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토가 읽은 소설'에 해당되는 글 43건

  1. 내 생각 2006/12/26
  2. 문화적 저항 (3) 2006/12/26
  3. 구별짓기 2006/12/26
  4. 고래 (2) 2006/12/21
  5. 은빛 초콜릿맛 임신 캘린더 (1) 2006/09/28
  6. 사요나라 갱들이여 2006/06/29
  7. 돈키호테 2005/01/29
  8. 난장이 2003/12/31
  9. 해변의 카프카 2003/08/25
  10. 목화밭엽기전 2002/06/10

내 생각

from 책에 대해 2006/12/26 18:56

개토님의 [문화적 저항] 에 관련된 글.

사실은,

아주 개인적인 의미에서 구별짓기를 다시 읽어야 했을 뿐이었다.

해묵은 습관이 어디선가 고개를 쳐들어

처음 쓰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고 말았다.

다시 원래 쓰려던걸 쓰려다가

먼저 덧글들을 읽어버렸는데, 생각의 가지가 가지를 쳐서

그리고는 길을 잃었다.

 

생각보다 블로깅은 어렵다.

 

블로그를 사용한다는 것은 소통을 원한다는 적극적 표현일텐데,

소통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와도 같은 것일텐데

 

습관적으로 극단적 해석을 해버리게 된다...

 

내가 옳다는 믿음에 대한 반성,

어쨌든 그걸 위해 구별짓기를 읽었던 거라는 점을 기억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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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18:56 2006/12/26 18:56

문화적 저항

from 책에 대해 2006/12/26 17:53

개토님의 [구별짓기] 에 관련된 글.

 

이 책의 연구에서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음을 의미한다.

즉 의도적 건망증이라고도 말해지는 것에 의하여 문화에 관한 온갖 교양화된 담론 전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서, 단순히 (기성질서에의) 승인이라는

과시적 기호에 의해 확보되는 이익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양에 따른 즐거움이라는 보다 내밀한 이익의 포기도 함축한다.

 

부르디외, 구별짓기 중에서

 

 

 

참으로 무서운 문장이다.

[구별짓기]를 읽으면, 문화적 저항의 한계를 보게 된다.

문화적 저항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슬픈 이야기.

 

경제자본은 없지만 문화자본을 풍족하게 맛보고 자라난 '문화귀족'으로서

그러한 자신을 자각하고 있는 '문화귀족'으로서,

 

페미니즘이 '문화귀족'들 사이에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자본주의에 무기력하게 이용당하는 모습,

저항의 음악이 가장 잘 팔리는 음반이 되어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내고

'~이즘'들이 그저 멋지구리한 아이콘들로 자리잡은 것을 볼때

몇몇 지식인들만이 전유하는 생활양식으로서의 저항을 볼때

 

나 스스로의 저항이 아주 개인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욕망의 발현에 불과했다는 것을

마주보게 될때

'본질적인 예술인'인 양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30년동안 읽어오고 보아온 문화들에 의해 만들어진 에토스를 내 것인양 표현할 때

 

나는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생각한다.

 

 

뼈속까지 절어버렸다.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해독하기 어려운 사회학저서이고

나는 그런 글을 읽으면서 '구별된' 나를 바라보고

그저 슬퍼할 뿐이다.

 

저항은, 어떤 문화로 존재해야 하나요? 부르디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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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17:53 2006/12/26 17:53

구별짓기

from 책에 대해 2006/12/26 17:02

예술과 문화 소비가 애초부터 사람들이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또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전혀 상관없이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술가의 생활양식은 언제나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에는 도전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이 추구하는 가치나 권력들이 전혀 공허함을

실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생활양식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고 터무니없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미적성향을 규정하고 있는 세계와 중성적 관계를 맺으려면

잠재적으로 부르주아적 자기투입의 자세가 요구하는 진지함의 정신을 전복해야한다.

예술을 생활양식의 토대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문학에 대한 기억이나 회화에 대한

이러저러한 언급을 통해 세계나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수단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지나치게 윤리적인 평가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와 심미주의자들이 내리는

'순수하고', 순전히 미적인 평가는

나름대로 독특한 논리를 갖춘 에토스의 여러성향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문화자본은 풍부하지만 경제자본은 빈약한 특정집단에

특유한 성향이나 이해관심과의 관계를 간파하지 못하는 한

예술가들이나 심미주의자들은 계속 정통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서로 상대화하는 여러 취미들이 끊임없이 유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일종의 절대적인 참조사항을 제공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들은 역설적이지만 본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타고 태어난 성향'을 절대적 차이로 만들려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정당화시켜주게 된다.

