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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4/09/18
    일상투쟁과 노조집행부 장악
    불혹
  2. 2004/09/18
    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한다는 것
    불혹
  3. 2004/09/18
    노동자의 삶과 철학/민주노총 노동자학교
    불혹

일상투쟁과 노조집행부 장악

일상투쟁과 노조 집행부 장악, 집행부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수단으로! 김 준 태(버스노민추 정책국장) ◎ 노조가 어용일 때도 현장을 바꾸기 위해 소수의 힘으로 투쟁해 왔다 민주노총으로 조직변경을 해서 형식적으로 민주노조라고 불리는 많은 사업장들의 경우는 버스현장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이다. 즉 현재 버스현장에서 각종 현장에서 조합원들이 부당하게 당하는 수많은 일상적인 탄압과 착취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곧 바로 사측과 맞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과도 대면해야 한다.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있는 노동조합이 회사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조합원들의 조직된 힘이 악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민주노총 소속의 노동조합들은 문제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조합원들의 일에 노동조합에서 딴지 걸지는 못한다. 이런 어려운 조건은 비단 버스사업장 뿐만 아니라, 어용 한국노총 소속의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공통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어려운 조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건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타령만 하는 순간조차도 조합원들은 신음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버스현장의 활동가들은 이런 어려운 조건을 바꿔보고자 활동하고 투쟁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버스현장의 상황은 변하지 않아왔다. 오히려 사측이 더욱 세련되게 형식적인 절차들을 지켜가면서 활동가들을 탄압해 오고 있다. 나아가 여전히 70년대식 노무관리의 풍토도 어려운 조건이지만 최근의 비용절감을 핵심으로 하는 구조조정이 들어오면서 어려움은 더욱 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제조업의 노동자들 하면 공돌이, 공순이라고 비하했지만 지금은 어떤가? 대표적인 예로 현대자동차 제조업 노동자들은 지난 7월 직업인기 조사에서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속적으로 투쟁하면서 고용안정, 임금․단협을 쟁취해 오면서 현재는 버스노동자들보다도 훨씬 안정적이고 나은 조건을 받고 있다. 불과 십 여년 전만 해도 버스노동자들, 특히 고속버스노동자들의 대우는 제조업 노동자들에 비하면 월등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버스노동자들의 처지가 열악해 졌는가? 그 대답은 단순하다. 제조업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건설한 이후 끊임없이 사측에 맞서 투쟁해왔다. 민주노조로서 처음의 투쟁에서는 오히려 더 탄압받고, 열악해 졌을 수도 있었지만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오히려 버스노동자들보다 나은 노동조건을 쟁취해 온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받은 사례는 그 어디에도 없다. 강력한 투쟁을 전개한 노조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그나마 투쟁한 번 제대로 해오지 않은 한국노총 산하의 노조들도 민주노조로 넘어갈 까봐 떡고물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서울지하철노조의 경우 2000년 배일도 집행부가 들어서면서 ‘노사 상생’, ‘신노사문화’를 외치면서 그 전까의 소위 강성 노조에서 온건 노조로 탈바꿈했다. 그러자 공사와 정부는 쌍수를 들고 환영하면서 노동조합 내부에서 십수년간 투쟁을 통해 단련되어 온 활동가나 노조 간부들의 반발을 줄이고자 불과 3년 사이에 35%에 상당하는 임금인상을 하는 등의 당근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현장의 투쟁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죽었다고 판단하자 이제와서는 배일도 집행부에게 더 못준다고 배짱을 부리고 있다. 어용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민주노조가 떡하니 버티고 있을 때이다. 사측과 정부는 민주노조를 죽이기 위해서 어용노조를 키워야 하고 어용노조의 비위를 일정정도 맞춰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지하철노조에서 보듯이 민주노조의 씨가 사그러들면 어용노조는 곧 바로 그나마 받아먹던 것들도 뱉어 내도록 요구받는다. 과거 십 몇 퍼센트씩 민주노조에서 임금인상 등을 쟁취하자 정부와 사측은 울며겨자 먹기로 어용노조에게도 민주노조 만큼은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맞춰서 임금을 인상해 주었다. 다시말해 그나마 제대로 투쟁 한 번 하지 않아왔던 버스현장에서도 매년 임금인상 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조 사업장들의 투쟁 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 자신들이 싸우면서 쟁취하지 않으면서 과거 잘 나간다고 하던 고속버스 조합원들은 자동차, 중공업 등의 대공장 사업장들보다도 노동조건, 임금 면에서 뒤떨어지고 있다. 투쟁없이 쟁취없다는 것은 현실에서 엄연히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버스현장 등의 어용사업장에서의 투쟁은 노조집행부가 조합원들의 이해가 아닌 사측의 이해를 대변하다보니 항상 사업주와 노조의 두개의 투쟁대상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그만큼 투쟁이 힘들고, 활동가를 지키게 만든다. 그래도 지금까지 버스현장의 많은 활동가들은 그러한 어려운 조건을 알면서도 투쟁해 왔다. 집행부의 힘을 등에 업는 것이 아니라 집행부 마저 투쟁 대상으로 놓고 싸워야 하는 현실은 많은 활동가들에게 해봐야 성과가 나지 않는다거나, 조합원들을 실제로 조직하는 데 한계를 느낀다는 등의 패배주의를 확산시키기도 했다. 많은 활동가들이 중도에 포기해왔지만 여전히 버스현장에서는 새로운 활동가들이 간간히 튀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게중에는 상당한 성과들을 내면서 현장활동의 모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힘든 상황임에도 계속 활동가들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버스현장의 착취와 탄압이 심하기 때문이다. 버티다 못해, 눈치 보는 것도 한도가 있기 때문에 노조와 사측에 저항하는 것이다. 어용노조를 상대로 소수이지만 지속적으로 활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합원들을 대변하는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서! ◎ 노조 집행부 장악! 현장을 바꾸기 위해 가장 잘 조직된 지도부를 활용하는 것이다 조합원들의 노동조건, 임금 등의 당면한 경제적인 문제들을 요구하고 따내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사측과의 투쟁이 관건이다. 그러나 그 투쟁을 조직할 조합원들의 대표기구인 노동조합이 어용이다보니 사측에 직접적인 투쟁은 반드시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투쟁으로 나타난다. 개별적으로 사측에 대항해서, 또는 일부 집단적으로 사측의 부당한 착취에 대항해서 투쟁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투쟁들을 지속적으로 조직해내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일상적인 시기의 노동조합 집행부만큼 잘 조직되어 있고,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노동조합 집행부를 민주파들이 장악하려는 것은 위원장 등에 대한 자리욕심때문이 아니라, 민주적인 노조운영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그 이해를 대변하려다보면 노동조합의 힘으로 사측과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점을 새기지 않고 노동조합 집행부 장악 자체를 목적으로 사고하게 되면 조합원들이 야당에게 항상 하는 얘기인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집행부되면 똑같다”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이 아니어도 일반 조합원들 사이의 현장조직을 통해 노동조합보다도 더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다면 노동조합 집행부 장악은 그 의미가 반감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일상적인 시기에 가장 잘 조직되어 있는 기구는 바로 노동조합이다. 