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 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 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 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낙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 둘 수는 없습니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가기로 작정하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이면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허공 중에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또 울 것이다 

 

천둥벌거숭이 노래

 

지도에도 없는 숲길을 갑니다

태양이 호수에서 금발을 흔들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등성이를 넘어갑니다

바하의 악보를 오솔길에 깔았더니

무반주 첼로의 서늘한 그림자가

지구의 머리칼에 고요히 걸립니다

내가 당도할 문은 아직 멀었습니다

숲에 별 뜨고

바람 부는 밤

모든 언어에 빗장을 지른 뒤

찔레꽃 향기가 심장을 가릅니다

어둠 뿐인 하늘에 당신을 그립니다

오늘 밤은 이것으로 따뜻합니다

 

 

1990, 고정희, <아름다운 사람 하나>, 들꽃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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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8 19:12 2016/12/1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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