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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싱가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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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제주도 하이킹1

메모] 2003년 8월 31일. 제주도 하이킹을 준비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KGI파업은 극적으로 8월 말에 극적으로 마무리 됐고, 난 가벼운 맘으로 다 털고 휴가를 갔다올 수 있다. 더욱 기분 좋은 것은 휴가 때 덤으로 생긴 휴가 경비로 인해 기분이 더 좋아졌고..

 

100일에 이르는 협회 점거 투쟁과 50일에 가까운 KGI파업 투쟁 때문에 몸도 마음도 정말 엉망인 상황이었다. 무기력하고 나의 키 뿐만 아니라 내 맘이 정말 작았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던 엉망진창의 여름이었다.

 

증권전산 수련회까지 갔다 오게 되서 결국 8월 31일 비행기 출발임에도 불구하고, 31일 새벽에야 짐을 챙길 수 있었다. 당시 협회로비를 점거 농성 중이었고, 사무실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알리안츠 건물에서 고객용 PC를 사용해서 신청하고, 결과를 설레게 기다렸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증권 간부들이 그랬겠지만 정말 여의도를 벗어나고 싶었다.


 

제주도 월드컵 경기장. 이날 제주도 날씨는 34도 였다. 저기 왼쪽 끝 세번째가 나다. 어찌나 다리가 튼실한지^^*



결국 하이킹을 다시 생각해 냈고, 여름휴가를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간다'는 생각에 이곳 저곳 하이킹 까페들을 기웃 거렸다. 그리고 극적으로 찾아낸 '제 1회 제주국토대장정'프로그램. 신청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결과가 났는데도 파업이 안끝났다. 음.. 미안한 맘에 포기할까 했는데 8월 마지막 째 주에 극적으로 끝나는 상황이 된 거지. 음하하.. 가야 한다. 가서 다시 살아나서 돌아오자. 그렇게 해서 난 하이킹 같이 할 수 있게 됐다.

 

신청자가 많지 않아서 뭐 그리 설레게 기다릴 필요가 (^^;) 없었지만....암튼.. 31일 8시 50분에 비행기를 탔으니.. 얼마나 새벽부터 난리 였겠는가.. 왠만한건 제주도에서 구입한다는 생각으로 되는대로 챙겼다.

 

준비물 옷 3벌, 칫솔, 치약, 수건 2개(안장용1개 포함), 메모지, 카메라, 썬글라스, 모자, 속옷, 썬블럭 및 기타 화장품, 양말, 껌, 현금, 벌레약, 맨소레담, 휴지 등등 당시 비행기 가격은 77,060원 대항항공을 이용해서 갔다. 

 

제1기 제주국토대장정
공식 일정은 9월 1일부터 9월 5일 까지

 

계획상으로는 9/1) 제주하이킹랜드 라는 자전거 랜탈 장소를 출발해서 용두암 ☞ 용연 ☞탑동 ☞ 사라봉정복 ☞함덕해수욕장 ☞행원해안도로 ☞풍차마을 ☞세화 ☞종달해안도로 ☞성산항 ☞우도항 ☞서빈박사 해수욕장 ☞제주사랑 축구대회☞하고수동 해수욕장

 

9/2) 우도봉☞ 일출 ☞검밀레 동굴 ☞우도항 ☞ 성산항 ☞ 성산일출봉 정복 ☞섭지코지 ☞용눈이 오름 ☞다랑쉬 오름 ☞성읍민속마을 ☞표선해수욕장 ☞펭귄 수영대회

 

9/3) 큰언해안경승지☞ 정방폭포 ☞월드컵 경기장 ☞ 중문관광단지 ☞ 테디베어 뮤지엄 ☞주상절리, 쉬리언덕 ☞ 창천리 3거리 ☞안덕 계곡 ☞화순해수욕장

 

9/4) 산방산일대 ☞송악산 ☞ 타입갭슐 묻기 ☞대정 ☞추사적거지 ☞소인국테마파크 ☞오설록 박물관 ☞ 금릉석 식물원 ☞청소년 수련원

 