따라서 노동조합 집행부 장악이 현장투쟁의 전 과정에서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 집행부 장악을 통해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려 하고, 그 이해를 대변하려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사측과 마찰을 빚게 되는 것은 사측과 조합원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측은 이럴 경우 소위 당근과 채찍을 휘두른다. 집행부 몇몇에 대해 돈으로 매수하거나 여러 가지 혜택들을 주는 척하면서 매수를 하여 아예 사측에 코끼게 만들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민주적인 노조로 가지 못하도록 침탈들을 개시한다. 사측의 매수에서 대부분 넘어가고 일부 안 넘어간 집행부들의 경우 오히려 조합원들에게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결국 사측과의 투쟁에서 집행부 인자들 소수만의 고립된 투쟁을 하면서 지키면서 민주노조의 싹들이 죽어온 경험들은 노동조합 집행부 장악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자리잡혀왔기 때문이다. 노조 집행부 장악을 하든, 하지 않든 현장에서 사측의 다양한 억압과 부당한 착취들에 맞서 일상적인 현장 투쟁을 하나의 전체 과정으로 놓고 그 과정속의 한 부분으로 노조 집행부 장악을 놓아야만 노동조합 집행부가 되더라도 소위 똥 누러 갈 때 마음 틀리고, 똥 눈 다음 마음 틀리다는 비아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조업 등 다른 업종까지 포함해서)지금까지의 수많은 사업장들의 예를 들지 않고 버스현장에서의 예만 들더라도 일상적인 활동이 없는 가운데 선거 몇 달전부터 선거운동에만 본격적으로 움직이던 숱한 사례들 속에서 위원장 등 집행부를 장악한 사례들이 수도 없이 많아 왔지만 그들 사업장들 중에서 민주노조 건설을 한 사업장이 없다는 것은 가장 명확하게 이를 입증하는 사례이다. 지금까지의 많은 버스활동가들, 버스관련 단체 및 조직들의 활동방식이 바로 처음 장에서 비판한 개별적 법적투쟁, 선거주의였고, 이들은 조합원들의 의식을 조금씩이나마 바꾸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썩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은 행동이라도 같이 할 수 있도록 ‘조직’하지 않아왔기 때문에 막상 노조집행부를 장악하더라도 민주노조로 갈 수 있는 준비, 민주노조로 가기 위한 자신들의 능력들이 없었던 것이다. 민주노조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지속적인 현장투쟁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들을 전체적으로 꿰고 있지 못하다면 순간순간 감각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하는 임기응변만이 남게 될 것이고, 그것은 나침반을 잃은 항해를 하는 것과 같다. ◎ 집행부의 활동도 일상적인 투쟁을 통해서 다져진다 현재 야당출신이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는 버스현장들은 꽤 많다. 가장 가까운 예로 중앙고속의 경우는 대표적인 예이다. 시내버스 현장의 경우도 김포교통, 우신버스, 보영운수, 한남운수 등 상당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 사업장은 어떤가? 과거 어용과 다를바 없고, 나아가 민주파 활동가들이 써먹던 일부 기술들을 배워 조합원들 탄압을 더욱 정교하게 진행하고 있다. 대부분의 버스 현장이 30-40년의 어용의 역사들을 가지고 그 기간동안 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해왔다. 조합원들도, 어용노조를 바꾸자고 외치는 야당활동가들도 말로만 외치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흐릿하게만 통박때리고 있지 구체적으로 자기 몸에 배어있지 못하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순간 집행부를 장악한다고 민주노조가 바로 되는 것이 아니다. 집행부 장악은 민주노조의 완성이 아니라 민주노조로 가는 어려운 길의 첫발을 내미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직변경을 했던 버스현장들 조차도 불과 몇 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어용한국노총 산하로 들어가면서 그 현장은 다시 조직하기가 더없이 힘들어진 경우들이 있다.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준비를 일단 집행부 장악하고 해보자는 것은 무책임한 생각이다. 한 번 경험적으로 닥쳐보지만 그것이 실패하게 될 경우 그 사업장의 변화는 몇 배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계적인 교육이나 자기 몸에 실천을 통해서 배어있지 않다면 실패할 확률이 거의 대부분이다. 즉 막상 닥쳐보고 그때부터 준비해보자는 것은 사실상 그 사업장을 피폐하게 만들어 버리는 무책임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자! 그럼 그런 준비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갖춰질 수 있는가? 지속적인 일상활동은 조합원들에 대한 선전, 교육이 포함된다. 또한 선전과정을 통해서 집행부에 조합원들의 의견을 어떤 식으로 피력을 하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을 당연시하게 만든다. 일상활동을 앞장서서하는 활동가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나 의식들이 현장활동의 결과 나타나는 오류들, 성과들로 인해 더 자신감을 갖거나 때로는 자기의 생각을 고쳐먹게 만든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측과 어용노조의 탄압에서 활동가들 사이에서 어떤 사람은 말은 잘 하는데 막상 닥치니 뒤로 빼더라, 누구는 끝까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는 등의 서로간의 검증이 된다. 또한 끝까지 활동하는 활동가들 자신이 탄압에 대해 단련이 된다. 조합원들은 지금까지 고향선후배, 어느 버스회사 출신 등의 인맥관계를 중심으로 뭉쳐왔던 어용의 조직적인 뿌리에서 이제 지속적으로 현장활동을 하면서 내용, 실천적으로 보여준  활동가들에 대한 신뢰를 보낸다. 이 과정은 기존까지의 어용의 조직적 뿌리인 인맥, 돈 관계를 현장활동의 실천과 그 내용으로 판단하게 하는 과정이다. 또한 그것을 판단하게 하는 과정도 어떤 실천사업 속에서 토의와 결정된 사항에 대한 행동통일, 그 결과에 대한 평가 속에서 다시 오류들을 걸러내는 과정을 일상적으로 진행하면서 민주노조의 단단한 기반인 조합원들의 의식적 각성과 민주적 절차를 몸에 익히게 하는 과정이 진행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단 몇일, 몇 개월의 과정이 아닌 몇 년간의 지속적인 과정으로 현장에서 뿌리내린다면 민주노조 건설의 단단한 뿌리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뿌리가 단단하게 내리고 있으면 웬만한 천지풍파에 대해서는 뽑히지 않는다. 그러한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집행부를 장악할 때에만 이미 준비를 해 들어가면 가장 잘 조직된 노동조합조직의 최대치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역시 일상적인 활동을 통해서만 민주노조의 기틀이 다져질 수 있다는 것이고, 그 일환으로 집행부 장악이 될 경우에만 사측의 어떠한 회유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조합원 동력은 노조집행부의 의지와 그에 따른 일상적인 투쟁들을 통해 올라간다 한성여객노조의 총파업을 보면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것이 있다. “조합원 동력이 안 따라 준다”는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현 한성여객노조 집행부의 핑계이다. 그렇다 이건 핑계다. 그 근거는 이미 파업 전 조합원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쟁의 찬성, 파업 첫 날 보여준 조합원들의 자발적인 지도부 비판, 그 후 지속적으로 지도부에게 강력한 투쟁전술을 구사하라고 압박해오던 각 분임조들의 토론 및 그 결과보고, 파업 과정에서 황충구 위원장의 각종 밀실 타협 등이 밝혀지면서 즉각적인 조합원 총회를 통해 불신임 시키고 새로운 직무대행을 선임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새로 바뀐 집행부마저 아무런 전술 구사 없이 파업현장 안에서 시간때우기만을 ‘강요’하고 여타의 어떤 제안들에 대해서는 막무가내로 잘라버리는 과정이 근 40여일을 지내오면서 조합원들은 “집행부 바뀌어도 다를 것 없고, 오히려 더 안 움직이네”라는 심각한 패배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니 현장 안에 죽치고 있어도 매사에 의욕을 잃어가고 적극적으로 임하던 각종 토론, 간담회 등에서 이제는 별반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하지 않고 있다. 이것을 보고 지도부에서는 조합원 동력이 없어서 못한다라고 얘기하지만, 사실 조합원 동력이 가장 올라왔던 시기에 지도부가 어떻게든 조합원 동력을 떨어뜨리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조합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튀지 마라”는 식의 협박을 일삼았던 부분들이 조합원들을 현재의 사기저하된 모습으로 만든 것이다. 