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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

...이혼할 만큼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었나? 하지만 결국 나는 그 대답은 알아내지 못하고 다만 지극히 하찮은 우연들의 연쇄과정에다 대고 왜 그래야만 했느냐는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사실만을 알아냈을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은 대부분 스캔들에 휩싸인 영화배우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면서 진실은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들을 향해 내젓는 단호한 손짓 이상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나간 일들을 다시 떠올릴 때 늘 만나게 되는, 서로 연결될 수 없음에도 그어지는 그 많은 선들은 다 무슨 의미일까? 역사의 인과관계가, 혹은 지나간 일들의 진실이 도중의 사소하고 우연적이고 꾸불꾸불한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단숨에 긋는, 그런 선과 같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날 걸어간 복잡하고 우연에 가까운 행로의 의미는 무엇일까?

 

기억을 쫓아가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혼자서 옛일들을 생가하며 자문자답할 때면 특히 그렇다. 지나간 일들은 실험실에서 알코올램프와 플라스크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일어난 일들은 그 자체가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검증할 방법이 없다.

 

....그녀나 나나 이제는 삶의 행로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여전히 그런 농담은 하나도 재미가 없으며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우리는 그런 것도 농담이냐고 쏘아붙이기도 하고 이게 웃긴 얘기가 아니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삶을 이해하기는 서른네살이라는 나이는 아직도 부족하다. 나는 우산을 뒤로 젖히고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선 백송나무를 올려다봤다. 하나의 가지는 북한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또 하나의 가지는 한강이 있는 남쪽을 향해 서로 갈라져 서 있는 나무 한그루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차가운 장맛비가 내 얼굴로 들이닥치는 동안, 여전히 푸른 우듬지가 흐리마리 빗물에 지워졌다. 나는 고개를 숙여 오른손으로 눈두덩을 한번 닦은 뒤, 다시 얼굴을 들어 백송을 올려다봤다. 둥치에서부터 나누어진 두 개의 가지는 저마다 아픈 사람들처럼 철제 버팀기둥에 기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두 가지 사이로는 가느다란 쇠줄이 연결돼 있었다. 그 통에 서로가 서로를 끌어주면서 버티는 꼴이 돼버렸다. 쇠줄을 자르고 버팀기둥을 없애버리면 금방이라도 두 개의 가지는 땅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얼굴로 떨어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서서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왜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인가? 나는 울타리를 넘어 잔디를 밟으며 백송을 향해 몇걸음 더 걸어갔다. 천연기념물 제8호 재동 백송이 내 머리 위로 그 젖은 잎을 드리웠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여전히 나는 고개를 치켜들고 계속 따져묻기로 했다. 왜 그냥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가? 철제 버팀기둥과 쇠줄로 지탱되는 육백살이라니? 다른 나무들은 다 죽어버렸는데, 오래 살아남기만 하면 천연기념물이 된다니 그것도 일종의 농담인가? 백송이여, 그런 것도 농담인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하면 지금의 우연한 일들도 모두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어린 백송도 천연기념물이 될 수 있다는 뜻인가? 우리가 만난 것도, 헤어진 것도, 그날 길 잃은 아이들처럼 골목길을 한없이 걸어다녔던 일들도 필연이 된다는 뜻인가? 백송 사이를 지나온 빗물이 내 얼굴로 떨어졌지만, 그래서 부릅뜬 눈이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결코 고개를 숙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결코 질문을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도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한번 버텨보기로 했으니까. 육백살이 넘은 천연기념물과 이제 고작 서른네살이 된 따분한 인간, 둘 중 누구의 농담이 더 웃긴가 따져보기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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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평화수감자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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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성석제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1. 작가 소개


성석제(成碩濟) : 196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1994년 짧은 소설 모음집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내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했으며, 1997년 단편 <유랑>으로 제3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0년 소설집 <홀림>으로 제13회 동서문학상을, 2001년 단편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2회 이효석문학상을, 2002년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로 제3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새가 되었네><재미나는 인생><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호랑이를 봤다><홀림><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번쩍하는 황홀한 순간>, 장편소설로 <왕을 찾아서><궁전의 새><순정><아름다운 날들><인간의 힘> 등이 있다.


2. 줄거리


사내가 탄 차는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떨어지는 중. 지상 10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자동차가 바닥에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4.5초. 사내는 그 시간 동안 지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본다.

여섯 살 때 이웃집 아이의 장화를 빼앗는 것을 시작으로 전형적인 불량학생의 길을 밟아나간다. 동네 깡패 마사오를 동경하며 탈선을 일삼다가 퇴학당하자, 집을 나와 친구 둘과 함께 ‘ㄷ'시로 향한다. ’ㄷ'시에서 건달 밑으로 들어가 심부름꾼을 하며 차츰 조직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러다 육년만에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귀향하게 되고 육년 전 마을을 함께 떠났던 두 청년과 재회한다.

피도 눈물도 없이 칼을 주로 사용해 점차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가던 사내는 동네에 술집을 낸다. 일취월장하며 사업을 확대하고 조직을 불려나가던 사내는 동네 건달들이 우상으로 떠받들던 마사오를 계략에 빠뜨려 무찌르고 명실공히 지역의 실력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조직이 절정에 달하던 때 왼팔 노릇을 하던 청카바가 배신을 하게 되고 마사오를 처치한 배경이 소문날까 노심초사하며 청카바를 찾아 나선다. 청카바를 찾아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마사오와 마주친 그는 심리적 공포감에 시달린다. 과속을 하다 다리에서 미끄러져 추락, “엄마, 무서워”란 말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3. 성석제 소설의 특징


성석제 소설의 기본은 ‘재미’다. 성석제 소설은 코메디 한 편을 감상하는 것처럼 시종일관 즐겁고 유쾌하다. 성석제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단연 성석제 소설의 새로운 형식에 있다. 성석제 소설의 가장 강력한 힘은 ‘문체’로부터 나온다. 애초에 시인으로 등단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까? 성석제 소설은 마치 한 편의 긴 시를 읽는 것처럼, 혹은 래퍼의 노래를 들으며 라임과 비트에 맞춰 얼깨를 들썩거리게 되는 것처럼 리듬감 넘치는 문장들로 가득차 있다. 성석제는 언어의 감수성을 통해 독자들이 잊고 지내던 감각의 세계를 환기시킨다.


