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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현실이 꿈에 스미고 꿈이 현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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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13
    2016/01/11
    하루

2016/01/11

요즘 참 분주하여 이틀 전 꿈을 오늘에야 옮긴다.

 

1. 

어느 대학에 특강을 갔다.

그런데 특강이라고 생각했는데 한학기 강의였고

나는 그 첫시간을 아무런 준비없이 맞았다.

강의명이 '현대미술의 동향과 크로키' 뭐 비슷한 거였는데

너무 당황한 나는 당황한 척을 하지 않으면서 내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강의는 정교수가 아닌 시간강사가 내게 하청을 준 

참 이상한 경로로 나한테 온 거다.

원래 담당인 시간강사는 자기없이 내가 먼저 자기소개를 하고

강의에 대해서 설명하는 걸 불쾌해하며

자기가 다시 강의소개와 내 소개를 했다.

(그래봤자 3분?)

그리고 그녀는 잘부탁한다고 말하고 나갔다.

 

머리속으로는 끊임없이 '현대미술의 동향과 크로키'라는 수업을 

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내가 맡았는가에 대해서 의아해하면서도

어떻게든 그 강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머리 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했다.

영상언어에 대한 설명을 한 후에 

카메라의 위치=시선의 위치에 대한 의미를 설명할까.

그러려면 그 동영상을 집에서 갖고 왔어야하는데 왜 안갖고왔지,

암튼 머리 속에는 정리되지 않은 온갖 생각들이 나타났다 사라져가는데

나는 그런 당황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밝은 목소리로

"출석부가 없으니 이름과 함께 자기소개를 하자. 

그럼 즉석에서 출석부를 만들면서 여러분들에 대해서 알아가겠다"

라고 말하고 오른쪽 앞줄 앉은 학생에게 소개를 부탁했다.

 

첫번째 학생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한 후

자기 옆에 있는 학생을 대신 소개했다.

옆학생은 굉장히 잘생긴 남자인데 발달장애인이었다.

첫번째 학생은 자기가 옆 학생의 학습도우미이자 친구라면서

발달장애인의 특성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고맙다고,

그리고 내가 발달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두 편의 영화를 만든 터라

나도 잘 알고 있다, 

발달장애인은 장애특성이 개인의 특성이라고 할만큼 다양한 면모를 보이는데

학생은 정말 친구인 것같다고 기분좋게 리액션을 했다.

그 순간, 강의실이 술렁이면서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자기들도 첫번째학생처럼 필드를 가지고 싶고

필드를 가진 채로 창작활동을 하고 싶다,

필드는 어떻게 개척하는가 선생님의 경험을 들려달라,

하며 열정적으로 요청을 해왔다.

갑자기 내가 나아갈 방향을 발견하고선

내가 해오던 일이라

나는 너무나 기뻐서 활짝 웃었다.

 

2. 전철을 타고 이동중이었다.

나는 서있었는데 내 앞에는 루피망고를 쓴 여자와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들은 우크렐레를 꺼내면서 흥겹게 노래를 하고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거기에 동조한다.

그들의 일행인 듯한 사람들도 여기저기서 흥겹게 동참했고

빵, 치즈, 와인 같은 것을 전철 안 사람들과 함께 나눴다.

꿈 속의 나는 아픈 사람이었고

또 와인을 마시면 안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동조하지 않고

그냥 구경만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녹색당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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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해설가는 "뭔가 새로운 일을 힘차게 시작할 꿈인데요"라고 짧게 말하고 넘어갔다.

가끔 물어봐야 찬찬히 살피지 너무 자주 대화를 청하면 이런 식이다. 

그냥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는 중이다.

다음학기에도 겸임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더 나아가서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맡을 수 있을 것인가.

방학 때면 늘 불안함.

좀더 안정적인 교육을 위해 서울시청자미디어센터 강사풀에 등록을 하려고 한다.

취약계층 미디어교사에 지원하고 싶은데 

2주일전에 센터 주임이 심사를 좀 맡아달라고 했다.

"저는 강사를 하고 싶은데요"라고 말하니 "그럼 좋죠" 하며 웃긴 했는데

그게 진심인지는 잘 모르겠다.

센터입장에서는 노하우를 받고 싶을 뿐

자기들이 관리해야하는 교사로 받는 건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봄부터 인천센터에서 다큐강의를 다시 시작한다.