9/5) 한림공워 ☞협재해수욕장 ☞애월전망대 ☞하귀 해단도로 ☞ 이호 해수욕장 ☞ 제주하이킹 랜드 ☞ 끝

 

이것이 공식 일정이었다. 그렇지만 생각치 못한 변수로 2명은 거의 자전거를 처음 타 보는 실력, 나 또한 2002년 한번 여행을 다녀왔을 뿐 그리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하.. 그 외 기타 변수들 발생.. 흐흐.. 계획대로 될 턱이 없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제 1회 제주국토대장정'을 기획했던 제주사랑이 철인 3종 참가한 자신을 염두해서 동에서 서 쪽으로 하이킹 코스를 계획했던 것이다. 하하. 다녀 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오름까지 가는 그 험난하고 질긴 오르막길과 동에서 서쪽으로 돈다는 것의 의미를...

 

까페에서 신청해서 만난 사람들은 사전에 채팅을 통해 대장을 뽑고, 준비물을 체크하고 서로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친해 졌지만 난 바쁘다는 핑계로 달랑 한번 참여했기 때문에 어색 만빵인 상황이었다. 처음 보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낯설었다. 심지어 당시 노랑 커트 머리를 하고 내 모습에 다들 너무 쉽게 '랄라형!'으로 나를 정리했다. 물론 나의 말투가 공손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지만 다들 너무 쉽게 '남자 같아요' '오빠' '형' 이렇게 부르며 상당히 기어오르더라고.. 몇마디 좀 재밌게 건넸더니.. ^^; 결국 내내 사람들은 형, 어이 친구 등 동네 노는 형들 부르듯 날 불렀다..

 

8월 31일 제주공항 도착. 정말 무턱대고 비행기 타고온 내가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공황에는 내렸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미처 코스와 연락처를 챙기지 못해서 공항 PC방을 이용해 사람들의 연락처를 적고, 제주사랑에게 연락을 해서 먼져 와서 놀고 있는 일행들을 만났다.

 

31일은 그냥 놀았다. 주최측인 제주사랑 집에 가서 라면도 끓여 먹고 사진도 찍고.. 이영애 CF로 유명해진 미로 공원에서 공주놀이도 하고, 이름은 기억도 안나는 데 동네 공원 언덕에 올라가서 제주도의 일몰도 봤다. 사전 체력장으로 모두 뛰어서 가는 거였는데 난 4등정도 했다.. 당시 나는 하이킹 참가자들 중에서 나이 순으로는 서열 3위의 왕 고참측에 속했다.

대장, 회계 그리고 꼬마 대장, 그 외 후발로 참가하는 녀석들도 있고. 끼니는 해먹기로 했다. 그러니 당연히 코펠들이 기본짐으로 실어 진다. 1일 민박 나머지는 야영을 하기로 했다. 텐트는 중간에 넘겨 받는 걸로 얘기 하고 의기 투합하며 31일 출발을 위한 뒷풀이를 하고..

 

9월 1일

10시 출발 예정지, 하이킹랜드 앞. 난리 도 아니다. 처음 타는 녀석이 있어서 자전거가 맘대로 구르고.. 나도 간만에 타는 지라 어찌나 중심 잡기가 쉽지 않다.. 오호..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할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출발 하자마자 나타난 고개에서 우리 모두의 실력은 아주 솔직하게 드러났다. 한 명은 인도에서 떨어지는 낙마 사고, 기아 변속을 몰라서 올라가다 말고 후퇴하는 자전거.. 박박 기는 멤버가 있다면 술술 고개를 넘어가는 멤버들도 있었다.. 개인적인 일정으로 행사 주최자였던 제주사랑이 우리와 함께 같이 가지 못했는데 뒤에서 우리를 바라보면서 정말 저들이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많이 들었다고..