‘그 과정에서 이웃집 아이의 코피가 터졌다. 그 일로 이웃집 아이의 아버지와 그의 아버지가 싸워 그의 아버지의 코피가 터졌다. 또 그의 아버지에게 코를 얻어맞고 그의 어머니의 코피가 터졌으며 그 역시 어머니에게 맞아 코피를 터뜨렸다.’


‘냇물이 깊었다면 풍덩풍덩 소리를 냈을 것이고 더 깊었다면 빠져죽었겠지만, 수영을 못했으니까, 하여간 그런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아이들이 곧 그를 따라왔다. 벙첨벙첨벙첨벙첨벙첨.’


성석제 소설이 단지 새로운 ‘문체’를 선보이는 데에 그쳤다면 그 ‘재미’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성석제 소설의 백미는 단연 ‘이야기’ 형식에 있다. 성석제의 형식은 ‘이야기’를 통해 그 구성이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성석제 소설은 마치 한 바탕 판소리나 마당극을 보는 것처럼, 시종일관 유쾌한 놀이로 읽힌다. 성석제는 주절주절 ‘이야기’를 풀어낸다. 독자는 잃어버린 구전소설의 20세기식 부활을 목도한다. 성석제 소설은 서사라기보다 이야기에 가깝다. 꽉 짜여진 구성을 통해 교훈적 결말을 이끌어내던 종래 소설의 관습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이야기는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구성진 가락처럼 듣기 좋게 흘러가고 귀신에게 홀린듯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와 같은 형식은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빨아들이기 위해 잡다하고 과장된 잡지식들을 주워삼키는데, 흡사 판소리 기법 중 하나인 ‘주워섬기기’를 연상시킨다. 처음 판소리가 등장했을 때는 대개 완창이 아니라 며칠에 걸쳐 이야기를 토막토막 공연했었다. 소리꾼의 입장에서는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무엇보다 ‘재미’를 선서해야만 한다. 그 결과 판소리는 각 장면이 ‘부분의 독자성’을 갖게 되고 소리꾼은 장면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워섬기기’를 일삼는다. 어떤 상황이나 장면을 묘사하는데 온갖 이야기거리를 다 동원해서 과장함으로써 재미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상 100미터 높이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아래로 떨어지는 대머리독수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독수리가 땅에 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0=1/2*9.0*t^2, 고로 t=4.5175394이다.’

‘일념 : 불교에서의 시간 단위. 1주야(24시간)는 30수유다. 수유는 모호율다이기도 한데 30달찰나의 길이이고 달찰나는 납박이다. 납박은 일념의 120배나 되는 기나긴 시간이다. 일념이란 말 그대로 생각 한 번 할 시간이 아닐까.’


‘위산의 분비는 공포의 소산이다. 정면 출돌 사고를 당한 운전자의 대부분은 갑작스런 위산의 분비를 경험한다고 한다.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위산은 위벽을 녹일 정도로 강력해서 평소에 궤양 등이 있는 경우에 그 자체로써 위천공을 유발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당연히 내용적 측면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성석제 소설에서는 누구도 그 끝이 어디에 가 닿을 지 예측하지 못한다. 그래서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 한토막을 들은 것처럼 소설을 다 읽고 나도 이야기는 실체가 없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작가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만큼, 독자 역시 매일 들어도 가물가물한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듣고 나면 쉽게 내용을 잊어버린다. 결국 ‘이야기’로 구성된 소설은 형식의 변형을 통해 의미의 변형을 이끌어낸다. 더 이상 소설은 완결적인 답을 내지 않고, 심지어는 이것이 단지 이야기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고 짐짓 딴청을 피운다. 모든 이야기는 마치 풍문처럼 한 귀로 들어왔다 한 쪽 귀로 사라진다. 성석제 소설은 항상 애매함을 동반한다. 분분한 해석을 낳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정확치 않다. 어쩌면 작가는 처음부터 아무 말도 전하지 않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성석제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촌스런 건달이나 착한 바보는 이런 의도를 더욱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는 끝내 주인공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공간적, 시대적 배경 역시 제시되지 않는다. 그 주인공은 매번 다르게 불리워도 상관없을 지 모른다. 그래서 끝내 이야기가 끝나도 의미가 쉽게 전달되지 않는다. 인생 막장의 아웃사이더의 등장은 한 편으로 묘한 삶의 ‘비의(非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성석제의 소설은 늘상 묘한 서글픔을 수반하며 이야기 속에 뭔가 진지한 삶의 비의를 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과연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닌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끝내 풀 수 없는 알레고리처럼 성석제의 소설은 늘상 결국 이건 그져 이야기일 뿐이라고 심각한 몸짓을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에서 주인공은, 그래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엄마, 무서워.”를 외치는 것인가?


4. 풍자 소설의 계보와 변형, 그 속에 성석제의 위치


‘풍자’에서 ‘풍(諷)’은 노래를 의미한다. 이는 웃음과 재미를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성석제 소설만큼 ‘풍(諷)’의 의미에 충실한 소설이 또 있을까? 성석제는 시종일관 노래하고 떠들면서 웃긴다. 그러나 ‘자(刺)’의 의미가 찌른다, 즉 비판하고 공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때 성석제식 풍자는 노래하며 웃고 즐기되 비판은 사라진, 90년대식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는 풍자소설의 특징인 풍부한 이야기와 능청스런 입담, 그리고 노래같은 리듬감으로 무장했지만 무엇을 비판하고 공격해야할 지는 분명히 찾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야기’의 전통을 빌려오되 처음부터 그는 ‘재미’를 추구했을 뿐, 무언가를 비판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는 지도 모른다.