가을에 했던 강의도 쉽지가 않았었는데

다행인 건 이번엔 우리가 수강생들의 면접을 볼 수 있다는 것.

 

꿈처럼 이런 우려들이 단번에 날아가고

내가 해왔던, 내가 즐거워하는, 그런 교육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하지만 내 꿈은 한 번도 예지몽인 적은 없었다.

올해부터 예지몽을 꾸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언니는 애를 둘을 낳고 나더니 식구들에게 닥칠 일들을 척척 예견하던데

나는 애를 셋이나 낳았는데도 여전히 비슷한 상황만 반복하는 듯하다.

 

그래도 내면이든 무의식이든 나는 성장했다.

상황이 안좋거나 일에 과부하가 걸릴 때

나는 늘 학력고사를 보았다.

그것도 공부는 하나도 안한채 학력고사를 보는 거다.

꿈 속에서 나는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어서 쩔쩔 맨다.

그러면서 또 의아해한다. '이상하다. 나 대학에 간 적이 있는 것같은데'

 

또다른 꿈은 과외다.

과외에 늦었는데 나는 가는 길을 몰라서 헤매거나 

내릴 정류장을 지나쳐버렸다.

 

고3 학력고사가 끝나자마자 담임선생님은 내게 과외를 소개해주었다.

그러니까 나는 18살때부터 끊임없이 과외를 해왔던 거다.

휘황찬란한 자개장 위에 담금주들이 열을 지어 서있었던 첫번째 집.

2개월을 하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과외일정을 조정한 것 때문에

안좋은 소리를 듣고서 나는 집에 와서 그냥 잤다.

기분이 안좋을 땐 자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그 때 처음 알았다.

그전까지는 공부공부공부, 늘 공부만 했다.

공부 말고 할 일이 별로 없었고

공부하고 학교를 다닐 땐

돈을 주는 사람한테 잔소리를 듣는 일 따위는 겪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가르쳤던 그 수많은 아이들은 지금 다 뭘하고 있을까?

<엄마...>를 만든 후 그 때 가르쳤던 애가 이대 법학부 학생이 되어서

쿠키상자를 들고 극장에 찾아와서 무척 놀랐던 기억이 유일하다.

제자든 동창이든 동료든 사람을 남기지 않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러겠지.

 

내가 조금은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꿈 속 내가 더이상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아니라는 거다.

물론 준비하지못해서 쩔쩔매는 건 여전하지만

요즘에 주로 쩔쩔매는 장소는

대학강의실이나 방송국 녹음실이다.

강의준비를 못해서 겉으로는 웃으면서 잔머리를 굴리거나

방송원고를 못 쓴 상황에서 앞 차례 연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다.

그럴 때 꿈 속의 내가 느끼는 조바심과

어떻게든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온갖 생각을 짜내는 고군분투는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쓰이는 것같다.

 

<몸 이야기>

방송원고를 쓰지 못해서 이 이야기는 다음기회에.

다만 친구가 보내준 논문을 읽다가

"진료실에서 한의사는 얼굴을 비롯한 환자의 몸을 바라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반면, 의사는 컴퓨터 모니터를 주로 바라본다"는 부분에

밑줄을 긋고 싶었음.

H병원의 주치의나

자생한방병원의 젊은 의사는

나를 보거나 나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나의 MRI차트만 보면서 '단순근육통'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김태우의 논문은 

'앓음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바로 옆의 몸보다

그 몸에서 재현된 이미지와 수치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을

당대 생의학의 풍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자생한방병원은 안 그랬다. 

 

그 의사가 보였던 행태를

"미국 의사에 의한 침 시술,

중국 중의사에 의한 CT/MRI 진단과 외과 수술

그리고 일본 의사의 한약 처방"과 비슷한 경향으로

바라볼 수는 없는 일이다.

한국에서 한의학의 과학화, 표준화라는 이름으로

한의학과 생의학의 결합이 논의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게 결코 자생한방병원과 같은 형태는 아닐 것이다.

 

며칠 전 병원에서 조선일보 전면에

자생한방병원에서 만든 베개 광고가 실린 것을 보았다.

돈이 돈을 먹는 세상.

그 세상에서 우리 선생님을 만나서 참 다행,

이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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