실제로 파업에 임하기 직전의 한성여객노조에서는 조합원들이 불과 전체 노동자 340명 중 100명이 갓 넘었었다. 그러나 매주 수요집회 과정에서 관리자들에 대한 타격, 흥안운수 본사에서 조장우 사장 타격, 진입투쟁 등을 통해서 지도부가 정말 할 것 같다는 모습들을 보여주면서 급속하게 조합원 숫자가 230여명이 되었고, 쟁의행위 찬반투표에서는 223명 중 217명 투표, 211명 찬성이라는 어느 사업장에서도 보여주기 힘든 압도적인 찬성을 했다. 그리고 그 당시 진행하고 있던 철야 천막 농성에 조합원들이 김치를 싸들고 올라오거나 새벽까지 함께 밤을 새면서 앞으로의 결의를 다졌다. 조합원들의 동력을 끌어 올리는 것은 지도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한 번 올라선 조합원들은 이제 지도부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더 앞서나가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조합원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얘기한다. 그렇다. 대중은 이중적이다. 어느 시점까지는 함부로 올라서려 하지 않는다. 함부로 앞장서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이 모든 책임을 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까지 지도부가 의지를 갖고 동력을 끌어올린 후부터 조합원들은 이제 과거에 주저했던 어려운 선택들을 스스로 한다. 과거 동력이 올라오기 전에 조합원들은 자신들을 개개인으로만 생각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까지 동력이 올라가게 되면 개인이 아닌 집단, 조직의 성원으로 사고하게 된다. 그 조직 속의 일부로서 판단하고 모든 책임을 개인이 지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에서 이제는 함께 책임을 진다는 조직적인 사고들을 터득하게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업장들에서 각종 파업투쟁 등을 통해서 조합원들이 임금, 노동조건 등을 쟁취한 것 외에 더 큰 성과는 개인적인 사고위주에서 조직적인 사고와 조직적인 실천을 몸에 익혀왔다는 것이다. 노동자에게는 조직만큼 강력한 무기가 없다. 조직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한 번 맛보고 깨닫게 되면 이제 노동자들은 과거에 억눌리고 눈치보던 무력한 개인이 아닌, 당당한 역사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그 것을 힘으로 투쟁하는 것은 이렇게 당장에 쟁취하는 성과물뿐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고 그 힘이 어느만큼 강력한가를 몸소 맛보게 하는 눈에 안보이는 더 큰 성과들을 주게 된다. 조합원들의 동력은 어느 정도 올라가면 지도부를 뛰어넘으려 하지만 그 동력을 처음에 조직하고 상승시키고 계속 유지시키는 것은 지도부의 의지와 그 의지를 조합원들에게 투명하게 공유하면서 가능하다. 이것은 어용노조의 관성에 굳어진 사람들이 보기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피곤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실제로 어용노조에서 민주노조로 건설하는 과정은 그만큼 힘든 과정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 과거 어용과 마찬가지로 집행부만 어떻게든 장악해보려는 개인적 욕심이 아니고, 진정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과정은 필수이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 조합원들의 의식적 성장은 바로 민주노조가 어용의 각종 음해, 사측의 탄압 등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는 기반이다. 이 기반이 허물어진다면 당연히 민주노조도 흔들린다. 핵심은 이 기반을 지속적으로 유지, 강화하기 위한 일상적인 활동이 집행부를 장악하더라도, 집행부에 올라가 있지 않더라도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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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한다는 것

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김 준 태(버스노민추 정책국장) ◎ 어용에서 어용으로 … 여전히 바뀌지 않은 버스현장 코오롱고속을 비롯해 고속버스 노동조합들, 나아가 서울시내버스 및 전국의 버스현장 노동조합들이 어용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러나 과거의 수많은 야당 활동가들도 어용노조를 바꾸자고 했지만 여전히 어용노조 판도는 변화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민주버스나 민주노총(한성여객)으로 조직변경한 노동조합의 총 조합원 숫자도 3000도 되지 않는 실정이다. 나머지 9만여 조합원들이 있는 버스현장들은 여전히 암흑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 이미 지난 전국버스노동자협의회 시절에만해도 50여명이 넘는 야당활동가들이 집행부를 장악했으면서도 최소한 이들 사업장들이 민주적인 노조로 거듭나지 못하고 아직도 어용의 아성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결과 많은 조합원들과 활동가들은 당연히 “똥 누러갈 때 마음틀리고, 똥 누고 나올때 마음 틀리다”면서 누가 집행부 되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는 듯이 체념하고 있다. 이런 결과는 민주노조에 대한 패배주의만 확산시키게 되고,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노조집행부의 노조민주화 사업에 한 발 떨어지게 만든다. 나아가 이런 민주노조를 건설하기까지의 힘들고 지루한 일상 현장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지 않도록 만든다. ◎ 과연 어용을 민주로 바꾸기 위해 무엇을 제대로 했던가? 처음에 열의를 가지고 버스현장에서 의욕적으로 노조를 민주화시켜보고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면 대번에 기존의 야당 선배들은 “너무 강하면 부러져”, “조합원들 정서는 그게 아니야, 아직은 일러”라면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온 경험들을 통해서 버스현장의 변화가 상당히 오랜 시일이 흘러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얘기한다. 심지어는 ‘바뀌기 힘들다, 나아가 바뀔 수 없다’는 비관적인 얘기들도 많이 한다. 시내버스보다도 고속버스 현장은 더욱 그 정도가 심하다. 과연 버스현장은 다른 현장들에 비해서 가능성이 희박한 곳인가? 결론적으로 얘기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에 와서 변화를 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과거의 수많은 야당활동가들의 잘못된 활동방식에서 나타났다. 버스노동자의 근무 방식이 “운전 나가면 혼자 독고다이이고, 자기가 왕이다. 이에 따라 개인주의적인 성향들이 강하다”라는 것은 가장 대표적으로 버스현장의 조직화가 어렵다는 근거이다. 거기에 더해 고속버스현장의 경우는 시내버스, 시외버스, 관광버스 등을 해 오다가(굴러먹다가) 들어오고, 들어올때 브로커들에게 얼마 건네주고 들어오는 식으로 코끼고 들어오는 사슬이 복잡하게 되어 있고, 전국 사업소들이 있다보니 자주 보기 힘들고, 모이는 것도 지역별, 연고지별로 모이게 될 수밖에 없는 조건들 때문에 더욱 조직하기 힘들다고 얘기한다. 상당부분 맞는 얘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다. 예를 들어 혼자서 일하든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든지 간에, 각 현장별로 여러 가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현장문제들은 호남지역이든, 서울이든, 경남지역이든 마찬가지 이다. 친목계 중심으로, 연고지, 인맥 중심으로 모이는 모임의 경우에는 앞에서 얘기한 대로 지역별 한계들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한 사업장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사안들을 중심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면 다른 지역의 조합원들과도 공통된 문제를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 질 수 있다. 현장문제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많은 야당 활동가들이 과거 십 수년 이상을 활동하면서 잘못된 활동방식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인맥, 개인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친목계’ 수준의 활동을 할 것인가? 현장 내의 현안문제를 가지고 개인적 관계를 넘어서는 ‘현장조직’ 수준의 활동을 할 것인가?가 그 갈림길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대부분의 야당활동가들은 법적인 활동, 그것도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법적인 활동에 집중해 왔다. 재미있는 것은 버스현장의 활동가들은 ‘개별적 노동법’인 근로기준법에는 빠삭하다. 