 

이날 우리의 목적은 우도에 가는 것. 마지막 배 시간(5시)에 맞추기 위해 페달을 열심히 밟아야 하는데 심지어 한 친구가 중도 포기를 선언해 버렸다. 어떻게 모인건데 누구를 버리고 갈 수 있으랴.. 그 친구를 밀고 끌고 난리 부르스를 치면서 갔다. 음 결국 2인을 선발대로 파견해서 표와 장을 미리 보게 하고 나머지들이 그 친구와 보조를 맞춰서 가는데 고개는 어찌난 계속 나오던지.. 대체의 장소는 생략하거나 멀리서 보고 계속 밟아 성산항 까지 갔다. 극적으로 도착한 성산항에는 마지막 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정말 탄성과 함성을 지르며 우린 사진 찍고 배를 타고 우도에 들어갔다.

 

우도에서도 역시 쉽지 않다. 숙소까지 가는 길은 고개, 고개, 고개 쉼도 없이 고개다.. 나도 체력하는 자부 하고 있었는데 정말 힘에 부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라.. 간신히 고개를 넘었는데 갈림길이 마구 나오는데 선두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후미에 있던 녀석들도 사라진 거.. 아뿔사. 너무 고개 숙이고 페달 밟는데만 집중해서 엉뚱한 방향에 서 있었던 것..한참을 헤메고 나서야 일행을 만나서 숙소에 짐풀고 백사해수욕장에서 물장난을 하고 놀았다. 음.. 사진에 보면 이상하게 찍은 몇 장의 장난스런 사진이 있는데 그게 다 백사 해수욕장이었다. 당시 TV를 강타하던 다모 삼매경에 빠져 있느라 회의, 취침 너무 늦었음에도 우리는 일출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새벽 4시에 기가막히게 일어났다..

 

9월 2일

새벽 4시에 기상해 아침 밥 먹고, 점심용 김밥 만들어서 냉큼 챙기고 자전거를 세워두고 우도봉으로 올라갔다.. 음.. 해는 언제 뜨는 거야 졸며 깨며 기다리고 있는데 그날은 좀 흐린 덕에 제대로 된 일출을 볼 수가 없었다. 포기할 때쯤 대장이 우도에 정말 경관 좋은데가 있다면서 대오를 이끌었다. 순진한 우리는 그냥 따라 갔는데 이게 왠일인가.. 길도 사라지고 벌판이 나오고..우하하.. 섬을 가로질러 가면서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해서 사진 몇장을 찍고..그런데 오는 길에  심지어 길도 잃고, 무덤을 밟고 다니고, 소똥 피해 다니고, 섬 경비대가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 암튼.. 풀 독이 마구 (당시에 난 반바지였기 땜시) 오르는 상황에서 대장에 대한 항의가 빗발쳤지만.. 대장은 묵묵히 '길이 나온다 안 하나..'하면서 앞으로 갔고.. 이런 대장의 특성은 주상절리 앞에서 다시 빛을 발했다..

 

암튼.. 우여곡절 끝에 다시 자전거 있는 곳으로 내려와서 검밀레 동굴(모래가 검은 동굴이다)에서 놀다가 배타고 나왔다. 음.. 배를 타고 다시 성산항으로 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비가 오면 바퀴가 쉽게 미끄러지기 때문에 사고를 조심해야 한다. 다행이 별일 없었지만 하얀 우비를 입고 한줄로 자전거를 타는 우리의 모습이란.. ^^* 성산일출봉에 도착.. 어찌나 높기도 하고 전경도 멋지고 돌도 많고 예술 같은 그림들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예술적으로 펼쳐진다..음.. 고소공포가 있는 나로써는 좋기도 좋지만 발에 힘이 풀려서 바들바들 떨면서 사진 찍고 그랬다. 대단한 것은 찍었던 사진기가 고장나는 바램에 일출봉에서의 개인 사진들이 하나도 없다는 거지.. 심지어 거기서 300원 짜리 고가의 요쿠르트를 사먹으며 찍은 사진도 ..

