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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현실이 꿈에 스미고 꿈이 현실을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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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12/30
    추락사
    하루

내가 선 자리

하루님의 [2016/01/18] 에 관련된 글.

 

스승의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12월 말의 일이다. 

문자를 받고서 단체문자라고 생각을 했는데

문자가 한 번 더 와서

"네 내일쯤 찾아뵙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답문자를 보낸 후 깜박 잊었다.

아니 잊었다기 보다는 그 때 몸이 너무 안좋아서 치료받고 쉬는 게 일이었다.

그런데 발인 전날 밤 11시에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제부터는 이름을 정해야겠다. 스승은 P감독이고 선배는 T감독이다. 

T감독은 내게 "P가 너는 꼭 올거라고 기다리고 있더라. 가는 김에 조의금을 대신 내줘"

그 전화를 받은 게  발인 전날 밤 11시.

혹시  가는 사람 없나 여기저기 다 전화를 해봤는데

안받거나, "그래? 근데 너는 잘 지내니?"와 같은 반응들.

누구도 스승의 어머님의 장례식장에 갈 생각이 없는 거다.

결국 그 밤에 장례식장에 갔다.

장례식장엔 아무도 없었고(정말 스승과 그 직계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스승은 너무나 반가워하며

"너는 꼭 올 줄 알았어. 여기 음식들도 다 정리했는데 너 오면 주려고 내가 챙겨둔거"

 하며 참이슬 파란 거 한 병을 내놓으셨다.

(사고 전의 나는 주로 참이슬 빨간 거를 마셨는데 스승님을 뵈온지 6년 가까이되니

그냥 내 몸을 생각해서 그러셨을 거라 이해함)

 

주차를 잘못 해서 차가 엉기게 된 꿈과 관련해서는 이 일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받았던 건 전체문자가 아니라 스승이 나한테만 보낸 문자였던 거다.

독립영화계에 있었으나 독립영화계를 떠나서 독립영화인들과 교류가 없던 스승은

내게만(!) 그 문자를 보냈던 거고

내가 독립영화인들에게 단체문자를 돌렸어야 했던 거다!

 

그런데 말이야. 내 차는 모닝이라서 거기 세워뒀다고 해서

통행에 큰 불편을 끼칠 만큼은 아니었던 거거든.

그러니까 내 핑계 댈 것은 아니었지 않을까.(<---이건 핑계 혹은 자기변명인 것같긴 해)

내가 잘못을 했다는 건 나한테는 아버지같은 D감독님과의 통화 후에 알게 되었다.

D감독님은 그랬다.

"걔가 독립영화쪽하는 영 멀어졌잖아. 그러니 아무한테도 소식을 안 전한 거야"

모든 이들과 소원해진 스승은 오로지 나한테만 문자를 보낼 수 있었던 거다.

나는 제자이니까. 내가 가로막고 있는 차처럼 소식을 막아버린 거다.

 

사람 사이의 길은 처음이 중요하다.

스승 P와 ,나를 처음으로 조연출로 써준 T선배는

푸른영상 안에서도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나이도 T선배가 한두살 위지만 나한테 T감독은 선배이고 P감독은 스승이다.

P감독이 푸른영상을 그만 둔 직후에 다큐멘터리 워크샵 수강생을 모집했고

당시 유학을 준비중이었던 나는 '소수정예니까!' 비싼 수강료를 내며

P감독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니 나는 평생 그냥 제자인 거다.

2010년 가든파이브에서 내 영화를 상영할 때

스승은 학생들을 몽땅 끌고 와서 매진을 만들어주셨다.

그리고나서 스승은 말했다.

"나는 네가 크게 될 줄 알았다. 이게 뭐냐...."

감독으로서 스승은 차갑고 냉정한 스탠스를 유지한다.

스승은 그래서 나의 주관적인 카메라가 맘에 안 든 거다.

 

T선배도 나의 주관적인 카메라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T선배로부터 다큐멘터리에 관한한 거의 모든 것을 배웠다.

