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가 읽은 소설'에 해당되는 글 43건

  1. 은하철도의 밤 2008/07/12
  2. 존레논대화성인 2008/07/10
  3. funtional 2007/11/23
  4. 핑퐁 (3) 2007/10/07
  5.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 (5) 2007/09/23
  6. Big Bang & Prime number 2007/09/22
  7. 한 밤 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2007/09/22
  8. 눈먼자들의 도시는 (6) 2007/09/22
  9. 티코와 케플러 (5) 2007/08/31
  10. Natural born killer (2) 2007/08/18

은하철도의 밤

from 책에 대해 2008/07/12 02:25

책이 집에 없다.

 

어딘가에 있겠지만, 보고 싶을 때 보지 못하는 것은 싫다.

 

게다가 품절이다.

 

품절만 안되면, 선물한 셈칠텐데.

 

특별히 좋아하는 책은, 결국 여러번 사다가 품절인 사태를 만나게 된다.

 

미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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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2 02:25 2008/07/12 02:25

존레논대화성인

from 책에 대해 2008/07/10 01:03

또 몇권의 책을 샀고, 이번 선택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존레논대화성인은, 저자가 독자에게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역시 비평가따위는 속을 파서 볏집따위로 채우는 편이 낫겠다 생각했다.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냥 적어놓기만 해도 바보같은 생각인데.

 

그러고들 사는 거지.

 

 

나 부탁이 있어.

 

더이상 이곳에 오지마.

 

니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

 

지워버린 덧글도 봤어.

 

오.지.마.

내 근처에 다가오지 마.

 

존중했던 만큼 경멸해.

 

내 이름을 생각하지도, 내 몸에 대해 생각하지도 마.

기분이 아.주. 나쁘거든.

 

농담이 아니야. 너를 자극하기 위한 것도 아니야.

다시는, 나를 기웃거리지 마.

 

내 이야기에 너를 섞고 싶지 않아.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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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 01:03 2008/07/10 01:03

funtional

from 책에 대해 2007/11/23 16:38

narrator라는 단어는 말하는 목소리(a voice speaking)를 암시하고, 말하는 목소리(a speaking voice)는 존재의 감각(인식 / sense)을 암시한다. 그라마톨로지의 출현을 선포한, 데리다는, 말하기를 글쓰기로부터 분리시키는 차이(gap)에 주목했다 : narrator를 '말하는 자'로부터 '쓰는 자'로 변형시키는 그러한 변화, 혹은 좀 더 정확하게는, 어떤 inscription point(시점)를 향하는 것의 부재. 정보과학(Informatics)은 이러한 변형을 좀 더 확장시킨다. 글쓰기가 이진수에 의해 서명된 명멸하는 기표들에 자리를 양보하게(yield to) 되면서, narrator는 쓰는 자(scribe)가 아니라, 적절한 코드들에 접근하기 위한 권한을 부여받은 사이보그가 된다.

narrator의 기능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보려면, Mark Leyner의 [내 사촌, 나의 위장병 전문의]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 하나인 "나는 지독하게 뜨겁고 조밀한(dense) 하얀 점이었다. (I was an Infinitely Hot and Dense White Dot)" 중에서 유혹 장면을 살펴보자. "Sinutab에 의해 high되고(약을 먹고 열에 들떠있고), 등방적으로 운전하고 있어서 어떤 목적지로도 균등하게 갈 수 있는 narrotor는, 자신을 궁상맞은 작은 싸구려 술집(dive)에서 발견한다.

 