 

난 매일 아침 김밥을 만드는 것을 보조했다. 저 안에서 하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 나다. 노랑머리 손수건..^^*

 

이날 하이킹이의 막둥이 2명이 합류했다. 그래서 총 멤버는 랄라, 샐리언니, 직이대장, 은빛바다 윤정, 메티스, 동종주, 막걸리, 제주사랑, 알바스, 한국인, 루시아 등이 됐다. 정말 특이하게 비슷하고 정의감에 넘치고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고 희생정신도 대단 들 했다. 암튼 이들과의 질긴 인연으로 작년 연말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여서 서울에서 송년회도 하고, 얼굴고 보고 그랬다. 음.. 다들 어찌나 잘 자라고, 잘 살고 있던지.. ^^*

 

드라마 올인 찍은 섭지코지 언덕도 갔다 오고, 혜교 처럼은 아니어도 비슷하게 독사진도 찍어 보고 잠시 쉬는 동안 소나기도 맞고, 그 뒤에 상한 김밥먹고 체하기도 하고..사실 하이킹은 이 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개인일정으로 빠져 있었던 체력 짱!의 제주 사랑이 참여 멤버로 참여했고 용오름에 가서 단체 사진 찍어야 한다면서 하이킹 메버들을 마구 굴린 것이다. 달리고, 오르고, 내리고, 다시 씩씩거리고 올라가고.. 결국 우리는 제주도의 명물이라는 다랑쉬 오름은 포기하는 대신 용오름에 가서 사진도 찍고.. 그리고 우리는 이 사진을 기념 사진으로 액자 선물로 받았다.

 

돌아다니면서 재밌는 일도 많았다. 농협만 나오면 무조건 물뜨러 가고, 물 나오면 무조건 씻소, 틈만 나면 썬블럭 덕지 덕지 바르고.. 심지어 귤농장 아주머니가 공짜 귤도 얻어 먹고...

 

전날은 민박을 했지만, 이 날은 해수욕장에서 아영을 하기로 했다. 4시부터 이뤄진 강행군 덕분에 왕언니 샐리 언니는 도착하자마자 쓰러저 버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씻을 곳을 찾아 헤메였다. 다시 내륙을 통과해서 대천동사거리에서 다시 동쪽으로 쭉쭉 가다가 간신히 표선해수욕장의 야영지를 찾았지만 제주도의 야영지는 한 철이 끝나면 문을 닫아 버리기 때문에 화장실 조차도 쓸수 가 없었다. 이런 낭패가 있나..

 

어찌나 땀도 많이 흘려서 냄새도 장난 아닌데다가 그날 비도 많이 맞아서 영 상태도 않좋은데.. 다들 돈이 별로 없으니 민박하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와도 간신히 자전거에 실고 온 텐트랑 코펠 등을 생각하며 야영지에 짐을 풀었다. 극적으로 대장이 근처 교회에서 씻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고, 우린 간신히 씻고 간신히 요리하고, 빠질 수 없는 한잔 쏘주 걸치고, 텐트에서 깊은 숙면에 돌입했다..

 

사실 난 그 때 일이 있어서 근처 PC방에 가서 일을 하고 왔는데 일부는 뻗고, 일부는 한잔 계속 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장이 모기향을 마구 피우면서 벌레들을 쫓고 있었다. 대장은 정성스레 모기향을 앞뒤로 피워 줬지만 사실 우리는 그 모기향 덕분에 질식해 죽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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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처음으로 자전거 여행을 갔다

컴퓨를 보다보니 2002년 첫 여름 휴가 때 적었던 글이 있었다. 이것 저것 손 볼까 하다가 .. 그냥 올린다.. 언제나 그렇듯 여름 휴가 때가 되면 사람이 문제다. 그리고.. 내가 문제다..

 

참고로 그때 난 자전거를 탄지 일주일도 채 안된 왕 생짜 초보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혼자가서 음.. 사진도 별로 못찍었다. 그리고 혼자 찍는 사진은 늘 이렇다.. 타이밍도 못맞추거나.. 어설프게 나오거나.. 

어쨋든 내 2002년의 모습과 내 알톤 자전거다.

 

2002년 8월 4일부터 7일까지
아주 짧은 첫 여름 휴가

준비물 : 현금, 썬글라스, 썬블럭, 손수건, 안장수건, 캡모자, 여유분 옷, 우비(나중에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지만 무지 무거운 우비를 준비했었다), 물통, 장갑, 시계, 비상약, 건전지

자전거는 영등포 기차역에서 화물로 강릉역으로 보냈다. 화물로 보내기 전에 자전거에 붙어 있는 조명등 및 기타의 물건들을 떼어내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없어지기 땜시. 당시 15만원에 구입한 앞 뒤 쇼파가 있는 알톤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여행객들이 나의 자전거와 혼자여행온 여자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모든 것에  어찌나들 놀라는지..



