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주의하다.

타고난 것으로 대체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도록 부주의하다.

전형적인 부주의함이다.

부주의함의 스테레오타입.

버스를 타면 내려야할 정류소를 지나치고,

손에는 항상 물건을 가득 들고 있어서 번갈아가며 떨어뜨린다.

칼을 들면 꼭 손을 베고 먹을 때는 잘 흘리고

'저러다 꼭 ~하게 되지~'하고 남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나는 현실로 행한다.

 

부주의한 만큼 거짓말은 못한다.

부지불식간에 진실을 말해버리니까.

 

어쨌든 부주의하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내게 칼을 주지 않는다.

 

예스24에 5만원이나 되는 쿠폰이 있어서 이번달 초에 그걸로 책을 샀다,

9월 말까지만 쓸 수 있는 쿠폰이어서 생기자 마자 신나게 썼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부주의하게도 쿠폰 쓰는 것을 잊었었다.

 

쿠폰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친구를 통해 알게되었다.

 

나는 없는 살림에 5만원이나 카드를 긁어 책을 샀던 것이다.

쿠폰은 친구가 아니었으면 그냥 날릴 뻔 했다.

 

덕분에 이번에 그 쿠폰으로 책을 5만원어치 더 샀다.

안타까운 것은, 그 와중에 또 받을 수 있었던 천원쿠폰을 받고도 또 쓰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에 산 5만원어치의 책들은 모두 반짝반짝 건강한 비늘이 눈부신 월척들이었다.

두 손 가득 살아 펄떡이는 책들의 둔중한 무게는 가슴을 오래도록 설레게 한다.

 

이번에 산 책들은,

1. 임신캘린더 /오가와 요코/김난주 옮김/이레출판사

2. 초콜릿칩쿠키살인사건 /조앤플루크/박영민 옮김/해문출판사

3.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르시아 마르케스 /송병선 옮김/민음사

 

그리고 그외 3권(한권은 아직 읽지 못했고 두권에 대해서는 흠....), DVD 한개.

 

감동먹은 책은 임신캘린더와 초콜릿칩쿠키살인사건.

 

여자가 아니면 쓸 수 없는 두권의 책.

행복한 내 속에 있는 깊은 절망을 차갑게 녹이면 이렇게 되는 구나...

따듯하게 녹이면 이렇게 되는 구나...

 

어린시절 우리집에 있던 100권짜리 한질의 세계문학선집에서 여성작가가 쓴 책은 단 두권.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언덕', 샬롯 브론테의 '제인에어'.

그 전에도 이후로도 내가 읽은 수천권의 책들은 대개 남성작가의 것들이었다.

 

책을 읽으면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다른지, 그들이 보는 세계가 어떻게 다른지

참으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같은 책은, 여성은 죽었다 깨나도 쓸 수 없다.

 

두 권의 책을 내 아끼는 책 분류 책꽂이에 꽂고 보니

여성작가가 처음 들어왔다.

흠칫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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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16:27 2006/09/28 16:27