 

 

 

정통 문화에 대한 규정을 둘러 싸고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벌이는 논쟁은

단지 지배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이

사회적 투쟁의 정통적인 투쟁목표와 무기에 대한 정의를 부과하기 위해,

다시 말해 경제자본과 학력자본, 또는 사회자본과 사회적 권력(각 권력의 구체적인 효율성은 특히 상징적 효율성, 즉 집단적 신념에 의해 공인되고 위임된 권위 때문에 배가된다)의 정통적인 지배원리를 규정하기 위해 벌이는 끝없는 투쟁의 한 측면일 뿐이다.

지배분파와 피지배분파들(이들 자체가 지배계급 전체의 장과 상동적인 구조속에서 조직되는 여러 장을 구성하고 있다) 간의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번역해보면

-그리고 여기서는 피지배분파들이 주도권과 통제권을 갖고 있다 -

그것은 지배적인 견해가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들 간에 설정하는 대립항들로

그대로 이항가능한 대립항에 의해 조직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 자유, 무사무욕, 승화된 취향의 '순수성', 내세에서의 구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 이해관심, 물질적 만족의 비속함, 현세에서의 구원이 대립된다.

이로부터 '부르주아지'에 맞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생산해내는 모든 전략은 필연적으로

아무런 명백한 의도 없이도 이들이 생성되는 공간의 구조덕분에 이중적 효과를 가져오는 행동의 도구가 되는 경향이 있다.

즉, 민중적, 물질적 이해와 부르주아적 이해 양자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종속도

무차별적으로 거부하는 도구가 된다 .....[중략].....

부르지아지들이 피지배계급들과 비교해 자신들은 '무사무욕', '자유', '순수성', '영혼' 쪽에

서 있음을 표시함으로써 다른 계급들이 자신들을 겨냥하고 만든 무기들을

다른 계급들에게 되돌리려 할 때마다 자신들에게 적대적으로 생산된 예술을

그토록 손쉽게 자신들의 탁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플라톤이 요구한 대로 즐거운 진지함, 즉 '진지함의 없는 정신'이 없는 진지함,

항상 진지할 것을 전제로 하는 유희를 통해 진지함을 즐기려는 문화게임을 진행해나가려면

반드시 예술가들처럼 존재 전체를 일종의 어린아이들의 게임처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오랫동안, 때로는 평생동안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와 똑같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모든 어린아이는 부르주아로서 삶을

시작하며 타인에 대해 마술적 관계를 맺으며, 타인을 통해 세계에 대해 마술적 관계를 맺지만 조만간 그러한 세계로부터 벗어나온다).

 

 

이 책의 연구에서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음을 의미한다.

즉 의도적 건망증이라고도 말해지는 것에 의하여 문화에 관한 온갖 교양화된 담론 전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서, 단순히 (기성질서에의) 승인이라는

과시적 기호에 의해 확보되는 이익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양에 따른 즐거움이라는 보다 내밀한 이익의 포기도 함축한다.

 

 

부르디외, 구별짓기 중에서

 

 

"예술가의 삶의 발명" 이라는 책을 읽고 싶은데, 번역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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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17:02 2006/12/26 17:02

고래

from 책에 대해 2006/12/21 19:18

'고래'라는 책을 읽었던 곳에 다시 놀러와서

결국 그 책을 끝까지 모두 읽어버렸다.

나는 그 책을 쓴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기억에 남지 않는 흑백의 사진과 '천명관'이라는 이름.

 

참 같은 시대를 살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가 읽는 책과 보는 영화와 만나는 사람들이

나와 많이 다르지 않겠구나...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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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1 19:18 2006/12/21 19:18

나는 부주의하다.

타고난 것으로 대체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도록 부주의하다.

전형적인 부주의함이다.

부주의함의 스테레오타입.

버스를 타면 내려야할 정류소를 지나치고,

손에는 항상 물건을 가득 들고 있어서 번갈아가며 떨어뜨린다.

칼을 들면 꼭 손을 베고 먹을 때는 잘 흘리고

'저러다 꼭 ~하게 되지~'하고 남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나는 현실로 행한다.

 

부주의한 만큼 거짓말은 못한다.

부지불식간에 진실을 말해버리니까.

 

어쨌든 부주의하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내게 칼을 주지 않는다.

 

예스24에 5만원이나 되는 쿠폰이 있어서 이번달 초에 그걸로 책을 샀다,

9월 말까지만 쓸 수 있는 쿠폰이어서 생기자 마자 신나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부주의하게도 쿠폰 쓰는 것을 잊었었다.