준비물을 담은 가방과 몸만 기차에 싣고 밤기차를 타고 강릉역으로 감. 가방은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좋다. 사전에 준비한 것은 자전거 여행 까페에 가서 코스 및 일정들을 체크하고, 정말 혼자 무작정 떠난 극기훈련이였다. 7번 국도가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덤벼든 여행은 강릉역에서 날 맞은 비에 넘어지면서 시작됐다. 준비는 없다. 그냥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라은영이란 사람에 대한 자괴감에서 오는 절박함이 있었다.

 

8월 4일.
7번 국도를 타고 내려갈 것만 결정했지 어떻게 강릉시내에서 7번국도를 탈것인가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비를 맞으며 다시 전국 교통지도를 꺼내고 강릉시내의 조밀도를 보고, 7번국도를 찾는다. 출발은 양호하다. 무거운 우비는 자전거를 타자마자 간이 찜질방으로 변해버렸고, 비는 우비의 틈을 비집고 나를 적시고 있었다. 자전거를 탄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 멈춤, 코너 돌기 및 모든 것이 서툴렀다. 특히 무거운 짐은 자전거를 더욱 무겁게 했다.

 수차례의 무단횡단과 신호무시 자동차 경적, 사람들의 손가락을 따라 도착한 7번 국도는 한적한 시골길과 같이 직선 길로 시작됐다. 그리고 처음으로 거꾸로 올라온 하이킹 족을 만났고, 그들의 힘찬 응원이 여행내내 힘이 됐다.

 

강릉역 출발 ☞ 7번 국도 진입. 진입 30분도 채 되지 않아 심각하게 자전거가 빗길에 미끄러진다. 미끄러진 자전거가 도로로 미끄러 지고 자칫 교통사고가 날뻔했다. 덕분에 무거운 우비와 바지가 찢어지는 액땜을 겪었다. ☞ 정동진. 고 3때 수능 끝나고 성적이 나오기 전에 잠시 가출아닌 가출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혼자 기차타고 왔던 정동진. 이미 2002년의 정동진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혹여 자전거 도둑맞을까 자전거와 함께 모래 바닷가를 가는 무모한 짓도 한번 하고 편의점에서 물도 사먹었다. 어찌나 사람들도 많고 여름 휴가때면 빠지지 않는 이른시간에 바닷가에서 유흥을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인다 ☞ 헌화로 바다가 내옆에서 계속 파도를 친다. 특히 비가 오는 바닷가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였다 ☞ 다시 7번 로 돌아와서 동해시를 지나 묵호 ☞ 삼척 ☞ 맹방에서 1박을 한다.
 
사실 맹방에서 일박을 할 계획이 아니였으나 이미 날이 저문 상태에 빗길이고, 자잔거 등도 생각보다 무척 약했다. 특히 가로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야맹증이 있는 개인적 상황에서는 더욱 나가기가 어려웠다. 맹방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는 언제 호랑이가 나타날지 변태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공포속에서 찔끔찔금 한 상황이였기에 맹방에서 1박을 했다. 장소는 맹방 민박. 2만원. 맥주 1캔과 약간의 과자를 사서 맹방 바닷가에서 혼자 한잔하고 나의 기억하나를 바닷가에 묻고 왔다.

 

사전에 알았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 7번 국도를 타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강원도에는 무척이나 고개가 많다. 맹방에 이르는 곳까지의 해안도로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개에서는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많았다. 특히 공사중인 곳도 많고 국도도 역시 자동차 운전자들은 자전거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확확 밀치고 가는 경우가 많다. 식사는 중간에 보인 휴게소 식당에서 하고, 볼일은 여기 저기 널린 화장실에서 보고, 이곳 저곳에서 물 사먹으며 정말 아픈곳 하나 없이 잘 왔다.

