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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 이것이 모든 창조의 시작이자 내 인생을 결정하는 순간이다. 마음엔 집착을 몸속엔 숙변을 제거할 때 건강이 나를 반길 것이다. 특히 음식문화에서 무엇을 어떻게 먹는 것이 마음을 맑히는가 보다는 혀의 취향과 포만감을 즐기기에 급급했던 우리의 모습 아니었던가? 편식과 과식은 우리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모두 내것이란 착각에 빠져 있지는 않았는가? 주먹만한 위장에다가 그 몇배를 집어넣고도 오장육부가 편안하길 기대하지는 않았는지? 돈도 권력도 명예도 음식도 채워서 쌓이면 부패하고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할 수 밖엔... 비우고 또 비워야 한다. 몸과 마음의 비움을 통해 여유로움과 새로운 가능성으로 자신을 채워보자.

 

숙변이란 묵은변, 오래된 대장벽의 유착물, 찌꺼기등으로 표현가능하다. 즉 숙변은 하수도의 관이 녹슬어 관벽에 이물질이 붙어 있는 것과 같이 대장에 변이 정체된 것을 말한다. 육식과 지방질 과다의 식사는 장에 자극을 주고 배출을 어렵게 한다. 대장이 늘어지고 부풀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여 변이 정체된다. 찌꺼기가 쌓여 부패하고 거기서 나오는 독소로 인하여 신경이 마비된다. 숙변은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숙변제거에 탁월한 서해안갯벌의 함초는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한 보배다. 텅빈 충만의 진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찌울 것이다.

 

'음식공급이 중단되면 배고품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숨겨진 놀라운 기능이 작동하게 되는데 간에 쌓인 노폐물과 독소가 제거되고 피하지방이 소모되며 근육의 일부도 감소한다. 그러나 심장, 혈액, 뇌신경은 놀랍게도 정상적으로 유지된다. 단식은 몸을 정화시키고 조직을 개선하며 독소를 배출하는 놀라운 기능을 한다.' 노벨의학상 수상자 Dr. Alexis carrel

 

生命과 生死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생은 어디에서 왔으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생이란 한조각 구름이 뜬 것과 같고 죽음은 그 한조각의 구름이 없어진 것과 같다. 일어난 구름 스스로는 본래 실다움이 없다. 生死도 이와 같다. 구름이 일어나고 없어짐에 따라 물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연에 의해 수증기로, 얼음으로, 물방울로 변해갈 뿐이다.

 

생명에는 두가지 필수조건이 있다. 대사능력과 복제능력이 그것이다. 대사능력이란 생존을 위한 에너지의 생산과 회전을 말하고 복제능력이란 종족번식을 위한 생산능력을 말한다. 생명이란 결국 어떤 원소들이 어떻게 만나 어떻게 서로 반응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일종의 상태이며 현상인 것이다. 늙고 병든다는 것은 생명현상의 시스템이 변화하는 것이다.

 

諸行無常

모든 것은 변하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 역시 변화의 과정중 사망이라는 절차를 경유, 본질인 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다양한 원소로 구성된 물질이다. 프로판에 불을 붙이면 연소한다. 그러나 불이 있다고 타는 것은 아니다. 연소한다는 것은 프로판과 산소가 결합한다는 뜻이다. 프로판분자를 구성하는 탄소와 수소는 연소의 과정을 거쳐 이산화탄소와 수중기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생노병사라는 과정을 거쳐 본래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에너지의 운동과 변화의 모습일 뿐이다.

 

인간의 체질이나 성격형성은 유전자의 기능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수정된 세포는 분열(성장)과정의 정보와 영양상태에 의해서 결정된다. 난자와 정자, 그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하고 또한 인식과 의식도 새롭게 시작된다. 태아는 어머니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자란다. 부모들의 감정과 주변환경은 태아들의 유전자에 정보를 전달하고 성격을 형성한다. 어머니의 감정 즉 공포나 기쁨과 슬픔 그리고 즐거움같은 감정은 유전자에 정보로 작용하고 잠재의식에 기억되어 인격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자궁속의 태아는 산모로부터 전달되는 영양분, 산소, 호르몬등 생리학적 조건에 적응하기위해 태아의 조절시스템을 미세하게 변조하게되며 이렇게 결정된 태아의 삶의 질서가 프로그램되어 성인이된 뒤 건강을 지배한다. 태교가 태아에 미치는 영향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환경은 정보를 유발시키고 유전자는 정보에 반응하며 마음을 만들고 마음은 행동을 만든다. 그리고 행동은 다시 환경을 만든다. 좋은 환경은 좋은 정보를 유발하고 좋은 정보는 좋은 기억을 저장하고 좋은 정보와 좋은 기억은 좋은 마음으로 반응한다. 내적정보란 유전자의 기존기능과 뇌세포에 기억되어 있는 정보를 말한다. 그리고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접촉의 오감을 통하여 들어온 새로운 정보를 외적정보라 한다. 이러한 내외 정보가 상호작용하여 정신 또는 마음이라는 반응현상을 유발시킨다. 상생호발의 시스템인 것이다. 건강한 삶이 영위되기 위해선 출생과정의 정성스러움, 그리고 출생이후 오감을 통한 좋은 정보를 끊임없이 유전자에 입력시켜야 한다. 콩심은 데 콩나고, 팥심은 데 팥나듯. 나의 미래는 내가 만드는 것. 운명이니 숙명이니 누구의 뜻이니... 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자.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양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은 본질적으로 에너지라는 동질성이다. 우주는 극미세계에서 거시세계인 거대우주에 이르기까지 알고리즘으로 짜여진 치밀한 시스템이다. 단세포 생명체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 하나하나가 개체이면서, 全一性인 우주의 한 부분이다.