모르겠다... 그러나 거기에 그녀가 있다. 나는 그녀가 사람인지 제 5세대 여성형(gynemorphic)의 안드로이드인지 모르며, 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내 술, 메틸 이소시아네이트 온 더 락,을 홀짝거리면서,  짝짓기(mating) 페로몬 앰플을 하나 깨어 열어서 바 전체에 그것이 퍼지도록 했다. 메틸 이소시아네이트는 인도의 보팔에서 누출되었을 때 2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인 물질이다. 그러나 웨이트트레이닝과 에어로빅 연습, 저지방 섬유질 식이요법 덕분에, (the scuff는) 내게는 전혀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충분히 확실하게 어슬렁거리고, 내 옆의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 내 입술은 이제 그녀의 입술로부터 1옹스트롬 단위만큼 떨어져 있다. .... 나는 그녀에게 키스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머리를 돌려버린다. ... 나는 당신에게 키스할 수 없어. 우리는 단일접합체적(monozygotic) 복제인간들이야 - 우리는 우리의 유전 물질을 100% 공유하고 있어. 내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너는 아름다운 하루야, 나는 외친다. 너의 숨결은 갈릴리의 바다를 건너 빠 드 부레를 추는 유칼립투스의 제피로스(서풍)야. 고마워. 그녀가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 집으로 돌아가 사랑을 나눌 수 없다. 단일접합체의 근친상간은 연장자들(elders)에 의해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면? ... 만약 내가 작은 샷건을 가지고 있어서 살아있는 유기체의 세포들안에 유전 입자들을 쏘아 넣는다면, 그들의 유전자 회로들을 변형시켜 단일집합체적 복제인간이 더 이상 단일접합체적 복제인간이 아니게 한다면, 그러면 그녀는 근친상간의 타부를 위반하지 않고 근육맨과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나는, 셔츠를 열어 젖히고, 검은 청바지의 허리 밴드안에 끼어있는 기구를 드러내면서, 말한다. 어떻게 그걸 가졌지. 그녀는 그 두껍게 섬유조직으로 강화된 플라스틱 몸통과 탄창위에 엠보스된 Uzi-Biotech 로고를  흘낏거리면서 숨이 막힌다. 탄창에는 젤라틴화 된 유전자재조합 DNA가 두 통 끼워져 있다. 크리스마스를 위해 샀어. .... 네 염색체를 뒤섞기 전에 하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니? 겨냥하면서, 나는 말한다. 응, 있어. 그녀가 말한다. 네가 먼저 해.

 

구절들에서 재치있는 부분들 대부분은, 일반 상식(folk wisdom)과,  높은 수준의 어법과 아이디어들로 이루어져 그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유혹의 클리셰의 병치에서 비롯된다. narrator는 자연에 누출되었을 때 수천을 죽인 화학물질을 홀짝거린다. 그러나 그는 위험에 면역되어 있다. 저지방 식이요법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narrator는 여성/안드로이드에게 키스하기 위해 가까이 몸을 기댄다. 그러나 그는 수소 원자의 직경보다 더 작은 거리인, 1 옹스트롬의 거리에서조차 접촉하지 못한다. 등장인물들은 그들을 일란성 쌍생아로 만든, 그러나 그들이 서로 다른 성을 갖는 것을 막지는 못한, 같은 단일접합체로부터 복제인간이 되어, 근친상간의 타부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 그들은 부족의 연장자들에 의해 강요된 혈족관계의 규칙에 의해 지배되지만, 혈통의 진화론적인 형식에 끼어들고 분열시키는 유전학적 기술에는 접근할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문제가 그들의 염색체를 뒤섞어놓을 Uzi-Biotech 무기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narrator는 결국, 그들의 정체성이 손상되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다섯 페이지가 채 안 되는 단편이라는 한도 내에서 조차, 이 만남은 그것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건에 앞서거나 따라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narrative는 가장 빈약하고 임의적인 맥락에 의해 연결된, 장면에서 장면으로 도약한다. 모순들은 narrative를 조립과 분해의 pattern(반복?/견본들)을 통해 만들어진 문자그대로의 안드로이드의 한 종류로 만든다. 이 텍스트 안에 자연적인 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텍스트를 향한 자연스러운 몸은 없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정체성은 타이포그래피와 융합하고(I was a ,,,,dot)  더 나아가 중력붕괴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같은 그러한 신기술 재구성(high tech reconstruction)과 융합된다(I was an infinately hot and dense white dot"). 기표들은, 명멸하는 기의의 훝어지는 물결 안에서 터져나갈 준비가 된 상태로, 신성의 중요한 시점에 접근하는, 폭발성 물질 내에 있는 별들의 몸처럼 붕괴한다.