 

 

8월 5일

맹방에서 다시 아침을 맞고,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출발한다. 전날 무리하게 달려서 상당히 근육통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어찌나 튼튼한 다리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미쳐 간과했던 어깨와 종아리 뒷쪽이 완전히 익어버리는 불상사를 제외하고는. 난 정말 건강한 사람임이 입증됐다. 철저히 썬블럭으로 커버하고 썬글라스와 수건을 정비하고 다시 출발한다. ☞계속 7번 국도를 타며 왕 고개들을 넘고 엄청난 활주로를 넘고 고가도로를 타고 ☞ 동해 휴게소 (강원도와 경상도 경계 고개에 있음)에서 잠시 쉼. 고가도로에서 다른 하이킹 여행족과 도보여행자를 만났다. 그들이 내게 다음의 코스가 어려움을 알려줬다. 까짓것 하고 오르는 고개는 정말 오를수도 없고 내려 갈수도 없고 자전거를 뉘여 놓고 쉴수도 없는 울고싶은 고개였다. ☞ 울진 발전소 근처에서 맥주 한캔도 까보고, 부둣가에서 놀고 ☞ 왕 바람 많이 부는 고개를 넘어 평해에 도착. 기냥 평범한 읍내 인데 전날과 같이 어둠의 상황에서 절망하기 보다 해질녁에 그냥 쉬어버린 상황이다. 저녁 먹는 식당에서 고개에서 만난 하이킹족을 다시 만남. 그들은 텐트를 싣고  여행중이기 때문에 강가에서 잔다고. 다음날을 위해 오이를 사서 여관 냉장고에 넣어두고 물도 얼렸다. 어찌나 고급스런 여관을 잡아서 1박을 함. 어찌나 고급스럽던지 다시는 여관에는 가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과 특히 혼자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누군가에 부탁해서 찍었겠지.뒤는 동해바다다..

 

8월 7일

평해를 떠나 포항에 도착하는데 6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경상도 부터는 강원도와 완전 대비되는 완만한 길이 나오는 데 특히 평해 이후로는 정말로 완만한 시골길과 도로길이 번갈아 나온다. 특히 이날 부터는 비가 좀 심하게 내리는 상황이였고 자전거 수리도구를 하나도 챙겨오지 않은 상황에서 자전거 바퀴 바람이 빠지는 상황인지라 더 여행하기가 어려웠다. 일상의 도로에서 덤프 트럭은 주위 대상이다. 지나가면 엄청난 바람과 먼지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특히 비가오는 상황에서의 덤프트럭은 빗물로 물보라을 만들고 엄청난 빗물을 퍼붓고 가기 때문에 중심을 잘못 잡으면 그 바람에 자전거가 넘어지기도 한다. 결국 포항에 사는 후배 녀석의 신세를 지며 여행을 끝내기로 한다. 포항 주유소에서 전날에 만난 하이킹 족을 다시 만나서 쉬면서 옥수수 나눠 포항시내를 헤집어서 후배네 집으로 가며 여행을 마무리한다.

 

후기 ..

그냥 꿈 같다. 지나간 시간들. 혼자 되씹던 말들. 수천번을 되뇌었을 할수 있다는 나의 약속. 한고개 한고개를 넘으며 그리고 내려오며 나는 나를 시험하고 이겨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남들에게 과시하거나 자랑하기 위해 시작한 홀로여행이 아니다. 역시 너야, 대단해 라는 말들은 흘려라. 남들이 나에게 해주는 말들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나의 결정에 대한 그들의 가치관에서 예의상 나오는 말일뿐이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부분이고 현상처럼 해낸 것이고 누구도 할수 있는 일이다.

 

자전거는 맛탱이가 갔다. 그럴만 하지. 그리 무리를 했으니. 이 여행을 통해 혼자 달릴지라도 언제나 나에게 힘이 되는 사람들. 그들에 대한 느낌과 존재감 그리고 그들에 대한 내가 가진 의미를 알수 있었다. 독불장군과 같은 나란 사람은 원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란 감정자체를 느끼지 않으니... 표현하지도 않는다. 고민스럽게 찡얼거리며 강한척 어느 순간에 약한척. 척척하는 가식적 행위에 대한 불필요함을 느낀다.