시대적 맥락을 따져보자. 많은 사람들이 80년대의 진지함에 지쳐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할 때 성석제는 만담가 내지 구연가로서 90년대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90년대 들어 내용적인 측면에서 하루끼식 허무주의와 탈정치적 경향이 새로운 소설의 흐름으로 제시되었다면, 형식적인 측면에서 성석제는 본격적인 시와 노래의 언어, 이야기와 만담의 화법을 들고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이런 성석제 소설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와 같은 작풍은 80년대까지 소설의 상식으로 통했던 내용과 의미 중심의 서술방식, 그러니까 근대적 서사의 완결성, 총체성을 완전히 무시한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이는 수많은 시도 중에 하나의 흐름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성석제식 글쓰기가 중요한 하나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것이고, 그렇지만 여전히 그 의미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80년대 소설이 추구하던 계몽적이고 총체적인 내용구성보다는 이야기가 주는 재미와 애매함에 더 매료된 것은 과거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추구하는 어떤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최근 발표된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에서 소설가가 자꾸만 무슨 의미를 전달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이것이 인생인가? 그런 걸까?’로 마무리되는 작가의 말이 그렇게 가볍게 넘겨지지는 않는다. 그는 변하고 있는걸까? 그렇다면 왜,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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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수다수다수다


 

>> 유럽여행...어느 성당에서 정원을 배경으로

 

 

1. 어릴 때 그러니까 초딩 정도까지는, 다락방에  쌓아둔 책을 보며 하루를 보내도 지겹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 중 단연 백과사전이 백미. 15권짜리 동아백과사전에는 10살짜리 소년에게는 흘러넘칠만큼 다양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특히 나는 동물편을 즐겨 봤는데 먼 이국땅의 동물을 대할 때는 마치 세계를 다 품에 안은 것처럼 즐거워서 상상조차 하기 힘들던 미지의 세계를 와작와작 다 씹어 먹을 기세로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그 곳에서 선데이서울도 처음 봤다. 15권짜리 계몽사 위인전집과 몇 권 인지 모르지만 그림 하나 없이 수백페이지를 빼곡히 글자로 채운 한국문한전집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낡고 퀴퀴한 먼지 냄새, 닳아가는 책냄새...그 냄새가 낯설지 않아서인지 난 헌책방이 좋다. 거기서 그림없는 책들을 읽기 시작하던 무렵에 난 세상이 좀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림처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직관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무엇인가가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 그 느낌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온갖 추상명사들의 의미를 생각했던 거 같다.

 

 

 

 

>> 베트남이 생각난다. 빨간 모자에 노란별, 미치겠다. 나 저거 사줘~

 

 

 

2. 오늘 수업 시간에 '성개방형 결혼'이란 주제로 10여명이 토론을 벌였다. 요즘 이 주제로 비교적 고민이 많은 관계로 사회자를 떠맡고. 남자와 여자의 생각을 골고루 들으며 비교분석에 들어갔다. 뭐든 기존 통념에 반하면 대체로 좋아하지만서도,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은 이후로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딱 하나 있었다. 자유로운 연애와 다양한 성관계를 원한다면 대체 왜 결혼을 한단 말이냐? 굳이 같이 살고 싶으면 동거를 하던지. 그래서 난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왜 굳이 결혼이란 제도적 구속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성개방을 추구하는지. 몇몇 사람들의 답을 듣고 좀 이해가 갔다. 요컨대 서른 넘어서 결혼을 하지 않는 여자가 받게 되는 각종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종합해볼 때 결혼은 상당히 현실적인 요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 따위의 환타지는 없고, 다양한 사람과 자고 싶고 사랑이란 감정도 여기 저기 생겨나는데 동시에 결혼이 주는 안정감을 원하면... 성개방형 결혼도 가능하지 싶다. 뚜시쿵. 처음엔 그 안정감의 실체가 대체 뭔지도 궁금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은 것을 고려하고 있었으니. 일단 결혼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고(아~~노처녀는 공격적이고 히스테리컬하다는 주위의 평을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결혼하라는 스트레스 안받아도 되고, 경제적으로 안정되고(하나같이 결혼을 해야 돈이 모인다고들 한다. 더 정확히는 결혼해야 돈을 미친듯이 벌게 되는 거 같다.), 국가에서 혜택도 더 많이 주고(하다못해 전세대출 받을래도 결혼한 사람이 유리하다는 친구의 한탄), 무엇보다 출산과 육아 문제를 생각할 때 경제적 안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아무리 혼자 키운다해도 서포터없이 이겨내기는 힘겨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욕구들을 제대로 고민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상당히 간편하게 '그냥 동거를 하면 되는거지'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듣고보니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 싶다. 상대가 흔쾌히 동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동거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도 엄청난 압력이 되겠구나 싶었다. 남자 입장에선 성개방을 허용한다면 동거가 편한 점이 많겠지만, 이것도 은근히 남성중심적인 사고겠구나 싶었다. 돈없이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보다 결혼해서 집도 마련하고 제대로 갖춰놓고 사는걸 원하는 심리를 뭐라하기도 어렵고... 사랑과 안정, 두가지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키고 싶다는데 뭐라고해. 그래서 난 오늘 이후로 '성개방형 결혼'을 심증적으로가 아니라 제대로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토론자들에게 이해시켜줘서 고맙다는 말도 했다.

 