그러나 ‘집단적 노동법’인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에 대해서는 그만큼 잘 모른다. 민주노총의 현대자동차의 현장조직 활동가들을 본다면 그 반대로 근로기준법에 대해서보다는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에 대해서 빠삭하다. 이 차이가 왜 나타나는 것인가? 그건 지금까지 버스현장의 활동가들은 ‘개별적’인 활동 중심을 해왔다는 것이고, 선진적인 다른 사업장에서는 ‘집단적’인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개별적인 노동법인 근로기준법에 따라서 회사를 상대로 임금체불, 휴게-식사시간 등 조합원들 누구나 겪고 있는 현안문제를 야당 활동가 자신만 ‘걸고’ 받아내는 방식은 일단 자신의 권리는 찾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야당활동가는 곧 바로 사측에 찍혀서 요주의 인물로 견제되고, 그 조합원과 함께 뭔가를 하려는 다른 조합원들은 회사와 어용노조의 서슬이 무서워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한다. 쉽게 말해 개별적인 법적 투쟁을 하면서 자신의 권리는 찾지만 다른 조합원들과의 조직적인 활동을 오히려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자신은 조합원들 사이에서 “저 기사 보니까 법도 많이 알고 참 똑똑해”라는 ‘명성’을 얻을지 모르지만 그걸로 끝이 되어 버린다. 이미 사측과 어용에 찍혀서 뒤늦게 조합원들과 뭔가 해보려 해도 그때 조직하는 것은 쉽지 않게 되어버린다. 그 사이 선거는 다가온다. 여전히 이 야당활동가는 의욕을 가지고 어용을 바꿔보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조직은 별로 없지만 ‘한 방에’ 뭔가 할 수 있는 기회가 ‘선거’에 있다고 생각하고 선거에 뛰어들게 된다. 선거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당연히 최대한 활용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들어가야 하는 큰 사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선거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선거 또는 집행부 장악하는 것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고, 그것이 가장 크다고 보는 생각은 필연적으로 선거자체에 매몰되게 한다. 선거, 집행부를 활용할 큰 기회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선거, 집행부만이 뭐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반드시 ‘선거주의’에 빠지게 된다. 앞에서 과거 야당활동가들이 집행부를 무수히 장악했으면서도 여전히 어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예들은 선거주의가 실제로 노조를 민주적으로 운영하게 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장 최근에만 김포교통 김상영 지부장, 우신버스, 보영운수 등에서도 야당활동가들이 당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 아는 놈이 더 한다고 오히려 더한 어용이 되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이제 우리는 과거 야당활동가들이 중심에 두어왔던 활동방식의 전부를 간략하게 보았다. 즉 ‘개별적인 법적투쟁, 그것의 결과 선거주의에의 경도’가 수많은 버스현장의 야당활동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적인 잘못된 활동방식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순수한 마음으로 출발을 하든 위원장이 되고 싶은 욕심에 출발은 하든 과학적으로 활동의 체계들을 계획하고 만들어가고 평가하는 과정없이 무대포로, 계획없이 진행하는 이런 활동방식이 결과적으로는 현장 내에서의 변화를 이뤄내기는 커녕, 조합원들을 더 침체시켜왔다는 것이다. 활동가가 무식한 것은 개인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그 현장의 변화의 원동력인 조합원들을 패배주의에 젖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활동가의 무식과 비과학성은 현장을 말아먹는다. 어용노조를 끝장내야 한다라고 마음으로는 다짐하면서 자신이 이론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활동방식에서도 일관되지 못한 방식, 법적투쟁과 선거투쟁에 매몰되는 방식으로 나타나다보면 잘 되어봐야 집행부의 아무개 조합장 갈아 치우고 다시 어용이 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 민주노조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대부분의 버스현장의 활동가들은 어용노조를 몰아내자고는 얘기하면서 정작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만들어 나가야 할 ‘민주노조 건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린다. “조합원들의 정서가 아직은 아니다”, “우리가 아직 힘이 없는데 민주노조를 걸어버리면 회사로부터 탄압이 더 거세진다”는 게 대표적인 이유다. 그러나 이는 핑계일 뿐이다. 정서를 외치지만 사실 조합원들의 정서는 현재의 어용노조 하에서 말만 못할 뿐 속으로 쌓여있는 다양한 불만들이 농축되어 있다. 그 어용에 대한 불만의 정서를 풀 수 있는 방법 역시 민주노조로 가는 길 밖에 없다. 우리에게 지금 힘이 없다는 것 역시 핑계일 수밖에 없다. 그 힘이 얼마만큼 갖춰져야 민주노조로 가겠다는 것인가? 항상 우리가 과거 수많은 선진적인 현장들, 과거 역사들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조직의 힘은 오히려 조직만 하고나서 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힘으로 투쟁으로 돌파하는 가운데서 조직이 강화되고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수많은 친목계들이 있어왔지만 그 친목계에 계원들을 늘리기 위해서만 작업을 했고, 기껏해봐야 선거에서 몰표를 얻기 위해서 작업해 왔다. 문제는 친목계의 계원들 중 사측이나 어용노조를 상대로 실제적인 현장투쟁을 시작하게 되면 그 친목계의 쪽수가 10명이든 30명이든 규모에 상관없이 낱낱이 흩어지고 나아가 투쟁하는 계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피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조직하고 그 다음에 뭔가 해본다? 이 말처럼 기만적인 얘기는 없다는 것이다. 일단 민주노조 건설이라고 얘기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민주노총으로의 조직변경이다. 사실 내용적으로 민주적인 절차들을 갖춘다고 하는 것도 민주노총으로의 조직변경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내용 자체를 갖추기가 힘들다. 즉 내용과 형식이 맞아 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민주노총으로 간다고 곧 바로 민주노조의 내용이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니다. 내용을 만드는 것, 형식을 바꾸는 것 모두 바로 그 현장의 핵심적인 활동가들이 꾸준히 부딪치면서 일궈나가야 하는 투쟁의 성과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거의 활동가들은 어떠한 핑계를 대든 민주노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어용노조를 바꾸자는 것으로만 소극적으로 일관하면서 다시 그 활동가들이 어용노조의 길을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어용노조를 바꾼다는 목적과 그것을 바꾸어서 민주노조로 가야 한다는 전망이 결합되지 않는다면 절름발이 투쟁만을 하는 것이다. 어용노조를 몰아내자고 하면서 한 편에서는 민주노조를 가야 한다고 조그만 목소리로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민주노조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활동가들이 민주노조가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민주노조로 갈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단지 지금의 어용노조가 문제이니까 어용노조의 반대로 구호만 민주노조를 얘기할 뿐, 민주노조의 내용을 빠삭하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노조란 무엇인가? 민주노조의 역사를 일일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들 속에서 수 많은 활동가들이 정립한 몇 가지 원칙을 봐야 할 것이다. 선배들보다 후배들이 좋은 이유는 선배들의 수십년의 경험을 후배는 단 한순간에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조는 기본적으로 민주성, 자주성, 투쟁성, 변혁지향성 등의 말로 정리된다. 민주성이란, 노동조합의 다양한 결정 및 집행의 절차 등이 투명하고 민주적인 절차와 토론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다수의 결정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예를 들 것 없이 현재의 어용노조에서 민주적인 절차란 찾아 볼 수 없다. 