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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 그리고 섹스 피스톨즈

http://blog.jinbo.net/attach/2434/160143366.jpg브리티쉬 펑크(British Punk)의 1세대인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는 불과 2년여의 기간동안 단 1장의 앨범을 발표하는 것을 끝으로 밴드 활동을 마감했지만 록역사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품위없는 언행과 난폭한 무대 매너, 영국 왕실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 냉소와 허무주의로 가득찬 무정부의적인 음악으로 요약되는 섹스 피스톨즈는 스투지스(The Stoogies), 클래쉬(The Clash), 버즈콕스(The Buzzcocks) 등과 더불어 70년대 펑크 부흥의 구심점이자 록큰롤 혁명의 핵이었다. 단 한 장의 싱글도 발매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들의 노래가 던지는 충격의 여파는 섹스 피스톨즈를 단박에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거의 악명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들에게 쏟아지던 영국 언론과 젊은이들의 관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70년대 초 런던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던 말콤 맥라렌(Malcom McLaren)-뉴욕 돌스(New York Dolls)의 매니저로 활동하기도 했다-은 동창생이었던 폴 쿡(Paul Cook, 56년생, 드럼)과 스티브 존스(Steve Jones, 55년생, 기타)를 만나 의기투합한다. 이들은 밴드를 조직하기로 결심하고 맥라렌의 상점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있던 글렌 매틀록(Glen Matlock, 56년생, 베이스)을 비롯해 왈리 나이팅게일(Wally Nightingale), 델 눈(Del Noone) 등을 합류시켜 스완커스(Swankers)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당시 존스는 보컬을 맡고 있었으나 나이팅게일과 눈이 밴드를 떠나고 팀을 재정비하면서 기타로 전향했다. 섹스(Sex)로 밴드명을 개명한 이들은 새로운 보컬이 필요했고 오디션을 통해 존 리든(John Lydon, 56년생, 보컬)을 영입한다. 얼마후 밴드는 다시 섹스 피스톨스라는 새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존 리든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썩어빠진 자니'(Johnny Rotten)로 이름을 바꾼다.

클럽을 중심으로 연주활동을 하던 섹스 피스톨즈는 EMI 레코드를 통해 76년 전영국을 들끓게 한 문제의 싱글 [Anachy In The U.K]를 발표한다. 그러나 이들은 이해 12월 TV쇼프로에서 천박한 욕설을 내뱉어 언론의 맹공격을 받게 되고 결국 두달만에 EMI로부터 계약파기를 통고받는다. 얼마 후에는 멤버들과 음악적인 견해가 달랐던 매틀록이 밴드에서 해고-매틀록은 비틀즈의 음악에 경도돼 있었다-되고 수지 앤 더 밴시스(Siouxsie & The Banshees)와 플라워즈 오브 로맨스(Flowers Of Romance)의 멤버였던 시드 비셔스(Sid Vicious)가 새로운 베이시스트로 가담한다. A&M 레코드로 이적한 섹스 피스톨즈는 영국 왕실에 대한 비판을 담은 두 번째 싱글 [God Save The Queen]을 발표하였으며 이 음반들은 영국내에서 금지곡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파급력으로 퍼져나갔다. 77년에 이들은 '퀸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보트를 타고 영국 국회의사당이 바라보이는 템즈강 위에서 'Anachy In The UK'를 부르다가 체포되기도 한다.

얼마지나지 않아 A&M사로부터도 버림받은 섹스 피스톨즈는 미국의 워너 브라더스사를 통해 록역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데뷔앨범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77)는 발매했다. 앞서 발표한 두 곡의 싱글을 비롯해 EMI 레코드사에 대한 신랄한 냉소를 담은 'E.M.I', 'No Feelings', 'Pretty Vacant' 등이 수록되어 있는 이 앨범은 UK 차트 정상에 올랐는데 앨범 타이틀의 'Bollock'이란 단어 때문에 한때 경범죄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섹스 피스톨즈는 논란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했다.