난 단지 나 이다. 그냥 그 모습을 있으며 움직이면 되는 것이 세상의 한 부분인 나란 존재이다. 후후 연애나 찐하게 해서 누군가를 죽도록 좋아하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지만 난 죽도록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의 내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너무 뻔하다. 욕심 부리지 말고 조급해 하지 말아야.. 주변에 모든 것에 ..

 버티고개에 자전거를 밀고 올라가던거. 활주로 끝에 나왔던 감동적인 내리막길. 억수같은 빗속에서 만난 하이커들. 모두가 힘을 나눠가는 모습. 모두의 까만 얼굴과 파이팅의 말들. S나 또한 그들에게.. 내 주변인들에게 힘을 주는, 나눠주는, 단 한줌의 정성도 나누는.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이 아닌 삶은, 세상은 그렇게 나눠가면서 살아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겠다. 이제 포항을 떠나 다시 성남으로 가야한다. 이제 나의 첫 휴가도 끝났다.

 

나의 그사람에게
분명 왜곡된 거다. 그리고 그 사람도 그것을 알 것이다. 서로간에 사랑이 아니라 익숙함인 것을. 분명한 것은 난 그 사람을 좋아하고 인정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잘못한 거다. 처음부터 너무 잘 맞아 떨어진 우연처럼 지금까지 온거다. 나로 인해 그 사람이 더 많은 해를 입었기에 나또한 이렇게 혼자 나를 되돌아 볼 수 밖에 없다, 이제 인생을 나누는 동지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하든 서로에게 어떠한 사람이 생기든 간에.

 

여행을 끝내니 ...
손톱에 끼여있는 때. 고개. 햇볕. 소금에 절은 옷. 바다. 트럭이 선사한 빗물 세례. 바람. 다리의 멍. 2번이나 사고를 낼만큼 심하게 넘어진 상황. 내가 목격한 불륜의 현장. 까맣게 탄 팔과 다리. 힘내자. 할수 있다.

그리고 내가 깨우친 내가 가진 삶에 대한 집착. 살기 위해 달릴 수 밖에 없었던 첫날 밤. 오르막길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가지 밀어 부티는 나의 고집. 난 독한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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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싱가폴

5학년이 되던 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친구 잘둔 덕분에 친구의 친척집에 머물면서 아이들 돌봐주는 조건으로 보름정도 싱가폴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다녀왔다.

 

당시 들인 돈은 우리 나라 돈으로 100만원정도. 내돈 30, 부모님돈 70  

그리 싸게 간것도 비싸게 간것도 아니다.

비행기 왕복이 50만원 좀 넘었던 기억이 나고..



싱가폴은 우리나라 보다 1시간정도 늦고 싱가폴 달러는 우리나라랑 비교하면  SDG 1S$=700원 정도 된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물가가 상당하다. 싱가폴이라는 이름의 유례는 예날 싱가폴에서 묘하게 생긴 동물을 발견했는데 그 동물을 사자로 오인해 singa pura(사자의 도시)라고 부르면서 시작됐다고 했다.  

 

1819년 영국 스탬포드 래플스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견제하기 위해 노호르 주의 술탄으로 부터 싱가폴을 사들여 이 곳에 자유무역항을 건설했다. 말레이 반도와 인근 여러 나라를 관할하는 영국의 무역거점으로 성정하게 됐다. 이후 1921년 영국이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군사, 경제적으로 영국의 동아시아 식민지 지배의 핵심이었다. 2차 대전 중에 일본이 싱가폴에 쳐들어와 싱가폴 사람들을 학살하는 대학살극을 벌어서 그런지 상당부분 나쁜 감정들이 있다고 하고 1959년 자치권을 획득했고, 말레이시아로 부터도 완전히 독립한 상황이고. 도시 규모는 서울보다 좀 큰 편인데 경제적 규모나 세계적인 지위를 볼때 비교가 안되는 곳이다.