대의원대회가 집행부의 따까리 노릇을 하고 있는 것, 선거 때 자행되는 갖가지 부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조는 대의원대회, 상집회의 등 각종 회의체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 나아가 이런 회의 결과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그 공개된 내용을 조합원들 토론을 부치거나 여전히 쟁점으로 남을 경우 교육, 공개 토론회 등을 개최하여 의견을 한군데로 모아간다. 이 과정이 한번에 지시를 내리는 어용노조보다는 시간은 많이 걸린다. 또한 다양한 의견들이 서로 나오고 논쟁이 벌어지는 과정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토론, 각종의 공개적인 회의 등을 통해서 나타난 이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투명하다보니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참가와 결합을 통해 보다 힘있게 추진되게 된다. 민주노총 사업장이 한국노총 사업장보다 그래도 더 단호하고 강력한 투쟁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민주성을 통해서 조합원들을 한데 묶고 조합원들의 힘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성은 사측과 정부에 대한 자주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현재의 어용노조들은 사측으로부터 다양한 형태로 떡고물을 받아먹고 있다. 이미 집행부 장악 전부터 사측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측의 노무부서 역할을 자처하다보니 당연히 사측의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할 수 없다. 특히 버스현장에서 사측에 대한 투쟁이 곧바로 어용노조에 대한 투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용노조가 사측으로부터 자주적이지 못하고 하부부서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조는 당연히 사측에 대해 자주적이다. 노조사무실에 관리자가 기웃거리지 못하게 함은 물론, 다양한 형태의 매수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역으로 사측의 그런 시도를 조합원들에게 공개하면서 사측의 입김을 미연에 방지한다. 한번 코끼면 계속 사측에서 당기는 대로 갈 수 밖에 없다. 단 한번도 코 끼는 일을 해서는 안되며 그래야만 노조의 자주성이 보장될 수 있다. 민주성과 자주성이 담보되는 것과 함께 노조는 투쟁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투쟁의 역사이다. 민주노총의 처음 출범 역시 투쟁을 통해서 쟁취된 것이다. 오죽하면 투쟁없이 쟁취없다라고 하겠는가? 다만 투쟁의 수위와 방식은 사안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앞서서 지금까지 민주적이지 못하고 사측으로부터 자주적이지 못해왔는데, 그 관행을 바꿔나간다고 생각해보자. 알박해왔는데, 알박은 불법이며 그래서 알박을 노조차원에서 막으려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사측은 노조의 지침에 따라 알박을 제일 처음 거부한 조합원을 상대로 징계 등의 탄압을 가해올 것이고, 그에 맞서서 노조에서는 선전물을 뿌리든, 공고문을 부치고 법적대응을 하든지 간에 어떤 식으로든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투쟁의 수위는 달라질지 몰라도 민주적인 노동조합은 사측에 맞서 투쟁성이 있어야만 조합원들의 최소한의 권리를 지켜낼 수 있는 것이다. 변혁지향성이란 노조가 단지 자기사업장의 이익에만 국한되어서 자기 울타리만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코오롱노동조합이 민주적으로 가려고 노력을 한다면 당연히 고속지부 및 자동차노동조합연맹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 들어오려 한다. 현재 버스어용노조들은 서로 간에 단합이 잘되고 여전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단위 사업장 하나가 전체 자노련과 맞서 싸우는데는 힘이 많이 드는 것은 뻔하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한성여객노조 투쟁을 죽이기 위해 지난 번 서울버스노조에서 서울시내 각 버스사업장의 어용들을 착출해서 500명이 구사대로 동원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것이다. 즉 현재의 한성여객만 보더라도 사실은 한성여객 사측과 한성여객노조의 1대 1 싸움이 아니라 사실은 한성여객노조 대 서울시내 모든 버스사업주(서울버스사업조합)와 서울버스노조(50개 사업장 어용노조)와의 투쟁인 것이다. 어용과 사측은 서로 연대하고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데 우리는 다른 사업장은 외면하고 우리사업장만 바라보고 있다면 질 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이처럼 자기 사업장의 테두리에만 갇힌 소위 우물 안 개구리를 ‘조합주의’라고 한다. 현재 조합주의는 각 민주노조들의 연대투쟁을 가로막고 나아가 자기사업장의 문제마저 제대로 풀기 힘들게 만든다. 결국 버스현장에서도 한 단사의 투쟁과 민주노조 건설은 핵심이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그 사업장이 제대로 민주노조로 우뚝 서고 끝까지 민주노조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버스현장의 투쟁들이 활발해지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어용과 사업주들의 연대보다 더 강력한 각 사업장별, 사업장 내의 소수 핵심활동가들의 투쟁들이 긴밀하게 연대되고 상호간에 지원되어야만 거대한 어용 버스노조들을 바꿔낼 수 있다. 즉 조합주의에 갇히지 않고 더 넓은 전망을 가지고 투쟁을 해 가는 것이 바로 변혁지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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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삶과 철학/민주노총 노동자학교

노동자의 삶과 철학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1.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 2.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3. 노동자의 인간관 4. 노동자의 세계관 5. 노동자와 경제 6. 노동자와 역사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 1.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 노동자의 철학이 따로 있나 ‘노동자의 철학’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칫 ‘노동자의 철학’이 따로 있고 ‘자본가의 철학’이 따로 있고 ‘권력의 철학’이 모두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중에서 ‘노동자의 철학’을 선택하겠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노동자의 철학’이란 ‘노동자가 알아야 할 세상의 가장 올바른 철학’이란 뜻이다. 누구의 관점이 옳은가 똑 같은 사실을 노동자는 노동의 관점으로, 자본가는 자본의 관점으로, 권력은 권력의 관점으로 본다. 사실은 하나인데 설명이 세 가지이니 그 중에 정답은 하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관점이 옳은 것일까? 이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들일 테니 당연히 노동자의 관점이 옳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옳은 것이 아니다. 80년 9월부터 이런 활동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으니 내가 노동문제와 관련된 일을 해온 지 20년이 넘었다. 20년이란 세월은 개인의 인생에서는 꽤나 긴 기간인지 모르나 장구한 역사 속에서는 점에 불과할 만큼 짧은 순간이다. 그런데, 20년 동안 우리 나라의 노동조합을 지켜 본 알량한 경력만으로도 나는 노동과 자본과 권력이 하나의 사실에 대해 각각 다르게 주장하다가 몇 년의 세월이 지나면 신기할 정도로 노동자의 주장이 옳다고 밝혀지는 경우를 수 없이 봤다. ‘전교조’ 의 합법화가 그랬고 ‘위험작업중지권’도 그랬고, ‘제3자개입금지’도 그랬다. 노동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거의 모든 문제가 그랬다. 처음에는 정신나간 소리처럼 들릴지라도 몇 년이 지나면 대부분 노동자의 주장이 옳았다. 전두환․노태우가 구속되는 데에는 15년의 세월밖에 걸리지 않았고, 박정희의 그릇된 경제 정책이 우리나라를 빈 깡통으로 만들고 말 것이라는 예언은 24년 후에 정확하게 적중했다. ‘아하, 이래서 노동자가 진보세력이라는 것이로구나’ -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현실이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세상을 구조적으로 보자 노동자의 주장이 옳은 이유는 노동자들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관점이 옳은 이유는 노동자들의 지식과 교양과 인품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우리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숲에 보면 키가 큰 나무가 있고 키가 작은 나무도 있다. 