유일한 오리지널 앨범이 되고 만 [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의 발매에 이어 이듬해 초 섹스 피스톨즈는 미국 투어를 벌이지만 투어가 끝나자마자 자니 로튼이 밴드를 탈퇴해 버리고 나머지 세명의 멤버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히트곡 'My Way'의 가사를 개작해 부르는 등 활동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나 가십란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시드 비셔스가 78년 10월 맨하탄의 첼시어 호텔에서 여자친구인 낸시 스펀진(Nancy Spungen)을 사냥칼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체포되면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보석금을 내고 귀가한 시스 비셔스는 바로 다음날인 79년 2월 2일 21세의 나이로 그리니치 빌리지의 자신의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약물과용이었다. 후에 시드 비셔스와 낸시 스펀진의 약물과 폭력으로 점철된 자유분방하고 광기어린 행각은 86년에 [시드와 낸시(Sid And Nancy)]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2년의 짧은 기간 동안 음악을 포함해 멤버들의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끊임없이 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던 섹스 피스톨즈는 결국 시드 비셔스의 죽음을 맞이하며 해체를 하고 말았다. 매니저인 맥라레은 섹스 피스톨즈를 유지시키고자 했으나 스티브 존스와 폴 쿡은 이를 거부하고 또다른 펑크 그룹을 결성해 활동을 계속했다. 자니 로튼 또한 뉴욕을 거점으로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Public Image Limited)라는 그룹을 결성하고 앨범을 발표하고 있었다.

섹스 피스톨즈의 해체 이후 이후 여러 레이블에서는 이들의 라이브 앨범과 베스트 앨범 등을 발매했다. 상업적인 목적을 뚜렷하게 띄고 있는 이와 같은 일련의 앨범 발매는 음악 산업에 대한 반항심을 품고있었던 섹스 피스톨즈의 의도에 크게 반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밴드 결성 20주년이 되던 지난 96년 초창기 멤버 4인이 다시 뭉쳐 섹스 피스톨즈라는 이름을 되살렸다. 사망한 시드 비셔스의 자리는 창립 멤버인 글랜 매틀록이 다시 채웠으며 이제 40대가 된 왕년의 펑크 투사들은 라이브 앨범 [Filthy Lucre Live](96), [Alive](96), [[Live at Winterland 1978](97) 등을 발표하며 활동 재개에 나섰다.

글 / 이기연 in changgo.com


섹스 피스톨스 : 대중문화의 id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20세기 서양 사회는 세계 나머지 지역에는 없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록(혹은 로큰롤)의 역사'다. 이건 단지 대중음악의 역사가 아니고(음악에, 더구나 '대중' 음악에 무슨 역사가 있나? 아닌가?), 음악'만'의 역사도 아니다. 범상치 않은 이 역사는 때로 문화사 혹은 정치사의 차원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다른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 역사에도 영웅들이 등장하여 이전의 역사를 작파한다. 달리 말해 록의 역사는 계기적인 작파(作破)의 역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시점은 20세기를 절반으로 뚝 자르고 뒤의 50년을 다시 반으로 나눈 시점인 1976년이다. 펑크의 '원년(Year Zero)'라는 수사가 너무 거창해 보이긴 하지만 획기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섹스 피스톨스라는 이름은 펑크 운동의 전설이다. 음악 밴드로서 이들을 궁금해 한다면 '1976년 런던에서 결성된 4인조 밴드로서 펑크 록의 시조'라고 소개되어 있는 록 음악에 관한 사전들을 뒤져보면 된다. 사전이 조금 전문적이라면 '1970년대 후반 경제 위기 하에서 영국 프롤레타리아 청년들의 자연발생적 반란'이라는 펑크 운동에 대한 '정통적 해석'도 소개되어 있을 것이다. 덧붙여 '쓰리코드주의', '연주 못하기(anti-playing)'같은 이들의 미학(이라기 보다는 反미학)과 '누구나 할 수 있다', '네 스스로 해라(DIY)'라는 윤리학도 상세히 소개되어 있을 것이다. 시각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사진들을 훑어 보면서 닭벼슬같거나 빡빡 밀어버린 헤어 스타일이나 폐고무, 폐비닐, 쇠사슬, 잭나이프 등 허접쓰레기같거나 도착적인 장식물의 기호학적 해석을 부여할 수도 있다.

