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코와 케플러

from 책에 대해 2007/08/31 14:06

글씨가 쓰여져 있는 거라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사적으로 읽기는 하지만,

역시, 작품에 대한 해설이나, 작가에 대한 설명글같은 건 재미가 없다.

소설이건, 이론서이건, 시이건,

뒤에 붙은 작품해설은 읽지 않는 것이 작품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대부분 읽지 않는다.

 

평론같은 건 대체 왜 쓰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하고

평전같은 것도 사실 잘 이해가 안된달까.

체 게바라 평전은 세계 최악의 글들 중에 꼽힐만 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런 것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아서

개토는 '티코와 케플러'라는 책을 읽고 있다.

평전이라기 보다는 꽤나 자세한 티코와 케플러 생애연구서랄까.

평전보다는 연구서가 낫다.

 

개토는 '티코 브라헤'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고 '티코스노바'라는 말이 주문같아서 좋다.

 

학자들은 한스가 면접 때문에 그곳을 방문했는지 아니면 티코의 아내로 20년간 살아온 누이를 찾아온 것인지 그 이유를 연구하고 있다.

p 65

 

티코브라헤는 덴마크의 굉장한 상류귀족이었는데, 아내는 귀족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녀가 농민의 딸이었는가, 성직자의 딸이었는가라는 부분이 아마도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은 모양인데, 책에서는 그녀가 티코와 수준이 맞으려면 최소한 성직자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한스'라는 사람이 그 증거가 될 작은 열쇠를 갖고 있다는 투로 위 문장을 적고 있다.

학자들이, 그 이유를 연구하고 있다니.

대체 그걸 알아서 어따 쓴단 말인가?

그래도 그런 태도가 어딘가 모르게 재미있다. 

전세계 인구의 0.1 %정도나 될까 한 사람들이  한스가 누나를 찾아간게 틀림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어디선가 자료를 조사하다가는, 갑자기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다.

 

사소한 사실들이 모여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입장에서 보면 작은 조각도 모아서 빈틈없이 채우고자 하는 학자들도 있는 법이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떤 이론, 어떤 글, 어떤 그림이 사회적 인가를 받고 통용된다는 것이 저자의 환경조건에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으니. 아내가 농민의 딸인지 교양있는 성직자의 딸인지도 중요한 문제였을 거다.

 

100페이지정도 읽었는데, 재미있었던 부분.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별의 시차(stellar parallax) 이동을 관찰할 수 없다는 말은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마찬가지로 마차 안에서 숲을 바라볼 때 나무가 이동하지 않는다면 마차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별의 시차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예가 있다. 모든 고대인들은 별의 시차 이동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모스(Samos)의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는 코페르니쿠스보다 1700년 앞서 별들이 무한대나 거의 무한대에 가까울 정도의 먼 거리에 있다고 가정하며 태양 중심의 우주사상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숲을 마차를 타고 관찰한다면 실제 나무 기둥들의 상호이동이 있더라도 식별할 수 없다고 말했다.

p91

 

번역이 상당히 껄끄러워서 괴롭긴하지만, 가끔은 맛없는 것도 먹어보는 거다.

부드럽게 머릿속으로 재해석하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잠시, 소설책으로 머리를 좀 식힌 다음에 다시 읽어야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8/31 14:06 2007/08/31 1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