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 아가씨

from 2001/06/22 23:33
어제는, 오랫만에 두더지 아가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내 방 베란다 지붕에서 과묵하고 예의바른 것으로 생각되는 다른 두 마리의 두더지와 함께 살고 있다.

'두더지로써...'
작고 까만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길고 굵은 손가락으로 무릎 위쪽을 살살 긁으면서,
그녀는 내 반응을 살피고 있는 것 같았다.
눈치를 본다고나 할까?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두더지로써...지붕에 산다는 것이 아주 좋은 일은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약간 쉰듯했지만, 듣기에 아주 편안했다.

나는 두더지들을 딱 한번 만났었고, 그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과묵하고 예의바를지도 모른다는 것 뿐이었다.
'응...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들은, 상대방이 약간 어색하고 관심없는 듯이 대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두더지 아가씨는 바깥쪽을 향해있는 그녀의 손바닥을 조금 힘겹게 뒤집어 바라보았다.
(두더지들은 땅을 파기 좋도록 손바닥이 바깥쪽을 향해 있다.)
'비가 오면 시끄럽지. 땅속은 안그런데 말이야...'
'정말 그렇겠는걸.'
'사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늘 시끄럽고, 물론 비가 오면 더 시끄러워지지만, 너무 더워...'
'저런...'
'사실, 나는 지붕으로 이사오는 것을 반대했었어.'
'그래?'
'우린 원래 근처 땅속에 굴이 있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여기저기 아스팔트를 깔았잖아...'
'응...그랬구나...'
갑자기 그녀는 말을 멈추고 베란다 지붕쪽을 살피는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비밀이야.'
'응...그래.'
우리는 다시 약간 어색해져서,
식탁 위에 놓인 오렌지 쥬스를 한모금씩 마시고 방안을 둘러보고
서로 눈이 마주치면 조금 웃었다.

'사실, 먹을 것이 부족하다거나 한 것은 아니야. 우린 요새 일 할 필요도 없어. 가만히 있어도 지붕에는 벌레가 많고...가끔 비가 오면 아스팔트 위로 지렁이가 나오기도 해. 풍족한 생활이지.'
'흠...'
'혹시, 뭔가 좀 들을 수 없을까?'
'응? 뭐? 음악을 틀까?'
'...사실, 나는 음악을 좋아해.'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데?'
그녀의 검은 털사이로 언뜻 분홍빛이 지나간 것도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우습겠지만, 사실, 난 음악을 잘 몰라.'
'아, 그럼...내가 좋아하는 걸 듣자.'
우리는 듀크 엘링턴의 All the thing you are 연주를 들었다.
두더지 아가씨는 말없이 컵을 바라보면서 음악을 끝까지 듣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난 음악이 너무나 좋아. 흐흑...'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같이 음악을 들었다.
듀크엘링턴과 존 콜트레인과 내가 즐겨듣는 영화음악들도 들었다.
어떤 곡도 그녀를 감동시켰고, 시간은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우리는 시간이 너무 느려서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9시가 되었을 때,
두더지 아가씨는 컵과 접시를 싱크대에 가져다가 씻고는
'이제 가야겠어'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를 살짝 안아주었다.
즐거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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