 

한개의 유전자에 생명의 전체비밀이 온전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즉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다. 우주적 관점으로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호 다르지 않다(不異)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유전자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벌레나 인간이나 동일형이다. 인간은 '인간만이 인식하고 사고한다'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에 빠져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이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질이 있다. 원자는 핵과 전자가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100여가지의 원자가 된다. 생체를 구성하는 물질 즉 바이러스나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그 구성물질은 모두가 같다. 핵산과 단백질, 그리고 당질과 지방을 생체를 구성하는 4대물질이라 한다. 모든 생명의 구성물질이 같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본질은 결코 하나(不二)라는 것이다. 온 곳도 돌아가야 할 곳도... 이것은 모든 생명이 하나의 생명체로부터 진화되어 현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찌 분별심으로 시기, 질투, 증오한단 말인가? 풀 한포기, 개미 한마리까지도 나의 또다른 모습일진데...

 

인간은 눈과 귀 그리고 맛과 냄새와 촉감으로 들어온 정보에 의한 경험을 통하여 의식하고 판단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감으로 인지되지 않은 바깥세계를 알 수도 없고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와 현상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존재의 본질을 알기엔 절대부족인 오감의 능력에 의존해 시비, 선악, 증애의 놀음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미완성인 현대물리학의 성과조차 우리의 삶에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원자를 포함한 모든 물질의 본질이란 에너지의 다른 모습이다. 쿼크의 수준으로 내려가면 물질은 그 본색인 파동과 물질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원자란 화학적 방법으로는 더이상 분할할 수 없는 물질의 기본입자인데 그것의 크기가 운동장만하다면 원자핵은 골프공정도이며 전자의 크기는 무시해도 좋을만큼 작다. 전자는 원자핵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돌고 있기 때문에 관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미시세계에서는 물질은 없다. 결국 모양이 있는 모든 존재의 본질은 공(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이것이 현대과학에 의해 밝혀진 물질의 본질이자 존재의 실상임에도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온갖 것에 집착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갈등하고 화내고, 그래서 우리의 삶을 스스로 황폐화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중도(中道)는 중간(中間) 또는 중용(中庸)이 아니다. 중도는 시비선악등과 같은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이다. 이것은 평면적인 절충점으로서의 중간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양극단, 또는 대립되는 상대적 위치에 얽매이지 않고 존재의 본질이 공(空)임을 인식, 어느것에도 끄달리지 않으며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임이 입증되었으니 이것 역시 중도의 한 원리이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남의 과오만 생각하는 자는 어느 곳에 가더라도 시비가 그칠 날이 없어 고달픈 삶을 살아간다. 어떤 사람이 미워서 용서할 수 없다?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좌지우지 당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은 상대방이 아니고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전도몽상(顚倒夢想)속에 인생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내고 그래서 이성적 판단을 놓치지는 않는지, 어려운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의 생존에 필수인 자연환경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는지 등등... 이야말로 용서해선 안될 일이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갈등과 괴로움이 따른다. 미움과 원망, 증오의 마음을 느낄 때는 그럴만한 과거의 기억과 그에 대한 집착이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다. 과거에 얽매이는 집착심을 놓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까지 증오와 원망을 그대로 가져와 현재에 투사하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은 결코 두번다시 올 수 없는 과거와는 전혀 새로운 온전한 '지금 여기'의 현실일 뿐, 과거에 얽매인 기억들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우리는 '지금 여기'를 순간순간 온전히 살아 갈 수 있게 된다. 과거는 흘러가서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 없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얽매이는 마음을 놓아버리고 쉴 수 있어야 상대를 치우침없는 바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고 그랬을때 미움과 사랑이 투사된 대상이 아닌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 원망스런 마음과 미운마음이 내 안에 있다면 그 마음이 근본이 되어 앞으로 펼쳐질 나의 미래는 원망스럽고 증오로 가득찬 미래가 펼쳐질 것이다. 늘 새로움의 '지금 여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만이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미래의 밝은 내 모습일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는 '미운사람', '좋은사람'이 아닌 그저 지금 이 순간 전혀 '새로운 사람'일 뿐이라고 느껴야 한다.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 좋은 사람이라는 수식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대상을 좋다고 분별해버리면 이미 좋고, 싫은 상대적 마음의 굴레에 나를 가두고 미움의 싹을 남겨놓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 깊이 살피고 또 살피어 존재의 본질과 함께 할 수 있다면 날마다 좋은 날을 이룰 것이다.

 

더불어 삶은 교만속의 돌봄이나 차별속의 도움이 아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不二의 자세를 실천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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