근데 어지간히 성숙하지 않고서야 쌍방간에 저걸 견뎌낼 사람, 특히 남자가 얼마나 될까? ㅋㅋ..진짜 재밌는 거는 이런 토론 하다보면 꼭 얼굴 빨개지고 흥분해서 자기 얘기 주절주절하는 사람이 나온다는거다. 난 점잖게 사회봤는데 중간에 강사가 끼어들어서 여기 저기 들쑤시며 도발한 덕분에 몇 명은 완전 바닥드러내고 만신창이 됐다. 처음엔 다들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육아 문제 나오니까 슬슬 일부 남자 애들이 조건부 찬성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아빠나 엄마가 둘이면 애가 받게 될 상처는 어쩌냐? 게다가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받게 될 상처는? 그 비난을 어떻게 감수하냐? 사회적으로 너무나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등등... 그러다 차츰 속내가 다 드러나기 시작. 지지입장에 선 학생이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를 제시했다. 아는 사람 중에 남자쪽에 문제가 있어 임신이 불가능한 부부가 있는데 여자 쪽에서 이혼을 해야 하는건지, 아님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같이 살아야 하는건지, 그럼 성관계는 어떻게 되는건지 고민이란다. 그러자 한 남학생이 '사랑한다면 당연히 평생 함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흥분. 그러자 한 여학생이 '그건 여자를 지나치게 무성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편견 때문'이라고 반박. 그러자 옆에 앉은 남학생이 한술 더떠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결혼했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숨긴 것이라면 이혼해도 할 말이 없다'고 흥분. 이 때다 싶은 강사 바로 공격. '그럼 입장을 바꿔 여자 때문에 임신이 불가능한데 남자가 다른 사람이랑 섹스하는 건 어찌 생각하나요? 가령 성매매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러자 순간 당황한 남학생. 그건 인정할 수 있다고 말을 꺼내다가 이내 분위기 파악하고 말을 바꾼다. '전 그래도 사랑한다면 평생 같이 살 수 있어요. 당연히 평생 참아야죠' 아구야~~아서라...급기야는!! '전 아직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애초에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잖아요. 그 정도는 평생 이겨내야죠!"  

 

OTL

orz

T.T

 

쿵~~~~게임 오버. 유유히 사라지는 강사. KO승. 얼굴이 화끈 화끈. 벌겋게 달아오른 남학생. 쯔비~~

 

 아무튼 덕분에 생각이 많이 정리됐다. 유쾌했다. 이젠 결혼 하는 사람들 뭐라 안하기로 했다. 자의식 때문인지, 아님 갈수록 동료가 줄어들어 불안한건지 결혼식 때마다 '결혼은 뭐하러 하냐?'고 초치고 다녔는데. 이젠 그 짓도 그만해야겠다. 그러면서 끝내는 마지 못해 결혼한 것이라는 답을 얻어내고야 마는 그 심술도 그만둬야겠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미안해하며 날 격려하게 만드는 짓도 그만~~그만!! 다들 심각하고, 진지하다. 자기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그래서 나름 그렇게 결심한 것을...괜히 상처주면서 혼자 강한 척하는 것도 지겹다. 내가 결혼의 이유를 못 찾으면 그 뿐이지. 강요는 왜...

 

성개방형 결혼...나쁘지 않다. 그런데 결국 항상 제일 중요한 문제는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

 

 

 

 

>> 가을이다...

 

 

3. 오늘 '신화와 역사' 수업 시간에 또 잤다. 이런 것도 일종의 조건반사인가? 처음에 한 번 두 번 눈치보며 졸았는데, 이젠 이 수업시간만 되면 자동으로 잠이 온다. 처음엔 자다깨다 반복하면서 강사 눈치도 보고, 중간중간 수업 들어보려고 애쓰며 버티기도 했는데...요즘은 거의 기절하다시피 1시간 15분을 내리 잔다. 자다 깨기가 싫을 정도로 혼곤하게 잔다. 그리고 급기야 오늘은 자다가 이 수업을 듣는 꿈을 꿨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나는 가끔 내 무의식의 세계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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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평화수감자의 날 함께해요


 

참여를 원하시면 www.corights.net/brokenrifle 로~

 


평화수감자의 날 소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ar Resisters' International, WRI)의 '평화수감자의 날(Prisoners for Peace Day)' 행사는 1956년 12월 1일에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이날에는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에서 집계한 전 세계 평화수감자들의 명단이 발표되고 특별히 한 국가나 지역 혹은 평화이슈를 선정해 그 곳의 평화수감자들의 현황과 평화이슈 현안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의 평화수감자는 전쟁 혹은 전쟁준비에 반대하여 비폭력 행동을 하다 수감된 사람이면 누구라도 명단에 포함될 수 있으며 특히 어떠한 종류의 폭력도 공공연히 지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명단을 채우고 있는 대부분의 평화수감자들은 병역거부자들이며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체포된 다수의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과 함께 2003년에 처음 평화수감자의 날 행사가 시작되었고, 올해도 역시 12월 1일에 평화를 원하는 다양한 활동가들이 준비하는 행사가 열리게 됩니다.

 

 

 


2003년 12월 1일 행사


 

 

 

2003년 12월 1일 평화수감자의 날 문화제 부러진 총 이야기

일시: 2003년 12월 1일 월요일 저녁 7시부터
장소: 서울 고려대학교 제2학생회관 강당
주최: 12.1 평화수감자의 날 문화제 준비하는 사람들


함께하는 사람들:
동성애자인권연대 / 문화연대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 사회당 / 성공회대학교 인권평화센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여성해방연대 / 월곡교회 / 인권운동사랑방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 전쟁없는세상 / 좋은벗들 / 참여연대 /평화를만드는여성회 /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 평화인권연대

 

 

 

 

 

 

2004년 12월 1일 평화수감자의 날
'평화의 페달을 밟자'

 

 

 

 

 

 

 

 

2005년 12월 1일 평화수감자의 날
Prisners for Peac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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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빛의제국]

1.

빛의 제국은 뭐야? 그렇지. 이젠 더 이상 나에게 이념 따위는,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고정간첩이 국정원 프락치가 되어 동해 앞바다에서 잠수정을 타고 들어오는 동료들을, 아니지 그들은 더 이상 동료는 아니지, 팔아먹었어. 새벽 바다에 쏟아지던 써치라이트 빛은 미친듯이 강렬해. 빛의 제국. 아주 환하더군. 그리고 동료들을, 아니지 그들은 더 이상 동료는 아니지, 그들을 향해 미친듯이 쏟아지는 총알들. 그건 내가 쏜 건 아니지. 난 이제 국정원 프락치가 되어 동료들을 팔아먹었지. 그리고 난 아버지고 남편이고, 끝내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냥 난 여기 살아. 이제 더 이상 이념 따위는,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아무튼 난 여기 눌러 살기 위해, 프락치가 되었지.