키가 큰 나무는 그 나무의 품성이 아무리 훌륭해도 키가 작은 나무에게는 햇볕을 가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키 작은 나무가 공평하게 햇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키를 크게 키우거나 키가 큰 나무의 햇볕을 가리는 가지를 쳐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이 세상을 구조적으로 보지 못하도록 훈련시킨다. 개인의 성실한 노력만으로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뚫고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만든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기 혼자만 아름답고 고운 생각을 품고 ‘자아 발견’을 하면 그것이 가장 가치 있고 올바른 삶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노동자 계급의 특권 노동자의 주장이 옳은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구조가 노동자의 관점이 본능적으로 옳을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기 때문이다. 좀 거창하게 말한다면, ‘노동 해방’을 주장하는 우리의 관점이 옳은 것은 고대사회 ‘해방 노예’의 관점이 옳았고, 중세사회 ‘해방 농노’의 관점이 옳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관점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었던 것이다. 가치 생산을 담당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확대되고 그 상대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는 축소되는 과정 - 그것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다. 때로 전진하고 후퇴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길게 봐도 결국은 올바른 관점을 가진 사람만이 올바른 전망을 세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만이 가지는 특권이란, 쉽게 말하면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은 그러한 특권을 도저히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자본가가 자신과 가족만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신문을 매일 장식하는 대형 사건들이 대부분 그런 노력의 결과들이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집단 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사익’이 모여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공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 바로 노동조합이다. 노동자들이 노력하는 과정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촉진시키는 것이 바로 노동조합이고 구체적으로 노동조합에 의해 그 활동이 추동되는 것이다. 조합원 개인이 하는 작은 활동일지라도 그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여전히 ‘역사의 기관차’이다. 2.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밝을 - 哲, 배울 - 學)’이란 단어는 본래 영어 'Philosophy'의 발음을 본따 만든 단어로 본 뜻에 충실한 번역은 아니다. 'Philosophy'는 '지식을 사랑한다'는 어원에서 온 단어로서 엄밀한 의미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과는 거리가 있다. 동양에서는 철학을 '도(道)'라고 표현했다. '머리카락을 날리며 걸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철학이란 막연하고 신비롭고 골치 아픈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직접 발로 걸으면서 깨달아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더욱이 노동자의 철학이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활동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단순한 생활을 하는 노동자라도 어떤 문제에 대해 입장, 가치, 판단, 태도 등을 결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의 철학이다. 철학의 세 가지 영역 철학은 일반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영역을 갖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존재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무엇’인가 라는 문제이다. 도대체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석도 이 영역에 속한다. 둘째는 ‘인식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나 자신과 사회와 자연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셋째는 ‘실천론’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그러한 인식 위에서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 자신의 삶의 내용을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설명하는 노동자 철학의 명제들도 모두 위의 세 가지 영역 중 하나에 속하는 것들이다. 3. 노동자의 인간관 인간은 자주적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예속에 저항하여 자주적인 삶을 살고자 원한다. 그래서 억압된 삶 속에 처하게 되면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다. 짐승과 인간의 중요한 차이점 중에 하나는 바로 이런 자주적인 정신이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인간은 노예적인 삶으로부터 만인이 평등해지는 삶을 추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사회의 노예보다 중세사회 농노는 그 권리와 자유가 보다 확대되었고 중세사회의 농노보다 자본주의사회 노동자의 권리와 자유가 보다 확대된 것은 모두 인간이 억압에 대하여 저항하고 보다 자주적인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가 모두 당연히 진리라고 생각하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 역시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예속을 거부하는 인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해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식민지의 해방을 위해, 독재정치의 민주화를 위해 다양한 투쟁이 어느 나라에서나 일어났던 것도 인류가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비인간적 억압과 굴종에 대항하여 권리와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싸우는 ‘노동운동’이나 ‘노동해방’도 물론 이러한 인간의 자주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혼자 살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의 삶은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집단을 이루며 서로 협력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표현 역시 그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은 ‘나’이지만, 인간관계를 떠난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친목 모임, 하다 못해 버스를 같이 타고 출퇴근을 하는 사람, 내가 먹을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과 떨어져서 고립된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즉, 더불어 삶을 개척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맞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것도, 다른 어떤 짐승들보다 뛰어난 사회를 만들고 이를 유지시켜 나가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자신의 발전을 꾀할 때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하는 것 역시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결국, 사회가 발전하면 개인도 그만큼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면 개인도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즉 인간다운 삶은 개인적인 노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문제를 그 주변의 사회적 관계와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것을 ‘구조적 인식’이라고 한다. 