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국회에서 선거연령 하향 법 개정을 촉구하는 농성이 시작된 지 보름여. 노란리본인권모임 사람들과 함께 농성장에 다녀왔다. 마침 손희정의 강연 <페미니즘과 청소년 참정권>이 있어 흥미롭게 들었다. 페미니즘의 첫 물결이라 불리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역사와 현재의 페미니즘이 마주한 현실의 단면에서 청소년 참정권 운동과 마주치는 지점들을 짚어보는 강연이었다. 모두들 좋은 시간이었다고. 

4월에 법 개정해서 6월에 투표하자고 말할 때면 4년 전이 떠오른다. 2014년 4월에는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6월에는 지방선거가 있었다. '한 번만 도와달라'는 쇼까지 할 정도로 새누리당도 불안해하던 선거에서, 당혹스럽게도 새누리당 압승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7월 보궐선거도 다르지 않았고. 만약 2014년에도 청소년들에게 투표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18세, 17세, 16세의 사람도 투표할 수 있었다면 선거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람들의 죽음 앞에 막말과 발뺌밖에 내놓지 못하는 새누리당에, 아마도 청소년들이라면 더욱 표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2014년에는. 

물론 결과는 모를 일이다. 게다가 청소년 참정권은 특정 정치세력의 유불리를 따지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령 새누리당의 압승이 그대로였더라도 청소년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중요하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한 이유로 서로 다르다는 점을 더 쉽게 이해하고 그것이 차별의 근거일 수 있다고 수긍해버린다. 그러니 서로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인식과 감각을 얻기 위한 사회적 도전은, 언제나 사회를 더 낫게 만든다. 한 번의 선거 결과로 참정권의 의의를 평가할 수는 없는 것. 

여성 참정권 운동의 역사도 그렇다. 참정권이 결국 투표권에 그치는 것이라면,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들러리 설 권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면, 참정권 운동은 새로운 역사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투표에 참여한다는 것은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의 가시화다. 정치가 누구와 무엇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확인시키는 과정이다. 한편으로는 정치를 재구성하고, 그럼으로써 시민권을 재구성하는 과정이 참정권운동이다. 이때 시민권의 재구성은 그저 자격의 부여가 아니다. (아마티아 센의 역량이론을 참조하면) 사회구성원으로서 개개인이 가진 역량 집합이 실질적인 기능으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한 사회가 가진 자원을 재분배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 

제헌헌법에서부터 여성이 선거권을 가질 수 있었던 한국사회에서 청소년 참정권운동이 '서프러제트'와 자주 비교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3번 출구 앞의 농성장에서 참정권운동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18세 선거를 명시한 개헌안을 낸 것도 지금의 흐름을 감히 거슬러서는 안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가져올 변화를 감당하기 두려우니 학령제와 연계하겠다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가 논평에서 잘 지적했듯이- 자가당착의 개헌안을 냈을 터. 참정권을 선거연령의 문제로 가두고 싶을 것. 그러나 농성장의 분위기로 보아, 청소년들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4월 국회에서 꼭! 선거연령 낮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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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8:10 2018/04/0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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