빛의 제국은 뭐야? 사방을 밝히는 네온사인. 기쁨도, 외로움도, 상실감도, 비겁함도 이 빛 아래에선 아무 것도 아냐. 이 빛은 그저 감각이고, 돈이고, 권태지. 그럼 내가 찾던 빛은 이건가? 마음 속에 빛나던 이념의 빛은 이미 오래 전에 꺼졌어. 지금 북에는 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데, 거긴 내가 갈 곳이 아닌데, 여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남겨지 있고, 그렇지 나는 소유하고 집착하게 되었어. 그것이 내가 가진 전부야. 내가 찾던 빛은 뭐야? 그런 게 있긴 한건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난 그냥 여기 살아. 애가 있고, 부인이 있고, 아파트도 있고, 돈도 있어. 난 솔직히 지금이 좋아. 도대체, 빛의 제국은 뭐야?

 

2.

영화 [살인의 추억]을, 몇 년 전에 봤을 때, 송강호가 첫번째 희생자를 발견했던 그 장소에서, 하염없이 슬픈 눈으로 빈 공간을 응시하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순간, 난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줄줄흐르지도 않고, 엉엉 소리가 나지도 않는, 그 눈물은, 꼭 그럴 때 그렁그렁하게 맺힌다. 그리고 [빛의 제국]을 읽으면서, 갑자기, 그렇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송강호의 눈빛이 떠올랐다. 맹목적이었든, 합리적이었든, 지나간 열정은, 이유없는 회한과 서글픔을, 아주 오랫 동안 남긴다.

 

3.

후일담 소설이 많았다. 90년대 중반에는 부정하든, 긍정하든, 타협하든, 외면하든, 부채의식이 시달리든, 계속 지난 날들을 의식했다. 오랫동안 거부감 때문에 외면했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게 되었고, 그러니까 그 엇비슷한 소설들을 줄줄이 읽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김소진같은 소설가들을 아겼고, 한 편으로는 '그 상실감의 실체는 아무 것도 없다'고 화를 내면서도 묘하게 씨니컬해지게 멜랑꼬리해지는 순간 순간에 빠져드는 불편한 감정 속에 있었다.

그게 10년도 더 지나 송강호의 눈빛으로 되살아 났을 때, 막연한 상실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빛의 제국]도 그런 상실감에 관한 소설이고, 참 많이도 팔리던 후일담 소설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많다.

 

4.

그런게 참 지겨울 때가 지났다. 어느새 후일담의 후일담도 지겨운 시절이 되고, 김영하처럼 너무나 재밌고, 재치발랄하고, 빠르며, 감각적인, 그러니까 여기서 감각적이란 마치 영화 컷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소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김영하 단편소설은 다 그렇게 재밌었다. 가끔 소설책을 읽는 속도가 영화 한 편을 보는 속도와 비슷한 날이 있는데, 그런 때는 적어도 작가의 말발 만큼은 인정해줘야 한다. 장정일이 말했듯이, 나에게 맞는 소설이란 거침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소설이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까먹고, 진도가 나가지 않는 소설은 피하는 게 좋다. 그러니까 중학교 때 말도 안되게 어려운 해외 고전소설을 필독서란 이유만으로, 꾸역꾸역 읽어내려갈 때 '무슨무슨스키'로 끝나는 등장인물 이름 맞추느라 시도 때도 없이 뒤로 돌아보게 만든, 그 소설은 뭐냐? 중학교 때 그런 책 읽히면 독서에 정나미 떨어진다. 어휘력도, 철학도, 역사도, 받쳐주지 않는 소설을 어떻게 읽냐고?

 

그러다 김영하가 장편을 쓰기 시작했다. 첫 작품은 [검은꽃]. 애니깽으로 불리운 멕시코 에네켄 농장. 한국 최초 계약 노동자로 팔려간 이들의 삶은, 여전히 빠르고 감각적으로, 그러니까 마치 영화 컷을 보는 것처럼 지나갔지만, 소설이 보여주는 역사적 상상력은, 이전 단편소설과는 다른, 그러니까 서사적 구조가 가능한 이야기의 맛에 푹 빠져들게 했다.

빛의 제국은 그런 소설이다. 김영하가 단편을 거쳐 장편으로 넘어가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장점들이 골고루 배어나오면서, 역사적 무게 때문에 또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소설이다. 이미 이 소재도 영화로 팔린 적 있으니 [간첩 리철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런 소설 참 지겨웠는데, 그래도 이 소설이 재밌는 이유는 순전히 김영하의 능력 때문인가? 자의식 때문인가? 이젠 잘 모르겠다. 한 편으로 권태에 지치고, 한 편으로 경제적 욕구 때문에 눌러앉아버린 이들에게, 꾸준히 반복되는 이런 소설들은 재앙인가? 위로인가? 자학인가? 성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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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는 길다...

 

 

1.

어제 우연히 대학가요제를 봤다. 80년대만 해도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의 파워는 대단했다. 상을 탄 사람들은 물론 가끔 상을 못 탄 사람들도 유명한 가수가 되고는 했으니까. 가끔 괜찮은 옛날 노래를 아무 사전 지식없이 찾아 들었는데 우연히 가요제 출전곡인 경우도 왕왕 있다. 아무튼 말로 할 수는 없지만 그 노래들을 듣고 있으면, 그들만의, 뭔가가 있었다, 고 생각이 든다, 괜히 서글프거나, 괜히 허탈해지는. 센치해진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아마추어리즘은, 열 살 때부터 합숙으로 프로를 키워내는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누군가 '산울림'을 아마추어리즘의 절정이라고 했었는데, 그런 아마추어리즘도 찾기 어렵다. 힘들게 흉내내서 따라가는 느낌.

그러다 어제 우연히 대학가요제를 봤다. 장애인이 함께 노래부르는 밴드가 나왔다. 또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독창곡이 있었는데 그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채널을 돌렸다. 오늘 뉴스를 보니 그 노래가 금상을 탔다.

 

오늘은 소리바다에서 가요제 출전곡들을 다운 받아 듣는다. 역시 좋은 곡들이 많은데, 하나같이 뭔가 서글프고 가슴 답답해진다. 과도하게 진지하고 서정적이고 순진하다. 어제 들었던 노래는 대체로 밝고 희망적인 어조였다.