행위를 친숙하게 하는 문화적 코드들과 전통적 기대들을 혼란시키는 신조어적 접목들(neologistic splices) 사이의 그러한 폭발성 긴장들은, narrative를 구성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들은, 또한 그럴듯한 심리학이 부여된 말하는 목소리로써 보다, 주관성의 새로운 종류 쪽으로 push하는, 갈라진 틈들과 혼란의 연속으로써 narrator를 구성한다. 이러한 주관성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저 편의 어떤 수신자를 향하는 스토리텔러로부터 전문가로 이어지는 호를 그리는 궤도를 상상해보자. / 발터 벤야민이, 작품의 리듬에 그의 단어들을 짜맞추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러를 재현할 때(evoke) 생각했던, 가치와 존재를 공유하는 공동체는 부족의 연장자들과 노래들에 대한 노래(Song of Songs)를 넌지시 빗대어 어렴풋이 반영하고 있다. 거기에 덧붙여 료타르는 포스트 모던의 조건에서, 이야기를 할 권한이, ‘물리적으로 흩어지고, 전자적으로 엮인 전문화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적절한 자격증을 가지는 것’에 의해 주어지는, 전문화에 대해 쓰고 있다. 궤도의 이러한 상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의미될 수 있다. narrator는, 물리적 위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거나 이야기의 제작과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등방적으로” 운전하고 있다. 그의 권한은, 공동체 안에서의 물리적 참여에 의해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Uzi-Biotech 남근 은 물론이고, 페로몬, 메틸 이소시아네이트, 젤라틴화된 유전자 재조합 DNA 를 포함하는 수준 높은 언어구사능력의 소유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권한은 또한, 그것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추방된다. 왜냐하면 모순(부조화)들이, narrative와 narrator가 이야기 내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하이 테크, 정체성 변환 오르가즘 폭발에 의해 의미지워진, 가까스로 생각해낼만한 형태로 변이하려고 하면서, 극단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형태란 무엇인가? 그 물리적 발현은 다양하다. 그러나 복잡한 코드를 조작하기위한 가능성은 일정 불변의 것이다. 구절들의 언어를 통해 이미 일어난 희미한 변형들은 주관성 내에 있다. 이 주관성은 정확한 코드들을 소유하는 것에서 그의 권한을 이끌어 낸다. 셀 수 없는 시나리오들이, 누군가가 컴퓨터를 속여, 그가 컴퓨터가 구성된 권한으로 인식하는 코드를 가졌거나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에, “권한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대중적인 문학과 문화 속에서 존재한다. 흔히 이러한 시나리오는 그 사람이, 정보적 시스템안에서 인식되지 않고 움직이게 허락하는 위조 정체성을 가지면서, 변화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narrative들을 읽는 다른 방법이 있다. 권한부여 코드들을 통해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정확히 존재하는, 그가 그 코드들을 알기 때문에 인식되는, 다른 종류의 주관성 내에서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표면적 기만은 보다 깊은 진실에 의해 받쳐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두드리는 코드들이 된다. narrator는, 비록 이러한 기능들이 narrative 안에서 시대착오적인 암시와 왜곡된 연관성으로 남아있지만, 스토리텔러나 전문적 권위자가 아니다. 오히려 narrator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이고, 해커이고, 코드를 조작하는 사람이다. 텍스트가 디지털라이즈된 그 존재 안에서 어떤 상태에 있다고 가정하면, 문자그대로 그(he/it?)는 이러한 코드들이다.
코드의 조작자로서의 narrator의 구성(construction)은 명백히 독자의 구성을 위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독자는 같은 형식으로, 듣는 자에서 읽는 자로, 해독자(decoder)로 움직이는  층층의 고고학을 통해 구성된다. 코드는 본질적으로 즉시 광섬유로 보내지기 때문에, 더 이상 의미를 고정하고 해석을 안내하는 것을 돕는, 공유되는 안정된 문맥은 없다. 읽기(reading)처럼, decoding은 원천 텍스트(source text)로부터 공간적, 시간적으로 임의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fixed-type print와는 현저히 다르게, decoding은 원본 텍스트(original text)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 초판, 공정한 복사, 자필 원고(holographic)는 없다. 명멸하는 기표가 있을 뿐이다. 명멸하는 기표들의 일시적인 패턴들은, G.W.S. Trow가 ‘맥락(context-문맥?) 아닌 것에 대한 맥락’이라고 표현한, 모든 맥락이, 모든 텍스트처럼, 전자적으로 매개된 구조들이라는 의심을 재현하고 구체화하고 있다.>> decoder를 시스템에 묶어 두는 것은 하나의 해석의 일치의 안정성이나, 모든 책수집가들이 알고 있는 물리적으로 책을 갖는 것의 강한 기쁨이 아니다. 오히려 사이보그로서, 자신의 신체적 특징들이, ‘몸의 내부 체제(in-format)인 DNA로부터 컴퓨터의 첫 번째 언어인 이진 코드까지 많은 층위를 통해 확장되는 기의의 사슬들 안에서 또 다른 명멸하는 기표, 살로 된 정보라는 것’에 대한 인식을 구조(construction)하는 것이다. 