 

쿠폰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친구를 통해 알게되었다.

 

나는 없는 살림에 5만원이나 카드를 긁어 책을 샀던 것이다.

쿠폰은 친구가 아니었으면 그냥 날릴 뻔 했다.

 

덕분에 이번에 그 쿠폰으로 책을 5만원어치 더 샀다.

안타까운 것은, 그 와중에 또 받을 수 있었던 천원쿠폰을 받고도 또 쓰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에 산 5만원어치의 책들은 모두 반짝반짝 건강한 비늘이 눈부신 월척들이었다.

두 손 가득 살아 펄떡이는 책들의 둔중한 무게는 가슴을 오래도록 설레게 한다.

 

이번에 산 책들은,

1. 임신캘린더 /오가와 요코/김난주 옮김/이레출판사

2. 초콜릿칩쿠키살인사건 /조앤플루크/박영민 옮김/해문출판사

3.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옮김/민음사

 

그리고 그외 3권(한권은 아직 읽지 못했고 두권에 대해서는 흠....), DVD 한개.

 

감동먹은 책은 임신캘린더와 초콜릿칩쿠키살인사건.

 

여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두권의 책.

행복한 내 속에 있는 깊은 절망을 차갑게 녹이면 이렇게 되는 구나...

따듯하게 녹이면 이렇게 되는 구나...

 

어린시절 우리집에 있던 100권짜리 한질의 세계문학선집에서 여성작가가 쓴 책은 단 두권.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언덕', 샬롯 브론테의 '제인에어'.

그 전에도 이후로도 내가 읽은 수천권의 책들은 대개 남성작가의 것들이었다.

 

책을 읽으면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다른지, 그들이 보는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

참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같은 책은, 여성은 죽었다 깨나도 쓸 수 없다.

 

두 권의 책을 내 아끼는 책 분류 책꽂이에 꽂고 보니

여성작가가 처음 들어왔다.

흠칫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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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16:27 2006/09/28 16:27

다카하시 겐이치로를 좋아하지만,

사실 읽은 거라고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와 "사요나라 갱들이여" 뿐이다.

일본어를 못하니 어쩔 수 없다.

번역된 것이 그것 뿐이니.

 

"사요나라 갱들이여"는 몇번을 읽었는지 잘 모르겠다.

여러번 읽었는데,

새로 읽을때마다,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부분이 다가오면

가슴이 두근거리곤 한다.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젠 눈물이 안나면 어쩌지...'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결국 울고만다.

 

가장 눈물이 많이 나는 부분은 헨리4세가 죽어가는 부분이다.

조금씩 작아지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차라리 지금 죽여달라고 말하는 헨리4세는

 

나와 닮았다.

조금씩 작아지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하는 나.

차라리 지금 죽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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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9 09:31 2006/06/29 09:31

돈키호테

from 책에 대해 2005/01/29 12:37
생각하고, 분석하고, 창조하는 것은(그는 또한 내게 이렇게 써보냈다)
비정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성의 정상적인 호흡작용이네.
이러한 일반적인 기능이 이따금 성취시키게 되는 것을 미화시키거나,
케케묵고 시대에 동떨어진 생각들을 보물인 양 떠받들거나,
<만능박사>가 생각했던 것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게으름과 야만성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네.
모든 사람들은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미래에는 그처럼 될 것이네.

보르헤스 전집에 주석을 단 바보를 불쌍히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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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9 12:37 2005/01/29 12:37

난장이

from 책에 대해 2003/12/31 15:44
2003년이 끝나는 날이다.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의미들이
뭐 그렇게 나쁘지 않게 느껴지는 끝이라 다행인가.
오늘은 새벽 0시쯤에 흰쌀밥에 물말아 김치랑 대구포를 저녁으로 먹으면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마저 읽었다.
밥을 먹으면서 보기에는 힘든 책인데,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한 손에 밥숟가락을 들고 한 손으로 코를 훔치면서
12월 31일의 시작을 맞았다.

나는 천국에 살고 있다.
아버지는 옳았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아버지, 덕분에 천국에 살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게 될 줄 몰랐던 어둠 속, 불안의 시절,
내가 가진 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 뿐이었는데
따듯하고 깨끗한 집과 편리한 차를 가진 요즈음
분노와 증오가 있던 자리에는 차가운 빛, 욕망이 들어섰다.
매끈한 욕망 덩어리, 제 몸을 삼키고 뭉게뭉게 증식해 간다.

나는 죄를 짓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지옥에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변명이다.

나는 정말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일까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난장이들을 외면하면서
나는 절름거린다.