엠피쓰리 플레이어가 없는 요즘은, 담배없는 흡연자처럼 금단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2.

내가 사는 동네에는 대형마트가 없다. 성북K마트라고 그나마 조금 큰 슈퍼가 하나 있는데 언제부턴가 고객카드를 만들면 0.1%를 적립해주고 있다. 계산을 해보니 1천만원을 쓰면 1만원이 적립되는거다. 만원어치를 공짜로 받아먹으려고 1천만원을 슈퍼에 갖다 바쳐야 하는 인생이라니. 평생 참 많이도 갖다 주겠구나, 생각했다. 괜히 다른 슈퍼로 가고 싶다.

 

 

3.

음악이 없을 땐 소설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최근에는 장정일의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와 김영하의 [빛의제국]을 읽었다. 추석 연휴 기간도 무지 긴데 음악이 없는 자리를 소설이 대신할 수 있을까? 서점에 가봐야지. 근데 돈이 없어(-.-;;) 월급을 타려고 기다리는 한 달은 마치 0.1%적립카드처럼, 천만년을 기다려 만원이 쌓이듯, 감질맛나게 아주 천천히 다가온다.

추석 연휴는 올드송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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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2] 길은 또 여기서 시작되고..

 

 

 

여행은 끝났고, 일상이 여행처럼 바뀌는 것 아닐까 기대했지만 일상은 견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모든 게 그 자리에 있었다. 가족은 한결 같았고, 졸업과 돈벌이에 대한 걱정은 잠시 유예된 것뿐이었고, 왕복 6차선 도로를 꽉 메운 차들은 하루 종일 매캐한 연기를 내뿜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지나치게 바쁘고, 끊임없이 만능이 될 것을 요구받는 사람들은 동시에 절대 튀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리고 개그콘서트는 여전히 재밌다(마빡이 미치겠다).


 

1.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난 분명 많은 걸 기대했다. 그리고 여행은 기대이상이었다. 여행은 50일.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기엔 충분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두드러지진 않겠지만 두고두고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예감. 무엇보다 최고의 수확은 자신감이다.(아~ 좀 식상한 말이지만 정말 그래요-.-;;) 이 번 여행을 통해서 자전거도 배웠고, 수영도 배웠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 나한테는 대단했으니. 스물이 넘도록 자전거 못 배운 사람들은 이 심정 안다. 한 번 때를 놓치면 그 후엔 기회가 잘 안 온다. 쑥쓰러워서 못 배운다. 그러다 여행가기로 맘먹고 5월에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에 강화도로 예행연습을 다녀올 때만 해도 한강다리에서 가드레일 들이 받고 차도로 떨어졌는데. 아무 탈없이 여행을 마무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참 좋다. 이젠 나도 자전거 타고 여기 저기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할 수도 있고. 수영 배운 것도 신기한 일이다. 물에 대한 공포심이 심해서 수영만은 평생 극복 못할 콤플렉스라 생각했는데 물에 뜬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제 수영장이 두렵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자신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의 발견. 내가 참 초라해 보이고 새로운 도전이 마냥 두렵기만 할 때 여행은 나에게 작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낯선 환경으로 가득찼던 첫 번째 해외 여행이자 자전거 여행이었다.

이미 난 자전거로 사무실에 오고 가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종로나 청계천을 지날 때는 유독 오토바이가 많다. 짐을 가득 실은 오토바이가 신호를 기다리며 일렬 횡대로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토바이로 가득했던 호치민 시티가 생각난다. ‘치열한 삶의 현장은 어디나 이렇게 비슷하구나.’ 다른 듯 닮아 있는 모습을 본다. 종로와 청계천 일대를 지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전태일 열사 거리도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처음봤다.


 

2.

여행을 가면 더러는 헤어지는 연인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만큼 의견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고 서로 바닥을 보게 되니까 더러 실망도 한다는 뜻. 여섯 명이서 50일 동안 자전거 여행을 갔다. 참 많이 부대끼고 즐거운 일도 힘든 일도 많았다. 내 인간성의 밑바닥을 보였다. 흔치 않은 경우다. 또 다른 사람들의 밑바닥을 봤다. 항상 사무실이나 집회 현장에서만 보던 친구들. 너무나 자주 보는 얼굴이지만 깊이 이해하려들면 전혀 잡히지 않는. 그런 친구들.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잘 이겨냈고 서로 배려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여행 전에는 어색했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이제는 좀 편해졌다. 사람에 대해서, 인간관계에 대해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생각한 시간이었다. 그 때 느낌처럼 섬세해질 수 있다면 일상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둔해지는 건 한순간이다. 감이 떨어진다 싶을 때 그 때 느낌을 떠올려봐야지.

몸이 힘든 때도 많았다. 애초에 몸으로 때우기로 결심했던 여행이었다. 예산은 넉넉지 않았고, 계획은 완전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전거에 대한 준비가 너무 미흡했다. 사전지식도 부족했고 10만원대 하이브리드 생활형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을 계획한 것도 무리였다. 자전거는 하루도 멀쩡한 날이 없었고, 친구 중 한 명은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는데 손목에 금이 가서 중간에 자전거 여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사고가 정말 많았다. 거짓말 안보태고 하루에 평균 한 번 이상씩 튜브에 펑크가 났다. 아, 정말 계획하고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영화같은 장면 많이도 찍었다.


 

상황 하나. 캠핑장은 밤 열 시에 문을 닫는다. 어렵사리 캠핑장에 도착한 게 밤 9시 조금 넘은 시간. 캠핑장 자리가 꽉 차서 더 받을 수가 없단다. 그러더니 ‘인근 숲에서 몰래 텐트를 쳐라. 단 경찰에게 들키면 우리가 가르쳐줬다고 말하지 말라’고 귀뜸해주는 캠핑장 주인. 계속되는 토론과 의견수렴. 어렵사리 캠핑장에 양해를 구해서 1유로를 내고 샤워만 해결하기로 결정. 그런데 텐트를 칠 자리 찾는 게 쉽지 않다. 날은 너무 춥고 해는 떨어져서 날은 어둡고. 그 때 기적적으로 자기집 정원에 텐트를 치라며 호의를 베푼 의사 부부. 휴...