‘functionality'는 가상 현실 기술자들이, 컴퓨터-인간 인터페이스에서 활발한 커뮤니케이션 형식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새로운 용어이다. 예를 들어, 만약 유저가 정보 장갑을 끼고 있다면, 손의 움직임은 하나의 functionality를 구성한다. 만약 컴퓨터가 음성-활성화된 명령에 대답할 수 있다면, 음성은 또 다른 functionality가 된다. 만약 컴퓨터가 몸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다면, 공간상의 위치는 또 다른 functionality이다. functionality들은 양 방향으로 작용한다. : 다시 말해, functionality들은 컴퓨터의 능력을 묘사함과 동시에 유저의 감각-운동(sensory-moto?) 기구가 어떻게 컴퓨터의 반응들에 적응하도록 훈련되는가를 보여준다. VR 시뮬레이션과 함께 하면서, 유저는 그의 손을, 컴퓨터가 수용할 수 있는 일정한 형식의 몸짓으로 움직이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유저의 뇌에 있는 신경 조직(구성?) 내에서 변화가 발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들 중 어떤 것들은 오래 지속될 수 있다. 컴퓨터는, 인간이 컴퓨터를 만든 것처럼, 인간을 주조한다.
narrative의 functionality가 변화할 때, 새로운 형식의 독자가 텍스트에 의해 생산된다. 독자들은 다른 functionality들을 통해 읽도록 훈련되기 때문에, 명멸하는 기의의 효과들은 파문처럼 퍼져나간다. 다른 functionality들은 컴퓨터가 발명되기 이전에 쓰여진 텍스트를 포함하는, 모든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게다가 narrative functionality들의 변화는, 특정 장르의 구조적인, 주제에 관한 특성보다 더 깊은 곳까지 미친다. 내러티브를 생산하기 위해 활성화된 양식 자체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수준에서, information narrative와 다른 종류의 현대 소설들 사이의 미묘한 연결(접속? connection)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정보 기술을 포함하는 맥락 속에서, S/Z에서 롤랑 바르트는 훌륭하게 ‘다양한 코드들의 생산으로써의 텍스트를 읽음’의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 information narrative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 information narrative가, 코드들이나 정보기술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문자 그대로의 수준에서조차 종종 이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멸하는 기의(signification)는, 코드들의 생산적인 힘을 텍스트 너머, 의미화의 과정들을 포함하는 데까지 확장한다. 의미화의 과정은, 인터페이스들이 인간을 통합 회로의 그물망에 빠뜨리게 할 뿐만 아니라, 기술들이 텍스트를 생산하게 한다. 기술, 텍스트, 인간을 연결하는 회로가 확장되고 강해질수록, 양적 증가가 질적 변형으로 변화되는 지점이 가까워진다.
만약 패턴/랜덤니스(무작위)의 변증법이 존재(현존)/부재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고 있다는 나의 평가가 맞는다면, 그 함의(암시)는 내러티브를 넘어 많은 문화적 활동의 장 안으로 확장될 수 있다. 내 시각으로는, 현재 문화적 상황에서 이러한 함의(암시)들의 가장 심각한 점 가운데 하나는 물질성과 구체화(embodiment)에 대한 조직적인systematic) 평가절하이다. 나는 이러한 추세가 아이러닉하다고 생각한다. 물질적 조건들과 구체화된 경험들 안에서의 변화들은, 정확하게 매일의 경험들 내에서 그 깊은 뿌리들에 변화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서 나는 그 변화를 분석하고 문학에 있어서의 그 함의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변화가 구체화의 경험을 변화시키는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함을 제안하는 것에 대해서도 고려했다. 한 편으로, 만약 구체화(embodiment)가 정보과학(informatics)이 정신에 뿐만 아니라 몸에도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함의한다면, 다른 한편, 그것은 또한 비물질화를 향한 압력에 저항하는 물질성의 축적으로써 기능한다.
내가 여기에 적은 거의 내용 대부분에 내재하는 것은, 현존과 패턴이 상반되는 관계 내에 서로 맞은편에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한 가지가 더 많은 중요성이 부여될수록, 다른 쪽은 덜 주지되고 가치매겨 진다. 누군가 패턴과 현존이 상호적으로 강화하고 보완할 가능성을 즐길 때, 완전하게 다른 읽기(readings)들이 나타나게 된다. 폴 비릴리오는 정보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해야하는가에 대해 누구도 물을 수 없다고 말했다. 시장의 힘은 이미 작동하고 있고, 사실상(내가 그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구체화된 virtuality들로써 우리를 구성하는 환경들 안에서, 우리가 살고 일하고, 놀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이러한 발전에 건설적으로 개입하는 우리의 가장 나은 희망은, 현존과 패턴을 상반되기보다 상호보완적으로 볼 가능성을 여는, 해석의 spin을 두는 것이라고 믿는다. 정보는 인간성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세계 속의 물질적 실체로써 만들어 내는 구체화(embodiment)로부터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다. : 그리고 구체화(embodiment)는 언제나 예를 들어 설명되고, 지엽적이고, 구체적이다. 구체화(embodiment)는 파괴될 수는 있지만, 복제될 수는 없다. 일단 그것을 구성하는 특정한 형태가 사라지고 나면, 어떤 양의 조작된 정보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다. 이러한 관찰은 개인의 삶-형태에 대해 진실인 것처럼, 행성에 대해서도 진실이다. 우리가 사이버스페이스가 새로운 식민지의 가능성이 되었다는 새로운 전망들을 탐험하는 것을 서두를 때,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물질세계의 부서지기 쉬움에 대해서도 기억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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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3 16:38 2007/11/23 16:38

