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짓기

from 책에 대해 2006/12/26 17:02

예술과 문화 소비가 애초부터 사람들이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또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전혀 상관없이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술가의 생활양식은 언제나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에는 도전으로 비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부르주아적 생활양식이 추구하는 가치나 권력들이 전혀 공허함을

실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러한 생활양식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고 터무니없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미적성향을 규정하고 있는 세계와 중성적 관계를 맺으려면

잠재적으로 부르주아적 자기투입의 자세가 요구하는 진지함의 정신을 전복해야한다.

예술을 생활양식의 토대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문학에 대한 기억이나 회화에 대한

이러저러한 언급을 통해 세계나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수단을 결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내리는 지나치게 윤리적인 평가와 마찬가지로 예술가와 심미주의자들이 내리는

'순수하고', 순전히 미적인 평가는

나름대로 독특한 논리를 갖춘 에토스의 여러성향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문화자본은 풍부하지만 경제자본은 빈약한 특정집단에

특유한 성향이나 이해관심과의 관계를 간파하지 못하는 한

예술가들이나 심미주의자들은 계속 정통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서로 상대화하는 여러 취미들이 끊임없이 유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일종의 절대적인 참조사항을 제공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들은 역설적이지만 본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타고 태어난 성향'을 절대적 차이로 만들려고 하는

부르주아지의 요구를 정당화시켜주게 된다.

 

 

 

정통 문화에 대한 규정을 둘러 싸고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벌이는 논쟁은

단지 지배계급의 다양한 분파들이

사회적 투쟁의 정통적인 투쟁목표와 무기에 대한 정의를 부과하기 위해,

다시 말해 경제자본과 학력자본, 또는 사회자본과 사회적 권력(각 권력의 구체적인 효율성은 특히 상징적 효율성, 즉 집단적 신념에 의해 공인되고 위임된 권위 때문에 배가된다)의 정통적인 지배원리를 규정하기 위해 벌이는 끝없는 투쟁의 한 측면일 뿐이다.

지배분파와 피지배분파들(이들 자체가 지배계급 전체의 장과 상동적인 구조속에서 조직되는 여러 장을 구성하고 있다) 간의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재번역해보면

-그리고 여기서는 피지배분파들이 주도권과 통제권을 갖고 있다 -

그것은 지배적인 견해가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들 간에 설정하는 대립항들로

그대로 이항가능한 대립항에 의해 조직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 자유, 무사무욕, 승화된 취향의 '순수성', 내세에서의 구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 이해관심, 물질적 만족의 비속함, 현세에서의 구원이 대립된다.

이로부터 '부르주아지'에 맞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생산해내는 모든 전략은 필연적으로

아무런 명백한 의도 없이도 이들이 생성되는 공간의 구조덕분에 이중적 효과를 가져오는 행동의 도구가 되는 경향이 있다.

즉, 민중적, 물질적 이해와 부르주아적 이해 양자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종속도

무차별적으로 거부하는 도구가 된다 .....[중략].....

부르지아지들이 피지배계급들과 비교해 자신들은 '무사무욕', '자유', '순수성', '영혼' 쪽에

서 있음을 표시함으로써 다른 계급들이 자신들을 겨냥하고 만든 무기들을

다른 계급들에게 되돌리려 할 때마다 자신들에게 적대적으로 생산된 예술을

그토록 손쉽게 자신들의 탁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플라톤이 요구한 대로 즐거운 진지함, 즉 '진지함의 없는 정신'이 없는 진지함,

항상 진지할 것을 전제로 하는 유희를 통해 진지함을 즐기려는 문화게임을 진행해나가려면

반드시 예술가들처럼 존재 전체를 일종의 어린아이들의 게임처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오랫동안, 때로는 평생동안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와 똑같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모든 어린아이는 부르주아로서 삶을

시작하며 타인에 대해 마술적 관계를 맺으며, 타인을 통해 세계에 대해 마술적 관계를 맺지만 조만간 그러한 세계로부터 벗어나온다).

 

 

이 책의 연구에서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음을 의미한다.

즉 의도적 건망증이라고도 말해지는 것에 의하여 문화에 관한 온갖 교양화된 담론 전체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에 의해서, 단순히 (기성질서에의) 승인이라는

과시적 기호에 의해 확보되는 이익을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양에 따른 즐거움이라는 보다 내밀한 이익의 포기도 함축한다.

 

 

부르디외, 구별짓기 중에서

 

 

"예술가의 삶의 발명" 이라는 책을 읽고 싶은데, 번역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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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6 17:02 2006/12/26 1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