상황 둘. 벨기에에서 프랑스를 넘어갈 때다. 100KM 가까이 달리는 장거리 코스. 벨기에 자전거 도로 상황이 너무 좋아서 페이스가 괜찮다. 그런데 프랑스로 접어들면서 상황 반전. 자전거 도로를 찾기도 쉽지 않은데 도로 표지판이 죄다 바뀌어서 도로구조를 파악할 수가 없다. 해는 저물어가는데 비가 온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자전거 도로는 나타나지 않고, 저녁 6시가 지나면 상점이 죄다 문을 닫아 거리에 사람 찾기가 힘들다. 어렵게 행인을 붙잡고 길을 물어봐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고. 없친 데 덮친 격으로 타이어가 또 펑크. 버스 정류장에 비를 피하면 펑크를 떼우는 사이 몇몇은 숙소를 알아보러 떠난다. 결국 캠핑장을 못찾고 호스텔에서 일박. 예산에 무리가 간다.


쉴새없이 반복되는 자전거 사고는 사람들을 점점 불안하게 만들었다. 심리적으로 지쳐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아주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졌다. 고열에 타이어가 터지는 가하면 자전거 휠을 지탱하는 가는 살들이 뽑히는 경우는 생전 처음 봤다.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도 일이다. 기차역에 앉아 있으니 낯선 땅의 노숙자들이 돈을 달라고 접근하는데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고, 예정된 시간까지 친구들이 안오니 연락할 수단도 없어 마음이 급해진다. 안트베르펜 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마치 ‘대구역’과 ‘동대구’역이 있듯 안트베르펜으로 시작하는 역이 두 개.(-.-) 아무튼 여행 내내 이랬다. 좌충우돌. 이러니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여행을 무사히 끝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가슴 벅처지 않을 수 있겠나?


 

이런 경험들이 결국엔 자신감으로 남았다. 새로운 도전을 계속할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어주고 있다. 그래서 다들 여행을 가나보다. 어느새 새로운 여행이 기다려진다.







 

>> 벨기에 브뤼쥬 광장

 

 

 


 

>> 퐁네프 다리에서...날맹과

 

 

 


 

>> 세느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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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와 재판

 

또 다시 넉 달 만에 수감기록이다. 이 수감기록은 순 사기다. 수감생활도 다 끝난 사람이 그것도 서너 달에 한 번 씩 쓴다. 어느덧 출소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니 이전 기억도 상당히 왜곡되었을 것이 뻔한데 게다가 갖가지 사후 정보나 지식으로 윤색되기 마련이니 이 글은 순전히 날조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되게 뻔뻔한 얘기지만 원래 그렇게 수감기록을 쓸 작정이었다. 안에서 쓰던 일기도, 수감기록도 출소하기 전에 다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쓰다가 지겨워서 관뒀다. 아무것도 새로울 것 없는 매일 매일을 보내니, 지금은 참 할 이야기가 많지만, 그 때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귀찮았고, 힘들었고(할 말이 없는데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야 할 때 참 힘들다), 구질구질해 보였다. 그래서 버렸다. 이거 싸들고 나가서 뭐에 쓰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막판에는 하도 쓸 말이 없어서 편지도 거의 쓰지 않았다. 너무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펜만 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났다. 아마 몇 달 쯤. 거기서 보이지 않던 것들, 못 보던 것들, 내가 문제의 정 가운데 놓여 있을 때 깨닫지 못하는 것들, 흥분된 감정 때문에 좀체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던 것들. 더 냉정하게, 더 솔직하게, 더 처절하게 보이는 게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억의 총량은 줄어들어도 해석의 총량은 자꾸만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은?? 그랬다.

시간이 지나니까 차츰 그 때 내가 왜 그랬었는지, 어떤 심정이었었는지, 무엇을 원했었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감정은 너무 얽히고 뭉쳐 있어서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가끔은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이건 누구나 경험하는 인생의 진리다. 이런 일반적인 조건 말고도 새록새록 그 때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건은 많다. 수용시설과 관련된 뉴스를 볼 때면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다 알고 있던 것들이야. 뭘 새삼스럽게 이제와서 떠들어 대는거야? 너희들은 그런 거 원래 몰랐었어?’ 이렇게 냉소적인 반응도 나오고. ‘애초부터 이건 문제가 있었어. 그래서 내가 이런 이런 대안을 생각하고 있었지.’ 이렇게 생산적인 반응도 나온다. 심지어 얼마 전 서울구치소 내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가해자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와 너무나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을게다. 출소하고 영화 ‘오로라 공주’를 볼 때는 종반부에서 엄정화가 어떤 방식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지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다 맞춰내고야 말았다. 므훗해하는 내 모습. 대략 좋지 않다.


계기는 많다. 무엇보다 지금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이 보내주는 편지 속에서, 그들이 어떤 상황을 대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모습 속에서, 나는 매일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해한다. 재발견한다. 마음으로 최대한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미안하게도 해석하고 관조한다. 동시에 과거의 나를 해석하고 관조한다. 그 시간에 자신이 얼마나 무미건조했었는지. 얼마나 자주 자학과 가학을 일삼았었는지. 또 얼마나 많이 심사숙고했었는지. 또 얼마나 선택지가 좁았는지. 그래도 나름대로 얼마나 자신이 대견했었는지. 오늘도 날조된 기억 하나를 붙잡고 떠들 작정이다.


얼마 전 병역거부자 김태훈 씨가 1심에서 1년 8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는 통상 1년 6개월을 선고하던 기존 관습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우리는 판사가 똘아이라고 욕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고 2심(항소심)에서는 당연히 1년 6개월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항소심이 기각되고 1년 8개월 원심이 확정되었다. 이 소식을 유럽 여행 중에 들었다. 쿵~. 아주 된통 세게 두들겨맞은 느낌. 기분이 나빴다. 아니 아팠다. 숫자상으로는 2개월 차이다. 그런데 수감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게 아니다.