핑퐁

from 책에 대해 2007/10/07 18:57

NeoPool님의 [BombBombBomb] 에 관련된 글.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바람의 노래를 들으면서 이나중탁구부를 읽다보면

세계를 언인스톨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시가테라도, 두더지도 읽다보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핑퐁은 미노루 후류야님의 아류였다.

존 메이슨처럼.

 

하지만, 역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떠올랐다.

레이먼드 카버도.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구나......

정말로 같은 시대를 살고 있구나.

 

아류라는 건 멋지구나.

 

평론가가 아닌, 작가의 짧은 말이 있는 것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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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7 18:57 2007/10/07 18:57

1. 커뮤니케이션?

 

다른 모든 동물들처럼 인간은 자신이 취합한 정보들에 대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위험한 것과 위험하지 않은 것, 편안한 것과 편안하지 않은 것 등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우연에 의해(여기까지 인간은 세계에 대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의존적이었다),

인간이 눈을 중심으로 진화하게 되어, 직립하게 되고,

손이라는 복잡한 도구를 갖게 되면서,

인간은, 단순히 정보(특히 이미지)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정보(이미지)를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달리는 얼룩말은 사자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그러나,

달리는 얼룩말에 '돌을 던지면' 돌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서 얼룩말을 죽인다.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는 비슷한 경험들을 공유하게 된다.

누군가 얼룩말에 돌을 던져서 얼룩말을 잡으면,

그걸 '보고 있던' 다른 개체들도 그 정보를 입수하여 각자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개체가 정보를 뇌에서 구성하는 방식은 개체의 경험이나 뇌의 물리적 형식에 따라 달라진다.

 

누구도 돌을 던져보지 않은 다른 공동체의 구성원이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왔을 경우,

전체 구성원이 사냥을 나갔을 때, 그는 다른 구성원들이 서로 주고 받는 몸짓과 눈짓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커뮤니케이션이란 공통의 경험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된다.