인간 개인의 문제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권력과 자본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 내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인 양 호도하고 사람들이 주로 인간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조장한다. 4. 노동자의 세계관 사회에는 서로 대립하는 존재가 있다. 사회는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세력과 기득권을 고수하려고 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져있다. 인간은 위 두 세력 중 어느 한 곳에 소속되게 마련이고, 이 집단은 크게 보아 대립되는 계급으로 나뉘어진다. 지배/피재배계급, 자본가/노동자계급, 보수세력/진보세력으로 나누어진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집단의 대립과 갈등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는 발전해나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을 가지고 이윤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본가 집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비를 버는 노동자 집단의 대립이 기본 축을 이룬다. 사회는 변화하고 발전한다. 어떤 집단도 갈등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노동자와 기업주들처럼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 집단들 속에서 갈등과 대립,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문제는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해 나가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방법인가 하는 것이다. 이런 갈등 때문에 분쟁과 저항이 일어나며, 이 과정에서 보다 진보적인 견해를 가진 집단이 승리할 때 그 사회는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갈등은 변화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갈등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갈등이 있는 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라는 속담처럼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면 나약해지고 시들어 버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변화가 없는 삶과 사회는 침체된다. 모든 것은 항상 다른 것으로 변화하면서 흘러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한다는 것이야말로 실로 변할 수 없는 만물의 실상”이라는 사상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고대의 자연철학 시대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논란되어 온 철학 문제 중의 하나는 바로 '운동과 변화의 문제'였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변치 않은 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만물은 다 생성(生成)한다. 만물은 흐를 뿐 어떠한 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다. 만물은 이루어진 것이며,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무 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오직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삶은 변화하고 있다.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다."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변화에는 어떤 규칙이 있다. 대립물 간의 갈등이 그 법칙의 바탕이다. 서로 대립되는 것들이 운동을 일으키며, 만가지 변화를 만들어 낸다.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운동은 ‘투쟁’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투쟁이야말로 변화의 원동력이다. 투쟁을 통해 갈등은 새로운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 이처럼 “만물은 대립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사상 역시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물은 대립을 통하여 발생한다." "병이 있기에 건강은 좋은 것, 악이 있기에 선은 좋은 것, 배고픔이 있기에 포만이 좋고, 피곤함이 있기에 휴식이 좋은 것이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왕이다." "만물은 투쟁을 통해서 생긴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조화가 아니라 실은 그 조화 속에 들어 있는 대립물 사이의 긴장이고 투쟁이다." 이처럼 사물의 존재는 자신과 반대되는 것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가치를 갖게 된다. 변증법 철학에서는 이를 '상반(相反)되는 양자간의 융합(融合)'이라 한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대립에 기인"한다. 자연은 이 대립으로부터 조화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깊은 내면에서는 그 대립되는 것들이 하나가 되어 있다. 생성의 내면에는 대립물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물은 자기 혼자 독단적(獨斷的)으로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자기에 반대되는 것, 반대되는 현상과 대립하거나 때로는 서로 섞이기도 한다. 투쟁이 필연적임은 이 세상에서 대립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5. 노동자와 경제 경제를 알아야 세상이 바로 보인다 노동자가 경제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제를 알아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를 모르면, 권력과 자본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고임금 망국론’이 어째서 새빨간 거짓인지 그 진실을 볼 수가 없다. 경제를 모르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왜 잘못된 정책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경제를 모르면, 노동자의 월급봉투가 매년 두꺼워져도 어째서 우리의 삶은 매년 더 가난해지는 것인지 그 진실을 볼 수가 없다. 경제를 모르면, 어째서 인류의 역사가 원시시대부터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과정을 겪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역사와 경제 지금까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려는 많은 노력의 결론은 “경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해답을 구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이 ‘프랑스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변호사나 유복한 상인이나 시골 귀족의 상처받은 허영심이라든가 말 많은 철학이 아니라, 2천5백만의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굶주림, 추위, 괴로움... 이런 것들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혁명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거룩한 이념은 굶주림의 해결이라는 절박한 문제에 뒤따라 나온 자연스러운 결론인 것이다. 역사와 경제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석을 애써 부인하려는 노력이 최근까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중세시대에는 역사는 초월적 존재인 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에 불과했고, 20세기초까지도 역사는 ‘위인의 전기’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탁월한 한 역사학자조차 그들의 동료 역사학자들이 “역사상의 위인을 사회적 및 경제적 허수아비처럼 취급하고 그 위인들에 대한 대량살육을 자행했다”고 비난했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그와 같은 사회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경제적 조건이다. 