수감생활 초반에 진행되는 검찰수사와 재판은 사람들을 극도로 긴장시킨다. 심하게 위축되기도 한다. 재판 전날이면 어떤 사람들은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이상한 꿈을 꾸기도 한다. 대개 당신에게 의미심장한 어떤 날 전야에는 그런 경우가 많을 테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재판 당일 행동지침에 얽힌 갖가지 미신이 있다. 같은 방 쓰는 사람이 재판을 앞두고 있는 날에는 한 방을 쓰는 사람 모두가 물이나 국에 밥 말아먹으면 ‘재판 말아먹는다’고 금지, 밥에 김 싸먹는 것도 금지, 컵라면도 금지, 비벼먹는 것도 금지, 뭔 놈의 금지가 그리 많은 지. 그런데 이걸 안 지키면 당사자는 아주 불쾌해한다. 미신이라해도 남이 관습을 안 지켜주면 괜히 불쾌하고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판사의 말 한마디에,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그 몇 분 사이에,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의 운명이 좌우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꼭 고무신만 신고 간다. 전 날부터 고무신을 광이 나도록 깨끗이 닦아두는 사람도 있다. 수능 백일 전날 온갖 선물 주고 받는 거랑 비슷하지 않나? 잘 찍으라고 포크를 선물하는 따위의. 사람들은 아주 긴장되고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제의(祭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실효성이 없는 일종의 주술행위지만 고난을 이겨내고자 하는 그 나름의 의식적 행동이기도 하다.


나는 글재주가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재판부에 제출하는 항소이유서나 반성문을 여러 차례 대필해 준 경험이 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사람들에게는 아주 흔한 일이다. 예의 ‘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시작해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로 끝나는 그 반성문은 사실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반성문이 큰 효력을 발휘한다고 믿고, 또 실제로 어떤 판사는 반성문을 안 쓰는 자에게 괘씸죄를 적용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판사의 종교적 성향을 조사해 같은 종교를 믿으며 새로 태어났다고 은근슬쩍 종교적 권위에 기대는 사람도 있다. 늘 어느 재판부에 판사 아무개는 어떤 경향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마련이고, 아무개 판사랑 친한 변호사를 찾는다고 돈을 들이 붓는 경우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판사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달려 있으니. 판사들은 매순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진지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찌질이 판사들도 많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병역거부자 재판 과정에서 우리는 찌질이 판사들을 너무도 많이 만났다.


병역거부 운동에서 다가오는 재판에 대비하는 것이, 판사들의 변화를 촉구하고 형량을 낮추고 보석을 받아내는 것이, 변호사들과 함께 변론을 작성하고 법원에 제출할 병역거부 이유서를 설득력 있게 써내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전례가 없었으므로 모든 과정이 항상 새로운 상황이었고,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1년 6개월 형이 관습처럼 굳어지면서 수사나 재판과정이 다소 안정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1년 6개월을 받았다. 당연히 그렇게 예상하고 이런 저런 계획도 짜고, 재판에 대비한다. 그런데 예상이 깨졌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속담이 실재하는 상황. 엄습한다. 구치소에서는 일도 없다. 일이 없는 심리적 불안상태. 굉장히 힘들다. 김태훈 씨 소식을 전해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고뇌하는 시간을 이겨냈으리라. 그래도 나는 믿는다. 병역거부자들이 강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마음고생 후에 더 강해질 것이라고. 또 바란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이겨내고 새로운 활력소를 찾기를.


이제 남는 것은 똘아이 판사를 심판하는 일이다. 자신은 판결을 내려보기만 했지 판결을 받아보지는 못했으니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야만 하는 사람들, 소위 피고인의 심정을 잘 모를 것이다.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사람들이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서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행사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다. 누구를 그 자리에 세워도 완전무결한 판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판사라면, 국가권력의 정점에 서서 남의 인생을 쥐락펴락 하는 사람이라면, 좀 영리해야 한다. 공정하고 냉정해야 한다. 착한 심성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판사는 왜 똘아이인가? 우선, 공부를 안했다. 이론 공부도 안했고 세상물정 돌아가는 공부도 안했다. 그래서 똘아이다. 병역거부자에 대한 판결이 주관적인 감성에 치우치는 순간, 권위는 추락한다. 똘아이가 제 고집을 신념이라 우기기 시작하면 피곤해진다. 볼테르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했다. 적어도 민주사회에서 판사질 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한다. 국가권위를 빌어 누군가를 판단할 때는, 판사의 개인적 감정이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판사는 판사의 재량을 이야기한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재량껏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더 강조하는 것이다. 당신 재량에 한 사람의 삶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라. 당신이 판사 앞에 서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라. 영리한 판결이 세상을 움직이기도 한다. 역사적인 판결이 큰 변화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어떤 판결은 역사적인 ‘쪽팔림’으로 남기도 한다.

또 있다. 이 판사가 똘아이인 이유. 판사는 무오류의 권력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무오류의 권력이란 민주사회에선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군대, 사법부, 경찰, 검찰, 정당, 국회 등 각종 권력집단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무오류의 화신이라 착각하고 있다. 반성도 없고, 회개도 없고, 회한도 없다. 자신의 결정이 항상 옳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 착각을 깨줘야지. 판사님 앞으로 편지나 한 통 쓸까? 신경도 안 쓸텐데...심난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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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1] 여행수기 Start

수감기록을 쓰기로 마음먹고 1년이 지났는데 글은 고작 두 편.

아마 여행 수기도 이럴 지 몰라...

그래도 그냥 꾸준히 쓸랜다. 천천히...

아무튼 컨셉은 정해놓은 바 없지만, 대략 생각하기를...

 

>> 자전거 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쓰자.

>> 사진을 겯들인다.

>> 시간순은 아니다.

>> 그 때 그 때 여행의 기억이 필요할 때마다 쓴다.

 

재밌을 거 같다.

 

아래 사진은 연속촬영에 꽂힌 다음,

프랑스 무슨 무슨 정원에서 찍은거다. 매일 저런 기분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그 기분 무척 그리워질 때, 여행기록을 들춰봐야겠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가끔, 날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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