 

지각이란,

초원위에서, 바람과 풀들과 나무들과 얼룩말들 가운데, 특별히 약한 얼룩말을 '골라내어', '주목하는' 일이며

커뮤니케이션이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하고, 시선을 돌맹이로 움직이는 정보(이미지) 등을

'지각하는 것'이다.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하고, 시선을 돌맹이로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코드이다.

 

그 코드는 우리의 환상과는 달리, 전혀 객관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다.

경험적일 뿐이다.

 

돌맹이를 던져보지 않은 이에게 그 코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이란

민주적이고 쌍방향적인 소통과 대화가 될 수 없다.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돌맹이를 던져본 부족은

돌맹이를 던져보지 않는 자가 돌맹이를 던지는 이미지(정보)에 자주 노출되도록 강제하는 수밖에 없다.

 

 

2. 고립된 단자들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에서 볼츠는

라이프니츠가 완전히 닫힌 체계인 '고립된 단자'들 사이에

신에 대한 근본적인 의존성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서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다고 했다

라고 말한다.

 

신을 '세계'로 대치하면, 내게는 좀 더 그럴 듯하게 느껴진다.

 

고립된 개체들은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의존성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서로 커뮤니케이션 한다.

먹고 자고 싸는 일들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 세계란 필연적인 조건이고

그 조건들의 동일함, 조건에 대한 의존성의 동일함이 커뮤니케이션을 낳는다.

 

그런데 인간은 눈과 뇌와 손을 갖게 됨으로써

세계에 대해 의존적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제 조건은 동일하지 않게 되었다.

 

세계는 인간에 대해 의존적이다.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의존성이라는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개체와 개체가 직접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한다는 환상은

세계에 대해 의존적이지 않은 자기자신을 상정함으로써만 가능하게 된다.

 

고립된 인간의 근본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은, 그곳에서부터 나오게 되는 걸까?

 

 

3. 이미지

 

돌맹이를 손으로 들어올려 던지기까지

인간의 뇌가 어떤 경험을 겪었는지는 그저 분분한 추측이 될 뿐이다.

어찌되었건 인간은 돌맹이를 들어올려 던졌다.

 

정보(이미지)를 가공하여 다른 정보(이미지)로.

 

[눈먼자들의 도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인간은 이미지없이는 인간이 아니다.

 

태초에 이미지가 있었다.

 

4. 미디어

 

이미지는 미디어이다.

 

5. 돈은 이미지이고 미디어이다.

 

그보다 강력한 이미지와 미디어.

 

6. 문자

 

내가 겪은 것을 타인에게 겪게 하는 것.

이것이 커뮤니케이션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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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3 16:27 2007/09/23 16:27

Big Bang & Prime number

from 책에 대해 2007/09/22 23:52

And when the universe has finished expoding, all the stars will slow down, like a ball that has been thrown into the air, and they will come to a halt and they will all begin to fall toward the center of the universe again. And then there will be nothing to stop us from seeing all the stars in the world because they will all be moving toward us, gradually faster and faster, and we will know that the world is going to end soon because when we look up into the sky at night there will be no darkness, just the blazing light of billions and billions of stars, all falling.

 

I think prime numbers are like life. They are very logical but you could never work out the rules, even if you spent all your life thinking about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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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23:52 2007/09/22 23:52

굉장히 개인적인.

 

 

아무도 없는 곳에 혼자 있고 싶어지는 책이었습니다.

 

어떤, 분위기에 대해서 생각했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

 

한 밤 중에 개토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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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23:14 2007/09/22 23:14

책 날개에는, 이 책의 작가가

마르케스, 보르헤스와 함께 20세기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꼽힌다고 적혀있었습니다.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에 포함되기 때문에,

저는 조금 기대를 했었어요.

결론은, 이 책만으로는 마르케스나 보르헤스의 책들만큼 재밌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흠잡을 데 없는 완성작이라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관심이 있는, '이미지'라는 주제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미지가 없이는, 인간이라는 존재, 문명, 문화도 없다는 거죠.