역사는 훌륭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 인간들이 생활해 온 모습이고, 그들의 경제적 욕구가 반영되어 온 과정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최근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매년 하나씩 출현한 통치 이데올로기들... ‘신경제’ ‘국제화’ ‘세계화’ ‘신노사관계구상’ ‘신자유주의’ 이 모든 통치이념들이 모두 경제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경제를 분석하고 전망한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양한 시각과 방법이 사용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현재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그 특성은 우리나라 국민, 특히 우리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세계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 그 특성은 어떻게 변화 발전할 것인가를 옳게 규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으나, 우리 노동자 활동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현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똑 같은 한국 경제의 실태를 자본가는 자본가의 입장으로, 노동자는 노동자의 입장으로 보게 된다. 사실은 같을지라도 그 평가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장래의 전망을 옳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관점에서 정확하게 이해한 쪽만이 사업의 방향을 옳게 세우고, 그 전망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객관'은 ‘객관'대로 파악해야 노동자에게 유리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그럴 때 ‘노동자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장기적으로 역사 변화를 바라보는 눈, 궁극적으로 민중의 승리라는 믿음에서 집어내는 현실 변화의 맥락 잡기... 이런 것일 수 있다. 6. 노동자와 역사 역사 발전의 법칙 선사시대를 빼고 실증적 기록이 남아있을 때부터 따지면 인류의 역사는 대략 얼마나 되는 것일까? 성경까지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할 경우 기독교의 출발이 되었던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2800년경이었으니 모두 5천년쯤 되었다고 본다. 5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류역사는 신기할 정도로 한쪽 방향을 진행되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인류역사도 줄기차가 한쪽 방향을 지향했다. 그 방향은 5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중세 사회에서는 농노가 노동을 담당했다.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생략하자. 다만, 고대의 노예는 잘게 부숴져서 연못의 붕어밥이 되기도 했고, 중세의 농노는 결혼 첫날밤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는 권리를 영주에게 받쳐야 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알아두자. 그 시대에는 그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관이었다. 고대 노예의 생활에 비하여 중세 농노의 생활은 한결 그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었고, 중세의 농노에 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 생활 역시 그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을 직접 담당했던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어 온 것에 비하면 중세의 영주는 고대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오히려 축소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 역시 중세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축소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계급이 있고,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이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는 사회 계급은 그렇게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을 진행되었다. 그 방향이 5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바로 “역사는 담당 주체의 세력 확대 과정이다”라고 표현한다. 그 시대의 노동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주체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 역사의 진행 방향이라는 뜻이다. 그 진행 방향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자신있게 반대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방향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노예제도가 문명사회에서 철폐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똑 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 나타나면 역사가 잠시 수십년쯤 뒤로 후퇴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지금은 신자유주의라는 망령 때문에 역사가 잠시 주춤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역사 담당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자유과 권리가 확대되는 과정에는 그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시대 노예의 피 어린 역사는 영화 ‘스팔타쿠스’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고, 중세 시대 농노의 해방 전쟁은 ‘토마스 뮌쳐’ 등에서 그 모범을 본다. 역사의 강물은 그렇게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 가능했다. 노동자가 역사를 똑바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의 강물을 밀고 가는 활동에 자신감을 준다. 지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끝내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노동자의 인생을 보람있게 만드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다. 역사와 경제를 이해하는 올바른 철학이 우리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합법칙성 노동운동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침체국면에 빠지기도 하고, 고양국면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정체되기도 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도 한다.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이것이 노동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이다. 언제나 동일하게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비를 겪으면서, 마치 고개를 넘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외형상 침체국면은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요구와 불만이 축적되는 시기이다. 이러한 불만과 요구는 언젠가 반드시 표출된다. 침체 가운데서도 노동운동 역량은 쉬임없이 고양․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는 반드시 비약적 발전을 준비한다. 축적된 불만은 다음의 고양국면을 향해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장명국 씨 같은 이가 오래 전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에 “어려울 때는 버티는 쪽이 이긴다”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었다. 침체국면을 지나 노동운동이 비약하고 고양되는 시기가 되면, 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고, 투쟁전술이 광범위하게 구사되며, 정치적인 투쟁의 수준이나 이념도 급속하게 발전한다. 87년, 88년의 노동자 대투쟁과 96년말과 97년초를 뜨겁게 달군 총파업투쟁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노동운동의 발전은 침체와 고양, 정체와 비약, 패배와 승리를 거듭하면서 역사를 이끌고 가는 기관차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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