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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해피엔딩

엔딩이 얼마 남지 않은 2013년.

모두에게 해피엔딩이길~

 

1.

다사다난이라는 단어에 맞는 한 해였다.

나는 무려 대학원을 졸업했고 새로운 작업도 시작했다.

논문 제출 시한을 앞두고 '졸업하지 않겠다'고 버티다 

친구의 끈질긴 설득으로 졸업을 하게된 내가

올해 '졸업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또다른 친구에게

졸업을 해라, 제발 졸업을 하라고 애원을 한 건

내가 그 여름에 졸업을 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안에 일대광풍이 불어와서 확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어버렸다.

 

남편은 실업자가 되었고

나는 IMF 후에 왜 이혼율이 높아졌는지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IMF 당시 엄마는, 어떻게 직장을 잃었다고, 돈을 못 번다고 '하루 아침에' 이혼을 하냐,며

 "요즘 여자들은 너무 편해"라고 말했었고 나는 그 말의 진위여부에 관심이 없었지만

내가 겪어보니 왜 이혼하는지 알겠더라.

남성들을 구성하는 요소의 90% 이상은 세상이 부여한 허구의 남성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너희들을 먹여살린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왔던 남편은

더이상 우리들을 벌어먹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자기가 먼저 못견뎌했다.

나 또한 한 번도 노동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아이를 낳아서 육아에 전념해야했던 시기에도 난 밤을 밝히며 글을 쓰고 라디오출연으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한 번도 '너희들을 먹여살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들쑥날쑥이긴 했지만 내가 남편보다 더 많이 벌던 시기가 있었음에도

늘 나는 그의 부양가족인 양 살아왔고 남편은 늘 자기만이 돈을 버는 사람인 양 살아왔으니까.

 

그 허위의 자부심이 꺾이자 그는 사소한 일에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가족이 위기에 빠진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기 때문에 초반에는 조심하는 듯했지만

그는 결국 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느냐라든지, 왜 다정하게 대하지 않느냐라든지

급기야는 남자 생겼냐와 같은 질문들로 나를 힘들게했다.

의심이라는 게 흡혈박쥐처럼 몸과 마음을 파먹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다 견뎠다.

어떤 날은 학생에게 약속장소인 강의실 방 번호를 가르쳐주는 문자대화를 가리키며

의혹을 제기했던 적도 있었다. 그자리에서 스피커폰 상태로 통화해서 그 의혹을 풀었다.

오랜만의 전화, 뜬금없는 안부. 그 애는 많이 당황했을 거다. 

그 당황을 감수하면서, 내 비겁을 감수하면서 그의 의혹을 풀어주고 싶었던 건

그래... 네가 빠져있는 그 의심이 너를, 네 마음을 괴물로 만든다는 거 아니까.

20대의 어느 시기에 나도 빠졌던 웅덩이니까.

그런 시간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라서 나는 감수했다.

 

어제 성탄미사를 드리면서, 이렇게 한 해를 보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내문서'에는 이혼절차에 대한 안내문과, 빈칸을 다 채운 이혼관련 서류들이 있다.

그 서류들을 제출하지 않고 이 한 해를 보내게 되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행, 이라고 이름붙일 것까지는 없고

인생의 위기가 나에게 닥쳤고 그럭저럭 잘 헤쳐나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살던 집을 떠나야했고 가진 돈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월세집을 얻었다.

한달 후에 이사를 가야하는데

좋게좋게 생각하다보니

그집은 공터가 많아서

콘테이너를 들여서

생애 최초로 나의 방, 

생애 최초로 나만의 작업실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틈틈히 중고 컨테이너를 알아보고 있다.

3*6 콘테이너가 150만원 정도에 거래되는 듯한데

더 싸고 더 깨끗한 콘테이너를 구해서 작업실 잘 꾸리고

작업 열심히 할테다.

 

하은은 이제 중학생이 될 거고 은별은 초등학생이 된다.

아이들이 많은 힘이 된다.

젊은 시절에 마음과 몸과 꿈까지 다 내주며

내 인생 전부를 쏟았던 이 아이들이

내가 흔들리고 내가 지쳤을 때 나를 위로하고 나를 웃게 만든다.

방금도 치킨을 먹고 싶어하는 한별을 위해

은별이가 자기 용돈을 털어서 치킨을 사주었다.

 

그렇게 올해는 모두에게 해피엔딩이다.

그래서 다행이다.

당신에게도 해피엔딩이길

갈 길은 멀지만.

 

2.

마음에 굳은 살이 박히지 않기를 바란다.

굳은 살이 박혀서 무감해지는 그 시기는 살기는 편하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이 일은 더이상 못하는 거니까.

나는 더 예민하게 느끼고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자 이 일을 하고 있으니.

내게 닥치는 모든 일들과 그 일들이 가져오는 감정의 파장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를.

 

3.

남편의 퇴직과 함께 차도 반납해야 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학교를 다녔다.

일주일에 한 번 들었던  '인권과 민주주의'

차로는 1시간 10분이 걸렸던 성공회대학에 가기 위해서

검암까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세번 갈아탄 후 걸어가는 방법으로 학교를 다니니 

2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첫날은 돌아오는 길에 검암역에서 700번 버스가 10분도 안 기다려서 곧 와서

'다닐 만 하겠다' 싶었는데

두번째 날은 전광판에 '700번 대기시간 62분'이라는 글자가 떴다.

망설이다 양곡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양곡에서 다시 강화가는 버스를 타는 방법을 선택.

그런데 정작 양곡에 도착하니 전광판도, 버스노선도도 없었다. 

막막해지는 맘을 달래며 30분 정도를 서있다가 60-3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강화는 그렇게 서울에서 먼 곳이다.

그래도 수요일이면 왕복 5시간을 할애해가며 수업을 들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내게 기도였고 예배였다.

고3때에도 그랬었다. 내가 살던 곳은 중랑천 옆 중화동, 나의 교회는 역삼동.

나는 매주 일요일이면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그 곳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내 신앙이 뜨거웠다기 보다는 그 과정이, 그리고 그 시간이 나를 숨쉬게 해주었다.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던 조효제선생님께 감사를.

그리고 늘 전철역까지 함께 걸으며 깊은 대화를 주고받았던 수녀님께도.

삶은 늘 내게 미래에 대한 사인을 건넸지만 나는 그 신호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어려움은 갑작스럽고 슬픔의 칼날은 내 심장을 예리하게 저며내지만

그래도 휴식같은, 기도같은, 축복같은 만남들이 있다.

모퉁이길을 걷듯이 한 치 앞에 어떤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모르지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만남들이 나를 지켜주고 끌어주었으니.

늘 그래왔고 올해도 그랬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의 친구, 나의 선생님, 나의 학생,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모든 만남들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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