인간의 진화는 어쩌면 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찾아보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만

(누군가 이미 그런 학설을 내놓았고, 어쩌면 이미 정설에 가까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각정보의 방대함때문에 뇌가 발달하고, 시각정보를 좀 더 확보하기 위해 직립보행을 하게 되고,

덕분에 손이라는 엄청나게 복잡한 도구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이미지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지만,

인간은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저것은 위험', '저것은 먹을 것', '저것은 생식', '저것은 안락함'

 

뭐 그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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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2 23:10 2007/09/22 23:10

티코와 케플러

from 책에 대해 2007/08/31 14:06

글씨가 쓰여져 있는 거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사적으로 읽기는 하지만,

역시,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작가에 대한 설명글같은 건 재미가 없다.

소설이건, 이론서이건, 시이건,

뒤에 붙은 작품해설은 읽지 않는 것이 작품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대부분 읽지 않는다.

 

평론같은 건 대체 왜 쓰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하고

평전같은 것도 사실 잘 이해가 안된달까.

체 게바라 평전은 세계 최악의 글들 중에 꼽힐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것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아서

개토는 '티코와 케플러'라는 책을 읽고 있다.

평전이라기 보다는 꽤나 자세한 티코와 케플러 생애연구서랄까.

평전보다는 연구서가 낫다.

 

개토는 '티코 브라헤'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고 '티코스노바'라는 말이 주문같아서 좋다.

 

학자들은 한스가 면접 때문에 그곳을 방문했는지 아니면 티코의 아내로 20년간 살아온 누이를 찾아온 것인지 그 이유를 연구하고 있다.

p 65

 

티코브라헤는 덴마크의 굉장한 상류귀족이었는데, 아내는 귀족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가 농민의 딸이었는가, 성직자의 딸이었는가라는 부분이 아마도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은 모양인데, 책에서는 그녀가 티코와 수준이 맞으려면 최소한 성직자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한스'라는 사람이 그 증거가 될 작은 열쇠를 갖고 있다는 투로 위 문장을 적고 있다.

학자들이, 그 이유를 연구하고 있다니.

대체 그걸 알아서 어따 쓴단 말인가?

그래도 그런 태도가 어딘가 모르게 재미있다. 

전세계 인구의 0.1 %정도나 될까 한 사람들이  한스가 누나를 찾아간게 틀림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어디선가 자료를 조사하다가는, 갑자기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다.

 

사소한 사실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입장에서 보면 작은 조각도 모아서 빈틈없이 채우고자 하는 학자들도 있는 법이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떤 이론, 어떤 글, 어떤 그림이 사회적 인가를 받고 통용된다는 것이 저자의 환경조건에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으니. 아내가 농민의 딸인지 교양있는 성직자의 딸인지도 중요한 문제였을 거다.

 

100페이지정도 읽었는데, 재미있었던 부분.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별의 시차(stellar parallax) 이동을 관찰할 수 없다는 말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마차 안에서 숲을 바라볼 때 나무가 이동하지 않는다면 마차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별의 시차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예가 있다. 모든 고대인들은 별의 시차 이동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모스(Samos)의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는 코페르니쿠스보다 1700년 앞서 별들이 무한대나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의 먼 거리에 있다고 가정하며 태양 중심의 우주사상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숲을 마차를 타고 관찰한다면 실제 나무 기둥들의 상호이동이 있더라도 식별할 수 없다고 말했다.

p91

 

번역이 상당히 껄끄러워서 괴롭긴하지만, 가끔은 맛없는 것도 먹어보는 거다.

부드럽게 머릿속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잠시, 소설책으로 머리를 좀 식힌 다음에 다시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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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31 14:06 2007/08/31 14:06

Natural born killer

from 책에 대해 2007/08/18 09:57
Egg님의 [사랑의 기술] 에 관련된 글.

"실제로 그들은 이렇게 정신나간 상태 - 즉 서로에게 "미쳐버린" 상태 - 의 강도를 그들의 사랑의 강도의 증거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그들이 전에는 얼마나 고독했었던가를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Natural born killer 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다.

 

아마도 내가 그런 영화류에 미쳐버렸던 건 내가 얼마나 고독했던가를 증명하는 거겠지.

 

대학교 1학년 때 [사랑의 기술]을 내게 선물해 준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는 그가 시인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흠....내 책에는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버리는] 것을 사랑의 열도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왔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라고 번역되어있네...

 

엊그제도 누구랑 이야기하면서 이 책의 제목을 잠깐 떠올렸었는데.

읽어봐야할 시기인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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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8 09:57 2007/08/18 0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