푸른영상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갈  때 T 선배는 나를 보라매공원에 불러 여러 당부를 했다.

"출근시간 잘 지키고, 사무실 전화 잘 받고, 성실하게 살아라.

결혼에 파묻히지 말고 평생 다큐멘터리 만들면서 살아라"

나는 T선배한테서 배운대로 성실을 제1의 덕목으로 알고 살았고

그래서 매번 영화를 만들때마다 늘 불만족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영화는 잘 못만들었지만 참 열심히는 했군'이라는 평가만은

놓치지 않으려 매번 열심히는 만들었다.

 

세번째 꿈과 관련해서는 T선배의 당부가 떠올랐다.

T선배는 말했다.

"우리는 돈을 못 버니까 알바를 많이 할수밖에 없는데

일정정도 연차가 되면 촬영알바는 후배들 몫으로 돌려야한다.

그게 의리고 도리다."

 

촬영알바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시민교육이나 대학강의는 영화 몇 편 만든 경력있는 감독들한테 들어온다.

하지만 촬영알바는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은 반면

시민교육이나 대학강의는 기회를 잡기 참 어렵다. 

경력 뿐만 아니라 지명도나 작품 흥행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학교에서는 2009년부터 강의를 해오고 있다.

학교강의는 꿈 속에서 나온 '가장 넓고 좋은 방'이다.

총명하고 열정적인 학생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제작중인 다큐멘터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일은 즐겁다. 나의 본업인 다큐제작과 가장 맞닿아있는 일거리이다.

시민교육센터에서 하는 강의에서는 쓰는 근육이 다르다.

자기표현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미디어로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

그런데 최근 자원이 몰리고 있는 시청자미디어센터는 뭔가 핵심은 남겨두고

활동만 가져온 듯한 느낌이 크다.

무엇보다 열의를 가지고 뭔가 해보려는 시도들을 귀찮아하는 것같다.

인천에서 그랬는데 서울은 어떨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최근 새로이 시청자미디어센터 교육을 시작하려는 나의 처지가

'가장 넓고 좋은 방'을 두고 '일본식 점방'에서  옹색하게 몸을 씻으려는 꿈과 통한다.

 

내가 그 넓고 좋은 방에서 빠져나오면 다른 감독이 그 자리에 들어설 것이다.

매번, 방학 때가 되면, 나에게 다음 학기 강의가 주어질 것인지 불안해지는 상황.

나의 모든 일은 그렇지.

방송도, 글 연재도, 대학 강의도, 시민센터 특강도,

"하루, 당신만이 진정한 적임자요!"

라는 태도로 나를 대하진 않는다.

나는 매번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기회가 다시 오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때문에 시민센터 강의를 못했다.

한달 전부터 커리와 수업차시안을 짰던 그 교육을

어떻게든 해보려고, 해보려고 노력하다가

교육 사흘 전에 다른 감독에게 넘겼다.

그렇게 넘긴 일거리들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들의 세계에 굶고 있는 감독들은 워낙 많고

일거리는 워낙 부족하기 때문이다.

 

깔깔깔 웃으면서 "쌤 감사해요~!" 인사하던 1~2학년 여학생들에게

이 방에서 같이 지내자~라고 말하면 안되었을까?

그렇게 생겨먹지 못했지. 나라는 사람은.

다큐멘터리를 포기하지 않는 일은

신체의 고통이나 작업과정에서의 고민, 만을 견디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안정된 삶에 대한 쏠림과 편안하고 나른한 시간에의 매혹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뿌듯함을 느끼게 하는,

창작 외의 다른 일에 대한 눈돌림.

이런 거미줄들이 얼굴에 끈끈하게 달라붙는다 하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다큐멘터리 말고도 행복할 수 있는 일은 많다는 게 지금 나의 함정.

 

첫번째 꿈에 대해서는 틈틈히 심심할 때 생각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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