 

우리나라에 알려 진 것 처럼, 싱가폴에 갈때 껌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고, 가지고 가다 들키면 벌금을 내야 하고 당연히 압수 당하고. 길거리가 깨끗한거는 이루 말할 수 없고, 안전장치들도 잘 되 있어서 지하철의 스크린 도어나 도로 표지 판등이 상당히 잘되어 있다. 물론 사람들이 질서도 잘 지키고, 버리는 일도 없고, 차들도 모범적이고.. 인공도시 답게 조경도 멋지던데, 친척분의 말로는 간판의 높이과 크기 숫자를 비롯해 건물 높이와 모델등 왼만한 것은 다 국가가 규제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리콴유나 싱가폴 사회 통제적 분위기와 성형등을 보름 동안 뭐 판단할 것 조차도 없었지만, 경제 성장이라는 발판을 딛고 있는 사회의 역동성(센토사 섬으로 가는 케이블 안에서 본 항구의 번잡한 움직임, 넘치는 관광객, 지하철 등 곳곳에서 드러나는 활기)과 그들이 보이는 자부심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 넘어온 사람들과의 경제적 불균형의 아이러니들이 마구 잡이로 섞여 있었다.


 아마 이 사진에서 날 찾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센토사 섬에 있는 사자상 근처에서 찍은 거다.

 

2001년 여행에서는 싱가폴과 말레이시아를 갔다. 말레이시아의 여행은 정말 집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특히 영화에도 자주 나오는 콸라룸푸르의 페트로나스 트윈타워(452m)에도 가보고, 절도 다니고, 팬이 도는 싸구려 여관에서도 자보고..

 

2000년과 2001년의 겨울은 참 괴롭고 힘든 시기였다. 나름대로 현장이란 곳에 기웃기웃하다가 생각을 바꾸기도 하고, 학교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것에 대한 처절한 현실도 느꼈고, 정말 오아시스 같은 여행을 친구랑 갔다 왔다. 남은 사진도 몇장 없고, 준비된 동선도 없이 무작정 떠났다가 와서 솔직히 어디어디를 갔다 왔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내 도피여행의 시작이고, 첫 외국어를 하는 세상에서 단 둘만이 한국어를 하는 놀라운 현실을 체감한 기회이기도 했다.

 

친구와 나의 영어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험이 있었는데..

싱가폴에 있는 유명한 도서관에 가려고 왠 사람에게 길을 물어 봤다.

"우리에게 길좀 알려 달라" 그랬더니 그 외국인이 한참을 영어로 설명하고, 그림을 그려 주고 난리가 났다(우리가 만난 싱가폴 사람들은 정말 다 친절했다) 그러더니 맨 끝에 "Are you follow me?" 라고 물었는데 우린 팔로우만 들은거다. "아니 이 사람이 우리한테 어쩔려고 따라오라는 거야. 야 안돼!" 갑자기 땡큐 라고 대답해 버리고 확 돌아서 버렸다. 어찌나 그 외국인이 황당했을까..

 

이런 경험도 있었다. 센토사에 가려면 케이블 타고 가면 케이블 타고 와야 한다. 그사실을 사전에 몰랐던 우리는 매표소에서 갈때는 케이블을 타고 가고 싶고 올때는 배를 타고 오고 싶다는 말을 한참을 하고 있었는데 안내원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우리는 왕복하지 않겠다는 말로 "go but No Return"이라고 말을 했는데 안내원이 상당히 당황해 하더니, 나중에 우리의 의도를 알아들었는지 한국말로 "왕복해야 해요"라고 대답을 했다.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하하.. 웃으면서 땡큐를 연발했었다.  

 

 같이 여행했던 내 친구가 다시 싱가폴에 간다. 다시 그 친척집에 간다. 아직 국가 공인 선생님이 되지 못한 내 친구는 요번 시험에서 떨어지면 상당기간 싱가폴에 묶여 있게 될 것이라는 겁을 주며 '너네가 그리울 거야'라는 말을 연발한다.

 

오뚱이가면.. 정말 심심할 텐데.. 약방의 감초 같은 오뚱이 가면 우리끼리 모여도 참 서먹서먹 할 텐데.. 오뚱이 아이들 수영장에서 다이빙 한다고 난리 치면서 머리 박는 사고가 없기를, 영어 때문에 압박받지 않기를.. 건강하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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