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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가리고 드러눕다

 

 

 

어떤 토론회에 참가하고 오는 길이었다.

'나무와 숲', H사마, 그리고  나.

H사마가 지름길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들어선 길은 폐점한 시장.

매대는 포장같은 걸로 덮여있었고

그 길을 굽이굽이 함께 걷던 '나무와 숲'이

갑자기 더 못가겠다고 그냥 드러누워버렸다. 

나는 애타게 일어나라고 몸을 흔들고

뜻밖에도 H사마는 냉정하게 그냥 두고 가자고 했다.

그의 뒤를 따라 걷다 돌아보니 '나무와 숲'은 눈에 파란색 천을 안대처럼 올려놓고

자는 듯 그냥 누워있었다.

시장골목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햇살이 쏟아졌다.

거기엔 호두로 만든 음식을 판다는 태국의 식당과

스튜를 파는 독일 식당이 있었다.

그곳 어디라도 좋아서 여기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나무와 숲'을 데리고 오자,라고 말하는데

H사마는 자꾸 싫다고 투덜거리며 자기는 그저 중국음식을 먹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다정했던 그 사람이 변한 것같아 의아해하고 있는데

가서 나무와 숲을 데려오겠다고 했다.

그래 잘됐다, 네가 다녀오는 동안

나는 이 곳을 돌아보며 네가 좋아할만한 식당을 찾고 있겠다,

그렇게 그가 떠난 후

나는 어떤 음식점에 들어가서

유효기간이 지난 도장 쿠폰을 보여주며

세상에, 제가 그 식당에 안 간 동안에 이 쿠폰이 못 쓰게 되어버린 거예요....

하소연을 했다. 

(일요일, 오랜만에 라페스타의 베트남 식당에 갔다가 

내가 그동안 서른 개나 모았던 도장쿠폰이 

시간이 지나버려서 무효라는 말을 듣고 실망했었다)

그 집주인은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 

다른 식당의 쿠폰이지만

도장을 다 계산에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안심을 한 나는 길가에 쭈그려 앉아서 H사마를 기다렸다.

그는 웬일인지 신발을 안신고갔다.

그의 신발을 품에 안은 채 길가에 앉아서 멀리 사람들의 발을 보는데

하얀 양말이 보여 나는 웃으며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 사람은 H사마가 아니라 그저 슬리퍼를 신은 사람이었을 뿐.

내 웃음에 놀라며 그 낯선 남자는 나를 미친 여자 보듯이 경계하며 지나쳐갔다.

 

내 얘기를 다 들은 꿈전문가는

내 생각을 물었다. 무엇에 관한 꿈인 것같냐고.

일단 나는 '나무와 숲'한테 힘든 일이 생긴건 아닐까 걱정된다,

하지만 내 꿈은 예지몽인 적은 없었기에 

그저 전해들은 힘든 상황이 꿈에 스몄을 것이다,

그리고 H사마는 나만큼이나 사람들 사이에 생기는 부조리한 상황을 못견디는 사람이다,

최근 결혼을 했는데 나는 그가 다시 영화만드는 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우리들의 예민함은 영화 만드는 데에는 유효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힘들게 하므로 영화만드는 게 우리 천직이라 생각한다,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꿈전문가는 그건 아닌 것같다고 했다. 

아마도 '나무와 숲'은 당신의 또다른 모습일 거라고,

당신은 최근 갈 길이 뻔히 보이지만 그 길이 힘에 겨워

에라 모르겠다, 

눈을 가린 채 주저앉은 건 아닌가.

 

H사마 또한 당신일 수 있다.

발이 상할지도 모르는 그 길을

당신은 준비도 안된 채 나선 것일 수 있다.

그 세 사람은 모두 당신일 거다......

 

그럼 식당들은요?

 

당신은 기대는 가득하지만

정작 아무 것도 맛보지  못했고

준비도  안된 채 무모하게 길을 걷거나

어려움을 앞에 두고 눈을 가린 채 주저앉아 있는 것일 수 있다.

당신을 들여다봐라.....

 

그 모든 말을 들은 후

오늘은 작업일지를 꿈일기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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