 2016/11/20 21:13 고유주소 고치기

      열린 부분에서 어떻게 달라질지는 짐작이 되기도 하네요 ㅎ

      저는 요즘 해방 직후와 이승만 정권 시절을 종종 복기해요. 정치체제가 재구성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참조되는 것이 많아요. 87년과 비교하는 건 주객관적 조건상 여러모로 부적절하다는 생각이예요. 그래서인지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결과 예측보다, 무엇이 새롭게 만들어질지 그것은 이후의 싸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런 게 더 궁금한 때네요.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내는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