문화적으로 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사회학적이거나 정치학적 분석이다. 펑크가 이른바 '영국 노동계급 하위문화(subculture)'의 절정이었다는 영국의 문화연구자 딕 헤브디지(Dick Hebdige)의 해석이나, 섹스 피스톨스를 비롯한 초기 펑크의 전략을 탈신비화(demystification)라는 말로 압축하는 미국의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Greil Marcus)의 해석 말이다. 양자를 종합하여 섹스 피스톨스가 청년 반항과 계급적 저항이라는 록 음악의 코드를 넘어 록 음악과 섹스를 공격하고, 이어 사랑, 가정, 계급, 군주제, 자본주의, 진보관 등 서구 사회의 각종 신비화 메커니즘을 발가벗겼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불알 따위는 신경쓰지 마. 여기 섹스 피스톨스가 간다"라는 이들의 음반 타이틀의 의미는 보다 선명하게 들어온다.

그렇지만 주목할 것은 섹스 피스톨스가 '무엇을 한 것인가'이 아니라 '어떻게 한 것인가'다. 이들은 분명 대중문화와 매스 미디어를 거부했지만, 거부하는 방식은 아이러닉했다. 피스톨스는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없어 보이는 뒷골목의 양아치들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니저를 맡은 맬컴 매클래런의 정치 강령의 실행자였다. 맬컴 매클래런은 '장난(prank)', '해프닝'을 통해 매스 미디어의 스펙터클 속에서 '일련의 우발적이고 위험한 상황들을 건설'한다는 상황주의(situatioism)의 강령을 대중음악의 장에서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섹스 피스톨스 본인들이 록 음악과 섹스에 선공을 취하면 자본주의의 일련의 스펙터클이 줄줄이 붕괴될 것이라고 정말 믿었는지는 불분명하다. BBC에 출연하여 'fuck'이라는 단어를 내뱉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광란의 공연(이른바 '주빌리 공연')을 감행하던 시기에는 '매일매일이 카니발같은 무정부 상태'가 지속될 것만 같았다. '대중 문화'가 이렇게 혼돈스러운 양상을 보인 시공간은 없었다.

그렇지만 단지 10개월 뿐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알다시피 대영제국의 무정부상태(anarchy)는 곧 대처리즘의 초강경지배(hyperarchy)로 대체되었다. 섹스 피스톨스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펑크는 분열증식의 운동을 가속화했다. 1980년대 초 신자유주의 하의 대중음악계의 한 극에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을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로 반전시켜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일으킨 삐까번쩍한 뉴 로멘틱스(New Romantics)가 있었고, 다른 한 극에는 '기업형 록은 메스껍다(Corporate rock sucks)'는 슬로건 하에 비타협적이고 반상업적 자세를 고수한 하드코어(hardcore)가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편리한 단어를 동원하기 싫다면 여기서 펑크의 파장들을 모두 설명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펑크의 작파에도 불구하고 록 음악을 포함하여 대중음악의 역사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현 시점에서 사고한다면 펑크란 대중문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운동이기 이전에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하나의 에토스다. 물론 조금 더 나아갈 수도 있다. 펑크는 어떤 고정된 의미도 결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랬기 때문에 부조리하게 병치되자마자 순간적이고 우발적으로 '폭발'했다. 그런 의미에서 섹스 피스톨스는 펑크의, 나아가 1970년대 대중문화의 이드(id)였다.

글/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씨네 21> 1999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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