뜨거웠던 추위도 이 겨울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얼마나 더 가지면 지옥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천국에 사는 자는 지옥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옥에 사는 자는 매일 천국을 꿈꾼다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읽었다.

내 천국은 구름대신 난장이들이 바닥으로 사용되는 곳.

새해에는 혁명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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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31 15:44 2003/12/31 15:44

해변의 카프카

from 책에 대해 2003/08/25 13:24
하루키는 참 남자다.
읽다보면, 정말 무사태평하구나 싶다.
나는, 경험의 뿌리 깊은 단절면에 부딪히면서 그를 보게 된다.

저 너머의 세계에서,
'고속버스 안에서 15살 소년이 20대 여인을 만난다.
그녀를 누나라고 생각한다. 갈 곳 없는 그는 그녀의 집에 가서 잔다.
그녀가 손으로 사정하게 해 준다. 마음 편히 잔다.'

고속버스를 탄 15살 소녀라면 어떨까?
속편하게 오빠라고 생각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의 집에 가서 잔다거나
그의 손마사지를 받고 오르가즘에 도달한다거나 그 후에 맘 편히 자는 것은
가능성 0%의 영역이다.

하루키 소설이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만
항상 성적인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그의 소설 속의 여성들에 대해서
이제 좀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그의 1인칭 시점 서술 방식은 세계에 대해 너무나 주관적이어서
굳이 상대 역의 여성이 어떤 삶을 사는가는 볼 필요가 없다.
그에게는, 그의 주된 관심사, 그녀가 얼마나 특별한 성적 매력을 가졌는가를
부각시켜줄 환상적인 그녀의 외모와 아주 간단한 이력 정도면 충분하다.

'해변의 카프카'에서 하루키는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일반적인 외디푸스 컴플렉스 이론을 보강하기 위해 '누나'라는 대상을 추가했지만,
엄마로부터 시작해서 어쨌든 모든 여성은 성적인 대상이며
아버지는 극복해야할 대상인 외디푸스 컴플렉스는 여성주의에 가장 반동적인 사상이다 싶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성적서비스를 받으면서 성장해서 아버지를 극복하고 자기 자신을 찾아 새 세계를 창조한다.

'해변의 카프카'는 하루키가 자신의 극악한 면을 총정리한 대작이다.
사실, 안스럽게도 하루키는 이 대작에서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세계 평화를 원하지만 그 과정에서 겪어야할 모든 고통에 대해 무지하다.
무사태평이다.

그가 주인공을 30대 중반의 중산층 남성으로 다룰 때는, 그러려니 하고
그의 환상적 이야기를 즐기기도 했지만,

15세 소년을 30대 중반 중산층 남자와 똑같이 다루면서
마치 세대를 넘나드는 대작을 쓴 듯 자만심에 빠진 하루키는 보기 싫다.
100%의 사랑과 그를 못 잊어 병약한 여자도 이제는 지겹다.

그는 주인공 카프카가 자기자신이고 '여러분' 모두란다.
그가 자신의 주관성을 인정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해변의 카프카'는 그의 지난 작품 총정리 였고, 총정리 해 놓은 것을 보니 실망이다.
그의 단편들은 재미있는 것도 많았는데. 그는 늙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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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8/25 13:24 2003/08/25 13:24

목화밭엽기전

from 책에 대해 2002/06/10 22:12
[목화밭엽기전]이라는 책을
동네 대여점에서 빌려다 보았다
자주 그렇듯이
눈으로 슥슥 ?어보았다

백민석이라는 작가의 글중에서
두번째로 읽어보는 글.

백민석은 그렇다치고

요새 나는 피비린내나고 혼란스러운 걸
찾아다니나 싶다
배틀로얄도 그렇고
파졸리니의 소돔도 그렇고
폭력에 질려서
더 큰 자극이 아니면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된걸까

처음에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는데
요새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나보다 싶어
그저 그렇다

폭력을 통해서 세상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는데
보여준다고 달라질 것이 있나
그저 익숙해질 뿐이지

이 글을 왜 썼을까 생각해보았다
동물원이 양산해내는 괴물들도
그안의 동물들도
이젠 지겹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지속되는 것이 싫다

비정상적인 열정만 남은 괴물이 되는 것도
동물원의 동물이 되는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런 글은 왜 쓰나

애꿎은 몸만 망가뜨리고 있다
이 몸뚱아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쓰고 싶어서 썼겠지
쓰여지니까 썼겠지
살고 싶어서 살겠지
살아지니까 살겠지
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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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10 22:12 2002/06/10 2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